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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8장 강해, 민족재건운동(말씀운동)

by Message.K 2022. 9. 16.

느헤미야강해에서 8장을 본문을 기반하여 '민족재건운동: 말씀운동'이란 제목으로 설교한 포스팅입니다. 느헤미야가 성벽재건을 주도하고 정치적인, 경제적인 제반사항을 주도했다면, 이제 영적인 부분은 또 다른 리더십에게 이양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느헤미야 8장은 에스라 8장과 9장 사이에 놓여 있있던 것으로 본다. 느헤미야 8-10장은 새롭게 거듭난 유다 공동체의 계약 갱신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느헤미야 8장은 그 중에서 독립된 단위로 에스라 회고록의 편집으로 간주된다.

 

 

  • 1-12절: 에스라의 율법 낭독과 해설이라는 주제의 통일성,
  • 13-18절: 1주제에 종속되어 있는 초막절 주제가 다뤄짐. 13,14,15,18절은 모두 에스라와 관련되어 있고, 에스라는 느헤미야서에서 처음으로 이곳에 등장하고 있다.

 

    

  성벽재건과 같은 물질 환경의 개선만으로는 인간의 참된 행복을 보장할 수 없다. 그것은 느헤미야 시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화려한 저택과 멋있는 자가용과 보장된 노후와 연금과 연봉이 우리의 행복의 척도라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편안하고 힘들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맞다.

 

 

 

  중요한 것은 참된 행복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의 회복이라는 영적 갱신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의 온전한 회복(holistic revival)을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세 가지 운동 중 첫 번째 것은 말씀운동이다.

 온전한 회복과 부흥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회복에서부터 시작됨을 확신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오늘날 말씀은 어떻게 취급되어져가고 있는가?

  

 

부모들은 이제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더 이상 성경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 교회의 설교...시사적인 주제들을 다루고 있고 피상적이며, 주일학교의 교육은 성경과 관련되는 한 종종 매우 초보적이다....그러므로 우리의 문화에는 성경적인 소양을 위한 격려가 거의 존재하고 있지 않으며, 그 결과는 슬프고 두려울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무지한 세대이다. 이러한 상태로 머물러 있는 한 하나님을 향한 의미 있는 전진은 기대할 수 없다.
-제임스 패커 ‘신앙의 열정’ 중에서

 

 

  성벽재건공사를 마친 후 첫 번째 신년절은 유대력에선 7월 1일(양력 9-10월 경)이다. 양력으로 새해 첫날에 해당하고, 10일은 속죄일이었고, 15일부터는 초막절이 시작된다. 초막절에는 매년 7년마다 빚을 면제해주는 율법 규정을 백성 앞에서 낭독했고(신 31:10-13), 이것은 계약 갱신 의식의 기초로 간주되었다. 암튼 이 날은 유대인들에게 의미있는 날이었다.

 

 

 특별한 날에 특별한 어떤 이벤트가 있었던 것일까? 예전 월드컵경기 펼쳐지면  ‘월드컵 길거리 응원’을 위해 수많은 인파들이 모였는데, 그것처럼 지금 유대 민족도 모이긴 모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지금 수문 앞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누가 명령해서 모인 것인가? 근데 뚜렷한 명령을 내린 사람은 보이지 않고 성경은

 

 

‘모든 백성1)이...일제히...모여’

 

 

라고 1절에 이야기한다. 공동체가 지금 새롭게 일어서는 시점에 백성들이 지금 일제히 모였다. 그들이 일제히 모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새해 첫날로 구분되는 그 시점에 해돋이를 위해 모인 것인가? 정신수양과 수련회를 위해서 모인건가? 새로운 분위기로 한 해를 시작하고, 포로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온 그들의 가슴에 새로운 기운으로 시작하고픈 마음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취지하에 그들이 모였는데, 명백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영적인 필요 때문이었다. 포로로 귀환한 후 그동안 영적 갈증을 제대로 채우지 못했는데, 이제 성벽도 건축하고 유다 민족을 새롭게 재건하는 시점에 무엇보다 그들은 ‘율법책’을 삶의 중심에 두고자 했던 것이다.

 

 

1절: 모든 백성이...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그래서, 특별히 학사 에스라를 불러 3절에 보면 뭇 백성이 에스라가 읽은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다고 말한다. 그것도 ‘새벽부터 정오까지’, ‘즉 대략 5-6시간, 아니면 6-7시간동안 진행되었던 것이다’2). 에스라가 낭독했다. 낭독이라 함은, 율법책의 요지만 간추려 읽고 해석했다는 의미로 성경학자들은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렇게 장시간동안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 율법에 귀를 기울였다는 사실! 그것도 한 두 사람이 아니고 ‘모든 백성’이 말씀에 청종했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했던 것이다. 민족을 새롭게 재건하려는 시점에 하나님의 율법을 배우고자 직접 에스라를 초청(초빙)하여 말씀을 배우고자 한 유다민족의 강한 욕구를 볼 수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새해를 맞이하거나 특별히 오늘이 6월의 마지막 날인데, 새롭게 하반기 7월을 내다보면서 우리에게 새롭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물론 새해의 느낌은 전혀 나지 않는 우리들이지만! 여러 가지 새로운 결단과 다짐, 약속, 서원 등을 우리가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우리의 심령을 재건하고 마음을 다잡는 개혁의 출발점은 바로 ‘말씀에서부터’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는’ 이런 현실 가운데 우리를 다시금 새롭게 재창조하고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것은 자기계발서나 자기혁신서 이전에 바로 ‘말씀교육’, ‘성경’임을 보여준다.

 

 

 

 

 

  유대인들은 그토록 소수이지만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것은 율법교육이었다는 것을 다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를 앉혀놓고 지속적인 토라의 말씀으로 양육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교육이, 세상의 다른 교육이 아니라 바로 말씀의 교육에서 세계의 모든 영역을 제패할 수 있는 힘이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이 말씀의 힘을 믿고 있는가? 확신하고 있는가? 세상의 다양한 교육학적인 방법이나 도구들 보다 말씀에 대한 위용, 확신을 소유하고 있느냐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유대인들은 포로로 귀환했고 심령의 재건을 위해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지만, 우리에게 과연 이러한 말씀에 대한 간절함이 있느냐는 것이다. 갈급함이 없다면 왜 없는가?

 

 

 그들의 갈급함은 5-6절에 보면 드러난다. 그들이 얼마나 말씀을 사모하였는지, 그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함께 읽어볼까?

 

 

5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6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솜뭉치나 티슈를 물에 넣으면 금방 물을 흡수해버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유다 민족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물을 흡수해버리는 티슈처럼 흡수해버리고 있다. 그만큼 갈급했다는 증거이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필요하다. 요즘은 너무나 넘쳐흐르는 정보의 홍수 가운데 간절함 보다는 넘침으로 인해 갈급함이 많이 시들어진 상태인 것 같다. 말씀을 듣기 위해 5시간 이상씩 서 있으라고 하면 사람들이 몸서리칠 것이고 오히려 그 자리에 코배기도 안 보일 것이다. 모이는 것 자체부터가 잘 되지 않는 현대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겐 갈급함이 무엇보다도 필요한 시대이다.

  우리는 매일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어떠한가? 간절한가? 갈급한가? 갈급하지 않다면 영적 대가들은 ‘말씀의 금식’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정말 갈급함이 필요하다!

 

  이렇게 에스라는 말씀을 요약 낭독했다면, 7절~8절에 나오는 레위인들은

 

 

‘백성들이 제 자리에 서 있는 동안 그들에게 율법을 깨닫게 해주었다, 해석해주었다’고 한다.
make it clear(NIV), 'paragraph by paragraph'(윌리엄슨)
7 ... explained the law to the people while the people remained in their place. 8 They read from the book, from the law of God, translating to give the sense so that they understood the reading.
하나님의 율법책이 낭독될 때에, 그들이 통역을 하고 뜻을 밝혀 설명하여 주었으므로, 백성은 내용을 잘 알아들을 수 있었다(표준)

 

 

 레위지파들은 백성들로 하여금 실생활에 말씀을 적용하도록 인도했다는 말이다. 그랬더니 놀라운 반응이 일어났다.

9절을 함께 읽어보자.

 

9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Then Nehemiah, who was the governor, and Ezra the priest and scribe, and the Levites who taught the people said to all the people, " This day is holy to the LORD your God; do not mourn or weep." For all the people were weeping when they heard the words of the law.

 

 

 

 어떻게 말씀을 전했길래, 백성들이 울었단 말인가? 전하는 자보다 듣는 자의 심령상태가 크게 좌우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바빌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게끔 했던 그들의 하나님 앞에서의 불순종의 삶의 내용에 대해 회개하고 통회자복했을 것이다.

 

 

 

 

 

백화점 왕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존 워너메이커는 말씀이 빚어낸 사람입니다.

그가 성공한 사업가로 60주년을 맞이한 기념행사에서 한 기자가 워너메이커에게 질문을 했어요.

 

“회장님, 지금까지 투자한 것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투자는 무엇이었습니까?”

 

라구요.

  그러자 워너메이커는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열 살 때 2달러 75센트를 주고 성경 한 권을 구입했습니다. 이것이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값진 투자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성경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으니까요.”

 

라고 대답했다는 거예요.

그러자 기자가 다시 물었어요.

 

“그러면 성경만 구입하면 성공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워너메이커가 다시 대답을 했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믿고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즐겁게 일하다 보면 성공은 어느새 옆에 다가와 있습니다.”

 

 

  워너메이커는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30분 동안 성경을 읽었고 그 말씀을 깊이 생각하며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했어요. 그렇게 하였더니 하나님께서 크게 쓰신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민족재건을 위해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마음, 심령을 새롭게 하는 것이었고 그 심령재건을 위해선 바로 말씀을 들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사실! 그런데 여기서 7장까지 성벽재건의 모든 일들을 책임졌던 주인공이 사라지고 다른 인물이 등장하고 있다.

 

 

 

바로 느헤미야가 보이지 않고 갑자기 에스라가 나타난 이유는?

  느헤미야는 솔직히 성벽재건과 민족재건의 모든 물질적인 기초를 놓은 인물이다. 그런데 정작 새롭게 시작하는 시점에선 다른 주인공이 등장한다. 바로 말씀을 전하는 적임자로 에스라가 등장한 것이다. 말씀사역은 느헤미야의 전공이 아니었기에 그는 무대에서 뒤로 물러선 이유인 것이다. 8장은 느헤미야가 아니라 에스라가 전면적으로 나서고 있다. 자기가 이제껏 이끌고 왔던 주도권을 다른 이에게 넘긴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지금 에스라에게 모든 주도권을 넘기고 있다. 이것이 올바른 리더십의 본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기의 전공도 아닌데, 가타부타 하는 것, 협력할 줄 모르는 것, 동역할 줄 모르는 마음도 교만한 자세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마음은 없는가? 우리가 메가폰을 잡았으면 끝까지 잡아야 한다는 것은 교만한 처사이다. 모세가 가나안 정복을 바로 눈앞에 놔두고 그는 여호수아에게 리더십을 이양해야 했다. 그것은 정말 모세에겐 참을 수 없는 아픔이자, 시험꺼리일 수도 있었다. 출애굽부터 시작해서 가나안 정복까지 그 험난한 광야의 여정을 함께 감당해왔던 리더인 모세를 이제는 그만 쓰시겠다고, 모세가 자신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싶다고 기도를 얼마나 했겠는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만하면 족하다 더 이상 말하지 말라'고 하셨을때 모세 스스로 울컥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을까? 그렇다. 모세의 타이밍은 거기까지였다. 모세의 시대는 거기까지였던 것이다. 이 하나님의 주권과 역사 앞에 자신의 주도권과 기득권을 물려주고 교체하는 것도 정말 아름다운 장면이다. 느헤미야는 지금 민족재건운동의 말씀회복운동은 에스라에게 위임하고 있다. 혹시나 우리의 집착 때문에 일을 그르치고 있는 것은 없는가? 하나님 앞에서 내려놓을 것은 없는지 돌아보라!

 

 

 

 

  또한 우리가 특별히 강조하고픈 대목은 13절 말씀이다. 다같이 읽어볼까?

  여기서의 주체는 누구인가? 바로 ‘뭇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사람들’이라고 나와 있다.

 

13 Then on the second day the heads of fathers' households of all the people, the priests and the Levites were gathered to Ezra the scribe that they might gain insight into the words of the law.

 

 

  한 마디로 집안의 가장, 족장들, 리더십들이 말씀에 대한 사모함을 가지고 나왔다는 것이다. 왜? 그들이 더욱 말씀에 대한 통찰을 얻기 위해서,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나왔던 대목이 인상적이다.

  지도자들의 말씀에 대한 열정은 온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게 하고 궁극적으로 그들로 하여금 큰 기쁨을 맛보게 하였다.

 

 그리고서 그들은 14절의 말씀을 받는다. 성경을 같이 공부하다가 보니깐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4 율법에 기록된 바를 본즉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명령하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은 일곱째 달 절기에 초막에서 거할지니라 하였고

 

 

  이 말씀을 받자마자 유대 민족들은 15-17절에 초막을 짓기 위해 산을 가서 재료들을 구해 와서는 초막을 짓는 재빠른 액션과 행동을 취한다. 빠른 적용! 바쁜 액션! 전체적인, 총체적인 실천!

  이 초막절 행사가 전에 와는 달리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찬 이유는 아마도 잃어버렸던 모든 것들을 다시 찾은 이의 마음과 갈급한 자들의 뜨거운 가슴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초막적은 원래 농경사회에서 지켰던 추수감사제이다. 그러나 이 축제는 후에 이스라엘의 광야 방랑 전승과 결합되어 민족적 절기로 발전했다. 하나님의 말씀, 즉 율법으로 거듭난 백성은 이제 율법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로 작정하고 규정대로 초막절을 지켰다.

 

18 에스라는 첫날부터 끝날까지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무리가 이레 동안 절기를 지키고 여덟째 날에 규례를 따라 성회를 열었느니라

 

 

 우리에게도 이러한 말씀의 흥왕함이, 말씀회복운동이 일어나길 주의 이름으로 소망한다.

 

 


1) ‘모든 백성’(콜 하암)이라는 용어는 모두 10회나 사용되었다,

  장춘식, 성서주석: 에스라.느헤미야서(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7), 330.

2) 장춘식, 상게서, 331.

 

 

구약성경 느헤미야8장을 가지고 <민족재건운동: 말씀운동>이란 주제의 설교를 포스팅해 보았는데요. 말씀, 율법운동은 에스라를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특별히 말씀에 고무된 족장들과 성직자들 위주의 리더십이 먼저 반응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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