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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미국 부흥 역사의 성과와 그 문제점-조나단 에드워즈, 찰스 피니 중심

by Message.K 2022. 3. 15.

이 논문은 필자의 목사고시로 제출한 내용입니다. 미국의 대각성운동, 1차, 2차에 걸친 부흥운동의 장점과 단점을 조나단 에드워즈, 찰스 피니 중심으로 엮어보았습니다. 3차 무디의 부흥운동은 배제했습니다. 

 

 

부흥과 부흥주의 책의 이미지를 찍은 사진입니다
부흥에 대한 저의 목사 논문입니다

 

 

 

 

Ⅰ. 서론

 

  A. 문제 제기 및 연구목적

 

   작가이자 신학자인 오스 기니스(Os Guiness)는 “우리는 이것저것 물건을 쇼핑하듯, 문제해결을 애타게 구하는 세대 속에 살고 있다”(Our generation is in a shopping mood for answers.)1)고 하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말 그대로, 이곳저곳, 여기저기를 기웃기웃하면서 표면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즐거움(entertainment)을 쇼핑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그만큼 표피적이고 물질적인, 감각적인 부흥이 팽배하는 시대이다.

   그렇다면 영적인(spiritual) 부흥은 어떠한가? 우리가 흔히 그렇게 이야기하는 부흥은 쇼핑하듯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먼저 2장에서는 부흥의 정의를 어원적 의미로 정의하고, 성경에 나타난 의미를 구약과 신약별로 정의하고자 한다.

  

 

  그 부흥이란 것에 대해 키드 하드먼은 이렇게 적고 있다.

 

 

“부흥”(revival) 또는 “각성”(awakening)이라는 단어는 “무관심과 쇠퇴의 시간이 지난 후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회복”으로 정의될 수 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요점이 있다. 첫째는 수많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회심 또는 구원이고, 다른 하나는 성경적 진리가 재정립되어 교회가 잃어버리고 죽어가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위하여 능력을 부여받고 든든히 서게 된다는 사실이다.2)

 

 

 

   부흥은 이러한 영혼의 풍성한 구원을 동반한다고 하였다. 정작 오늘날의 현실은 물질적인 번성함으로 가득 차 있긴 하지만 영적인 번성함은 피부로 느끼기가 힘든 시대이다. 만약 부흥의 시기, 부흥의 시즌(season)이 있다면 우리 세대는 그 시기에 대해 배우고 싶은 충동을 분명히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무엇이든지 보고 배운 게 있어야 모방이라도, 흉내라도 내지 않겠는가? 하지만 현 세대와 시대에서 물질적, 문화적인 부흥의 꺼리를 제외하고 ‘영적인 부흥의 꺼리’를 찾는다는 것은 다소 힘든 자가진단을 내려 본다. 부흥이 너무나 절박한 현실 가운데서 우리는 그 부흥의 흔적을 어디서 ‘듣고 눈으로 보고 자세히 보고 손으로 만져’3) 볼 수 있을까?

 

 

   해답은 바로 우리의 과거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4) 영문학자이자 인문학자인 디트리히 슈바니츠는 자신의 저서 『교양Bildung』에서 교양의 가장 기본은 바로 역사를 아는 것이라고 하였다.5) 교양뿐만이 아니라 역사를 아는 것은 부흥에 대해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부흥의 황금어장을 지나치고서야 어찌 부흥에 대해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필자는 3장에, 몇 세기 전에 있었던 미국의 위대한 부흥 현상, 이른바 미국 대각성운동의 중심에 섰던 인물, 특히 두 사람에 눈을 돌리고자 한다. 그 무궁무진하였던 영적인 기름진 부흥의 광맥에서 부흥에 대한 분석과 아울러 그 운동과 인물이 미친 영향력을 살펴보는 것 또한 현재적인 진단에 대단히 유용할 것이다.

 

 

 

  B. 연구범위 및 연구방법

 

  필자가 살펴 볼 미국 대각성운동은 지금으로부터 약 250년전, 식민지 시대의 미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목할 만한 부흥의 시즌은 바로 미국의 18, 19세기이다. 물론 미국 대각성운동의 주역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본 소고에서는 미국 대각성운동에서 제 1차와 제 2차의 각 시기마다 대표적인 한 인물을 들어 조망하고자 한다.

  먼저, 1차 대각성운동은 50년 동안 이루어진 사건으로 보고 프렐링휴이젠(Theodore Frelinghuysen)이 부흥운동을 시작한 1720년부터 약 30년간의 기간이며 이 식민지 나라 미국에는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가 있었다. 제 2차 대각성운동은 뉴 하트포트(New Heartford)와 코네티커트(Connecticut)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난 1795년부터 약 50년간의 기간인데 이 시기에는 신학적인 훈련은 부족했으나 원대한 꿈을 품은 찰스 피니(Charles Finney)가 있었다.

  이런 분류와 정리를 통해서 미국대각성의 주역이었던 조나단 에드워즈와 찰스 피니를 살펴보고, 1차와 2차 대각성이 일궈낸 성과와 문제점을 짚어볼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드러난 통찰로 결론지을 것이다.

 

 

 

 

Ⅱ. 부흥이란 무엇인가

  

 A. 어원적 의미

 

  1740년대 이전에 이 ‘부흥’이란 단어는 이따금씩 단지 묘사적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미 2세기 전인 유럽의 종교개혁시대 때부터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을 의미한다. 종교개혁자들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그의 승천으로 말미암아 마감된 것이 아니라, 그 이후 교회와 인간의 선교 활동을 통해 계속 수행되어 왔다는, 잊혀져 버린 진리를 성경을 통해 회복시켰다. 이안 머리(Ian Murray)는 사무엘 데이비스의 글을 인용하면서 부흥은 자신이 이야기한 바로 그 묘사적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과 단절되었으며 그분을 대적하여 죄를 저질렀고, 그 죄악의 일을 계속해서 사랑하고 있다. 그들은 순종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들의 의무와 충성에 복귀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의 고집스런 마음과 강퍅한 마음을 복종시킬 더욱 우월하고 강력한 능력이 필요하며, 그들로 하여금 감미롭게 주께 순종케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에 불타게 하는 동시에 죄를 지독하게 혐오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을 위해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께서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고, 이 목적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인간의 마음을 주장하시고 역사하시는 것이다.6)

 

 

  따라서 부흥은 기독교 역사를 통해 조망해 볼 때, 하나님의 교회는 ‘특별하신 하나님의 자비의 계절에 비범한 하나님의 영의 교통하심에 따라’ 새로운 활력과 성공으로 고양되어 왔던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시기를 다음과 같이 더욱 자세히 설명했다.

 

 이런 시기에 하나님의 사역은 엄청난 속도로 수행되었고 종종 갑작스러운 회심들이 나타났다. 그것은 바로 역사상 가장 기이한 방법으로 성령의 부어 주심이 강력하게 임했던 사도시대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 시대에 회심들은 얼마나 생생하고 갑작스러운 것이었는지......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의 성령의 기이한 부어 주심이 발생하는 때는 언제든지 그 부어 주심의 결과로 위대한 성공이 나타나는 때다.7)

 

 

  부흥은 ‘쇠퇴하였던 것이 다시 일어나는, 또는 그렇게 되게 하는’ 그 무엇을 의미한다. ‘부흥(復興)은 말 그대로 약하게 되었던 것이 전처럼 다시 힘이 생기거나 생기게 하는 것’8)이다

  ‘부흥’의 사전적인 의미는 생명의 회복으로 사람의 마음이나 영을 북돋고, 생각을 살아나게 하고 새롭게 하고 생명과 열정과 힘이 충만하게 하고 침체로부터 회복시키는 것이다. ‘부흥’이란 헬라어 단어는 anazao로, 그 의미는 ‘다시 사는 것’이다(롬 14:9, 눅 15:24).9) 이 말은 말 그대로 깊은 침체나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현실적인 상태가 있고 난 후에 다시 일어서는 것을 말한다. 이런 것들을 조합해 볼 때 부흥은 ‘다시’라는 의미가 강하다. 부흥을 revival10) 이라고 하지 않는가? 이전에 화려한 영광을 다시 재현하는 느낌이 강하다. 이 부흥은 흔히 ‘대각성(awakening)’이란 단어와 같이 쓰인다.11) 새뮤얼 데이비스는 성령의 광대한 부어 주심 혹은 교통하심, 즉 부흥만이 ‘무기력한 교회에 종교개혁을 생산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의 이사야서 32장 13절에서 19절까지의 설교에서 ‘성령의 부어주심은 황폐해진 사회를 치료할 수 있는 위대하고도 유일한 방법이며, 국가적 재앙과 비참함을 효과적이고도 최종적으로 예방할 수 있는 수단이며 평화를 확립할 수 있는 유일하고 확실한 근거’라고 주장했다.12)

 

 

  위대한 강해 설교자, 마틴 로이드 존스는 ‘부흥을 정의하는 데 시간을 쓸 필요는 없다.13) 성령께서 비상하게 역사하실 때 교회의 생활 속에서 체험되는 것이 바로 부흥이다. 일차적으로 성령께서는 교회에 속한 지체들을 통해 그러한 역사를 하신다. 그러므로 부흥은 신자들의 부흥이다. 생명이 없던 것을 부흥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 했다. 그는 부흥에 대한 뜻을 세밀하게 연구하는 것 보다 부흥이란 것이 보편적인 신앙인들이 느끼는 그 무엇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따라서 부흥이란 일차적으로 나른해지고 잠들어 거의 죽어 가는 교회의 지체들을 깨워 활기 있게 하고 소생하게 하는 것입니다’14)라고 했다.

 

제임스 번즈는 말하기를, ‘부흥은 결코 우연히 오지 않는다.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을 증거한다. 우리는 단지 부흥 속에서 하나님의 질서와 한계를 볼 수 있고, 부흥이 다가오는 것을 예측한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준비 되고, 때가 무르익었을 때 부흥이 온다는 것을 인식한다’고 하였다.

  댄 해이스는 부흥에 대해 명심해야 할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첫째,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부흥을 일으키시고 보존하시는 근원이 되시는 분이라는 것, 둘째,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할 때까지 부흥을 기다리신다는 것이다.15)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또한 부흥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로마 가톨릭에는 부흥이 일어났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더 살펴보면 ‘로마 가톨릭 교회에 속한 개인들은 부흥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알고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가 부흥을 경험한 적은 전혀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요?...그것은 성령께 대한 그들의 전체 교리가 낳은 직접적인 결과입니다. 그들은 성령을 교회와 사제에게, 특히 성례들에, 보다 특별하게는 영세에 국한시킵니다’ 라고 한다. 그렇게한 그 결과 ‘성령과 성령의 역사를 이렇게 다룸으로써 그들은 부흥의 여지를 전혀 남겨 두지 않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결코 부흥을 경험하지 못합니다’라고 적고 있다. 이것으로 볼 때, 부흥은 기독교 역사의 전유물이며 은혜의 선물임을 알 수 있다.16) 부흥은 하나님의 광대한 부어주임,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의 결과로 주어진 성공이다.

 

 

 

 

B. 성경적 의미

 

 1. 구약에서의 부흥의 의미

 

 구약성경에서 ‘부흥’( hy:j;;; to live, have life; 살다, 생명이 있다)이라는 의미의 말은 그 어원이 “살다”라는 의미를 가진 말이다. 이 “산다”는 말은 본래 “숨을 쉰다”는 의미를 가진다. “산다”와 “숨을 쉰다”는 것이 연결되는 이유는 숨(호흡)은 모든 살아 있는 존재에 있어서 생명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에스겔 37:5절에서 마른 뼈들에 대하여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겔 37:5)고 말씀하셨다. 부흥이나 생명은 하나님의 생기로 숨을 쉬는 것이다. 에스겔 37장 5절의 말씀은 문법적으로 사역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 의미는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17) 즉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있음을 보여준다.

  특별히 구약에서 자주 나타나는 ‘소생(蘇生)’이라는 단어가 바로 부흥에 맞먹는 용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말과 함께 ‘부흥’을 가리키는 히브리어가 “살다”의 강의형(intensive form)인 ‘히야’(היה)로 쓰여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즉, 부흥은 문자적으로 “갑자기 살리다”, “확 살아나게 하다”라는 의미이다.18)

  부흥이라는 히브리어 단어 ‘하야’(hy:j;)는 또한 어려운 환경에서 다시 ‘회복되다’의 의미, 성을 중수하고 무너진 것을 다시 일으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구약성경에 사용된 단어는 부흥의 실질적인 형태를 설명하고 있다. 이 부흥을 의미하는 말은 구약성경에서 250회 이상이나 여러 가지 형식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가운데서 55회 가량은 피엘(piel)형으로 혹은 히브리어 사역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

  또한, 구약성경에서 나타난 부흥의 때는 이스라엘 왕국이 성립되기 이전에 약 네 번 정도 커다란 부흥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야곱의 집안이 경험한 부흥(창 45장), 출애굽 당시 모세를 통해 주어졌던 부흥(출 7-15장), 그리고 출애굽기 32장에 나타나는 부흥과 마지막으로 사무엘 선지자를 사용하셨던 부흥(삼상 7장)이다. 이렇게 커다란 신앙의 부흥들은 횟수로는 몇 번 되지 않지만, 하나님의 계시를 간직하고 전수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19)

  그 후 왕국이 분열되고 포로들이 귀환하기까지 여섯 번 정도의 부흥과 이로 말미암은 종교개혁이 있었다. 이러한 부흥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신앙을 이어가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아사, 여호사밧, 요아스, 히스기야, 요시아로 이어지며, 이러한 징검다리는 포로 시대에서 에스라를 통해 다시 한 번 나타나게 된다.

 

 

   2. 신약에서의 부흥의 의미

 

 

  신약성경에서는 부흥을 “불 일듯 하게 하다”, “처음 행위를 가지게 하다”, “굳게 하다”, “열심을 내게 하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신약성경에는 성령의 외적 부어주심에 의한 여러 부흥의 사례들이 있지만 부흥의 상세한 양상을 기술한 어떤 단어를 찾는다는 것이 쉽지 않다.

  구약성경에서 비교해서 이렇게 신약성경이 부흥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던 하나의 이유는 신약 성경의 말씀들이 이미 부흥의 시대에 살고 있던 때에 기록되었던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구약성경의 ‘부흥’ 개념의 단어들과 비교될 헬라어로 아나자오(ajnazavw, live again; 다시 생명을 얻다), 아나카이노오(ajnakainovw, to make new: 새롭게 만들다), 아나조퓌레오(ajnazwpurevw, inflame one's mind), 아나달로(ajnaqavllw, grow green again; 다시 자라나다), 아납쉬코(ajnayuvcw, refreshing; 유쾌하게 하다)가 있다.

  구약성경에서와 같이 신약 성경의 모든 단어들도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적용되어 있다. 이는 부흥이 언제나 이미 하나님을 믿은 백성들에게 우선적으로 나타나는 사실과도 연관 지을 수 있을 것이다. 김남준 목사의 말처럼 “참된 부흥은 먼저 잠자고 있는 교회를 깨우는 각성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교회를 정결케 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가난하게 한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추구하게 하고 자신들의 참된 영적인 상태를 애통해 하는 것”20)이다.

  신약에 나타난 대표적인 부흥의 사건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대로 보혜사 성령을 보내어 성령의 시대를 열게 하신 것이 바로 부흥의 역사이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 사는 우리가 부흥을 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과 함께 시작된 신약 시대, 그 자체가 아미 부흥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성령께서 오셨고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심으로 그를 힘입어 선교하고 경건한 삶을 살며 하나님을 섬기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순절 성령 사건 이후에 일어난 이방인 고넬료의 집안에 성령 부으심의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집에 부으신 부흥의 역사는 유대인들에게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의 축복과 복음의 혜택이 자신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부흥의 역사는 에베소 지방에서도 나타나는데, 사도행전 19:17-20에 보면 에베소 지방이 복음화 될 때에도 부흥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사도행전이 보여 주는 선교의 역사에서도 부흥은 교회의 영적 회복과 확장에 징검다리 역할을 함을 보여준다.21) 이런 신약에서의 부흥이 현대에서도 다시 재생될 수 있음을 우린 미국 역사를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Ⅲ. 대각성운동의 역사적 배경

 

   A. 제 1차 대각성운동

 

     1. 역사적 상황

 

   미국은 1776년 독립을 선포한 비교적 역사가 오래 되지 않는 나라이다. 미국의 기독교 역시 200년에 불과한 짧은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미 방부 처리된 유행에 뒤떨어지고 우스운 기독교라는 상표의 유물로서 묘사되’22)던 18, 19세기에 일어난 세 번의 대각성운동은 미국교회사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 세계교회사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경건주의 운동에서 비롯된 18세기의 부흥 운동은 영국과 미국에서 거의 동시에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독일의 경건주의자 찐젠도르프는 1727년 모라비아 형제단을 창설하였으며, 1738년 영국에서는 존 웨슬리로부터 부흥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로부터 미국에서 부흥 운동이 시작된 것은 영국에서보다 4년 앞선 1734년이었다. 18세기 전반에 유럽과 미국에서 거의 동시에 부흥 운동이 일어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부흥 운동은 계몽사조의 합리주의 사상이 확산되고 있으며 산업화를 통한 물질의 풍요를 추구하는 비슷한 사회적 상황에 일어났다. 그것은 침체해가는 교회를 각성시키고 도덕적으로 타락해 가는 사회를 쇄신하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일어난 영적 각성 운동이었다. 18세기에 미국에서는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소수였다. 그러던 것이 19세기에 접어들면서 변화가 왔다. 즉, 칼빈주의 사회 전통에 변화가 온 것이었다. 18세기의 대부흥 운동은 뉴잉글랜드의 신학이 성장하는 데 촉진제 역할을 하였다.23)

 

 

    2. 전개

 

 

   대각성운동의 전개는 세 가지 측면에서 다룰 수 있겠다.

 

   첫째, 프렐링휴이젠의 부흥운동과 뉴저지의 부흥이다. 이것은 미국의 제 1차 대각성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네델란드 개혁교회의 목사인 프렐링휴이젠은 미국에 도착한 후 그는 교회의 형식화와 죽은 신앙을 보고 개혁의 필요성을 통감했다.24) 그는 권징을 통해서 성찬을 허락받아야 하며, 가정에서도 신앙을 위해서 개인적 훈련과 교육을 받아야 함을 강조하였고, 복음적인 설교를 통해서 받아들인 신앙을 교회 앞에 공식적으로 고백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의 이러한 경향은 교인들에게 다소간의 불평과 원망을 낳기도 했지만, 그의 설교는 점차 회중 가운데 많은 영향을 미쳐서 1726년경에는 큰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부흥운동은 오히려 장로교 계통의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그리고 이 부흥은 뉴브룬스윅(New Brunswick)의 테넌트일가(Tennents)와 통나무대학 출신들의 부흥운동과, 코네티컷 지역(Connecticuts)에서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부흥운동과 영국의 순회설교자 휫필드(George Whitefield)에 의한 부흥운동으로 크게 확대되어 갔다. 프렐링하이젠은 또한 식민지의 교회들이 직면한 문제들에 해결책을 준 최초의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즉 그의 철저한 교회 치리와 회심 체험에 대한 요구는 미국의 변경 교회들에게 힘을 불어넣었고, 목사의 권위를 확고하게 하였다. 프렐링하이젠이 다소 엄격한 권위와 원칙들이 긍정적으로 교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말이다.25)

 

 

  둘째, 테넌트의 부흥운동과 통나무대학의 출현이 대각성운동을 지속적으로 가능하게 했다. 프렐링휴이젠26)에 의한 부흥은 그의 장로교 동역자 길버트 테넌트(Gilbert Tennent)에 의해 뉴브룬스윅 장로교인들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다. 청교도 신앙의 뿌리를 가지고 있던 윌리엄 테넌트는 북부 필라델피아에 설립된 통나무대학(Log College)에서 그의 아들을 포함하여 목회자 훈련생들을 양육하고 있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라틴어, 히브리어, 논리학과 신학을 철저히 교육시켰고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열렬한 복음주의 정신을 고취시켰다. 이 통나무대학을 졸업한 길벗 테넌트의 열정적인 복음적 설교를 통한 부흥은 불같이 번져 롱아일랜드, 버지니아 등으로 퍼지게 되었다.27)

  

 

 

 셋째, 순회설교자와 이 대각성운동을 절정으로 이끈 사람인 휫필드(George Whitefield)28)의 부흥운동이다.

    18세기 교회지도자 가운데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는 그의 업적에 비하여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와 함께 기독교 역사적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존 웨슬리(John Wesley, 1705-1791)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5-1758)에 대하여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영국의 복음적인 각성운동과 미국의 대각성운동의 주역이었던 휫필드에 대하여는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러나 복음적인 각성운동을 일으킨 18세기의 지도자 가운데 조지 휫필드 이상 주목할 만한 인물은 없다. '휫필드는 18세기의 가장 위대한 부흥운동가였고, 미국 최초의 종교적인 영웅이었으며, 그 시대의 이적(marvel of the age)이었다.' 그는 22세에 영국에서 부흥운동을 일으켰고, 25세에 신대륙에서 대각성 운동을 일으켜서 미국인의 80퍼센트가 그의 설교를 한번 이상 들었고, 1천만 명 이상이 그의 설교로 인하여 각성했다. 그는 시대적인 요청을 재빨리 파악하였고 영적인 전쟁을 성실히 수행한 신앙의 웅장이었다. 그래서 존 라일(J. C. Ryle)은 말하기를, 18세기의 인물들 가운데 그의 이름 앞에 다른 사람을 내세운다면 불공정한 일을 범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1739년 8월 휫필드는 신대륙에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미국으로 항해하였다.

그는 처음으로 설교할 장소로 필라델피아를 택하였다. 그의 선택은 지혜로운 것이었다. 필라델피아는 신대륙의 중요한 항구도시로 경제의 중심지요, 가장 개화된 도시였다. 1739년 11월 6일 휫필드가 크라이스트 처치(Christ Church)에서 설교할 때 너무나 많은 사람이 몰려와서 교회당에 수용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옥외로 나와서 설교해야 했다. 필라델피아에서 뉴욕으로 여행하면서 집회를 가질 때마다 모이는 사람의 숫자가 많아졌다. 필라델피아에서는 8천명, 필라델피아 근교의 작은 도시 네샤미니(Neshaminy)에는 5천명이 모였고, 팩스 매너(Fagg’s Manor)와 같은 작은 마을에도 1만 2천명이나 모였다. 휫필드의 부흥운동에 대한 소식은 퍼져 나가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그가 가는 곳마다 말씀을 듣기 위하여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이 모여들었다. 휫필드는 1740년 가을 6주간에 걸쳐 뉴잉글랜드 순회전도를 떠났다. 뉴잉글랜드신문들은 휫필드의 부흥운동을 뉴스로 게재하였다. 그에 대한 이야기가 신문과 사람들을 통하여 널리 퍼져나가자, 그가 가는 곳은 어디나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보스톤에서는 몰려온 사람들을 수용할 장소가 없었고, 마블헤드(Marblehead)와 세일럼(Salem)과 같은 해안도시에도 하늘에서 들려오는 복음의 소식을 듣기 위하여 사람이 사람 위로 걸어 다닐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였다. 휫필드는 1740년 10월 17일 조나단 에드워즈가 목회하던 매사추세츠의 노샘프턴(Northampton)에서 설교하였는데, 에드워즈는 휫필드의 설교를 듣고 매번 눈시울을 적시곤 하였다. 이와 같은 부흥운동을 통하여 뉴잉글랜드 인구 30만명 가운데 25만명이 그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다. 이러한 휫필드의 부흥운동을 후대의 학자들은 '대각성운동' (Great Awakening)이라고 부른다.

 

 

 

    영국과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와 미국 등지에서 가는 곳마다 휫필드처럼 전폭적인 인기를 누린 설교자도 교회 역사상 없었다. 그는 설교를 시작하여 마칠 때까지 34년간 청중을 사로잡았고, 동일한 영향력을 유지하였다. 그의 인기는 수그러진 적이 없이 설교를 시작하던 날과 세상을 떠나 주님의 종으로 가던 날이 같았다.29) 대각성운동의 배후에는 이처럼 많은 이들의 보이지 않는 노고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 조나단 에드워즈        

               

조나단 에드워즈는 미국 코네티컷 주의 이스트 윈저(East Winsor)에서 1703년에 태어났다. 1716년에 그는 예일(Yale) 대학교에 들어갔고 후에 그 곳에서 강사로 일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종교적이었는데, 1720년대 초반에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은총을 가슴 깊이 느끼는 회심을 경험했다. 1727년에 그는 그의 조부 솔로몬 스토다드(Solomon Stoddard)의 뒤를 이어 메사추세스의 노담턴(Nothampton)의 회중교회(Congregational Church) 목사가 되었다. 에드워즈가 노담턴에서 지내는 동안, 1734-1735년 어간에 그의 설교로 그 교회 내에 부흥 운동이 일어났고 뉴 잉글랜드(New England)에서의 죠지 휫필드의 사역으로 1740년부터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에드워즈와 그의 회중과의 관계는 전적으로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의 조부가 교회 회원이 되는 자격을 느슨하게 해놓은 것을 엄격하게 하려고 했다.30) 그 결과, 1750년 그 교회를 사면하게끔 되었다.

  이듬해 그는 인디언 선교를 위해 스토크브릿지(Stockbridge)로 떠났고, 그 곳에 머무는 동안 훌륭한 저서들을 썼다. 1757년 그는 뉴 저지(New Jersey) 대학(현 프린스턴 대학교) 학장으로 초청받고 마지못해 승낙했다. 1758년에 그 곳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전염병 발발로 천연두 예방 접종을 받았는데, 그만 부작용으로 인해 곧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에드워즈는 신앙의 변증가요 당대의 부흥 운동에 대한 비평가였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장중에 있는 죄인들』(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이라는 그의 유명한 설교에서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특별히 강조했고, 부흥 운동의 열기를 숙연케 했던 설교 중 하나로 손꼽힌다.31)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죄인들이 처한 위험의 심각함, 그리고 지옥에 대한 에드워즈의 이해가 드러나 있다. 그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십중팔구 거부감을 느낄 정도로 지옥에 대해 분명하게 언급하는 설교자였다. 그는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경고하는 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볼 때는 너무 거칠고 노골적이며 자극적이라 여겨질 정도로 그는 확실하게 지옥의 존재와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다.32)

 

 

 

당신이 지난밤에 지옥으로 가지 않은 것, 당신이 잠을 자려고 눈을 감은 후 이 세상에서 다시 눈을 뜬 것......당신이 아침에 일어난 후 지옥에 떨어지지 않은 것......당신이 여기 하나님의 집에 들어와 앉은 후 그의 엄숙한 예배에 참석하는 죄악 되고 사악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지옥에 가지 않은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길은 그 분의 손이 당신을 붙들고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33)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을 향해 불타고 있습니다. 그들에 대한 저주는 잠들지 않습니다. 구덩이가 예비되었고 불은 준비되어 있습니다. 풀무는 지금 뜨겁게 달아 그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불길은 지금 무섭게 타오르며 이글거리고 있습니다. 번쩍이는 칼은 입맛을 다시면서 그들 위에 걸려 있습니다. 그리고 구덩이는 그들 아래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있습니다.34)

 

 

 

 에드워즈는 이 설교에서 인간의 생명이 대단히 불안정함을 강조하고,35) 이러한 위험을 벗어나기 위해 흔히 동원되는 방법 두 가지를 언급한다. 하나는 참된 회심 혹은 구원 얻는 믿음이요 다른 하나는 자연인의 종교적 노력이다.36)

 현대 설교의 강조점은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러나 17, 18세기의 많은 청교도 설교자들은 달랐다. 그들은 대조적인 강조점과 함께 죄인들에게 접근했다. “하나님은 회심치 않은 당신에 대해 진노하고 계십니다.” “당신은 당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 위험에 직면해 있습니다.” 과연 어느 쪽이 보다 성경적이며 복음적인 접근일까? 현대적 접근 방법은, 제임스 패커 같은 사람들이 지적하듯, 얄팍한 것이며 거짓 회심을 낳는 경향이 있는 것인 반면 청교도적인 방식이 참된 회심을 낳는 것인가? 아니면 진노든 사랑이든 양자를 모두 말해야 하며 그 순서는 뒤바뀌어도 상관이 없는 것일까? 여기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사랑 가운데 어느 한 가지만 배타적으로 전하고 나머지를 말하지 않는 것은 불건전하고 왜곡된 메시지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사랑만 주로 말하고 죄에 대한 그의 진노를 말하기를 꺼려하는 현대의 설교는 균형을 잃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37)

 

 

 

1746년에 조나단 에드워즈는 『종교적 열정』(Religious Affections)이란 글에서 참된 종교의 본질을 추구했다. 회심을 고백했던 자들 중 어떤 자들이 그들의 경건치 못한 옛 방식으로 빠져 들어갔다는 현상을 보고서 에드워즈는 참 종교란 정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열정’(마음, 감정, 의지)에 있다고 주장한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알미니안주의38)를 단호히 배격한다.39)

 

 

 

에드워즈는 각성운동과 동시에 일어난 사건을 이렇게 진술했다.

 

 

지금 여기에 영원한 세계와 신앙에 관한 지극한 관심이 이 도시의 모든 부분과 각계각층과 남녀노소 모두에게 보편화되었다. 마른 뼈들 사이에서 나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게 되었다. 영적이고 영원한 것들 이외의 모든 이야기는 도외시되었다. 그들은 생업을 수행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 아닌 한 모든 대화를 신앙에 관한 것들로 하였고 신앙에 관한 것이 아닌 다른 토의는 어떤 단체에서도 용납되지 않았다......그 도시는 노인이든 젊은이든 간에 영원한 세계에 무관심한 자는 하나도 없었다...... 영광스러운 변화가 도시 내에서 일어나 1935년의 봄과 여름에 그 도시는 하나님으로 가득 찬 것 같았다.40)

 

 

 

이처럼 에드워즈는 뉴잉글랜드의 대각성운동이 인간의 노력이나 인간적 기교에 의해 일어난 운동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사역이요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라고 생각했다. 에드워즈는 또한 일찍이 칼빈주의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계몽주위시대의 최근의 발견을 적절히 수용하며 그의 신학을 구성하였다. 부흥운동의 지도자로서 그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만이 진정한 부흥이라고 변호하면서 잘못된 감정주의를 배격하였다.41) 에드워즈의 사상은 후손들에 의해 수십 년 동안 뉴잉글랜드의 신학 토론의 틀을 마련해 주었다.42) 조나단 에드워즈가 없었더라면 대각성운동이 가능했을까 싶을 정도로 조나단 에드워즈는 미국 부흥 역사의 비중 있는 인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영향력은 제 2차 대각성 운동의 주역인물인 찰스 피니의 뉴해븐 신학(New Heaven Theology: 새 안식처 신학)을 낳게 된다.

   

 

에드워즈의 부흥에 관한 글은, 그 당시 여러 특이한 육체적 현상을 동반하며, 정신적으로는 환상 같은 것을 보는 것을 동반한, 급격한 회심 즉 부흥이 성령의 특이한 역사였다는 것을 변증하는 것과 그 가운데 있는, 사단이 훼방을 하기 위해서 섞어 놓은 거짓된 역사를 구별하려는 것이 그가 글을 쓴 의도이다. 따라서 그의 글의 이러한 의도 가운데 기록된 것임을 기억하고 읽어야 한다.

 

 

 급격한 회심은 하나님의 역사로, 성령이 신자들의 마음에 빛을 비추고, 영적인 자각을 하게 하여서 자신이 악하고 정죄 받을 상태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며, 영적인 본성을 얻게 되는 전반적인 변화이다. 설교자는 부흥을 진척시키는데 사용되는 도구의 하나이며, 목회자는 각성된 사람들을 올바르게 상담하고 인도할 책임이 있다. 부흥을 위해서 교회의 정규적인 예배 외에 여러 사적인 모임과 기도회가 도움을 주었다. 부흥의 시작과 끝은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이는 인간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에 속하는 것이다.43)

 

 

 

 

    

 

B. 제 2차 대각성 운동44)        

 

      1.역사적 상황

 

  미국 교회는 독립전쟁 이후 15년간 영적인 죽음에 있었다. 제 2차 대각성운동의 바로 전 상황45)은 신앙적으로 암울했다.

 

  감리교도는 들어오는 숫자보다 나가는 숫자가 더 많았다. 침례교도는 말하기를 그들은 가장 삭막한 계절을 맞이했다고 했다. 장로교도들은 총회에서 국가의 불경건을 규탄했다. 전형적인 회중교회인 메사추세츠주 레녹스(Lennox)의 사무엘 쉐퍼드(Samuel Shepherd)목사는 16년 동안 한 교인도 더 얻지를 못했다고 말한다.46)

 

또한 1790년대의 코네티컷에 거주했던 당시 젊은 소년이었던 헤먼 험프리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당시 경건의 모양은 겨우 유지되고 있었으나, 1745년부터 18세기가 끝나는 55년 동안 그 능력은 점차 약화되고 있었다. 성령은 한 때 바짝 말라 버린 수많은 들판을 여호와의 동산으로 바꾸어 놓으셨던 엄청나게 풍성한 갱신과 부흥을 거두어 가신 것이다.47)

 

 

1776년에 미국은 독립은 하였으나 새로운 정부의 인물들은 이미 유럽의 합리주의나 이신론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라투렛은 1750-1815년을 “거절과 부흥의 시대”라고 부르며 기독교 신앙에 대한 반대가 계몽사상에 의해서 일어났다고 말한다. 이러한 경향은 미국의 독립전쟁 이후 더욱 전파되어 합리주의와 이신론이 젊은 계층 사이에 만연하였다. 레씽은 “기독교는 인류의 진보로 인해서 이제 떠나고 있는 문화의 단계”48)라고 말하고 있다.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이나, 제퍼슨(Thomas Jefferson)과 같은 당시 미국의 지도자들은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정치를 하였으나 그들의 사상에도 역시 비신앙적인 이신론이 이미 침투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신앙 위주의 정책보다는 합리주의와 이신론에 입각한다. 국가위주의 정책을 펼쳤고, 이로 인해 교회생활에 대한 관심이 저하되었다. 또한 제퍼슨은 대통령이 된 후에 아무도 종교를 강요할 수 없다고 하면서 정교분리정책을 1785년에 채택하였다.

 

 

 

독립전쟁 후에 낭만주의 도전 역시 미국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낭만주의 정신은 직접적인 직관에 호소하였다. 이런 낭만주의 사상의 대표자는 1830년대에 에머슨(Ralph Emerson)이다. 그는 초월주의자로서 직관에 호소하며 자연 속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자아발견을 찾았다. 그는 사람은 하나님의 계시를 발견하기 위해 성서를 볼 필요가 없으며 다만 성서를 통해 자신의 마음속을 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인간을 하나님의 일부라고까지 말해서 범신론으로까지 기울였다. 결국 미국의 독립 후의 이러한 비신앙적 사상은 신앙적 나태를 초래하였고 기독교가 인간의 선택에 따른 하나의 종교라는 사상이 지배하게 되었다.

  

 

신학적으로는 더 이상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책임만큼이나 인간의 책임과 권리를 주장하는 당대의 낙관주의적 시대조류와 어울리지 않았다. 미국이 독립이 선포되던 18세기 말엽부터 19세기 초엽까지 30여 년 동안 미국에서 전통적인 칼빈주의는 크게 위협받고 있었다. 독립전쟁 이전 시대까지는 미국 기독교인의 절대 다수가 칼빈주의자들이었으나 18세기 말엽부터 알미니안주의적 성향이 다수를 차지했다. 그리고 영국의 지배에 벗어나 독립 교단으로서 급성장한 감리교는 전통적인 칼빈주의의 수정을 가속화시켰다.49)

  제 2차 대각성운동은 제 1차 대각성운동에 이어 경건주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경향을 지니면서 회심과 감정적인 경험도 역시 강조했다.50)

 

 

     2. 전개

 

 

  미국교회는 독립전쟁 이후 침체상태에 있었다. 19세기 초 기독교인은 전 인구의 10%에도 미치지 못했다. 반면 영토는 불과 50년 사이에 3배로 확장되었고 인구도 이민의 급증으로 인하여 5배로 증가했다. 따라서 이 같은 상황은 침체된 교회에 갱신을 요구했다. 1792년에 이미 제 2차 대각성운동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으며, 1800년에 이르면 뉴잉글랜드의 부흥운동은 절정에 달했다.

 

 

대각성운동은 동부의 부흥과 서부의 부흥 또는 제1기와 제 2기로 나누어 보는 것이 적절하다. 부흥운동역사 연구가인 에드윈 오르(Edwin Orr)에 의하면 제 2차 대각성운동의 제 1기는 18세기 말엽부터 1812년까지로 보고, 제 2기는 1822년부터 1842년까지를 보는데, 제 2기의 부흥운동을 이끌고 간 지도자가 피니(Charles Finney)이다.51)

 먼저, 동부에서는 제 1차 대각성운동 때와 마찬가지로 뉴잉글랜드지방에서 부흥운동이 시작되었다. 동부에서는 크게 흥분되는 일이 없이 부흥운동이 일어난 반면, 서부에서는 통곡, 기절, 육체적인 진동 등 특별한 현상들이 일어나면서 부흥운동이 진행되었다. 서부의 부흥운동은 야영집회(camp meeting)의 형태로 일어났다. 이것이 연속집회(protracted meeting)의 시작이었다. 감리교의 애즈버리(Asbury) 감독은 1811년 그의 일기에서 “그 해 400회의 야영집회가 개최되었다”고 기록했다.52)

 

 

동부의 뉴잉글랜드 사람들은 1798-1808년의 야외집회를 야만스러운 감정의 폭발로 보았다. 같은 부흥운동 지지자라도 동부사람들은 서부사람들을 경멸하는 태도를 가졌다. 이 태도는 1820년대의 피니가 중서부지역에서 부흥운동을 할 때도 문제가 되어 1827년에 동부와 서부 양측이 만나서 부흥운동에 대해서 회합을 갖기도 했다.

  그러나 대각성운동은 대서양 중부주들, 남부 및 서부개척지들로 널리 파급되었다. 서부사람들은 이 부흥운동이 동부로 확장되기를 바랬다. 하지만 동부사람들은 이 부흥운동을 견제하려고 하였고 목사의 교육을 오히려 강조하려 하였다. 하지만 대체로 제 2차 대각성운동은 18세기의 제 1차 대각성운동 보다는 흥분의 정도가 작았다.

 

   

 

 

 3. 찰스 피니           

     

 

                  

찰스 피니(Charles Finney)는 제 2차 대각성운동의 중심인물이다. 그리고 피니의 핵심적인 사상 중 하나인 성화론은 제 2차 대각성운동 이후 사회개혁을 일으킨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피니는 아담스(Adams)에서 변호사로 활동할 때 신앙적 회심을 하게 된다. 1821년 교회 담임목사 게일(George Gale)이 병든 누이를 방문하러 가면서 한 평신도에게 교회를 맡겼는데 그 때 피니는 기도회 참석했다가 깊은 신앙적 동요를 체험하게 된다. 이후 피니의 활약은 대단했다. 1824년부터 1832년까지 순회설교자로 미국 중서부지역을 중점으로 활동했고, 계속해서 대도시와 동부까지 활약하였다. 그의 집회방식53)은 이른바 참회자석, 집회의 갑작스런 연장, 여자들에게 공중 기도의 허용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일을 하였다.54) 그는 장로교 목사였지만 그 지역의 다른 교파와 교회와도 연합해서 부흥운동을 하였다. 피니의 이러한 부흥운동이 모든 사람의 찬성을 이끌어 올 것으로 피니 자신은 기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부흥운동은 1827년에서 1832년까지 뉴욕시, 필라델피아, 보스턴, 로체스터 등 도시를 휩쓸었다. 그런 놀라운 관심이 증폭된 이유를 이안 머레이(Iain H. Murrey)는 세 가지로 들고 있다.

 

 

 첫째, 부흥에 대한 주제는 그 당시 영어권에서 가장 큰 관심사였다.

 둘째, 피니 자신이 부흥을 경험한 설교자라는 소문이 퍼졌다.

 셋째, 피니는 전에는 출판한 적이 없었던 어떤 다른 것을 말하고 있었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확장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이전에는 부흥 신학이 거의 이해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 주제에 관해 ‘극심한 무지’가 목사들 사이에 팽배했었다고 논박했다.55)

 

 

피니가 부흥운동을 통하여 평생 관심을 가졌던 두 가지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죄인들의 회심”과 “그리스도인의 성화”에 관한 것이었다. 피니의 사역 초기는 주로 “죄인들의 회심”이, 피니의 사역 후기는 “그리스도인의 성화”가 주로 강조되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피니의 사역에서 이 두 가지가 확연히 구분되지 않는다. 오히려 언제나 그의 설교를 통한 사역 가운데 이 두 가지 주제는 조화를 이루어 왔다.

피니가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삶”(성화)이라고 하는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된 원인에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피니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난 문제였다. 피니는 자신의 사역이 보다 확장되어질수록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연약하여, 특별히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던 그리스도인들이 은혜에 있어서 별로 진보가 나타나지 않은 것에 관하여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고민의 답을 찾기 위해 피니는 성화와 관련된 책들과 특별히 성경을 연구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피니가 성화에 관심을 갖게 된 두 번째 원인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 때문이었다. 17세기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와 하나님 나라의 실제적 건설을 위해 미국 대륙에 건너온 이후, 청교도들의 순수했던 신앙과 거룩한 삶의 모습은 퇴색되어 버렸다. 유럽으로부터 들어온 이성주의 혹은 합리주의 철학적 영향과 이로 인한 이성적 사고는 유니테리언과 같은 이단적 교파를 형성하였으며, 이들은 나아가 보편 구원론을 강조하게 되었다. 그러나 비단 이런 모습이 종교적인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인 부분에서 나타나게 되었다.56)

 

 

 

 마지막 세 번째의 원인으로는 피니 자신이 이전에 사역했던 교회들을 다시 방문하면서 회심을 위해서 설교했던 것 이상의 사역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피니는 그리스도인의 성화에 대한 필요성을 성경연구와 사역의 경험을 통해서 특별히 성경 연구를 통해서 인식하게 되었다. 이로써 피니에게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삶”(성화)에 관한 신학적 주제는 “죄인들의 회심”이라는 주제와 더불어 부흥운동의 중요한 주제로 자리를 잡게 되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성화와 관련되어 피니의 관심은 성화는 이 땅에서 가능한 것인가, 즉 그리스도인은 사라지지 않는 평화를 소유하고, 정죄 받지 않으며 정죄감이나 죄의식을 갖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의 성화가 가능한가 하는 것이었다.

 

 

  박용규 교수는 피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는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을 떠난 칼빈주의자, 칼빈의 신학을 떠난 칼빈주의자, 웨슬리 전통을 따르는 칼빈주의자가 되었다. 피니를 통해 칼빈이 없는 칼빈주의가 세상에 태동하게 된 것이다.57)

 

 

 

  미국의 유명한 교회역사 학자인 시드니 알스트롬은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미국 역사상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라고 피니를 평가하면서, 동시에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를 연결한 “교량적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58)

  피니에 대한 박용규와 시드니 알스트롬의 평가는 서로 정반대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피니의 신학적 입장이 이제까지 미국 장로교회가 가지고 있던 신학으로서의 전통적 칼빈주의와는 다른59) 양상을 보이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분명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피니는 미국의 전통적 칼빈주의에서 강조해 왔던 이중 예정론과 인간의 전적 부패와 같은 내용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비록 피니가 이중 예정론과 인간의 전적 부패와 같은 칼빈주의 내용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였지만, 여전히 피니는 칼빈의 신학의 틀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60) 채은선의 말처럼 “피니는 칼빈주의를 떠나지 않으면서 그 교리를 개정”61)하였다.

  피니가 개정한 그 칼빈주의는 이렇다. 피니는 부흥이 노력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보았다. 다음의 글은 피니의 부흥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늘에서 만나가 내린 것은 기적이고 농부가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곡식을 돌보아서 결실을 거두는 것은 수단들을 사용해서 얻은 것이라고 한다면, 부흥은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는 것이 아니라 농부가 씨를 뿌려서 곡식을 거두는 것과 같다.62)

 

 

 

 

여기서 피니는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방식을 두 가지로 나누는데 하나는 기적이고, 또 하나는 법칙성을 따라 역사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부흥은 후자에 속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부흥이 일어나기를 바라면서도 인간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반론적 주장이었다.

피니의 방법론은 분명 18세기 에드워즈 중심의 부흥운동과는 달랐다. 에드워즈 시대에는 아직 청교도 1세대들로부터 전승된 신앙이 조금은 남아 있었다. 또한 계몽주의와 합리주의 등의 철학 사조가 있었으나 여전히 칼빈주의의 세력이 강했다. 그러므로 설교 중심의 정적인 부흥운동이 가능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피니의 시대에 청교도 1세대로부터 전승된 신앙은 더욱 희박하여졌으며, 독립 전쟁과 합리주의, 그리고 계몽주의를 중심으로 한 이성주의 영향으로 기독교 신앙은 보다 더욱 퇴색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피니가 사용한 방법들은 구체적인 실천을 강조한 삶의 변화를 통한 회심이었다. 그리고 이런 성령의 지배 아래 놓인 방법들은 합리주의, 이신론, 계몽주의, 유니테리언, 보편구원론 등과 같은 영향을 받고 있던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다.63)

 

 

 

  피니의 신학은 사람의 책임을 독려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성경은 부지런한 자에게는 반드시 보상이 있는 반면 수동적으로 미래에 일어날 일을 기다리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니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힘써 전도를 하면 열매를 맺을 것이며, 열심을 다한 기도는 반드시 응답될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의 오류는 교회는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하고 부흥을 경험할 때만 전진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예외적인 것을 일반적인 것처럼 보편화시키는 경향이 있으며, 따라서 부흥이 없는 모든 기간들을 마치 교회가 성령을 훼방하는 기간인 것으로 간주해 버리게 된다. 부흥이 없는 것을 황폐함, 또는 하나님의 심판의 ‘증거’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피니의 말처럼 “기독교의 부흥은 필연적으로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돌려놓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그것이 뿌리를 두고 있는 사상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결과이다. 왜냐하면 더 많이 순종하는 곳에서 부흥이 일어날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부흥이 없는 곳에는 불순종만 팽배할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 심각성을 거론하면서 윌리암 맥로클린(William G. McLoughlin)은 “만약 피니의 신학이 옳다면, 교회의 역사는 기독교의 왕성 또는 기독교의 빈곤 두 가지로만 대별될 수밖에 없다”라고 지적했다.64)

 

 

 

 

 피니는 부흥에 있어서 당시 칼빈주의자들이 하나님의 작용만을 주장하는 데 반해서 하나님과 진리를 전달하는 사람과 죄인 역시 작용자로 움직여야 함을 주장했다. 피니는 이제까지 교회가 부흥의 여부를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으로 생각해 왔기 때문에 부흥이 지속적으로 나타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부흥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전적으로 교회가 할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 바로 그가 믿는 진리였다.65) 그는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결정에 100% 달려 있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찰스 피니는 회심의 결정을 유도하기 위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하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다. 프래그머티즘이 오늘날 교회 속에 깊게 뿌리내리도록 한 사람 중의 일등 공신을 꼽는다면 그 자리는 단연 19세기 미국의 부흥사 찰스 피니이다. 2등과의 격차는 너무 커서 2등이 잘 보이지도 않는다.66)

  찰스 피니의 이와 같은 공헌에 대해 존 맥아더 목사는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찰스 피니는 하나님의 선택 교리를 하나님의 독재적이고 변덕스런 주권적 행위로 치부하고 무시함으로 처음부터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 그는 회심이 오로지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의한 것이라는 교리를 거부했다. 그는 대신 믿음이란 철저히 인간의 결정에 달린 것이고 따라서 구원은 죄인 스스로가 하나님을 향해 나아감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가르쳤다......피니는 자신의 회중으로부터 자기가 원하는 반응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어떠한 방법이라도 기꺼이 다 실행하고자 했다. 찰스 피니가 채택한 사역 방향은 따라서 오늘날 프래그머티즘의 전조가 되었고 현대적 프래그머티즘의 기반이 되었다......그는 실로 오늘날 복음주의 프래그머티즘의 아버지라고 당당히 불릴만한 사람이다.67)

 

 

 찰스 피니가 끼친 영향력에 대해서 로이드 존스 목사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찰스 피니의 글들이 주는 영향이 아직까지도 크게 남아 있었다. 그의 부흥회가 준 숫자적인 성공 때문에 그의 글들은 더욱더 사람들의 큰 관심을 끌었고 특히 그의 강의들을 모은 『종교의 부흥』이라는 책이 나오자마자 인기를 끌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피니가 가진 전반적인 견해와 가르침은 금방 교회의 사상을 지배하는 요소로 자리잡았으며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복음주의 캠페인’의 시초가 된 것이다. 피니야말로 오늘날 복음주의와 관련한 혼란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다......이제 사람들은 교회가 약해져 가는 상황을 보면서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대신에 위원회를 조직하며 복음 캠페인을 기획하고 프로그램을 준비, 광고, 발족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교회 안의 전반적인 상황과 생각이 완전히 변하고 말았다.68)

 

 

 

 

  이러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대각성운동의 주역 피니의 성화 개념은 교회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성화론에서 시작된 성결운동은 사회개혁과 선교적 열기를 확장시켰다. 피니는 여러 종류의 사회개혁에 관여했지만 특히 노예제도 폐지운동과 여권 신장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는 성령이 개인의 죄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악한 제도에 대해서도 슬퍼하시는 것으로 보고 부흥 운동과 사회개혁 운동을 같이 하였다.

 

 

   그는 노예제도는 커다란 악이며 죄이고 이기심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에 대한 위반이며 이를 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그에 의해서 회심한 웰드(Weld)는 서부 와욕시과 오하이오에서 노예제도 폐지운동을 하였다.

  

 

 또한 그는 부흥회 때 여자에게 기도를 시키며 간증을 하게 했는데 그 시기의 미국에서 여자는 남녀가 섞인 공적인 집회에서는 말을 할 수 없었고 심지어 사회 활동에도 참여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더욱이 그가 학장으로 있었던 오버린대학은 세계 최초의 남녀공학으로 여자에게 전 과정을 등록할 수 있게 하였으며 여자 신학생에게도 신학사 학위를 주었다. 그의 영향력은 또한 미국 대학생들 사이에 선교열을 고조시켰다. 1806년 윌리엄(William) 대학의 학생들이 “신앙형제회”(Society of Brethren)를 조직하였으며 1810년 “미국외지선교위원회”(The 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가 조직되었고 “미국성서공회”(The American Bible Society)도 이 때 형성되었다. 그의 성화론은 그에게 영향받은 대각성운동을 구체적인 사회개혁에 관여하게 하는 중요한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69)

 

 

 

 그는 신학적인 훈련이 부족했으나, 원대한 포부를 품은 사람이었다. 그는 개인 심령 속에 영적 각성을 도모하면서, 또한 노예제도와 습관성 악덕들로부터 거룩한 가정을 이루기 위한 필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회문제에 대한 미국의 양심을 일깨우기도 하였다. 그래서 미국 사회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가장 심각한 국가적 위기인 남북 전쟁(Civil War) 전후에도 발휘되었다.70)

 

 

  ‘현대 부흥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피니만큼 오랫동안 복음주의 기독교계 안에서 그렇게 영향력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할 수 있다.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박사는 피니에 대한 전반적인 생각을 다음과 같이 나타냈다. “그의 성령 충만한 사역을 통해 19세기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알게 됨으로써, 이 시기는 미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부흥 시대 중 하나가 되었다.”71) 피니만큼 많은 비판을 받은 인물도 드물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향력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Ⅳ. 대각성운동의 평가 및 영향

 

A. 조나단 에드워즈와 찰스 피니

  

에드워즈와 피니를 비교할 때, 부흥이라는 현상에서는 거의 차이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고 두려워하는 가운데 죄의 각성이 있고, 이는 급격한 회심으로 이어졌다. 주변의 사람들도 이에 충격을 받고 관심이 온통 신앙의 문제에 집중되었고, 기도회나 부흥집회 등 신앙적인 집회에 열심히 참석하였고, 도덕적 개선이 이루어 졌다. 다만 차이가 나는 것은 부흥에 대한 생각과 신학이다.72)

 

그 공통점과 차이는 다음과 같다.

 

 

1) 에드워즈와 피니는 둘 다 사람들의 회심을 추구하였고, 둘 다 급격한 회심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점진적인 회심도 하나님의 하시는 역사로 인정하고, 하나님이 특별한 섭리 가운데 급격한 회심의 역사도 일으키신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회심을 촉구하였지만 반드시 급격한 회심만을 통한 기독교의 전진을 추구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므로 에드워즈는 진정한 부흥을 옹호하기는 하였지만, 그는 부흥주의자가 아니다. 그러나 피니는 이 세상에 많은 부정적인 요인 때문에 점진적 변화로는 기독교인이 되기가 어렵다고 보고, 급격한 회심 즉 부흥을 통해서 기독교가 전진한다고 보았다. 이런 점에서 피니는 부흥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는 평생 부흥을 일으키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73)

 

 

 

2) 부흥이 일어나기 위해서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다는 것은 양자가 동일하다. 피니가 부흥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를 부인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해이다. 이러한 오해가 일어난 다른 요인이 있는데 성령의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는가가 에드워즈와 다르다. 성령의 역사에 있어서 에드워즈는 회심자의 마음에 직접 역사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 때 설교자는 그들이 올바로 각성하도록 인도하고 구원을 얻는 방법을 제시하는 역할, 즉 보조적인 역할을 한다. 이런 점에서 회심에서 성령의 역사가 주도적인 것이다.74) 그러나 피니는 이에 반하여 성령은 설교자를 통해서 역사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즉 성령은 설교자에게 말씀을 능력 있게 선포하게 하고, 죄인을 설득, 굴복시키는 지혜로운 방법을 사용하도록 하는 역사를 통해서 회심하는 것으로 주장하였다. 즉 설교자의 역할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성령은 설교자를 통해서 역사하지, 죄인에게 직접 접촉되지 않는다. 따라서 능력 있고, 지혜로운 설교자를 통해서 죄인은 회심하게 된다. 따라서 에드워즈 시대는 회심을 경험하지 않은 목회자의 목회가 문제로 제기되었다면, 피니 시대에 와서는 부흥을 위해서 성령 충만한 설교자가 요청되었다.

 

 

 

3) 부흥을 위한 사람들의 노력에 있어서 에드워즈나 피니는 둘 다 기도회나 성경공부, 상담을 위한 모임 등을 하였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그러한 모임을 사적인 모음으로 기술하지 교회의 공적인 모임은 아니었다. 에드워즈 시대는 관심 있는 사람들의 자발적 모임을 통해서, 소수의 모임이라도 이런 집회가 부흥에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피니는 부흥을 위해서 교회가 공식적으로 교회에서 모임을 갖는 것을 지지하였고 이러한 모임을 통해서 사람들은 회심을 하였다. 부흥을 위한 모임이 목회의 공식적인 활동이 되었다. 즉 피니 시대가 좀 더 의도적인 부흥을 추구하였고 부흥을 위한 수단들을 강구하였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이 여러 가지 수단을 사용하는 것으로 기록을 하였는데, 피니는 그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최종적으로 사람이다. 부흥을 기대하며 부흥을 위한 집회를 한 것은 피니 시대의 일이다.

 

 

 

4) 에드워즈나 피니는 급격한 회심의 지지, 부흥을 성령의 역사로 보는 것, 기도회 등의 집회를 갖는 것 등에서 일치하나, 그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에드워즈와 피니를 연구하는데 차이점만을 강조하는 것은 잘못이다. 물론 신학에 있어서는 둘은 명백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피니는 부흥에 관한 한 에드워즈의 기초 위에서, 인간의 역할에 대한 적극성을 강조한 보완과, 부흥을 특별한 하나님만의 사역이 아니고, 인간들의 노력에 의해 계속되어야 할 교회 사역의 하나로 본 변형을 동시에 가져왔다. 부흥신학의 진정한 기초자는 에드워즈이며, 피니는 이에 대한 보완적 변형을 가져온 사람이다.

 

 

 

  이 차이는 그들이 영향 받은 신학적 전통과 그 당시의 상황에서 온 것이다. 이 점에서 에드워즈는 칼빈주의적 신학적 전통을 고수하려는 신학적 입장에 서 있는데 반해, 피니는 과거의 신학적 전통보다는 그 시대적 사고에 적응시키려는 시도를 하였다. 시대적 상황이 에드워즈 시대는 전통적 사고에서 이탈하려는 초기였고, 피니의 시대는 이미 사람들이 인간의지의 자발적 능력과 인간의 운명에 대한 책임성을 받아들인 시점이기 때문에 피니는 이에 맞도록 변형된 신학을 받아들였다.

 

 

 

B. 대각성운동의 영향

 

 1. 국가의식의 형성

 

 

대각성운동이 있기 전의 미국은 유럽 제국의 식민지들로서 각기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대각성운동을 통하여 미국은 각기 다른 지배를 받아 식민지 사이의 장벽이 깨어지게 되었다. 대각성운동을 통한 종교적 운동이 강렬하였으므로 식민지의 담을 넘어 서로 일반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고, 대중 집회를 통하여 식민지 사이에 서로 결속하게 되었다. 순회 설교가들의 지역을 초월한 부흥운동으로 식민지 사이를 메워줌으로 미국인들 사이에 국가의식(national conciousness)이 자라나서 미국이라는 독립된 나라를 만들게 하였다. 프렐링휴이젠 같은 부흥사는 미국의 독립을 주장했고 많은 부흥사들이 이에 합세했다. 그 뿐만 아니라 미국이 신앙적으로 일체감을 갖게 됨으로써 국가적 일체의식의 형성에 이바지하여 독립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75) 대각성 운동은 18세기 미국 종교사의 가장 위대한 사건이며 미국독립전쟁의 열쇠이며 독립전쟁 전 미국 사회에 있어서 주요 분수령이며 인도주의 정신을 불러일으켰고 평등권 사상을 격려했으며 민주주의적 정서를 자극했다는 것이다.76) 대각성운동은 단순한 종교적 부흥이 아니었다.

 

 

2. 노예제도 폐지운동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자들은 이것이 기독교적 조치이며 적극적인 선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노예제도를 통해서 아프리카의 이교도들이 기독교문화들을 얻기 때문인가? 그러나 대각성운동은 이런 미국의 흐름에 제동을 걸었다. 대각성운동의 부흥의 결과로 나타난 노예제도에 반대의 영향은 1860년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을 대통령으로 선출했고 종국에는 남북 전쟁을 발발시키게 했다. 이 남북전쟁은 의를 확보하려는 복음자들이 최고로 비싼 대가를 치른 시도였다.77) 대각성운동의 주역 중에서 노예제도 반대를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한 인물은 바로 피니이다. 1830년대에 노예제도 폐지운동을 지지한다는 것은 인기를 얻는 일이 아니라 위험한 일이었다. 이같은 행위는 부흥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나 일반 대중에게 배척받을 수 있는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피니는 노예제도폐지에 대한 헌신은 회심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이라고 보았다. 미국교회사가 스위트는 “피니의 부흥운동이 가장 성공적이었던 이 지역들에서 노예제도 폐지운동에 대해 가장 큰 영향을 그로부터 받았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78)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노예제도 폐지운동은 부흥운동을 통한 죄책과 회심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3. 여권신장운동

 

 

여권신장운동은 19세기 미국에서 일어났다. 대각성운동의 주도자인 피니는 여권신장운동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그의 부흥운동이 반대를 받는 이유의 하나는 부흥집회 중에 여자에게 기도를 허용하며 간증을 하게 했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 미국에서는 사회활동에 여자는 참여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남녀가 섞인 공적인 집회에서는 말을 할 수 없었다.

 피니는 1825년 유티카(Utica)부흥회 때 매일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기도회를 인도하면서 “성령에 의하여 강하게 사로잡힌 뛰어난 여자들에게 기도회를 인도하게 하였다.” 그는 기도회를 인도하는 방법을 말하면서 “만일 기도해야 될 사람들의 이름을 지명해야 한다면 먼저 가장 영적인 사람을 부르는 것이 가장 좋다”79)고 말하면서 이 원칙에 따라 남자들보다 여자 중에서 더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여자일지라도 기도하도록 했다. 피니가 여권신장에 대한 관심은 물론이고 여권신장운동에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대학의 설립

 

 

  대각성운동은 대학의 설립에도 큰 영향력을 끼쳤다. 대각성운동으로 야기된 논란 및 새로운 교파들은 저마다 앞 다투어 새로운 대학과 신학교를 세웠다. 이 같은 학교들의 설립 목표는 목사 양성을 위해서였다. 이러한 학교들의 두드러진 예는 다음과 같다. 통나무대학 출신자들은 그들의 교구에 동일한 통나무대학들을 세웠다.

    그리고 장로교회에서는 1746년 뉴욕시대회가 뉴저지(New Jersy, Princeton대학의 전신)대학을 세웠다. 1776년 버지니아의 하노버(Hanover)교회는 햄프턴 시드니(Hampden Sydney)대학을 세웠다. 침례교 로드 아일랜드(Rhode Island, Brown대학의 전신)대학을 1764년에 설립하였다. 네델란드 개혁교회에서는 1766년에 콜럼비아(Columbia)대학을 세웠다. 그리고 1751년에 펜실배니아(Pennsylvania)대학의 모체인 필라델피아 대학 및 자선학교가 신파(New Divinity)에 의해 세워졌다.

 

  1784년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뉴저지에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의 뉴브룬스윅(New Brunswick)신학교를 세웠다. 1794년에는 연합장로교가 제니아신학교를, 이후 이 학교는 피츠버그신학교가 되었다. 장로교는 1812년에 뉴저지에 세운 뉴저지대학이 발전하자 프린스턴(Princeton)신학교로 개명했다. 1819년에는 유니테리언들의 영향으로 하버드(Harvard)대학에 신학부가 생겼다. 1822년에는 회중교회가 예일(Yale)대학 내에 신학부를 두었다.

    

이처럼 대각성운동의 영향으로 각 교파 별로 대학을 설립하여 교파에 맞는 목사를 양성하게 되었다. 이상의 목사 양성의 교육기관은 급속히 증가하여 1860년경에는 그 수가 50여개 교에 달했다.80) 이렇게 신학교나 대학 내에 신학부가 생긴 것은 부흥설교가들에 의해 목사가 선망의 대상이 되자 목사 지원생이 많아져서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세워졌기 때문이다. 대각성운동이 총체적인 개혁임을 보여주는 대목은 이러한 교육적인 발전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5. 신파의 출현

 

 

  대각성운동을 계기로 뉴잉글랜드의 신학사상은 세 흐름으로 나뉘었다. 첫째는 중용론자이자 뉴잉글랜드의 전통적인 교리와 정치제도를 따르는 구칼빈주의자(Old Calvinists)이고, 둘째는 이성의 권위를 중요시하며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를 거부하는 보수적 알미니안주의자(Arminianist)이며, 셋째는 에드워즈를 중심으로 하는 신파(New Divinity)이다. 구칼빈주의자는 예일대학을 중심으로 하고, 에드워즈파보다는 복음주의자들과 가까운 편이었다.81)

  알미니안주의자들은 하버드대학 출신들로 보스턴 지역에서 득세했으며, 촌시(Charles Chauncy), 메이휴(Jonathan Mayhew)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부흥운동을 반대했고 계몽주의와 자연신학의 사상에 깊이 빠져서 원죄설을 부인하며 칼빈주의적 예정론을 배격하였다.

   

구칼빈주의자가 신앙을 중요시하고,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이성만을 강조하였지만 조나단 에드워즈를 중심으로 한 신파는 신앙과 이성의 권위를 동시에 인정하고 식민지 전쟁, 혁명, 정치적 동란, 종교적 불화를 증오하고 중생한 신자를 중심으로 한 엄격한 교회를 세우려고 했다. 이들은 대부분 예일대학 출신들이다. 신파의 출현으로 미국의 신학이 크게 발전하는 계기를 가져왔고, 근본주의(Fundamentalism)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6. 선교열의 고조

 

 

 영국의 복음주의 운동이나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과 마찬가지로 대각성운동은 선교열을 고조시킨 점에서 크게 평가될 수 있다. 영국인으로 순회설교를 했던 휫필드는 선교사로써 미국을 선교했으며,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는 인디언 선교를 하다가 폐렴으로 죽었다. 그리고 그의 장인인 조나단 에드워즈에 의해 편집, 출간된 『일기』(Journals)는 선교학에 있어서는 고전이 되었다. 이 일기는 그가 죽은 후 영국과 미국의 복음주의 계통에서 널리 보급되었다. 그는 1740년대 미국을 휩쓴 대각성운동의 주도자 에드워즈에게 깊은 감동을 끼쳤고 웨슬리의 마음에 큰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캐리(William Carey)와 마틴(Henry Martyn), 엘리어트(Jim Eliot) 선교사의 마음을 움직여서 복음 사역에 종사하도록 만들었다.

 

  조나단 에드워즈 역시 1750년부터 1757년까지 스톡브리지(Stockbridge)에 가서 인디언을 위해 선교를 하였다. 그리고 그는 선교를 위한 세계적 연합기도회를 열 것을 제안했다.

  대각성운동에 있어 이러한 선교열의 고조의 특징은 국가 주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 단체들에 의한 것이다.

 

 

 

 

7. 에큐메니칼 운동의 발전

 

 

  19세기의 복음주의적 대각성운동이 엄청난 세계선교를 일으켰고 이러한 영향력은 1846년 런던에서 시작된 복음주의 연맹과 같은 여러 교회의 지도자들(개인자격)의 연합까지 가져왔다고 평가한다. 또한 수많은 초국가적, 초교파적 기독교기구들(특히, 자의적 단체들)의 일치와 협조를 고양시켰고 마침내는 교회(교파)의 일치 추구에 적극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본다.

 

 19세기 선교활동의 결과 선교현장에서 교파간의 사귐과 협조가 빈번히 일어났고 이로 인해 선교 주체국인 유럽이나 미국 안에서의 교파간의 갈등과 경쟁은 인도나 중국의 선교현장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따라서 선교사들은 물론 이 선교사들에 의하여 선교를 받은 사람들도 교파간의 장벽을 뛰어넘어서 연합과 사귐의 전망을 열어 놓았다. 어떤 선교단체들은 여러 교단 출신의 회원들이 한 교회를 구성하기도 했으며, 여러 교파들이 선교현장에 가서 자신들의 전통과 행습보다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구원시키는 복음의 선교에 중심을 두고 사명을 다했다. 그리고 이러한 에큐메니칼 운동의 발전은 1900년에 미국장로교총회(the General Assembly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U.S.A)의 결의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해외선교의 목적은 피선교지에 교파를 영속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방향을 따라 성경적 원칙과 방법에 근거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다.82)

 

 

대각성운동의 영향력은 공식적인 교파에서든지 자의적 기독교 공동체에서든지 간에 19세기 교회 일치 추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에큐메니칼 운동은 19세기와 20세기의 선교적 경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8. 교회의 분열

 

 

 

   대각성운동은 부정적인 측면도 발생시켰다. 대각성운동은 교회의 분열을 초래하였다. 뉴잉글랜드에 대각성운동이 크게 번지자 중부 식민지의 장로교 목사들은 부흥운동을 지지하는 신파(New Side)와 부흥운동을 반대하는 구파(Old Side)로 나뉘게 되었다. 구파는 부흥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형식적이고 죽은 정통신학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공격하자 이에 격분하여 부흥운동을 반대하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신파는 신앙적 체험을 중시하며 선택받은 성도는 행위를 봐서 알 수 있다는 체험적 신앙운동을 주장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1740년에 행한 길버트 테넌트 목사(Gilbert Tennent)의 “회심하지 못한 목사의 위험”(The Danger of an Nuconverted Ministry)란 설교에서 죽은 형식주의를 공격하며 “회개하지 않는 목사는 소경”과 같다83)고 주장하자 신파와 구파의 싸움은 더욱 격렬하게 되었다. 결국 1741년 필라델피아 대회를 열어서 수적으로 열세였던 신파 목사들을 제명하여서 교회분열의 결과를 초래하게 했다. 내용인즉 구파에서는 부흥운동의 주도자였던 통나무 대학 출신자들을 문제삼았다. 이들은 목사의 자격이 없고 교구목사의 승낙없이 교구들을 순회하며 설교하여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혔다는 죄목을 제명시켰다. 그러자 신파나는 1745년 다른 노회의 목사들의 지원을 얻어 뉴욕대회(New York Synod)대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교회의 분열로 인한 상처를 씻기 위해 신파의 목사들은 재결합 운동을 전개하여 1758년에 다시 연합을 이루었다. 재결합대회는 지도력 빈곤과 교회의 지지를 잃은 구파의 승복으로 이루어졌다. 이 때 결정된 사항은 목사후보생의 학문과 신앙적 체험은 노회에 일임하고, 대회는 시험이나 목사의 자격에 대해서는 관여치 못하게 하며, 목사들은 초대 받지 않고서는 다른 목사들의 교구에 침입해서는 안 되며, 그리고 뉴브룬스윅(New Brunswick)노회를 제명한 1741년의 의결은 불법이라고 선언하게 되었다.84) 이처럼 교회의 분열이 대각성운동에 의해 초래되었다는 사실은 참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Ⅴ. 결론        

 

    A. 발견

 

 

  18, 19세기에 일어난 조나단 에드워즈를 중심으로 한 1차 대각성운동, 그리고 찰스 피니를 중심으로 한 2차 대각성운동은은 그 근원이 청교도주의와 경건주의 그리고 영국이 복음주의 운동과 연속선상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세 가지는 대각성운동의 원동력의 기초이기도 했다.

 

첫째, 16세기 말과 17세기에 일어난 청교도주의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구습으로부터 영국 국교회를 정화하려는 의도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국가적 반감을 일으켰다. 그래서 그들은 대서양을 건너가 청교도적 생활방식을 미국 식민지에 이식하였다. 이 청교도들의 신앙적 입장은 이후에 대각성운동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미국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형성하였다. 따라서 청교도주의는 대각성운동의 뿌리이면서 동시에 전체적인 성격을 규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둘째, 경건주의는 정통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났다. 경건주의는 보다 더 선한 사람이 되며, 더 순결한 거룩한 생활을 함으로써 교회를 갱생시키고자 하는 운동이었다. 이러한 경건주의 사상은 유럽과 미국에 있는 루터교와 웨슬리의 감리교회,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형제, 독일 침례파 형제단 등의 창설에 큰 영향을 끼쳤다.

 

 

 셋째, 영국의 복음주의 운동은 계몽주의, 자연주의, 이신론, 반(反)정통주의와 회의주의, 산업혁명 등이 복음의 생명력을 잃게 한 것에 대한 신앙적 부흥운동이었다. 요한 웨슬리, 찰스 웨슬리, 조지 휫필드의 신앙적이며 열정적인 설교는 영국을 변화시켰다. 특히 웨슬리의 사상은 청교도주의와 경건주의나 신비주의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지만 청교도주의처럼 엄격하지 않았고 경건주의나 신비주의처럼 초월적이지도 않았다. 웨슬리의 사상은 이신칭의, 중생, 기독교적 완전(성화)이다.

 

  이상에서 다룬 3가지 원동력은 미국이 신앙적 침체기에 빠질 때마다 대각성운동을 일으킨 근원이 되었다.

 

 

 

  제 1차 대각성운동이 일어난 1720년경은 미국으로 이민 온 청교도 3세대의 시기였다. 서부개척에 집중된 사회적 분위기, 미국대륙의 지배권을 위한 영불전쟁, 그로 인한 도덕적 타락, 영국정부의 중앙집권화, 미국정치의 불안정 등의 상황 하에서 신앙적 침체상황에 응전하기 위해 제 1차 대각성운동이 일어났다. 프렐링휴이젠에 의해서 부흥운동이 시작되었고, 테넌트일가에 의해서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순회설교자들에 의해서 미국전역으로 퍼져나갔으며, 조나단 에드워즈와 함께 휫필드에 의해서 정점에 도달했다. 특히 에드워즈는 뛰어난 지성과 풍부한 정서의 사람으로 칼빈주의적 하나님 주권사상과 예정론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제 2차 대각성운동은 18세기 말에 시작되어 19세기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18세기에는 역사적으로 두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 계몽주의 시대로서 미국독립전쟁, 프랑스혁명, 과학혁명, 철학혁명, 기독교의 자연종교화, 정치사회적 민주화시대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독일의 경건주의의 영향으로 교회의 내실화와 적극적인 선교활동, 영국의 웨슬리의 복음주의적 부흥운동,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즈와 청교도들의 제 1차 대각성운동이 있었던 시대였다는 것이다. 제 2차 대각성운동은 18세기 경건주의와 복음주의적 흐름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이 시기의 주도자는 찰스 피니이다. 특히 피니의 성화론에서 시작된 성결운동은 대각성운동을 구체적인 사회개혁에 관여하게 하는 중요한 이론적 근거가 되었고 선교적 열기를 확장시켰다. 그는 사회개혁 중에서 노예제도 폐지운동과 여권신장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상에서 다룬 바와 같이 대각성운동은 신앙적 침체에 따른 기독교의 응답이었다. 그러나 1차, 2차 대각성운동은 신앙부흥운동의 차원에만 영향력을 끼친 것이 아니라 사회개혁에도 구체적인 변화를 일으켰다는 것은 굉장히 고무적인 일이다. 이러한 영향을 정리하자면,

 

 

  첫째, 대각성운동은 미국의 식민지 의식의 장벽이 깨어지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둘째, 미국의 노예제도 폐지운동에 큰 영향력를 미쳤다. 셋째, 여권신장운동이 대각성운동의 결과로 19세기 미국에서 일어났다. 넷째, 대학의 설립, 즉 교육적인 진보가 일어났다. 다섯째, 신파가 출현하여 신학의 발전과 적극적인 부흥운동을 부추기는 기회를 가져왔고 근본주의가 여기서 태동하게 된다. 여섯째, 선교열을 고조시킨 점에서 크게 평가될 수 있다. 일곱째, 선교열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여덟째, 부정적인 측면은 교회의 분열을 초래하였다는 것이다.

 

 

 

   B. 제언

 

  

1845년 아키발드 알렉산더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 중의 많은 경건한 사람들은 그들이 발로 밟고 살았던 이 땅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발자국으로 말미암아 거룩해진 사실을 목격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경건한 신앙의 선배들과 성도들이 믿음으로 올린 기도가 반드시 응답되기 위해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85)

 

 

 

  미국을 미국 되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저 위대한 대각성운동 때문이다. 대각성운동 세 차례 모두 다 급격한 신앙적 퇴조를 보이던 때에 일어났다. 대각성운동은 신앙적 부흥운동으로 시작했지만 다민족, 다문화 공동체인 미국, 이민으로 구성된 나라이기에 구심점을 찾지 못했던 혼란기에 미국사회를 응집시키는 역할을 하여 마침내 독립에 이바지 했다. 그리고 독립 이후에도 대각성운동은 사회적 부조리를 바로 잡는 등 사회개혁을 주도했다. 따라서 대각성운동은 신앙부흥운동을 넘어 사회개혁운동인 것이다.

 

 

  그러나 대각성운동이 갑작스러운 결과는 아니었다. 대각성운동은 처음부터 원동력이 되는 뿌리는 바로 청교도주의, 경건주의 그리고 영국의 복음주의 운동이다. 청교도주의는 대각성운동이 일어날 때마다 언제나 지향해야 할 목표이다. 1차 대각성운동의 중심에 조나단 에드워즈가 부흥 신학의 기초를 놓았고, 2차 대각성운동의 중심에는 찰스 피니가 에드워즈의 신학을 다소 변형된 형태로 주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흥은 미국이란 “그 시대의, 그 나라(there)”에만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지금, 그리고 여기(here and now)”에도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인가?

    

 

대각성운동은 일회성이 아니다. 대각성운동은 거듭될 때마다 특정교단이나 특정나라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대각성운동은 모든 사람들의 신앙부흥운동이다.

  총체적인 변화의 매개체가 바로 대각성운동이었다.

    

 

한국교회는 지금 여러 가지로 위기에 봉착해 있다.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인 위기 가운데서 영적 위기에까지 몰려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때에 18, 19세기의 미국 대각성운동으로부터 소중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걸출한 영적 거인들이 주도했던 그 시절처럼, 이 땅에서도 조나단 에드워즈와 찰스 피니를 방불케하는 영적 거인들을 일으키시고 뜨거운 대각성운동의 부흥이 이 나라와 이 민족과 이 사회 전체를 뒤덮을 것을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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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키드 하드먼,『부흥의 계절: 미국의 전도와 부흥운동역사』, 박응규 역(서울: CLC, 2006), 39.

2) Ibid., 17.

3) 요일 1:1

4) 역사는 미래를 내다 볼 수 있는 안목을 제공해주는 최고의 수단이다. 과거의 역사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일들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제공해 준다. 이 말은 부흥은 언제나 동일한 형태로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부흥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나 과거의 역사에서 몇 가지 주요한 현상들이 항상 나타났다는 것을 볼 때, 그러한 현상이 미래에도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억지가 아니다. 이안 머레이, 『성경적 부흥관 바로 세우기』,서창원 역(서울: 부흥과 개혁사, 2001), 241.

5) '역사는 우리의 모든 지식을 편성하는 틀이다'.

디트리히 슈바니츠,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교양』, 인성기 外 역, (서울: 들녘, 2005), 29.

6) Samuel Davis, Sermons on Important Subjects (London, 1824), vol. 2, 116; 이안 머리, 『부흥과 부흥주의』, 신호섭 역(서울: 부흥과 개혁사, 2005), 56에서 재인용.

7) Jonathan Edwards,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London, 1834; Edinburgh: Banner of Truth, 1974), vol. 1, 660; 이안 머리, 『부흥과 부흥주의』, 57에서 재인용.

8) 브리태니커사전 http://kordic.britannica.co.kr/sear_frame.asp?keyword=부흥&pumsa=&keykind=searkey

   ‘흘러넘침’, ‘세례’ 그리고 ‘영이 부어짐’이란 단어들은 모두 ‘신앙의 부흥’이란 단어와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1740년대에 이르러서야 표준적 용법으로 사용된 ‘신앙의 부흥’이란 용어는 언제나 이런 의미로 사용되었고...심지어 이 성령의 부어 주심은 일반적으로 교회가 영적으로 무감각한 상태에 있을 때, 그리고 성경적 신앙에 대한 무관심이 사회일반에 만연해 있을 때 종종 발생하는 것이었다. 이안 머리, 『부흥과 부흥주의』, 58.

9) http://blog.naver.com/sooklive/80008218263

10) “부흥”이라고 번역된 단어의 영어 리바이벌(revival)은 라틴어 re(다시)+vivere(산다)에서 온 말로서 ‘다시 산다’는 뜻이다. 이만신, “부흥운동의 역사적 고찰과 한국 교회 성장에 끼친 영향”, (미간행 박사학위논문,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1983), 6.

11) 키드 하드먼,『부흥의 계절: 미국의 전도와 부흥운동역사』, 17.

12) 이안 머리, 『부흥과 부흥주의』, 58.

13) 카일러(Theodore Cuyler)는 “형제여, 충고하건대 ‘부흥’에 대해 너무 많이 말하지 마시오. 당신이, 바로 그 부흥이라는 말의 의미를 퇴색시켜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오.”라고 말했다. 하버드 대학교 신학부 학장인 윌리엄 스페리(William Sperry)교수는 50여 년 전에 쏘아 부친 말은 “이제 부흥에 대하여 싫증난다”였다. 카일러 박사가 우려했던 대로 이 단어는 식상해져 버린 셈이다. 이안 머레이는 1장에서 부흥에 대한 세 가지 견해를 말하면서 먼저 ‘용어남용에 대한 경고’(A Caution over Terminology)를 적고 있다. 이안 머레이, 『성경적 부흥관 바로 세우기』, 20-22.

14) 마틴 로이드 존스, 『청교도 신앙, 그 기원과 계승자들』, 서문강 역(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2), 18.

15) 댄 해이스는 부흥의 기초적인 선행 요건들을 5가지로 압축하고 있다. 첫째, 하나님의 백성들이 반드시 영적 각성을 간절히 갈망해야 한다. 둘째,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겸손해야만 한다. 셋째, 하나님의 백성들은 반드시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해야만 한다. 넷째, 하나님의 백성들은 반드시 계속 간절하게 기도해야만 한다. 다섯째, 하나님의 백성들은 반드시 이러한 선결 요건들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을 초청해야만 한다. 댄 해이스,『시대를 깨운 영적 대각성운동의 불씨들』, 배성현 역(서울: 이레닷컴, 2008), 61-63.

16) 마틴 로이드 존스, 『청교도 신앙, 그 기원과 계승자들』, 19.

17) 김국중, “부흥에 대한 성경적. 역사적. 신학적 고찰”(미간행 신학석사논문, 합동신학교, 1995), 11.

18) 김남준, 『하나님의 백성들은 불꽃처럼 살아야 한다』(서울: 두란노, 1995), 28-29.

19) 김남준, 『거룩한 부흥』(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3), 43.

20) 김남준, 『하나님의 백성들은 불꽃처럼 살아야 한다』, 29-30.

21) 김남준, 『거룩한 부흥』, 48-50.

22) 키드 하드먼, 『부흥의 계절: 미국의 전도와 부흥운동역사』, 29.

23) 김영재, 『기독교교회사』(서울: 이레서원, 2004), 638-639.

24) 프렐링하이젠의 통역자였던 윌리엄 데마레스트(William Demarest)는 “교회 전체에 널리 퍼져있는 극도로 느슨한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직분자들 일부를 무시하는 분위기로 연결되었고, 경마, 도박, 유흥을 비롯한 다른 여러 종류의 무질서를 일반화시켰다. 교회는 단지 휴식을 위해 출석하는 정도의 장소였고, 신앙은 단지 의무적인 순서와 형식을 따르는 것 분이었다”라고 말했다. 키드 하드먼, 『부흥의 계절: 미국의 전도와 부흥운동역사』, 74.

25) 키드 하드먼, 『부흥의 계절: 미국의 전도와 부흥운동역사』, 84.

26)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의 책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대한 신실한 증언』(Faithful Narrative of the Surprising Work of God)안에 포함되어야 할 최우선의 사람으로 프렐링하이젠을 주목하였다.

    ‘그러나 이같이 물 붇듯 쏟아지는 하나님의 축복은 벌써 매우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내가 뉴욕에 있을 때 들은 바로는 뉴저지의 어떤 지역에서는 그 축복이 어마어마했다한다...특히 활기차게 그 일을 하고 있는 사역자인 윌리엄 테넌트(William Tennant)목사는 크로스 씨(Mr. Cross)의 사역 하에 마운틴즈(Mountains)라 불리는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각성이 일어났다고 말해주었다. 또 그의 형제 길버트 테넌트 목사 하에 또 다른 곳에서 매우 유력한 종교 부흥이 일어나고 있고, 또 다른 지역에서도, 내가 기억하기에는 그의 이름이 프릴링후사(Freelinghousa)라는 화란인사역자가 있는데, 이 경건한 젊은 신사의 사역으로 부흥이 있었다고 나에게 이야기해주었다.’ C. C. Goen, ed., The Great Awakening, in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New Haven, Conn., 1972), 4.155-56; 키드 하드먼, 『부흥의 계절: 미국의 전도와 부흥운동역사』, 79에서 재인용.

27) B. K. Kuiper, 『역사의 교회』, 김해연 역(서울: 성광문화사, 1992), 421.

28) Belden, George Whitefield, 155; 키드 하드먼, 『부흥의 계절: 미국의 전도와 부흥운동역사』, 131에서 재인용. 윗필드는 아메리카에 감리교의 토대를 놓았다. 웨슬리 형제도 한 때 그곳에 있었으나 조지아 식민지의 황무지에 잠시 머물렀을 뿐이며, 찰스는 일곱 달, 요한은 스물두 달을 그곳에 있었다. 윗필드는 아메리카를 일곱 번 방문하여 그 때마다 장기간 체류하면서 열세 주의 식민지 전역을 순회하면서 설교했다. 그리고 대각성(Great Awakening)의 역사가 일어났던 1740년의 이 방문이 그 나라의 역사에 가장 중요한 영적 축복이 임했던 때였다. 아놀드 델리모어,『조지 윗필드』, 오현미(서울: 두란노서원, 1997), 98.

29) 합동신학교 오덕교 교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bigjoy/15866959

30) 에드워즈는 회심이 없이도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이라면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하는 그의 조부의 입장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31) 토니 레인, 『기독교사상사』, 김응국 역(서울: 나침반사, 1992), 301-302.

32) 양낙흥, 『죠나단 에드워즈: 생애와 사상』(서울: 부흥과 개혁사, 2003), 344.

33) Ibid., 347. 조나단 에드워즈는 본 설교의 주제(교리)를 한 문장으로 제시한다.

“사악한 인간들을 당장이라도 지옥에 던져 넣지 못하게 막는 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 외에 아무 것도 없다.” Ibid., 345

34) Ibid., 346.

35) Ibid., 346.

36) Ibid., 348.

37) Ibid., 352-353.

38) 엄격한 칼빈주의에 도전했던 알미니안 주의는 사람들에게 쉽게 유니테리언 사상으로 넘어갈 수 있는 길을 터 놓은 셈이었다. 알미니안주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낙관적 견해를 취했고 완성의 가능성을 믿었기 때문에, 이러한 사상이 유니테리언주의로 가는 대로를 닦은 셈이었다. 알미니안 파의 만인구원론과 유니테리언주의는 유사성이 아주 많다. 유니테리언은 인간이 매우 선하기 때문에 저주를 받을 수 없다고 하는 반면에, 알미니안 파는 하나님께서 매우 선하시기 때문에 인간을 벌하실 수 없다고 한다. 김영재, 『기독교교회사』, 626. ‘18세기의 자연신론이 미국 교회에 미친 영향’에서는 유니테리언주의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Ibid., 636-638을 참고.

39) 토니 레인, 『기독교사상사』, 303-304.

40) Jonathan Edwards,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vol. 1, 348.

41) 이형기, 『세계교회사』Ⅱ,(서울: 한국 장로교 출판사, 1994), 355.

42) Ibid., 468.

43) 이종진, "미국 부흥운동연구: 조나단 에드워즈와 찰스 피니 비교", 서울장신논단, Vol. 14, 1998, 132.

44) 19세기 초기에 기독교회들이 다시 생명력을 얻고 부흥한 이런 현상은 우리가 다루고 있는 이 주제의 시기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차지하고 있다. 제2차 영적 대각성 운동은 전 기독교회의 역사의 전환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리드와 마테슨은 1835년에 ‘우리에게 알려진 가장 놀랍고 광범위한 부흥 가운데 하나가 이 백성을 관통하며 지나갔다’고 기록했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성경 레퍼토리와 신학 평론」지도 이런 영적 대각성운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으며, 하나님은 미국을 ‘온 세상이 전에 한 번도 눈으로 보거나 마음으로 경험한 적이 없는 가장 영광스러운 부흥의 현장’으로 만드셨다고 기록했다. 이안 머리, 『부흥과 부흥주의』, 192.

45) 떠오르는 영국의 국회의원이었던 윌리엄 윌버포스가 1794년 여름에 런던 주재 미국대사였던 존 제이를 만난 후, 당시 신앙의 분위기에 대해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이제 미국에 경건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낀다’. Arthur B. Strickland, The Great American Revival(cincinnati: Standard Press, 1934), 36; 이안 머리, 『부흥과 부흥주의』, 186에서 재인용.

    당시 미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도 역시 똑같은 두려움을 표현하고 있었다. 미드 주교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내가 버지니아에서 만나 본 모든 유식한 젊은이들은 공공연한 불신자들 아니면, 거의가 종교적 회의론자들이었다.’ 윌리엄 윌버포스와 미드 주교와 동시대 인물 가운데 어떤 한 사람은 온건한 코네티컷 사람들에 대해 역시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불경한 사상과 견해들이 홍수처럼 밀려왔다. 페인의 이성의 시대와 볼테르와 다른 이들의 이신론적 저작들이 발빠르게 보급되었고, 젊은이들은 갑자기 그들의 조상들보다 더욱 지혜롭고 똑똑해져 버렸다.’ E.E. Beardsley, The History of Episcopal Church in Connecticut, vol. 1, 432; Ibid, 186에서 재인용.

46) J. Edwin Orr, The Role of Prayer in Spiritual Awakening (LosAngeles: Oxford Association for Research in Revival), 1; 이주형, “18, 19세기 미국 대각성운동 연구: 역사적 배경과 영향”, 52에서 재인용

47) Heman Humphrey, Revival Sketches and Manual(New York, 1859), 94; 이안 머리, 『부흥과 부흥주의』, 189에서 재인용.

48) Kenneth Scott Latourette, 『기독교사』下, 윤두혁 역(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3), 61.

49) 박용규, 『근대교회사』(서울: 총신대학출판부, 1995), 318.

50) Ibid., 240.

51) Edwin Orr, The Light of the Nation: Evangelical Renewal and Advance in the Nineteenth Century(Paternoster Press, 1965), 54, 김명혁 역,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역사적 배경 및 그 발전과정”, 『신학지남』 제 182호(1978. 10), 241-42에서 재인용.

52) William W. Sweet, The Story of Religion in America(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75), 229.

53) 피니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믿도록 하기 위한 분명한 목적의 일환으로 구체적인 방법을 사용하였다. 첫째, 상담전도집회(anxious meeting)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피니에 의해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피니는 이 방법이 뉴잉글랜드에서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말한다. 둘째는, 부흥회(extended meeting)이다. 피니는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에 존재한 이래 항상 실행되었던 방법이라고 소개한다. 세 번째로 열망자의 좌석(the anxious seat)이다. 이 자리는 어떤 집회에서 영적으로 갈급한 사람이 와서 특별히 말씀을 듣고 개인적인 조언을 들으며 기도를 받을 수 있도록 별도로 준비된 자리이다. 피니는 이 자리를 부흥운동 가운데 간혹 사용하였으나, 로체스터 부흥운동에서 이 방법을 사용한 이후 주된 방법으로 활용하였다. 피니는 좌석을 만드는 목적에 관하여 “이처럼 열망자의 좌석은 망상 또는 착각에 빠져 있는 인간의 마음을 드러내며,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자신을 그리스도를 위해서 어떤 일이든 기꺼이 할 뜻이 있는 사람으로 간주할 사람의 뻔뻔스러움을 나타내 보임으로써 가짜 회개를 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기능을 한다.”고 말한다. 김대진, “찰스 피니의 부흥운동 연구: 성화론을 중심으로”(미간행 신학박사학위논문, 평택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2006), 109-113.

54) 존 우드브리지, 『인물로 본 기독교회사』, 박용구 역(서울: 횃불, 1993), 226.

55) Charles Finney, Revival of Religion(Old Tappen: Fleming H. Revel, n. d., 1967), 371; 이주형, “18, 19세기 미국 대각성운동 연구: 역사적 배경과 영향”, 66에서 재인용.

56) Justo L. Gonzales, 『근대교회사』, 서영일 역(서울: 은성출판사, 1994), 13.

57) 박용규, 『근대교회사』, 335.

58) 박용규, “19세기와 찰스 피니의 부흥운동”, 「그말씀」, 제 11월호 (서울: 두란노, 1996), 124.

59) 찰스 피니는 신기하게도 장로교 목사로 안수 받고 장로교 목사로 임직받은 이후부터 기회 있을 때마다 장로교의 전통적 교훈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안 머리, 『부흥과 부흥주의』, 392. 그는 ‘자기 사역의 대부분을 이 구파의 견해를 수정하는 데 쏟았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Ibid., 393.

60) 피니의 신학을 이해함에 있어 일부의 내용에 있어 칼빈주의와 일치되지 않는다고 해서 피니 자신이 칼빈의 신학을 떠났다거나, 칼빈주의를 부정했다고 볼 수 없다. 김대진, “찰스 피니의 부흥운동 연구: 성화론을 중심으로”, 100.

61) 채은선, “미국의 위대한 부흥운동사”, 신학지남, 가을 217호(서울: 신학지남사, 1988), 73; 김대진, “찰스 피니의 부흥운동 연구: 성화론을 중심으로”, 106에서 재인용.

62) Charles Finney, Revival of Religion, 6; 이주형, “18, 19세기 미국 대각성운동 연구: 역사적 배경과 영향”, 60에서 재인용.

63) 김대진, “찰스 피니의 부흥운동 연구: 성화론을 중심으로”, 114-115.

64) W. G. McLoughlin, Modern Revivalism: Charles Grandison Finney to Billy Graham, 149; 이안 머레이, 『성경적 부흥관 바로 세우기』, 49.

65) Ibid., 72.

66) 옥성호, 『마케팅에 물든 기독교』(서울: 부흥과 개혁사, 2008), 119.

67) John MacArthur, Ashamed of the Gospel, Crossway, 230; 옥성호, 『마케팅에 물든 기독교』, 120.

68) D. Martyn Lloyd-Jones, The Puritans: Their Origins and Success(Banner of the Truth, 1987), 5. 옥성호, 『마케팅에 물든 기독교』,127-128.

69) 이형기, 『세계교회사』Ⅱ, 468.

70) 키드 하드먼, 『부흥의 계절: 미국의 전도와 부흥운동역사』, 5.

71) 이안 머레이, 『성경적 부흥관 바로 세우기』, 64-65.

72) 윌리엄 맥러글린(William McLoughlin)은 그의 저서에서 두 사람의 차이를 이렇게 표현했다.

   “조나단 에드워즈와 피니의 차이는 본질적으로 중세와 현대 사상의 차이이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을 우주의 중심으로 보았고, 피니는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 보았다. 에드워즈는 부흥을 ‘기도해야 할 것’으로 보았고, 피니는 부흥을 ‘인위적으로 일으킬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이안 머레이, 『성경적 부흥관 바로 세우기』, 63.

73) 이종진, "미국 부흥운동연구: 조나단 에드워즈와 찰스 피니 비교", (서울장신논단, Vol. 14, 1998), 146.

74) 조나단 에드워즈만큼 회심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설교자도 없었지만 그의 설교는 전도의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 양낙흥,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 252.

75) Ahlstrom, A Religious History of the American People(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72), 355.

76) 양낙흥, “대각성운동의 원동력에 대한 논쟁,” 『개혁신학과 교회』(부산: 고려신학대학, 1997), 187.

77) 윙키 프래트니, 『기독교 부흥운동사』, 권혁재 역(서울: 나침반, 1997), 320.

78) William W. Sweet, The Story of Religion in America, 284.

79) Charles Finney, Revival of Religion, 140.

80) W. Walker, A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514-515; 이주형, “18, 19세기 미국 대각성운동 연구: 역사적 배경과 영향”, 100에서 재인용.

81) 복음주의자들은 새로운 영적생활을 동경하고 개인의 종교적 체험을 강조하고 뜨거운 마음(신앙)을 주장하고 신학적 논쟁을 피했다. 그러나 에드워즈파는 뜨거운 마음만으로 만족치 못했고 청교도주의의 전통에 따라 신앙과 이성(마음과 머리)를 강조하여 복음주의자들보다는 합리적 입장을 취하였다. Hudson, Religion in America, 79-80; 오덕교, “New England의 대각성운동 연구”, 『神學指南』(서울: 神學指南, 1982, 4), 114에서 재인용.

82) John, T. McNeil and James Hastings Nichols, Ecumenical Testimony: The Concern for Christian Unity within the Reformd and Presbyterian Churches(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74), 211; 이주형, “18, 19세기 미국 대각성운동 연구: 역사적 배경과 영향”, 110에서 재인용.

83) 오덕교, “New England의 대각성운동 연구”, 112.

84) Ibid., 112.

85) 이안 머리, 『부흥과 부흥주의』,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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