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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13장 강해 13장 10-31절, 느헤미야의 개혁②

by Message.K 2022. 9. 19.

구약성경 느헤미야 강해의 마지막으로 느헤미야 13:10-31의 본문을 텍스트로 하여 <느헤미야의 개혁②>란 주제로 설교한 내용입니다. 느헤미야의 마지막 내용은 어떻게 펼쳐지는 살펴보겠습니다.

 

 

 

영화 <파괴된 사나이>

한 목사님이 계셨다. 이 목사님은 슬하에 예쁜 딸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 딸이 어느날 납치를 당했다. 1억원이라는 몸값을 요구하면서. 하지만 결국 그 납치사건은 미해결된 채 8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목사님은 납치당한 딸로 인한 심한 좌절과 절망감에 압도된 나머지 눈물로 딸이 돌아오기를 기도하던, 그 목사의 자리를 내던지게 된다. 그러면서 점점 더 망가져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이야기, 바로 영화 ‘파괴된 사나이’의 이야기이다. 유괴당한 딸의 돌아오지 않는 사건으로 인해 목사의 성직을 떠난 한 사나이의 이야기가 주된 스토리이다. 성직자가 성직을 떠나는 이유에는 분명 심각한 원인이 있다. 오늘은 조금 다른 원인과 이유이지만 성직을 떠난 사람들, 성직을 떠난 레위인들의 이야기들로 그 모습이 드러난다. 무엇 때문에 성직을 떠났단 말인가?

 

 

 문제의 발단은 이렇게 시작된다.

 

 

10 내가 또 알아본즉 레위 사람들이 받을 몫을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자기 밭으로 도망하였기로

 

 

 

 

 ① 바로 십일조의 정상화(제사장 복지의 회복) 문제였다(10-14).

 하나님께서 주신 성직자들이 다들 자기 일을 내팽개치고 자기 집으로 돌아 가버린 것이다. 여기서 밭(전리)는 ‘밭, 초지, 시골’이란 뜻으로 레위인들이 원래 거처하던 성읍과 성읍에 딸린 경작지를 말한다. 자기들의 고향으로 돌아 가버린 것이다. 레위인들은 부동산을 소유할 수 없었지만 레위인들과 노래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미 예루살렘 주변에 정착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많았음을 보여준다(7:73; 11:20; 12:28-29-노래하는 이들이 하나의 부락, 동네를 이루었다는 것은 이러한 유다의 잘못된 폐단이 오래되었다고 해석할 여지도 있겠다). 거룩한 소명을 뒤로하고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간 이유는 자기들도 살고자 했기 때문이다. 먹고 사는 문제가 너무 빠듯했기 때문이다. 문제의 근본은 바로 백성들의 십일조 생활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지난번 설교 때 도비야를 위해 십일조를 비축해두는 방을 엘리아십이 줬다고 했다(5절). 유다인들이 열심히 십일조의 의무를 다했다면 분명 자기들이 낸 십일조를 저장하는 방에 왜 사람을 그것도, 이방사람들을 들여놓느냐고 항의하고 질문했을 것이다. 하지만 얼마나 십일조를 사람들이 안 내었으면 자기들이 낸 십일조저장고에 도비야가 들어와 살아도 아무런 불평이나 원망이 없었단 말인가?

  레위인들은 하나님의 성직을 감당하는 자로서 하나님께서 책임지셔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것은 원론적인 이야기이다. 실질적으로 성직자들의 생계는 그 성전에 출입하는 신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책임져야 했다. 그것이 성경적인 원리였다. 하지만 제사장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생존을 위해 자신들의 고향, 자기들이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는 경작지로 돌아간 것이다.

  백성들이 십일조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제사장들이 종교적인 의무를 감당하지 못한 것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와 함께 수입이 없어 빈궁한 성직자들도 그리 보기 좋은 현상은 아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11 내가 모든 민장들을 꾸짖어 이르기를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1) 바 되었느냐 하고 곧 레위 사람을 불러 모아 다시 제자리에 세웠더니
12 이에 온 유다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이므로

 

 

 

  느헤미야는 정치적인 지도자로서 그들 앞에 서서 행정적인 일을 도맡아할 뿐만 아니라 영적인 지도자로서 영적 질서, 성전의 질서를 바로 세우고 있다. 십일조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백성들을 책망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전을 비우고, 자기만 살겠다고 자리를 비운 제사장들에게도 책망했던 것이다. 이러한 일의 원활하고도 효과적인 운용을 위해 13절에서는 책임자를 세웠다.

 

 

13 내가 제사장 셀레먀와 서기관 사독과 레위 사람 브다야를 창고지기로 삼고 맛다냐의 손자 삭굴의 아들 하난을 버금assistant으로 삼았나니 이는 그들이 충직한 자로 인정됨이라 그 직분은 형제들에게 분배하는 일이었느니라

 

 

  느헤미야는 충직한 자로 인정된 사람들을 통해 성전관리와 제사장들의 생계를 위한 책임을 지웠다. 오늘날 교회에도 교역자들의 생활을 위해 애쓰고 힘쓰는 충직한 일꾼들이 있다. 이러한 모든 일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선 성도들의 십일조 생활이 바르게 되어져야 한다. 교역자들의 생활이 넉넉하진 않아도 궁핍하지 않도록, 빈궁하지 않도록, 오늘 본문에 나타난 것처럼 ‘먹고 살기 위해서’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는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대한 배려하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목회자들이 이사를 갈 때는 항상 짐을 버리거나 정리해야 할 형편이라고 한다. 침대를 버린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모든 목회자가 그렇겠지만, 저는 짐이 많진 않지만 책이 좀 있다. 몇 년 전에 이사를 가는데 짐을 다 못 넣을 것 같다고 말하니 교회 장로님이  ‘책을 다 소각하고 정리하면 되지 않느냐, 책을 좀 버리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 솔직히 좀 섭섭했다. 목회자의 재산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교회는 목회자를 위해 더욱 배려하고, 위하는 교회인가? 교회가 목회자를 돌아보고 복리에 신경쓰는 것은 손해 보는 일이 아니라 목회자가 더욱 힘을 내어 교회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이야기한다. 제가 이런 이야길 하면서도 참 쑥스럽다. 레위사람들, 노래하는 사람들이 더욱 하나님의 성전의 직무를 감당하는 일에 부족함이 없도록 서포터해주지 못해 느헤미야가 개혁을 일으켰던 모습이 오늘 나타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어떠한가?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내어야 할 거룩한 의무를 잘 감당하고 있는가? 신앙의 기본적인 직무를, 거룩한 십일조의 의무와 직무, 특권을 잘 감당하고 있는가? 여러분의 보이지 않는 믿음을 보이는 물질로 헌신하고 표현하고 있는가? 레위인과 목회자 뿐만 아니라 더 확대 적용한다면, 우리 주위에 믿음의 동역자들 가운데 궁핍하거나 결핍된, 연약한 상황 가운데 있다면 우리 또한 그들에게 관심과 사랑과 배려를 보여주는 것도 거룩한 의무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담임목사님께서 자주 이야기하신다. 우리가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냉수 한 그릇’의 공궤도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 주위에 마음이 상한 자에게는 따뜻하고 위로가 되는 사랑의 언어로, 궁핍한 자들에게 적절한 ‘냉수 한 그릇’을 나눠줄 수 있는 우리 경신교회가 되었음 한다. 믿음의 거룩한 의무를 온전히 감당하라!

 

 

 

 

② 안식일에 대한 개혁, 즉 주일성수의 문제였다(15-22).

  본문에 보면 15절에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장사를 하는가 하면, 16절에는 두로 사람이 물건을 떼다가 장사를 하는 모습이 보인다.

 

 

15 그 때에 내가 본즉 유다에서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술틀을 밟고 곡식단을 나귀에 실어 운반하며 포도주와 포도와 무화과와 여러 가지 짐을 지고 안식일에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음식물을 팔기로 그 날에 내가 경계하였고
16 또 두로 사람이 예루살렘에 살며 물고기와 각양 물건을 가져다가 안식일에 예루살렘에서도 유다 자손에게 팔기로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페르시아 시기에 해안 도시들을 따라서 항해하며 교역에 열중했던 민족들이다. 그들은 내지에 교역 센터들을 갖고 있었고, 그 가운데 대표적인 곳은 예루살렘 어문 광장의 어시장이었기 때문에 안식일 시장은 많은 유대인들에게 그들과 함께 안식법을 어기는 구실을 마련해 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런 모습에 대해 느헤미야는 단호하게 꾸짖는다.

 

 

17 내가 유다의 모든 귀인들을 꾸짖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 이 악을 행하여 안식일을 범하느냐

 

 

    느헤미야는 안식일 준수의 계명에 대해 책망하고 있다. 느헤미야 시대에도 안식일 성수에 걸리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인간의 욕심이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게 하고 물건을 사고, 팔고 하는 것을 본 것이다. 심지어 이방인들이 와서 물건을 팔고 있는 것이다. 물건이 팔린다는 것은 유대인들 중에 안식일에 사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느헤미야는 유대인의 재앙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기 때문이라고, 안식일을 범했기 때문이라고 못 박고 있다.

 

 

18 너희 조상들이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서 우리 하나님이 이 모든 재앙을 우리와 이 성읍에 내리신 것이 아니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안식일을 범하여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더욱 심하게 임하도록 하는도다 하고

 

 

  그리하여 안식일에는 모든 교역을 금지하도록 안식일 시장을 폐쇄시켰다. 그리고 그러한 상행위를 금지하도록 성문지기를 세운 것도 보인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신 5:12-15)을 기리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정된 하나님의 날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로 우리는 안식일을 주일로 지킨다. 한 주간의 모든 날이 하나님의 날이지만 우리는 주일을 지킴으로 이 날이 특별한 하나님의 날임을 고백한다.

  물론 구약시대에 안식일 성수와 오늘날의 주일 성수는 다소 차이가 있을 것이다. 주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안식일은 일주일 중에 하루가 아니라 모든 날이 안식일인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일만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일주일의 모든 날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우리는 매일 매일 더 많이 벌어야겠다는 생각, 더 많이 즐겨야겠다는 생각, 더 많이 배워야겠다는 생각, 더 많이 남겨야겠다는 생각 등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일주일의 모든 날, 무엇보다도 특히 주일날 이러한 우리의 사사로운 욕심에서 잠시 벗어나 하나님을 위한 자유를 만끽하며 안식하는 훈련이 필요하겠다. 그것을 우리는 주일성수의 정신이라 볼 수 있겠다!

 

 

 

  우리는 예전처럼 이제는 그처럼 굉장히 엄하게 주일성수를 고집하지는 않는다. 예전에는 주일날 운동하면 안 된다, 돈을 사용하면 안 된다 등의 굉장히 logic한 규칙이 있었다. 지금도 그렇게 생활하는 사람들은 드물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러한 면을 ‘고지식하다’고 생각하는 시대적인 분위기이다. 오히려 주일성수에 대해선 가벼이 여기는 풍조가 교회 안에 들어왔다. 주일성수 문제로 인해, 과거에 주일날 택시비를 썼다는 것만으로 그것도, 선교사님 픽업 때문에 택시를 사용한 것으로 말미암아 최고의 신학자를 교단에서 퇴출한 비하인드 스토리도 있다(이 부분에 대해선 오해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지 않겠다). 하지만, 이제는 주일성수는 하나의 취사선택할 수 있는 항목에 불과하다는 풍조가 들어온 것이다.

  

 

 

 

  오늘날의 변해가는 신앙분위기가 무조건 다 좋다는, 편한 것만이 다 옳다는 생각은 독이 든 성배를 마시는 것과 같은 것이리라. 우리가 되새겨야 할 부분은 모든 날이 다 주의 날이지만, 특히 주일은 하나님께 드리는 특별한 날임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주일성수는 신자의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한다. ‘가장 기본적인 행위이며 책임이며 의무이다’. 그렇게 하여 자신이 맡은 자리에서 믿음의 향기를 드러내었음 한다.

  

 

 

 주일성수에 대한 이야길 조금 더 하자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십계명의 제4명에 대해 부분적 의식법이요, 부분적 도덕법2)으로 접근하였는데, 이것은 중세 시대 교회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퀴나스를 넘어 루터와 칼빈은 안식에 대해 다소 내적인 해석은 가했다.3) 이들의 견해를 들여다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주일성수가 그렇게 율법적이고 보수적인 관점으로 접근하지 않았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의외로 진보적이고 자유롭게 ‘주일 성수’를 접근하고 있다. 그들은 ‘날’에 대해 집착하지 않는다. 칼빈은 안식일 계명의 실체를 ‘공예배와 묵상을 위한 날을 정기적으로 가지는 것’이라고 했다.4)

  청교도였던 조나단 에드워즈의 안식일 신학의 명제는 첫째, “이레 가운데 하루”one day in seven의 리듬이 계시적이라는 점이고, 둘째, 신약의 안식일은 한 주간의 첫 날이라는 점이다.5) 에드워즈는 또한 우리가 기독교 안식일 제도에 대해 감사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이 날을 거룩히 지켜야 함을 강조한다.6)

 

 

 

청교도 안식일주의는 종종 그것이 ‘율법주의적 색채’로 드러난다는 맹점을 가지고 있지만 오늘날 무관심하며 해이해진 ‘주일성수’에 대한 생각들을 다시금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제가 보기에는 청교도들은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율법의 의무에서 자유케 하셨지만 그들은 자아에 대한 긴장과 경계를 늦추지 않고 ‘주일성수’를 통해 세상에 도전하였던 것으로 보여 진다. ‘스파르타식 주일성수’의 위험은 있으나 그들이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뭔가를 보여주려고 발버둥을 쳤었고 그러한 몸부림이 세상에 먹혀들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철저한 주일관 속에서 제 1,2차 대각성과 영미의 복음주의 부흥 운동이 일어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다. 그들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 흔적’이 ‘주일성수’에 진하게 배여 있기 때문이다. 청교도들은 그들의 삶이 바탕이 된 ‘주일성수’로 세상에 도전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주일성수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자기만의 색깔과 논리와 의견을 피력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어디에서 구별되는가? 무엇보다 ‘주일을 대하는 태도’에서 구별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CEO의 열정

 한 회사에 새로운 사장이 취임하게 되었다. 이 신임 회장은 엄격하고 가차 없는 스타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직원들이 나태한 태도를 보이거나 120퍼센트 이상의 능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해고해버리는 그런 스타일의 사람이었다.

 

 

 사장의 첫 출근 날, 부하직원들이 그에게 회사에 대하여 설명하기로 되어 있었다. 직원들을 만나러 가던 사장은 한 남자가 복도에서 등을 벽에 기대고 선 채 빈둥거리는 모습을 발견했다. 어느 누구의 눈에도 쉽게 띄는 장소에서 버젓이 빈둥거리고 있는 직원의 모습을 발견한 사장은, 지금이야말로 자기가 얼마나 엄격한 사람인지 모두에게 본때를 보여줄 때라고 판단했다.

  사장이 그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물었다.

 

  “당신 한 달 월급이 얼마요?”

 

 

사장이 갑작스런 출현과 질문에 깜짝 놀라서 잠시 머뭇거리던 남자가 이렇게 말했다.

 

 

“800달러를 받고 있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남자의 대답을 들은 사장이 지갑을 열고 수표를 꺼내 서명하더니 남자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기 당신의 두달치 월급에 해당하는 1,600달러를 일시불로 주겠소. 그러니 당장 이 회사를 나가시오. 당신 같은 사람은 이 회사에 필요가 없소! 이거 받고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시오!”

 

 

신임 사장은 자신이 사원들에게 기막히게 본때를 보여줬다고 생각하고는 흐뭇한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며 직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 사람이 어느 부서의 직원이었는지 누가 좀 말해주겠소?”

 

 

그러자 한 직원이 애써 웃음을 참아가며 말했다.

 

 

  “저기, 저 사람은 피자 배달 온 사람이었는데요.”

 

 

우스개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직원인지 피자배달부인지는 구별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백성은 구별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저는 주일에 대해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힘주어 말했던 이 말을 들려주고 싶다. 우리 모두 귀기울여 보자.

 

“하나님은 이 날 특별히 기도를 들으시며,
특별히 예배를 받으시며,
특별히 자기 백성을 만나시며,
특별히 자신을 그들에게 나타내시며,
특별히 성령을 주시며,
그 날을 부지런히 그리고 철저하게 거룩하게 하는 자들에게 특별한 복을 주시려고 준비하고 계신다.”

 

 

 

친애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유다인과 같이 주일을 범하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의 편의와 기준과 사견에 의해 주일성수는 하나의 구습이요, 억지스런 율법조항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진 않는가? 하나님은 이 주일에 특별히 여러분에게 말씀하시길 원하시고 특별히 복주시길 원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라! 주일성수는 우리의 마지막 보루, 최후의 보루임을 기억하라! 가장 기초적인 토대임을 기억하라!

 

 

 

 

 

③ 외국인과의 결혼 문제(23절-31절)였다.

 아스돗은 블레셋 도시였다. 그런데 유다인이 아스돗과 모압과 암몬 여인을 아내로 맞아 결혼하였던 것이다. 문제는 결혼 뿐만 아니라 자녀교육였다. 24절을 보면,

 

 

24 그들의 자녀가 아스돗 방언을 절반쯤은 하여도 유다 방언은 못하니 그 하는 말이 각 족속의 방언이므로

 

 

 문화, 종교, 민족의 정체성...이 모든 것은 언어에 달려 있다. 아버지의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자녀들은 아버지의 문화 유산으로부터 단절당하게 된다. 반면에 아스돗에는 고고학적으로도 만신전이 발굴되었고 그 가운데 있는 다곤 우상, 그리고 에게해로부터 수입해 온 ‘아스도다’라는 여신상이 있었다. 이런 배경하에 자란 어머니, 그런데 아이들이 오직 어머니의 언어 만을 한다는 것, 대부분 그 어머니의 문화와 가치관 그리고 전통과 생활 양식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치명적인 아킬레스 건! 한 나라가 재건되는 시점에 이방인과의 혼인이 이스라엘이란 나라의 독특성을 말살할 위협적인 요소가 된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어 새로운 종족,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국가로 만들어놓으시기 위한 그 프로젝트가 이 사건으로 민족적인 색깔이 흐려질 수 있는 시점이었다. 언어는 그만큼 중요했다. 느헤미야는 이 사실을 알고는 충격을 너무나 받은 나머지 이성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행동한다. 25절의 행동들은 의외의 행동들이다.

 

 

25 내가 그들을 책망하고 저주하며 그들 중 몇 사람을 때리고 그들의 머리털을 뽑고 이르되 너희는 너희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 아들들이나 너희를 위하여 그들의 딸을 데려오지 아니하겠다고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라 하고

  

 

 이러한 이방인의 결혼은 평신도들 뿐만 아니었다. 28절에 보면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도 이방인과 결혼하게 되었던 것이다. 제사장도 아니고 대제사장이 말이다. 개혁을 끝까지 방해했던 산발랏의 딸과 손자를 결혼시킨 이 엘리아십에 대해서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가정이 하나가 되기 위해선 우리의 언어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 바로 신앙의 언어가 하나가 되어야 할 줄 믿는다. 믿음의 언어가 하나가 되어야 할 줄 믿는다. 국가와 민족이 하나가 되기 위해선 언어가 일치해야 하듯이 우리 가정의 하나됨을 위해선 믿음의 언어가 하나되어야 한다. 공동체는 피가 하나여야 하며 그 피는 바로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여야 한다. 그 피로 인해 우리의 언어는 하나여야 한다.

 

  느헤미야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지금 마지막 개혁의 현장에서도 그는 기도를 간헐적으로 14절, 22절, 31절에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이제 모든 개혁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다.

 

 

   31절b: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

 

 

 이 부분은 느헤미야 회고록의 결론인 동시에 느헤미야서 전체의 결론이기도 하다.

 

 

이 기도는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의 기도였다. 곧 영원에 직면한 모든 이들의 소망이요, 기도이다.

 

 

‘하나님, 나의 선함을 받으소서’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했다. 사회-정치-경제적 개혁을 했으며 계약 갱신을 통해 유다 공동체가 새롭게 태어나도록 했다. 느헤미야는 고난의 사람이었지만 기도로 그 고난을 극복한 신앙적 지도자였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지 않았더라면 페르시아의 수산 궁에서 왕을 섬기며 그가 경험했던 것과 같은 난관들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고향에서 언제나 외부적으로는 적대자들의 조롱, 모함, 협박에 시달렸고, 내부적으로는 지도자들과 백성의 안일한 신앙과 불의를 개혁해 나가야만 했다. 이 기도는 그런 의미에서 탄식시처럼 고난에서 터져 나온 절규였고 하나님을 의지했던 느헤미야의 신앙고백이었다고 볼 수 있다.

 

 

 

 

 

 

  돌이켜보면, 느헤미야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고 하나님의 선한 손길이 그와 함께했던 사실을 고백하고 미래도 하나님의 처분에 자신을 맡겼던 것이다.

 

 

“느헤미야, 유다총독 처음 12년은 내가 뛰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하나님이 직접 뛰셨습니다.”

 

 

에릭 리들의 고백, 구약시대의 느헤미야의 이런 고백은 신약시대 사도 바울의 고백으로 연결된다.

 

 


딤후 4:7-8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우리 또한 느헤미야처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최선을 다해 달려가길 주의 이름으로 소망한다.

 

 

 


 

 

주>

1) ‘버렸다’는 히브리어 ‘아자브’로 ‘버리다’, ‘무시하다’, ‘떠나다’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10:39에서도 사용되었다.

2) 양낙흥, 88.

3) 양낙흥, 92-121. 루터는 날에 대한 존중 보다는 말씀에 대한 존중에 신경을 썼다. 그에게 있어 일요일 제도는 계시적 제도라기 보다는 철저히 정치적이고 실용적인 것이었다. 칼빈은 주일 성수의 본질을 첫째, 자아를 죽이는 것mortification, 둘째, 하나님 일의 묵상이라고 했다.

4) 양낙흥, 106.

5) 양낙흥, 141-151.

6) 양낙흥,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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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느헤미야 9장을 본문으로 하여 <민족재건운동-회개운동>이란 주제로 설교한 내용을 포스팅해 봅니다. 느헤미야를 통해 52일간의 성벽재건을 이룬 동시에 에스라를 통한 말씀운동에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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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8장 강해, 민족재건운동(말씀운동)

느헤미야강해에서 8장을 본문을 기반하여 '민족재건운동: 말씀운동'이란 제목으로 설교한 포스팅입니다. 느헤미야가 성벽재건을 주도하고 정치적인, 경제적인 제반사항을 주도했다면, 이제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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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7:1-7, 66-73,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구약성경 느헤미야 7장을 가지고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라는 주제로 설교한 내용을 포스팅해 봅니다. 성벽재건을 52일만에 마친 느헤미야이지만 아직도 남겨진 숙제와 과업이 있다는 것을 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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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5-6장,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구약성경 느헤미야강해로서 5-6장에 대해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라는 주제로 설교한 내용을 포스팅해 보고자 합니다. 느헤미야의 기도와 관심, 그리고 합심을 통해 성벽건축에 한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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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3,4장, 한 마음으로 일어서라

구약성경 느헤미야 3,4장을 가지고 <한 마음으로 일어서라!>라는 주제로 대학.청년부를 대상으로 한 설교를 포스팅해 봅니다. 느헤미야강해를 하면서 굉장한 도전과 감동을 받았던 부분이 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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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2장 17절, 일어나 성벽을 건축하자

 느헤미야 2장 설교를 이미 포스팅을 했지만, 2:17을 가지고 '일어나 성벽을 건축하자'라는 주제로 설교를 다시 했었는데, 이전의 내용을 약간 업그레이드하고 더 간결하게 준비하여 3대지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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