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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9장 강해, 민족재건운동(회개운동)

by Message.K 2022.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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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느헤미야 9장을 본문으로 하여 <민족재건운동-회개운동>이란 주제로 설교한 내용을 포스팅해 봅니다. 느헤미야를 통해 52일간의 성벽재건을 이룬 동시에 에스라를 통한 말씀운동에 이어 이어진 '회개운동'을 살펴보겠습니다.

 

 

 

 

4년마다 열리는 월드컵이 올해에는 카타르에서 열린다. 월드컵경기는 공 하나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울기도하고 웃기도 하고 참 공 하나가 뭔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우리 일상생활 가운데 아무런 변화는 없는데, 그 4년마다 열리는 월드컵에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좌지우지했던 것 같다.

 

 

 사람들을 하나 되게 하는, 단합하게 하는 데는 스포츠만큼 좋은 것이 또 없는 것 같다. 다른 기타 도구들보다 아무래도 스포츠가 주는 효과가 만만치 않다. 그러나 스포츠는 스포츠일 뿐이다.

 

  정치계에서 수많은 정치가들이 수많은 슬로건과 공약을 내걸고 개혁이니, 변혁이니 외쳐댔지만 정작 사회가 얼마나 더 개혁이 되었고 변혁이 되었는가? 인간의 지혜와 지식에서 나온 것은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회복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느헤미야는 성경적인 접근법을 사용하여 그는 민족재건을 꾀했다.

 

  느헤미야는 민족재건을 위해 지난번에 설교했듯이 다른 어떤 정치나 경제나 문화의 회복, 개혁을 외치지 않았다. 그는 단지 ‘말씀회복운동’을 벌였다. 특별히 월드컵과 같은 체육대회나 단합대회, M.T도 할 수 있었지만 느헤미야는 민족적 정체성을 가다듬고 기초를 세우기 위해선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말씀회복’이 관건이었다. 사람들은 의식을 변화시키고 공동체와 사회의 어떤 변혁과 기반을 잡기 위해서 다양한 프로그램이나 교육방법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새로워질 수 있는 대안은 바로 ‘말씀’이다.

 

 

 8:18 에스라는 첫날부터 끝날까지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무리가 이레 동안 절기를 지키고 여덟째 날에 규례를 따라 성회를 열었느니라

 

 

 9:3 우리가 읽은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자.

 

 

3 이 날에 낮 사분의 일은 그 제자리에 서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낮 사분의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

  

 

  낮시간을 12시간으로 하면, 4등분하면 3 X 4=12시간, 1/4은 3시간이다. 3시간동안 말씀을 낭독하고, 3시간동산은 회개하였다. 그것도 말씀을 듣기 위해, 읽기 위해 제 자리에 서서 6시간을 보낸 것이다. 낭독하고 ‘카라’: 읽다, 암송하다의 뜻도 있다, 자복하며: ‘야다’의 동사는 ‘고백하다, 찬양하다’, 경배하는데: ‘솨하’는 ‘엎드리다, 절하다’의 뜻을 가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다’로 번역해야 할 것.

  예배하고 말씀을 듣는데 시간을 왕창 할애했다는 말씀이다. 이들이 이렇게 말씀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회개에 집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백성들은 지금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1-2절에서도 보면 알겠지만,

 

 

1 그 달 스무나흗 날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 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2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

 

 

  초막절은 7월 15일부터 22일까지 거행되었다. 회개 예배는 24일에 열렸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절에 따라서 금식 절기가 있었다. 4월 금식(예루살렘 성벽이 적군에 의하여 뚫린 것을 기념, 슥 8:19), 5월 금식(역사적으로 예루살렘의 멸망을 애통해 하던 것, 왕하 25:8-9; 렘 25:13), 7월 금식(그달리야의 암살을 기리기 위함, 렘 41:1-2), 또한 10월 금식(예루살렘 성이 포위되기 시작했던 사실을 기억하고 애통, 왕하 25:1)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절기에 진실한 회개와 슬픔 없이 형식적으로 금식하기도 하여 선지자의 책망을 받기도 했다(슥 7:3-6).

  

 

 

 

 

 여러분은 다들 금식을 해보셨을 것이다. 금식은 참 좋다. 우리 대학청년부도 ‘잃은 양 찾기 운동’을 준비하기 위해 자원자 중심으로 한 끼씩 금식하고 있다. 제 개인적인 고백이지만, 금식을 하고 나면 항상 느끼는 바가 있고, 또 하나님께서 특별한 선물을 주신다. 우리가 영적으로 살려고 발버둥치면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헤아려주신다. 발버둥치면 희망이 있다! 발버둥치지 않는 것이 문제이지 발버둥치면 절망은 희망으로, 소망으로 화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금식을 형식적인 금식이 아니라 전심으로, 절실하게 굵은 베 옷을 입고-회개의 표시이다!, 티끌을 무릎쓰며-사람들은 슬픔의 상황에서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썼다! 진정한 금식을 수행하고 있다. 이들의 금식이 진정한 금식이었다는, 그들의 영적 습관에 진정성, 진실성이 묻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이유는 2절에 나온다. 2절에서는 머라고 말하는가?

 

 

 

모든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이스라엘 자손’, 귀향민은 모든 이방인과의 관계를 끊없다, ‘제라’는 씨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의 씨는 외국 사람들과 구별되는 아브라함의 ‘거룩한 씨, 자손’을 말한다. ‘이스라엘의 씨’의 순수함을 유지하기 위해 ‘절교하고’...바달/ 구분하다, 분리하다, 절단해내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곳에서 바빌론으로부터 귀환한 유다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해이해진 민족 정통성 확립을 수립하기 위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과 일반 백성의 국제결혼을 종교적 죄로 지적하며 고발하고 있다. 그러나 외국인 아내들이 유다 사회에 위협이 되었던 것은 종교적 이유보다 경제적 이유가 더 컸을 것이다. 왜냐하면 외국인 아내들이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경우에 땅은 이방인의 손에 넘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조치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귀환자들의 토지들을 지키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성경학자도 있다(Tamara Cohn Eskenazi).1)

  아무튼 이들의 회개에는 진정한 행위의 열매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대하 7:14의 영적 부흥의 원리를 제대로 실천하며 회개운동을 벌이고 있다.

 

 

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회개는 곧바로 심령의 회복, 부흥을 가져온다.

 회개는? 하이델베르그 교리 문답에서 간접적으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3문 : 당신의 죄와 비참함을 어디에서 압니까?
 답 : 하나님의 율법에서 나의 죄와 비참함을 압니다.

 

 

 ‘비참함’의 독일어는 ‘엘렌트(Elend)’입니다. 이 엘렌트라는 말의 어원은

 

 

“자신의 탄생지 밖에 있음, 자신의 고국에서 유배되었음”

 

 

이라는 뜻입니다. 요리문답은 죄로 말미암은 우리의 결과가 “고향을 잃어버렸음”과 같다고 표현합니다. 자신이 원래 있어야만 하는 자리에서 떨어지거나 누락되어 있을 때 마음에 딜레마가 있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향, 고국을 잃어버린 비참함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던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육간의 상태가 그러하지 않았던가? 엘렌트된 그들의 영적 상태에 대한 깊은 자성과 뉘우침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민족재건을 위한 거국적인 회개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에서 나의 죄와 비참함을 아는 것, 거기서 바로 회개는 시작된다. 느헤미야에 의해 주도된 이스라엘의 회개운동은 이스라엘의 부흥으로 이어졌다. 그 부흥을 위한 기도는 기도(9:6-37)로 이어진다.

 

 

▣ 기도(9:6-37)
  1) 창조주 하나님(6)
  2) 아브라함의 선택과 계약(7-8)
  3) 출애굽(9-12)
  4) 시내산 계시(13-14)
  5) 안식일(14)
  6) 하나님의 은혜(27-33)

 

 

 

  부흥은 ‘쇠퇴하였던 것이 다시 일어나는, 또는 그렇게 되게 하는’ 그 무엇을 의미한다. ‘부흥(復興)은 말 그대로 약하게 되었던 것이 전처럼 다시 힘이 생기거나 생기게 하는 것’2)이다

   ‘부흥’이란 헬라어 단어는 anazao로, 그 의미는 ‘다시 사는 것’이다(롬 14:9, 눅 15:24).3) 이 말은 말 그대로 깊은 침체나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현실적인 상태가 있고 난 후에 다시 일어서는 것을 말한다. 이런 것들을 조합해 볼 때 부흥은 ‘다시’라는 의미가 강하다. 부흥을 revival4) 이라고 하지 않는가? 이전에 화려한 영광을 다시 재현하는 느낌이 강하다. 이 부흥은 흔히 ‘대각성(awakening)’이란 단어와 같이 쓰인다.5)

 

 

 

미국 부흥에 대한 조약한 본인의 목사논문이다. 참고하시길!

 

미국 부흥 역사의 성과와 그 문제점-조나단 에드워즈, 찰스 피니 중심

이 논문은 필자의 목사고시로 제출한 내용입니다. 미국의 대각성운동, 1차, 2차에 걸친 부흥운동의 장점과 단점을 조나단 에드워즈, 찰스 피니 중심으로 엮어보았습니다. 3차 무디의 부흥운동은

kkarl21.tistory.com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또한 부흥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로마 가톨릭에는 부흥이 일어났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더 살펴보면 ‘로마 가톨릭 교회에 속한 개인들은 부흥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알고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가 부흥을 경험한 적은 전혀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요?...그것은 성령께 대한 그들의 전체 교리가 낳은 직접적인 결과입니다. 그들은 성령을 교회와 사제에게, 특히 성례들에, 보다 특별하게는 영세에 국한시킵니다’ 라고 한다. 그렇게한 그 결과 ‘성령과 성령의 역사를 이렇게 다룸으로써 그들은 부흥의 여지를 전혀 남겨 두지 않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결코 부흥을 경험하지 못합니다’라고 적고 있다. 이것으로 볼 때, 부흥은 기독교 역사의 전유물이며 은혜의 선물임을 알 수 있다.6) 부흥은 하나님의 광대한 부어주임,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의 결과로 주어진 성공이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적 부흥을 경험하고 있으며 그것을 회개의 전주곡으로 펼치고 있다. 그리고서 하나님의 긍휼에 기대어 기도하고 있다.

 

 

32 우리 하나님이여 광대하시고 능하시고 두려우시며 언약과 인자하심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여 우리와 우리 왕들과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조상들과 주의 모든 백성이 앗수르 왕들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당한 모든 환난을 이제 작게 여기지 마옵소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신앙의 변증가요 당대의 부흥 운동에 대한 비평가였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장중에 있는 죄인들』(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이라는 그의 유명한 설교에서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특별히 강조했고, 부흥 운동의 열기를 숙연케 했던 설교 중 하나로 손꼽힌다.7)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죄인들이 처한 위험의 심각함, 그리고 지옥에 대한 에드워즈의 이해가 드러나 있다. 그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십중팔구 거부감을 느낄 정도로 지옥에 대해 분명하게 언급하는 설교자였다. 그는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경고하는 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볼 때는 너무 거칠고 노골적이며 자극적이라 여겨질 정도로 그는 확실하게 지옥의 존재와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다.8)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을/죄인들을 향해 불타고 있습니다. 그들에 대한 저주는 잠들지 않습니다. 구덩이가 예비되었고 불은 준비되어 있습니다. 풀무는 지금 뜨겁게 달아 그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불길은 지금 무섭게 타오르며 이글거리고 있습니다. 번쩍이는 칼은 입맛을 다시면서 그들 위에 걸려 있습니다. 그리고 구덩이는 그들 아래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있습니다.9)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지난밤에 지옥으로 가지 않은 것, 당신이 잠을 자려고 눈을 감은 후 이 세상에서 다시 눈을 뜬 것......당신이 아침에 일어난 후 지옥에 떨어지지 않은 것......당신이 여기 하나님의 집에 들어와 앉은 후 그의 엄숙한 예배에 참석하는 죄악 되고 사악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지옥에 가지 않은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길은 그 분의 손이 당신을 붙들고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10)

 

 

 

 

 

여러분은 이 사실에 동의하는가? 우리가 지금도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 호흡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의 끈에 우리가 매여 달려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비의 손이 우리를 붙잡고 놓지 않기 때문임을 믿으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과연 어떠한 것일까? 수많은 헌신? 수많은 결단? 수많은 재산과 물질, 헌금, 십일조? 수많은 태신자?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여러분의 삶의 요소는 무엇인가?

 

 

[시편 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17 The sacrifices of God are a broken spirit; A broken and a contrite heart, O God, You will not despise.

  

 

이스라엘의 회개운동, 더 나아가 회개의 가장 큰 요소는 바로 ‘상한 심령, 깨어진 마음’이다. 여러분이 상처받아 깨어지고 아파하고 낙담하고 좌절하고 넘어진 그 상처입은 마음, 깨어진 영혼과 육신은 바로 하나님께서 구하시고 원하시는 제사요, 희생임을 기억하라! 우리가 깨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필요성을 못 느끼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더 깨어지길 원하신다. 회개는 다른 게 아니라 바로 깨어짐이다.

 

 

 

▣ 서약자들(9:38-10:27)

  하나님께 충실했던 아브라함과의 계약을 기억하고 하나님과의 계약에 성실할 것을 다짐하는 의미에서 이 용어을 사용했을 것이다.

 

‘다 인봉하나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단이요 헌신이요 다짐이며 맹세이다!

  상한 심령들이 모여 하나님께 회개하고 자복하며 영적 부흥을 경험한 이스라엘 공동체처럼 우리에게도 이러한 하나님의 부흥, 영적인 것을 추구하고자 목말라하며 발버둥치는 몸짓이 있기를 소망한다. 우리교회 역시 하나님의 부흥을 기대하자. ‘깨어진 심령’, ‘상한 심령’이 되어 하나님의 긍휼 앞에 늘 감사하며 부흥되는 우리 공동체가 되었음 한다.

 

 


1) 장준석, 성서주석: 에스라/ 느헤미야(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7), 339-340.

2) 브리태니커사전 http://kordic.britannica.co.kr/sear_frame.asp?keyword=부흥&pumsa=&keykind=searkey

   ‘흘러넘침’, ‘세례’ 그리고 ‘영이 부어짐’이란 단어들은 모두 ‘신앙의 부흥’이란 단어와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1740년대에 이르러서야 표준적 용법으로 사용된 ‘신앙의 부흥’이란 용어는 언제나 이런 의미로 사용되었고...심지어 이 성령의 부어 주심은 일반적으로 교회가 영적으로 무감각한 상태에 있을 때, 그리고 성경적 신앙에 대한 무관심이 사회일반에 만연해 있을 때 종종 발생하는 것이었다. 이안 머리, 『부흥과 부흥주의』, 58.

3) http://blog.naver.com/sooklive/80008218263

4) “부흥”이라고 번역된 단어의 영어 리바이벌(revival)은 라틴어 re(다시)+vivere(산다)에서 온 말로서 ‘다시 산다’는 뜻이다. 이만신, “부흥운동의 역사적 고찰과 한국 교회 성장에 끼친 영향”, (미간행 박사학위논문,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1983), 6.

5) 키드 하드먼,『부흥의 계절: 미국의 전도와 부흥운동역사』, 17.

6) 마틴 로이드 존스, 『청교도 신앙, 그 기원과 계승자들』, 19.

7) 토니 레인, 『기독교사상사』, 김응국 역(서울: 나침반사, 1992), 301-302.

8) 양낙흥, 『죠나단 에드워즈: 생애와 사상』(서울: 부흥과 개혁사, 2003), 344.

9) Ibid., 346.

10) Ibid., 347. 조나단 에드워즈는 본 설교의 주제(교리)를 한 문장으로 제시한다.

“사악한 인간들을 당장이라도 지옥에 던져 넣지 못하게 막는 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 외에 아무 것도 없다.” Ibid., 345

 

 

오늘은 느헤미야 9강 강해설교로 <민족재건운동: 회개운동>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느헤미야의 준비된 기도와 행정적인 준비, 그리고 52일의 성벽재건, 그리고 말씀(율법)운동, 뒤이어 회개운동이 지속적으로 일어났던 느헤미야의 스토리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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