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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13장 1-9절, 느헤미야의 개혁①

by Message.K 2022.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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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강해설교로 13장을 두 부분으로 나눠 먼저 13:1-9의 본문을 가지고 <느헤미야의 개혁①>이란 주제로 설교한 내용을 포스팅하겠습니다.

 

 

 

고집이 아니라 원칙이다

 1924년 파리 올림픽에서 있었던 일이다.

올림픽의 꽃이라 불리는 100m 육상 결승전 경기가 주일로 잡혔다. 당시 강력한 우승후보는 영국의 에릭 리들 선수였는데, 그는 출전 포기를 선언했다.

 

‘주일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영국 신문과 뉴스는 ‘조국을 배신한 자’, ‘융통성이 없는 고집쟁이 신앙’이라며 그에게 온갖 비난을 퍼부었다. 며칠 후 리들은 200m, 400m 육상 경기에 출전했다. 그러나 중거리는 그의 주 종목이 아니어서 우승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리들은 200m에서 동메달을 차지했다. 그리고 400m경기, 그는 처음부터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가 달리는 것을 보고 있던 관중들은 걱정이 되었다.

 

 

“저렇게 달리다가 심장이 터져 죽을지도 모르겠는걸.”

 

 

 리들은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47초 6이라는 세계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차지했다. 그의 우승소감은?

 

 

“처음 200m는 내가 뛰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200m는 하나님이 직접 뛰셨습니다.”

 

 

  에릭 리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익히 들어 잘 아는 이야기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신앙의 원칙이 있었기 때문에 감동이 더하다. 에릭 리들보다 훨씬 더 오래 전, 구약 시대에 신앙의 원칙을 고수하는 것에 무엇보다 진지했던 한 지도자가 있었다. 오늘 그 지도자의 모습을 또 다시 들여다보고자 한다.

 

 

 

 

1) 이방인 제거(13:1-3)

 느헤미야는 성벽을 건축함으로 나라의 기초를 든든하게 하였다. 많은 개혁을 시도했고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존재했다. 한때 매스컴에서 연일 보도하고 있는 장관, 국무총리 등의 청문회처럼 사람들의 비리는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시대가 변했다고 해서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비리는 예나 지금이나 늘 있는 것이다.

 

  느헤미야가 기도하기 시작하면서 성벽재건 프로젝트를 시작한 시점이 아닥사스다 20년(1:1)이라면 5:14에서는 그가 32년까지 12년 동안 유다총독을 했다는 말이다. 물론 그는 그 이상의 시간을 유다 총독으로 지냈다(6절 참조). 느헤미야는 에릭 리들의 수상소감처럼 고백하지 않았을까?

 

 

“유다 총독, 처음 12년은 내가 뛰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하나님이 직접 뛰셨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그 십수년의 시간에 세월이 변하고 강산이 변한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도 변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정치인들에게 흔히 일어나는 어떤 경제적인 비리의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돈, 비자금에 관한 문제가 아니었고 전부 영적인 문제였다. 우리가 생각하는 청문회에서 다루는 이슈가 아니었다. 그들이 다루는 것은 ‘혈통’의 문제였다. 우리 같은 경우에는, 다른 외국인과 우리 나라사람이 결혼을 했다고 할 때 우리는 다소 신기하게 생각하거나 약간의 뜻밖의 시선으로 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결혼문제를 가지고 왈가왈부하진 않는다. 그러나, 이스라엘 공동체는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강한 언약적 사고가 있었다. 1절에 나오는 ‘모세의 책’(Cf, 대하 25:4; 35:12; 느 8:1)을 백성에게 낭독해서 들려주었다는데 거기에는 바로 이러한 공동체의 혈통과 결혼의 문제를 건드려주고 있다(이 문제는 23-27절에서도 ‘잘못된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다).

 

 

신명기 23:3-6의 대목이다.

 


3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4 그들은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떡과 물로 너희를 길에서 영접하지 아니하고 메소보다미아의 브돌 사람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너희를 저주하게 하려 하였으나
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사랑하시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발람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나니
6 네 평생에 그들의 평안함과 형통함을 영원히 구하지 말지니라
 

 

 

 이 본문 전후에는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로 성적 불구자, 사생아, 암몬과 모압 사람이 나열되어 있고, 결론에서는 에돔과 이집트 사람을 미워하지 말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곳에는 그 중에서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하나님의 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라는 부분만 인용되어 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양식과 물로 영접하지 않고 오히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했던 것이다(민 22:3-11). 왜 암몬과 모압을 하나님의 총회에 받아들이지 말라는지는 2절에 잘 나타난다. 발람은 외국 예언자로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상숭배하고 죄를 짓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대충 묻어둘 수 있는 부분인데도 느헤미야는 이 부분에 대해 단호하게 문제를 처리한다. 과거에 역사적인 죄악과 뒤틀려진 죄악을 결코 간과할 수 없었다. 이것은 유다 공동체가 외국인이라고 해서 그 동안 정붙여 살던 아내와 이혼하고 자손들과 별거했던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갈등과 아픔과 상처는 분명히 있었으나 본질에 벗어나 있는 현실에 대해서 더 이상 묵과할 수는 없었다. 이것이 바로 느헤미야의 ‘신앙원칙’이었다. 그리하여 느헤미야는 이에 대해 단호하게! 주저하지 않고! 대처한다.

 

 

3 백성이 이 율법을 듣고 곧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모두 분리하였느니라 
So when they heard the law, they 
excluded all foreigners from Israel(NIV, NASB, NLT 모두 ‘제외하다’의 이 동사를 사용).


 

 이스라엘 백성은 말씀에 순종해서 섞인 무리와 갈라섰다. ‘섞인 무리’는 유대인들과 유다 주변 국가 사람들과의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을 뜻하고 있다(cf, 스 9:2). ‘분리했다’는 히브리어 동사 ‘바달’은 ‘잘라냈다’는 뜻이다. 혈통적으로 불순한 이들, 혼혈아들, 이방인들은 모두 잘라냈다는 말이다. 더 이상 그들의 무리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추방했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극단적인 해석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가 어떤 사고나 재난으로 인해 우리의 다리나 팔이 썩어간다고 가정할 때 그 때 우리의 썩은 살을 도려내야 한다. 만약 도려내지 않으면 살아있는 생살까지 같이 썩게 되고 후에는 생명까지 위협하게 된다. 그래서 손가락이나 팔, 다리를 절단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단호한 잘라냄! 바달!

  느헤미야가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렸다면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분명하고 확실한 말씀의 원칙에 근거하여 융단을 내린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말씀에 근거하여 얼마나 확실하고 명백하게 느헤미야처럼 결정을 내리는가? 아니면 인간적인 사사로운 감정에 마음을 빼앗겨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과 약속을 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가 바달해야 할 것은, 잘라내야 할 부분은 어떤 것이 있는가?

 오랫동안 묵혀왔던 것이고 너무나 익숙한 것이기에 우리가 간과하고 있었던 부분은 없는가? 본질에 충실해야만 하는데 자꾸 비본질적인 것에 목매는 우리 모습은 없는가?

 

 

 

 

 

  ‘한 교회 장로님은 30년 넘게 우표 수집을 해 왔는데, 어느 날 아주 귀한 우표 한 장이 없어지는 일이 있었다. 그는 사색이 되었다. 하루 종일 온 집안을 완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러자 지켜보던 부인이 드디어 한 마디 했다.

 

 

“당신이 교회 장로인데, 하나님을 모르는 한 잃어버린 영혼 때문에 가슴 아파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우표 하나 잃어버린 것 가지고 이 난리를 떨다니....당신에게는 우표가 하나님인가?”

 

 

  그 말에 장로님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결심하고 모았던 우표를 이웃들에게 다 나눠주고 우표 수집 취미를 정리해버렸다고 한다.1) 본질을 벗어난 비본질적인, 원칙을 벗어난 그릇된 생활과 라이프스타일을 뛰어넘자!

 

 

  우리가 내려놓아야 할 관계나 습관이나 문화나 활동은 없는가? 하나님 앞에서 바달해야 할 연약함과 죄악들을 내버리자.

 

 

 

  자주 보던 드라마가 있는데, 그 드라마가 최근 들어서 너무 어처구니 없는 스토리로 흘러가기에 텔레비전을 보면서 화를 냈다. 어떻게 이야기를 저런 식으로 꾸려가냐고 그러면서 혼자서 TV를 향해 분노하고 있었다. 그 때 와이프가 한 마디 거들었다.

 

 

“그럼 안 보면 될 거 아니냐고? 안 보면 될건데 그걸 보면서, 열받아가면서 앉아있냐고?”

 

 

맞다. 우리는 안 보면 될 것을 미주알 고주알 다 보고서 어리석게도 시간 낭비를 해 가면서 입을 댄다.

 

 

  맥락은 비슷하다고 본다. 본질에 벗어났다면 단호하게 태도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비록 사랑하는 아내였고 자식들이었지만 말씀에 어긋났다는 이유로 철저하게 분리, 제외시켰던 유다 공동체, 느헤미야의 원리원칙을 보라! 생이별을 해야했던 그들! 느헤미야의 개혁의지의 1/10이라도 닮아가길, 아니 온전히 닮아가고자 노력하는 우리 동역자들, 그렇게 성화되는 동역자들 되시기를 소망한다.

 

 

 

2) 엘리야십과 도비야(13:4-9)

  청문회를 보면서 안타까운 것은 ‘상대방의 눈에 티나 자기 눈에 들보’ 다 그게 그거 아닌가? 싶다. 그런데 그런 공방을 하고 있다. 그 자체가 참 어리석게 보였다. 우리가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 이런 문제들이 없을 순 없겠지만 ‘보더 다 최선, 최상의 방책’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엘리야십의 직능은 에스겔 시기 성전 기물을 담당했던 므레못이 맡았던 역할과 동일했던 것으로 주석자들은 보고 있다(스 8:33)2). 이 엘리야십은 성벽 건설에 앞장섰던 그 엘리야십이었는지 불분명하다(3:1, 20-21). 어쨌든 중요한 것은 도비야는 이 제사장과 밀접한 유대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고(2:10; 6:17-19), 또한 그를 통해 산발랏과도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4 이전에 우리 하나님의 전의 방을 맡은 제사장 엘리아십이 도비야와 연락이 있었으므로3)
4 Before this had happened, Eliashib the priest, who had been appointed as supervisor of the storerooms of the Temple of our God and who was also a relative of Tobiah,[NLT]

 

 

  신적인 하나님의 성직자여야 할 사람이 또한 인간적인 관계에 끌렸단 말이다. NIV에선 더 선명하게 밝히고 있다.

 

 

4 Before this, Eliashib the priest had been put in charge of the storerooms of the house of our God. He was closely associated with Tobiah,

 

 

 하나님과 가깝게 지내야할 사람이 인간과 너무 가깝게 closely 지냈다는 말이 된다. 이 엘리야십은 도비야에게 성전의 방 한 곳, 즉 ‘리쉬카’를 마련해주었는데, 이 방은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줄 십일조를 보관해 두는 곳이었다. ‘리쉬카’는 이 시기에 숙소보다는 창고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스 8:29; 느 10:37-39). 그러므로 도비야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성전물품 공급자나 중개상인으로 성전에 임시숙소를 갖고 있었고, 엘리아십은 그로 인해 또한 부당한 이득에 관여되었을는지도 모른다. 엘리아십과 도비야는 느헤미야가 성벽재건을 완수하고 다시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귀국 일자를 알지 못했을 것 같다. 어쩌면 느헤미야가 12년간의 유다 총독직을 끝으로 예루살렘을 떠나서 다시는 고국으로 돌아올 계획이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엘리야십은 편법으로 하나님의 전을 인간적인 공간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어떤 비리의 차원이기도 하지만, 성결의 차원에서 더 큰 문제였다.

 

 

  도비야는? 도비야는 암몬사람이었다. 앞에서 암몬과 모압 사람은 이 총회에 들어올 수 없다고 했는데, 그 이방, 섟인 무리의 혈통을 가진 이 사람과 제사장이 인간적인 결탁이 있었던 것이다. 이방인의 출신성분으로 그가 어떤 계기를 통해 유다 공동체에 들어왔고 정략결혼을 통해 막강한 권력의 위치에 올랐던 것도 앞에서 보았다.

 

 

  이방인과의 결혼문제는 1-3절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4-9절에의 도비야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도비야는 느헤미야의 사역을 계속적으로 방해하는 훼방꾼이었다. 느헤미야 사역의 반대자, 산발랏과 도비야!(4:1-3에는 그들의 비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 도비야는 이제 유다 공동체의 핵심적인 하나님과 영적인 관계, 영적인 소통을 감당하는 예배의 자리, 성전의 공간까지 침해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배경주석에서는 ‘느헤미야가 다시 유다로 돌아온 이유, 두 번째로 유다 총독으로서의 임무를 감당하기 위한 이유가 아마도 도비야와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4)

 

 


6 그 때에는 내가 예루살렘에 있지 아니하였느니라 바벨론 왕 아닥사스다 삼십이년에 내가 왕에게 나아갔다가 며칠 후에 왕에게 말미를 청하고

7 예루살렘에 이르러서야 엘리아십이 도비야를 위하여 하나님의 전 뜰에 방을 만든 악한 일을 안지라

 

 

  도비야의 죄악도 죄악이지만, 이 옆에는 도비야를 도운 조력자, 또 다른 부패한 영혼이 있었다. 바로 엘리아십! 엘리아십이 저지른 문제는 도덕적인 것보다 이방인에게 성전 숙소를 제공해 줌으로써 제의적인 면에서 성전을 부정하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느헤미야는 도비야와 그의 소지품들을 모두 방 밖으로 버리고 그 방을 다시 정결하게 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이 때 어떠한 맘이었을까?

  그는 이삿짐센터에서 온 인부들이 일하는 것처럼 차곡차곡 도비야의 짐을 정리하지 않았다. ‘정리의 달인’처럼 정리하지 않았다. 어떻게?

 

 

8 내가 심히 근심하여 도비야의 세간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 던지고

 

 

 지금 느헤미야의 마음은 완전히 ‘거룩한 분노’로 가득찼다. 도비야는 불쾌했겠지만, 느헤미야는 신앙의 원칙에 입각하여, 본질에 입각한 확실한 행동을 하였다! 다 내어던졌다!

 

[KJV] Then I commanded, and they cleansed the chambers:
[NASB, NIV] Then I gave an order and they cleansed the rooms;...

 

 

 9절 본문에 ‘그 방’은 보통 교회에 있을만한 유아실(자모실)과 같은 쪽방 하나가 아닌 ‘복수’로 기록되어 있다. 그 때문에 도비야는 한 방이 아니고 여러 개의 방을 사용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이 이방사람, 그것도 암몬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의 공간을 이토록 넓게 사용하면서 자신의 이득을 취했다는 것 자체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더욱 폭발하여 살림을, 짐을 밖으로 ‘집어 던진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11:17에서 하신 말씀을 기억할 것이다.

 

 

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느헤미야의 죄에 대한 단호한 의지를 볼 수 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느헤미야처럼 단호하게 ‘집어 던질 줄 아는, 밖으로 던져 버릴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하다.  다시는 그 죄에 대해서 돌아보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아 던져버려야 하는데, 우리는 던질 때 혹시나 내가 너무 세게 던져 그 죄를 다시 찾지 못하는 거나 그 죄를 저지르지 아니할까 하는 심정으로 고이고이 곱게 곱게 다루지 않는가? 죄악에 대해서 단호함이 필요하다! 우리가 청소할 때 대충 대충하면 또 청소해야 한다! 한 방에 굵게 청소해야 한다!

 

  우리가 내어 던져버려야 할 죄악은 없는가? 우리가 멀리해야만 하는 죄는 없는가? 가만히 놔두었더니 어느새 내 삶을, 내 인생을, 우리 가족 가운데, 우리 교회 가운데 깊숙이 들어와 있는 도비야와 같은 요소는 없는지 돌아보자!

 

 

 

 

 

  이 대목을 해석할 때 느헤미야는 도비야가 사용했던 방 주변 모두를 정결하게 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인 해석일 것이다. 도비야는 쫓겨났고, 오염되었던 곳은 정화되었으며, 방은 원래의 목적에 맞게 그 기능을 회복했다.

 아무리 좋은 개혁이라도 그것을 얼마나 지속시키는가? 얼마나 일관성 있게 실행해나가는가? 가 더 중요한 것이다. 바이러스는 처음부터 크게 번지는 것이 아니다. 죄도 마찬가지이다. 처음에는 아주 작고 사소한 것에서 출발하여 나중에는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우리가 죄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무서운 부분이 바로 이런 대목이다. 죄는 죄를 낳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죄성이 우리에게만 부패하고 타락하고 우리 자신에게만 영향를 주면 되는데, 그게 끝이 아니라 때로는 우리 자녀들에게도, 우리 가족에게도, 제자들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동료들에게도, 공동체에도 파급효과가 있다는 사실이다.

 

  도비야와의 연락이 있었던 엘리야십, 그 인간적인 연락이 문제였다. 오늘 본문에서는 엘리야십과 도비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13장은 전부 이러한 일들로 인해 흐트러진 공동체의 분위기를 그리고 있다.

 

  성전은 인간을 위한 공간이 아니었다. 이방인들의 편의를 위한, 상업적인, 문화적인 공간도 아니었다. 성전은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의 임재의 공간이고 예배의 장소이다. 사사로운 공간일 수 없다. 이렇게 사용한 엘리아십과 도비야 모두 하나님을 모독한 것이었고 큰 악을 저지른 것이었다. 느헤미야가 분노한 까닭은 그 때문이었다(막 11:17). 우리에게도 이러한 ‘마음의 개혁, 영혼의 개혁’이 날마다 있기를, 느헤미야가 가진 신앙의 원칙의 재발견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1) 한 홍, 시간의 마스터(서울: 비전과 리더십, 2005), 108.

2) 제사일에 우리 하나님의 성전에서 은과 금과 그릇을 달아서 제사장 우리아의 아들 므레못의 손에 넘기니 비느하스의 아들 엘르아살과 레위 사람 예수아의 아들 요사밧과 빈누이의 아들 노아댜가 함께 있어

3) 도비야와 엘리아십이 연락이 있었던 이유는? 엘리아십의 손자가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기 때문이다(28절).

4) 죤 월튼, 빅터 매튜스, 마크 샤발라스, 『IVP성경배경주석; 구약』(서울: IVP, 2002), 68.

 

 

오늘은 구약성경 느헤미야 13장 1-9절까지의 본문을 기초로 하여 <느헤미야의 개혁①>이란 주제로 포스팅을 해 보았습니다. 물리적인 성벽이 재건되어진다고 해서 개혁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이고 점진적이며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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