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느헤미야 12장 강해로, 12:43을 토대로 <예루살렘성 봉헌식>이란 제목으로 설교한 내용을 포스팅합니다.
1월을 영어로 재뉴어리(JANUARY)라고 하는데, 이것은 고대 그리스의 신 ‘야누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야누스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신으로 한쪽은 앞을, 또 한쪽은 뒤를 바라보는 희귀한 형상을 하고 있다. 1월이란 야누스가 그런 것처럼 지나간 한 해를 돌아보면서 또 한편으로는 다가올 새로운 한 해를 바라본다는 의미다. 과거를 보면서 동시에 미래를 보는 것이 현재라는 뜻이고, 특히 1월은 그러한 의미가 더욱 가슴으로 다가온다.
예루살렘성 재건공사는 끝이 났지만, 그 성은 여전히 황량한 성이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과거를 회개하고 동시에 미래의 새로운 삶에 대한 약속을 하였다. 마치 말씀 앞에서 야누스의 두 얼굴 모양으로 과거에 대한 회개와 청산과 동시에 미래를 내다보고 조망하였다. 그 후에 비로소 그들은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살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령의 회복을 위한 말씀운동(8장), 회개운동(9장), 언약운동(10장)이 끝난 직후였다.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많은 부분에서 충전되긴 했지만 여전히 예루살렘성은 사람이 살기에는 무언가 모자란 터전이었다. 사람들도 별로 없었고 가옥도 그리 많지 않았다.
7:4
4 그 성읍은 광대하고 그 주민은 적으며 가옥은 미처 건축하지 못하였음이니라
4 Now the city was large and spacious, but the people in it were few and the houses were not built.
인적이 드문 곳, 어쩌면 우범지대라고도 할 수 있는 땅이 예루살렘이었는지도 모른다. 주택이 많은 곳이 아니어서 사람들이 살기를 꺼리는 땅이 바로 예루살렘이었다. 말 그대로 황폐한, 황무한 땅이 바로 예루살렘이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성은 성경에선 어떻게 언급하고 있는가?
11:1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거주하게 하고 그 십분의 구는 다른 성읍에 거주하게 하였으며
the holy city란 표현은 이곳 말고도 18절, 사 48:2; 53:1; 단 9:24에도 사용되었다. ‘거룩한’이란 뜻은 히 ‘카다쉬’는 ‘구별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재건하려고 했던 것은, 이 도성은 다른 세속 도시와 구별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지켜 보호해주는 도성으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느 1:9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
신 12:5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슥 8:1-8 11)도 참조하라!
예루살렘성은 구약의 약속, 언약의 말씀과 역사적인 의미가 있었다. 비록 지금은 인간적으로 볼 때 우범지대와 같은, 황무지와 같은 그런 곳이었다!
ex) 동네의 엔젤인어스 커피샵이 있던 곳, 그 곳에 건물이 완공되기전에는 정말 폐허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커피샵을 드나드는가? 소문만큼 커피맛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예루살렘은 과거에는 엄청난 영광을 누렸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황무지에 불과했다. 사람들도 얼마 살지 않았다.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무언가 활력과 생기를 줄 만한 것을 그 도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가 때때로 공동체를 바라보면서, 한 해를 시작하거나 부서나 전도회나 주일학교 반 애들 등을 바라볼 때 시작할 때는 언제나 서글프다. 과연 여기에서 어떤 역사가 일어날까?
오스카 와일드는 이런 말을 했다.
“가는 곳마다 즐거움을 주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하루라도 빨리 떠나야 즐거움을 주는 사람이 있다.”
정말 우리의 공동체 가운데 ‘하루라도 빨리 떠나야 공동체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손치더라도, ‘제발, 저 사람만 없으면 정말 우리 교회 부흥하겠다!’ 뭐 이런 생각 안 해 본 사람 있는가?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도 긍정의 믿음을 가지고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 본문이 그걸 말해주고 있다.
중남미에 100평방킬로미터나 되는 넓은 땅이 있었다고 한다. 그 땅에는 풀도 잘 자랐고, 물도 충분했고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아주 좋은 옥토로 알려졌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그곳에 비가 내리지 않았다. 풀들이 죽어갔다. 나무들도 죽어갔고 물들이 말랐다. 사람들도 하나 둘 씩 떠나가 버렸다.
그래서 나중에는 그 땅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다. 이른 바 황무지가 되어 버렸다. 더 나아가 많은 사람들이 그 땅을 통과하는 것조차 꺼리게 되었다. 거기만 들어가면, 유령이 떠다니는 소리가 난다는 것이었다. ‘silent hill’처럼 음산한 곳이었다. 공포와 두려움으로 뒤덮인 어둠의 땅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전도여행 팀이 그곳을 방문했다. 그들은 그 땅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므로 알게 되었다. 그 땅에 거하고 있던 사람들이 공평치 못하고 불의했던 것이다. 가진 자가 갖지 못한 자를 탈취하고, 권력을 남용하고 압제하고, 믿는 자들이 믿는 자로서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겔 22장처럼 모든 이들이 타락하고 범죄하였던 것이다. 땅이 슬퍼하기 시작했고 땅의 저주가 감돌기 시작했다. 옥토가 박토가 되어 버렸다.
중보기도 팀이 그 자리 안으로 들어갔다. 그 땅의 결렬된 틈을 찾아 들어갔다. 하나님 앞에서 긍휼을 구하기 시작했다. 그 땅을 회복하는 길은, 그 땅에 악을 행한 자의 피를 내는 것이다. 피흘림 받은 땅의 속함은 피 흘리게 한 자의 피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정결하게 되는가? 이전에 악을 행하던 사람들을 다 모아서 불로 태우고 중세시대의 ‘마녀사냥’처럼 화형을 시켜야 하는가?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속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그들을 대신해서 피 흘리게 하셨다.
그래서 중보기도 팀은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이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이 땅을 적셔 주옵소서, 이 땅을 정결해 주시옵소서”
하고 부르짖고,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전능하심을 찬양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그 땅에 오랜만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풀이 돋아나고 땅이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뉴질랜드는 얼마나 아름다운 땅인가? 일년 내내 꽃이 피어 있고, 너무나 아름다운 꽃과 나무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 처음 그곳에 사람들이 이주했을 때, 그 땅은 죽음의 땅이었다. 어떤 나무도 잘 자라지 못하는 죽은 땅, 버려진 땅이었다.
그런데 청교도들이 그 땅에 들어가면서 주님 앞에 중보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그 땅을 축복된 땅으로 바꾸셨다.
중보기도는 땅을 회복하는 능력이 있다. 중보기도는 우리의 땅, 우리의 필드, 우리의 지경을 회복시키는 능력이 있다. 중보기도자들이 기도할 때, 그 결렬된 틈 사이로 들어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변화시켜 주신다. 이 사실을 믿고 의지하라! 절망을 희망과 소망으로 바꾸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라!
예루살렘성은 지금 새롭게 시작하기에는 모든 면이 부족하고 결여되어 있고 볼품이 없었다. 말 그대로 ‘거기에 무슨 선한 것이 있겠는가?’할 정도의 매력없는 도시였다. 그러나,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공동체는 그 곳에 하나님의 기운이 있음을 알았고 그것을 정책적으로 유지해나갔다.
먼저 백성의 지도자들과 남은 백성 중에 제비를 뽑아 1/10과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선발하였다. 부족한 인구 때문에 발생한 예루살렘의 모든 안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비뽑기보다 먼저 ‘자원자’를 선발했다! 히브리어로 ‘네다바’는 자원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을 의미하는데(cf, 출 35:29; 레 7:16; 22:18, 21, 23), ‘예루살렘에 거하기를 자원하는 자’는 그러한 제물이 되었다(cf, 롬 12:1).
먼저, 예루살렘 거주 평신도(11:3-9)
둘째, 예루살렘 거주 제사장(11:10-14)
셋째, 예루살렘 거주 레위인과 문지기들, 노래하는 자(11:15-24)
기타, 유다와 베냐민 지파 지역 정비(11:25-36)
이스라엘 백성들이 희생하면서까지 예루살렘으로 이주한 것은 그곳에 하나님의 성전이 있고, 하나님의 이름이 걸려 있는 성읍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런 깨달음과 희생이 따르는 헌신이 가능했던 것은 앞에 있었던 언약운동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예루살렘을 사랑했던 것과 같은 사랑이 우리 속에 있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루살렘을 향한 연모함(사모함)과 사랑이 헌신으로 드러났다. 예루살렘 도시를 향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먼저 ‘네다바: 자원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가 되어 도시가 재건되는데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가진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진실성은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 교회를 향한 여러분의 사랑은 과연 어떠한 헌신으로 드러나고 있는가? 주님을 향한 여러분의 네다바는 무엇인가? 주님께서 여름성경학교와 수련회가 끝나고 새롭게 도전하시는 네다바는 무엇인가? 어떤 헌신으로 여러분을 도전하시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기 싫은 땅이었지만, 눈으로 보기에 꽉 차지 않는 부족한 지역이었지만 그 곳에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의 역사적인 의미와 믿음의 흔적이 존재하기에 과감하게 포기한 것이다.
크리스천 보비는
‘성공하는 사람은 송곳처럼 어느 한 점을 위하여 일한다’
고 했다.
하나님 앞에 성공하는 사람은 송곳처럼 하나님 한 점을 위하여 일한다고 말하고 싶다.
[야고보서 2: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우리의 헌신은 lip Service가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이다.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 액션으로 나와야 하는 것이다. 헌신은 몸으로 하는 것이다! 이 헌신의 동기는 말씀이어야 한다. 몸으로 하는 헌신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헌신의 이유나 헌신의 동기가 없이 맹목적인 헌신은 그 의미가 모호해진다. 약속의 말씀을 붙잡을 때 그 말씀이 우리를 자극하고 도전하면서 헌신하게 된다! 우리의 네다바가 넘침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더욱 든든하게 세워지길 주의 이름으로 소망한다.
12장으로 넘어간다. 먼저, 12:1-26까지는 제사장과 레위인 명부가 등장한다. 사람 이름들이 수없이 펼쳐져 있다.
첫째, 12:1-7 스룹바벨 시기 제사장들.
둘째, 12:8-9 스룹바벨 시기 레위인들.
셋째, 12:10-11 대제사장 명부.
넷째, 12:12-21 요야김 시기 제사장들.
다섯째, 12:22-26 기타 레위인들.
이 다양한 제사장과 레위인 명부를 통해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의 전수의 힘이다. 신앙교육의 힘이다. 후손대대로 예배와 찬양과 말씀을 배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기에 중단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은 역사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신앙은 환경에 의해 포기되어질 수 있을 수 있었다. 삶이 너무나 힘겹고 어렵기에 믿음은 쉽게 내버릴 수도 있는 처지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신앙적인 유산을 전수하는 일에는 인색치 않았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하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명부가 이렇게 넘친 것이 아닌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연 우리가 이 땅 위에서 살아가면서 영원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는 영원을 향한 마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했다.
[전도서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우리는 영원을 사모하기는 하나, 영원할 수 없는 순간적인 존재이다. 무엇이 영원할 수 있는가? 젊음? 명예? 권력? 인기? 패션(유행)?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바로 ‘믿음, 신앙’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더 나아가 교육의 현실로 들어갈 때 또 다른 역사를 일구어내는 것이다.
우리 다음 세대에게 이 놀라운 ‘믿음’을 건네주기 위해 노력하자. 우리 자녀들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의 교육부서의 모든 영혼들에게, 학생들에게 이 ‘믿음’을 교육하자. 교육의 힘을 믿으라! 말씀의 힘을 믿으라!
이 명부는 역사적으로 대제사장을 통한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의 모습과 실체를 증명해준다. 그러나 신학적인 면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구원사적 연속성과 이스라엘의 신앙적 전승을 보여 주고 있다. 동시에 이 명부는 하나님의 구원사와 이스라엘의 신앙적 전승은 역사를 통해 자손대대로 전승되고 기념되어야 할 것을 교훈해 주고 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믿음의 이력, 믿음의 계보가 넘치길 소원한다!
예루살렘성 봉헌식이 이제 진행된다. 하나님께 봉헌하는 예식을 앞두고 무엇을 하는가? 12: 27-30절, 레위사람들이 찬양하고 감사하고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했다. 세상에 음악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라도 자동차를 타고가면서 음악을 듣고 노래하면서 산다. 음악을 거부하는 사람은 드물다. 기독교는 특별히 음악과 관련이 깊다. ‘기도’ 또한 ‘곡조 없는(생략한) 찬송’, 찬양 또한 ‘곡조 있는 기도’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니 말이다. 노래를 담당했던 성가대의 음악이 봉헌식에 울려 퍼지고 있다. 찬송은 영혼을 살리는 능력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 또한 찬송이다.
사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성전봉헌식 보다 하나님은 어쩌면 이들의 찬양을 더 받으시길 기뻐하셨는지도 모른다. 때때로 우리의 거창한 예식과 행사와 세레머니보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송을, 우리의 혼이 담긴 찬송과 찬양을 더 좋아 하실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시편 69:31]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여기서 이것은?
30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황소를 드림보다 진정한 노래를 기쁘게 받으시는 주님’이심을 기억하라! 잘 드린 노래 한곡, 찬양 하나가 여러분의 인생의 질, 인생의 판도를 바꿀 수 있음을 믿으라! 다윗이 목동시절에 드렸던 그 놀라운 찬양들을 받으신 하나님께서 다윗을 더 크게, 더 위대하게, 이스라엘의 가장 탁월했던 황금기의 국왕으로 사용하신 것(사극드라마의 연기가 아니라 실제)을 기억하라! 그 유년시절의 찬양과 노래가 없었다면 다윗은 더 위대한 다윗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 하나님의 마음을 울리는 노래가 있었기에 다윗이 다윗되었던 것이 아닐까?
특별히 30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12:30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케 하고 또 백성과 성문과 성을 정결케 하니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봉헌예배를 드리기 전에 금식과 절제생활을 하고 제사와 제물을 드리며 스스로 몸을 정결케 했다. 또한 목욕재계하고 깨끗한 복장을 입었을 것이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마지막으로 백성과 성문과 성을 정결하게 했는데, 이것은 성수를 뿌리는 행위였을 것이다)(cf, 민 19:18; 겔 36:25). ‘주제는 거룩!’
우리가 어떤 일과 행사와 하나님 앞에서의 헌신을 다짐하기 전에 늘 돌아보아야 하는 것은 ‘깨끗케하는, 회개’인 것이다. 오늘도 우리가 청산해야 할 죄악은 없는지 돌아보고 즉각적으로 회개하자.
성벽 밟기
성벽 봉헌식은 무리를 두 그룹으로 나누어 골짜기 문 성벽 위에서 행렬을 지어 성 밟기를 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행렬의 순서는 맨 앞에 성가대가 서고(31, 38), 그 뒤를 7명의 제사장들이 따랐으며(33-35a; 41), 그 다음은 성가대 선창자(35b, 42)를 뒤이어 8명의 나팔수들이 행진을 했다. 분문 쪽의 남쪽 방향 그룹은 호세야(32)의 인도로 유다 방백의 절반이 가담했고(32), 반대 방향은 느헤미야(38)가 민장의 반을 인도했다.
7명의 제사장이 무리를 선도하는 것이나 나팔을 부는 것은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던 모습을 연상시켜 준다(대상 15:24).
성벽 봉헌식의 중요한 의식 중의 하나는 바로 성벽 밟기이다. 이러한 의식은 시편의 일부에서 발견되고 있다. 성벽밟기는 원래 성벽이 튼튼하고 안전하게 건축되었는지를 살펴보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cf, 시 48:12-14). 그러나 이 의식은 신앙적으로 하나님에게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그의 인도와 보호를 크게 기뻐하는 동시에 구원 능력을 대적들에게 선포하는 의식으로 발전되었다. 마치 민속놀이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성전봉헌식은 거행되었다. 우리 교회가 봉헌식을 했을 때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온 성도들이 교회를 한 바퀴 돌면서 땅밟기 하는 것도 의미있는 세레머니가 아닐까 싶다. 봉헌식은 하나님의 용서와 회복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느헤미야는 자기 동족을 위해 전적으로 헌신하였다. 지도자로 섬긴다는 것이 어떠한 것임을 느헤미야는 몸소 보여주고 있다.
제사장과 레위인의 몫(12:44-47)
예루살렘성을 봉헌하던 날 그 백성들이 행한 일은 무엇이었는가? 44절에 보면, 사람을 세워 거제물과 십일조를 쌓게 했다. 그리고서 거둔 십일조를 곳간에 쌓게 했다. 이 모든 것들은 모두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의 명령을 따라 행한 것이라고 45절은 못박고 있다. 순종 후에 46절에는 찬양과 감사가 흘러넘쳤고, 47절에서는 레위인들, 성전을 관리하고 담당하는 성직자 계급에 속한 자들에게 ‘날마다 쓸 몫’을 주었다. 성직자들의 생활비가 지급되지 않음으로 인해 자신들의 본연의 임무를 순수하게 감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45절의 말씀처럼 이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결례의 일에 힘쓸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포로시대로 인해 여러 가지 모든 정황들이 원래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법대로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성전봉헌식을 계기로 하여 원상복구된 셈이다. 이 모든 것은 말씀에 순종함으로 나타난 결과물들이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예루살렘성을 재건하고 그곳에 백성들을 이주시키므로 하나님의 온전한 회복을 이룬다. 그와 그의 동족은 이 모든 일을 마쳐 놓고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 드린다. 그것은 제사로 그리고 율법에 순종하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이런 일을 수행하면서 느헤미야는 그의 마음속에 그 옛날 다윗시대의 영광을 바라본다. 우리 또한 말씀을 통해 진정한 순종과 헌신의 본을 닮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를 선포하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네다바가 되자! 우리의 헌신을 통해 우리 교회가 든든히 세워지고, 교회가 우리의 헌신을 통해 교육의 물댄동산이 될 것을 믿고 나아가자! 믿음으로 이 도시가 blessing광주가 되기를! 전도자들과 우리 교회 성도들이 밟는 발걸음, 성벽 밟기를 통해 이 도시와 땅이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넘치기를 기도하자. 할렐루야!
1) 1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 2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 3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4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예루살렘 길거리에 늙은 남자들과 늙은 여자들이 다시 앉을 것이라 다 나이가 많으므로 저마다 손에 지팡이를 잡을 것이요 5 그 성읍 거리에 소년과 소녀들이 가득하여 거기에서 뛰놀리라 6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 일이 그 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려니와 내 눈에야 어찌 기이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7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내 백성을 해가 뜨는 땅과 해가 지는 땅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8 인도하여다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주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진리와 공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오늘 느헤미야 12장 강해설교는 <예루살렘성 봉헌식>이란 제목으로 한 포스팅입니다. 황무지와 같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예루살렘성 봉헌식을 거행하면서 물리적인 셋팅 뿐만 아니라 영적인 셋팅까지 감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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