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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2장 17절, 일어나 성벽을 건축하자

by Message.K 2022.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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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헤미야 2장 설교를 이미 포스팅을 했지만, 2:17을 가지고 '일어나 성벽을 건축하자'라는 주제로 설교를 다시 했었는데, 이전의 내용을 약간 업그레이드하고 더 간결하게 준비하여 3대지 설교문으로 변신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prologue...함몰웅덩이 증후군

  플로리다의 한 아파트 주민들은 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창 밖에서 벌어지는 무시무시한 광경을 목격했다. 그들의 아파트 바로 앞에 있는 도로의 지반이 내려앉아, 플로리다 사람들이 ‘함몰웅덩이’라고 부르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계속 꺼져 들어가는 웅덩이 속으로 자동차와 도로, 잔디밭이 함몰되어 갔다. 이제 아파트가 무너질 차례였다.

 이러한 함몰 웅덩이는 가뭄으로 지하수가 고갈되어 지표를 지탱할 힘을 잃을 때 생기는 현상이라고 과학자들은 말한다. 갑자기 모든 것이 땅 속으로 꺼져 들어가면서, 딛고 있는 땅조차 안전한지 의심스러워진다.

 

 

 

 

  수많은 사람들이 플로리다의 함몰 웅덩이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이가 한 두 번은 함몰 웅덩이와 같이 자신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피곤으로 무감각해진 정서, 처절한 실패감, 지금까지 추구해왔던 목표에 대한 쓰디쓴 환멸감 등을 느낄 때, 우리 안에서 무엇인가가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감지했을 것이다. 삶 전체가 온통 끝없는 심연으로 빠져 들어갈 것 같은 붕괴 직전의 위기를 느끼게 된다. 어떤 때는 그러한 붕괴를 피할 길이 거의 없어 보인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을까?1) 고든 맥도날드의 베스트셀러 ‘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이란 아주 멋진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도로, 지표면, 지반이 내려앉고 있다. 그 지반을 견디는 지하수의 층이 꺼져버려서 그렇다는 말이다.

  우리의 육신을 움직이는 것은 영혼, 정신인 것처럼 우리의 외부세계를 받치고 있는 것은 우리의 내면세계이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다’는 말씀이 진리다.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자신의 내면 세계에 별 관심이 없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신들은 내게 거의 모든 것을 선사하였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을 오랫동안 무분별하고 육체적인 향락에 빠져들도록 내버려두었다...향락이 극치에 달하면 곧 싫증을 느끼고 새로운 흥분거리를 찾아 삶의 밑바다까지 일부러 내려가 보았다. 내 사고는 역설로 가득 차고 정열은 도착되어 갔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개의치 않게 되었다. 나를 즐겁게 하는 곳이면 어디서나 계속 쾌락을 추구했다. 나는 일상의 작은 행위 하나 하나가 우리의 성품을 만들기도 하고 또는 파괴하기도 하며, 우리가 밀실에서 행한 일로 인해 언젠가 지붕 위에서 통곡하게 되리라는 것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의 주인이 아니었다. 나는 더 이상 내 영혼의 선장이 아니었고, 나는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쾌락이 나를 지배하도록 허용했던 것이다. 끔찍한 수치심 속에서 내 인생은 끝나 버렸다.’2)

  

 

이 대목은 마치 찬송가 528장,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에서 3절 가사의 내용과 흡사하다.

 

‘세월이 살같이 빠르게 지나 쾌락이 끝이 나고
사망의 그늘이 너와 내 앞에 둘리며 가리우네...오라...오라...’

  우리를 디디고 서 있는 땅, 지반! 그 지반이 겉으로 보이기엔 전부인 것 같지만 실상은 그 지반을 받치는 또 다른 지반과 층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거대한 배, 선박 동체의 70%가 바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그만큼 모든 것에는 기초가 중요하고 지반이 중요하다. 그 사람을 받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 물체를 지지하고 있는 기반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미 기초가 약한 부실공사로 인해 수 많은 재앙들을 목격한 경험이 있다.

  보이는 육신을 지배하는 영혼, 선박 전체를 지지하고 있는 바닥이 중요한 것처럼 우리 개인을 넘어 가정과 교회와 국가, 모든 공동체에도 동일하게 이러한 법칙이 적용된다. 공동체를 지지하고 받치고 있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그러나 그 밑받침이 무너질 때 공동체의 위기가 찾아오는 것이다.

 

 

 

 

  오늘의 주인공 느헤미야가 사역할 당시에 이스라엘 공동체는 이미 그 공동체, 국가라는 공동체, 민족공동체의 밑받침이 무너진 상태였다. 하나님 앞에 불순종한 댓가로 인한 국가적인 몰락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밑빠진 독과 같은 이스라엘은 결국 바벨론 포로생활로 망국의 길을 걸어갔다. 함몰웅덩이처럼 이스라엘은 무너져내렸다.

  하지만 하나님은 또 하나의 희망을 준비하셨다. 그 망국의 기운이 감도는 그 이방의 땅에서, 한 사람을 준비시키셨다. 그 사람은 바로 느헤미야였다. 그가 하는 말, 오늘 본문을 다 같이 한 번 읽어보자.

 

 

2:17 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하고

 

 

  패배의식이 가득했던 그 이방의 땅에서 자신이 잃어버린 조국을 향한 애절한 마음을 하나님께서 들으셨다. 1장에 보면 3절에서 느헤미야는 자신이 수산궁에 머물면서 충분히 자신의 안위만을 일삼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나라에 대한 생각을 뒤로하고 편의주의와 자신의 안녕을 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먼저 함몰웅덩이 증상으로 인해 망국의 길을 걸었던 자신의 조국의 형편을 먼저 살폈던 것이다.

 

 

1:3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무너진 조국의 회복을 위해선 무엇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우리의 개인과 교회와 나라와 공동체의 붕괴된 부분 가운데 무엇보다도 시급하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인가?

 

 

 

1. 관심

  관심이 있어야 한다. 붕괴된 우리의 영적인 생활, 우리의 말씀과 기도의 상태, 메마른 공동체와 의식 없는 예배 기타 등등...우리의 영적인 처소는 허물어지고 불타지는 않았는지 관심이 있어야 한다. 심지어 그런 의식조차 없는 동료들, 동역자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들의 영적 상황을 돌아볼 줄 아는 안목과 관심이 있어야 한다. 목장의 리더들은 자신들의 목장원들의 영적 상황과 상태가 어떠한지 관심이 있어야 한다. 영적 통찰력이 필요하다. 느헤미야는 개인의 영달과 성공을 위해서 몸부림치지 않았다. 개인 보다 더 중요한 공동체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고 관심을 가졌다.

 

 

 

  오늘날의 시대는 모래알과 같은 시대이다. 해변에 있는 모래는 잘 뭉쳐진 듯, 하나의 모래라는 단어에는 표현되어 있지만 정작 그 모래들은 모래알이다. 개체만이 있을 뿐이지 거기에 공동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뭉쳐지지 않는다. 찰흙과는 비교할 수 없다. 찰흙은 얼마나 잘 뭉쳐지는가? 오늘날은 모래알과 같은 개인성이 팽배한 시대이다. 공동체를 부각하기 보다는 개인을 부각시킨다.

  하지만 성경은 언제나 공동체를 강조한다. 공동체의 지체들이 실족한다면 자신의 자유와 특권과 의견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바울은 말한다.

 

 

고전 8:9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 공동체 가운데 바로 교회가 존재한다. 세상에 희망을 주는 공동체, 세상에 소망이 되는 공동체, 바로 교회이다. 이 교회에는 수많은 문제와 연약함과 핸디캡이 존재한다. 그러나 한 사람의 관심으로부터 교회는, 공동체는 다시금 일어설 수 있다. 모래알과 같은 자기 자신에 국한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붙여주신 공동체, 하나님이 내게 붙여주신 동역자들을 한 번 더 돌아보는 그 관심을 통해 무너진 성벽을 쌓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건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가 5번째 특별 새벽기도를 감당하고 있다. 그리고 아울러 소그룹 정착을 위한 생명공동체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특새 절반을 지나고 있다. 과연 우리는, 우리의 공동체는, 우리 소그룹, 우리 목장의 관심은? 우리 리더의 관심은 어디에 가 있는가? 나 자신만의 안일, 가족의 건강과 영달과 업적에만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닌가? 느헤미야를 보라! 이방의 땅에서 충분히 자신의 성공만을 돌아보아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지만 그는 뒤를 돌아보았고 조국을 돌아보았고 민족을 챙기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에게 이 마음, 이 관심이 필요하다! 다시금 목장원들을 독려하고 챙기자. 성도들을 챙기고 도전을 주고 동기부여를 하자. 특별한 집회는 특별한 은혜가 임할 줄 믿고, 특별한 기도는 특별한 응답을 주심을 믿고 집요하게 하나님께 나아가자!

 

  함몰웅덩이에 빠진, 붕괴된 공동체, 무너진 성벽을 건축하기 위해선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2. 기도

  느헤미야가 오늘 이 17절의 말씀을 하게 되는 배경이 있다. 그 배경은 바로 기도의 배경이다. 느헤미야는 지금 그냥 자신의 목적과 계획에 따라 ‘일어나 성벽을 건축하자’가 아니라 이미 전부터 기도의 성벽을 먼저 쌓고 있었던 것을 기억하자. 기도의 성벽을 먼저 건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1:3의 조국의 비극적인 장면들을 목도하고서 그가 반응하는 1:4의 말씀, 다같이 읽어보자.

 

 

1:4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느헤미야의 반응은 슬픔과 그 슬픔을 압도하는 반응, 금식과 기도였다. 이 금식과 기도는 몇일 동안만 지속된 것이 아니라 1장에서부터 2장에까지 계속 지속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1:1의 기슬르월은 B.C 445년 12월경을 의미한다면, 2:1의 니산월은 B.C 444년 3-4월경을 의미하기 때문에 적어도 3개월, 많게는 4개월 정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느헤미야의 기도는 계속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이 바로 그 민족의 부흥과 성벽재건을 위해 헌신해야 하는 주인공임을 알고 금식과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갔음을 알 수 있다. 느헤미야의 기도의 내용은 1:5-11에 잘 기술되어 있다. 그 기도의 핵심은 회개였다. 그리고 그 기도에는 진실한 마음이 녹아 있다.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6-7절)

 

 

이 기도는 아주 짧게도 나타나는데,

2:4에 보면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라고 나온다. 느헤미야가 기도를 충분히 한 후에 자신의 성벽재건을 위한 계획을 아닥사스다 왕에게 허락받는 과정에서 그는 ‘심히 두렵고 떨렸을 것이다’.  당시 2절에도 나오듯이 왕 앞에서 근심이 있는 표정을 한다는 것은 왕의 노를 일으킬 수 있는 부분이고 그로 인해 느헤미야가 목숨을 잃는다 해도 군주 독재자 시절에 누가 뭐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못되기 때문이다. 그런 위기일발의 상황에서 느헤미야는 짧게나마 ‘묵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어성경에서는 그러자 왕이 나에게 다시 물었다.

 

 

'그대에게 무슨 소원이 있으면 말하시오. 내가 이루어 주겠소'

 

 

그래서 나는 하늘의 하나님께 잠시 짧고도 절실한 기도를 드린...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만큼 절실했던 느헤미야였다. 그 당시의 상황을 참작해 볼 때 6절, ‘그 때에 왕후도 왕 곁에 앉아 있었더라’는 말은 굉장히 사적인 시간대였다는 말이다. 왕후가 공적인 업무 시간에 같이 있을 리가 없고 쉬는, 휴식 시간대에 느헤미야가 술관원(10절)으로서 포도주를 왕에게 갖다 드리는데 인상이 궂어 있었단 말이다. 2절에서는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라고 물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자세히 보면 느헤미야가 우발적으로, 우연히 계획한 행동이 아니라 전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지혜에 의해 행동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계획된 우연이 그 행동 속에 녹아나 있는 것이다. 3-4개월 동안의 충분한 기도에 의한 준비 작업이 느헤미야의 머리를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느헤미야는 밑 빠진 이스라엘의 부흥과 영적 회복, 그리고 성벽 재건을 위해서 기도로 준비하고 움직이는 것이다. 기도로 준비하고 이방의 왕 앞에서 자신의 조국의 상황이 이러이러하니 제발 좀 도와달라는 똘아이같은 부탁을 내놓은 것이다. 그것을 얼굴에 근심을 띤 채 말이다. 목이 잘릴지도 모르지만 기도하였기에 그런 용기가 튀어나온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답답해하고 무서워하며 떨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 두려움과 근심과 불안의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은 마인드컨트롤도 아니고 자기체면도 아니다.

Ex) 메이저리그 박찬호 선수의 휴대품에는 불교서적, 기독교서적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박찬호처럼 마인드컨트롤 할 수 있는 어떤 실용적인 서적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고 그리스도+인이다.

 

 

 

우리에게 가장 위대한 무기는  바로 ‘기도’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 답답해하는 것, 고민과 근심을, 문제를 다 털어놓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모든 수다를 다 떨고 구토해내는 것이 바로 기도이다. 느헤미야가 2장에서 보여주는 불굴의 용기는 바로 그의 기도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우리의 목숨이 몇 개라면 할 말, 안 할 말 다 하고 살겠지만 우리의 목숨, 생명은 하나인데, 그 목숨을 가지고 더 효과적으로 사역하기 위해선 지혜가 동반된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할 때 종종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위험을 무릎 쓴 용기이다. 마인드컨트롤이 아니라! 그 위험을 무릎 쓰기 위해선 기도의 무릎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타이밍을 위해 3~4개월 동안 기도한 느헤미야의 주도면밀한 모습은 우리가 정말 본받아야 할 모습이 아닌가? 느헤미야는 야성미가 넘치는 영성을 가진 것 같다.

 

 

 

  또한 느헤미야는 굉장히 주도면밀하다. 왕이 만약에 허락하면 어떻게 일을 진행할 지에 대해서 미리 다 구상하고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6절에서 ‘계획일은 언제이며 기간은 얼마인가?’라고 물었을 때 ‘기한을 정하는’것 뿐만 아니라

7절의 ‘강 서쪽 총독...조서’도 필요하고

8절의 ‘왕의 삼림 감독 아삽...조서...영문의 문과 성고각...재목’ 도 필요하고

9절에 ‘군대 장관과 마병을 보내...왕의 조서...’...

 

 

느헤미야는 이렇게 준비했다. 이렇게 브리핑했을 때 왕은 8절에서 ‘허락하는 역사’를 보이셨다. 모든 것이 만사형통이었다. 느헤미야는 기도의 위력을 절감했을 것이다. 일이 척척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기도했다고 해서, 열심히 기도했다고 해서 방해물이 없다는 생각은 금물이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 기도했지만 원수의 방해공작과 훼방작전은 여전히 있음을 기억하라!

 

 

2:10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하게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왕이 허락하였고 왕의 수하에 있는 이들이 다 후원하고 도운다고 하더라도 삐걱거리는 존재가 있기 마련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도 항상 ‘포도원을 헐려는 작은 여우’가 있음을 기억하라.

 

 

[아가 2:15]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

 

 

‘공동체를 허물려는 미꾸라지들’이 있음을 기억하자!

  그러할 때에도 우리는 좌절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허물어뜨릴려는 ‘작은 여우들과 미꾸라지들’을 물리쳐야 한다.

 우리가 먼저 기도의 성벽을 쌓기를 바란다. 우리가 공동체의 성벽을 건축하기 이전에 기도의 내면의 성벽을 건축하기를 소망한다.

 

 

 

 

 

3. 액션 그리고 합심

  느헤미야는 모든 것을 돌아보고 13절에 자신의 사랑하는 조국, 예루살렘 성벽이 다 무너졌고 성벽이 불탔음을 자세히 관찰하였다. 14절의 구체적인 현상이 어떠함을 보여준다.

   느헤미야는 훼파되고 성문은 소화된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자신이 원해서 하는 일, 즉 소명에 기원한 것이기에 더 가슴이 벅찼을 것이다. 터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는 터널 끝을 바라보면서 기대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지금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현실에 발을 딛고’서 이제껏 기도하였던 것들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철두철미하게 둘러보고 조사하고 준비하고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소명을 이루기 위해 사려 깊은 준비를 하는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비그리스도인들 보다 이런 면에서 비현실적인 면이 많은 것 같다. 기도는 많이 하고 신앙의 열정은 탁월한데 실력이 늘 뒤쳐진다. 그것은 그의 기도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현실적인 준비와 노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다. 고 3 수험생들의 대학수능시험 뿐만 아니라 취업과 승진과 사업과 모든 제반 사항들에 대해서 ‘현실에 발을 딛고’ 치밀하게 준비하되 그 위에 믿음을 얻는 것, 그것이 더 지혜로운 처사가 아닐까? 아니면 믿음을 기초로 하여 실력을 끊임없이 닦고 닦는 것, 그러한 느헤미야와 같이 철저하게 준비하는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하겠다.

 

 

 

  우리가 교회의 모든 사역을 앞두고 기도하는 것뿐만 아니라 ‘현실에 발을 딛고’ 더 나은, 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아이디어와 계획 속에서 치밀한 준비가 필요하겠다. 가령 우리가 살 집을 세우는데 나 몰라라 하는 사람이 없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데, 하나님 나라의 효과적인 사역을 준비하는데 우리가 대충대충 생각해선 아니 될 것이다. 느헤미야의 ‘현실에 발을 딛고’ 믿음으로 준비하는 자세가 우리에게 많이 요구된다.

 

  느헤미야는 이제 자신의 소명과 꿈과 확신을 개인적으로 가지는 것에 더 나아가서 여러 동역자들을 모으기에 이르른다. 하나님의 일에 있어 독불장군은 있을 수 없다. 무엇이든지 나눠서 함께 일을 할 때 더 큰 시너지 효과와 더 막대한 이익을 맛볼 수 있다.

 

 

2:17 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하고

 

 

  느헤미야는 동족들에게 선포하며 독려한다. 백성들과 지도자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용기가 생겼다. 느헤미야가 품은 비전, 민족을 살리는 비전, 하나님의 비전에 다들 동참하겠다고 일어섰다. 회복은 언제나 이러한 마음의 하나됨,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음과 마음이 하나가 될 때 10+10은 이론적으로는 20이지만, 50, 100의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느헤미야의 불타는 하나님을 향한, 예루살렘 성벽을 향한, 조국의 땅, 이스라엘을 향한 마음은 그가 4개월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며 그리고, 아닥사스다 왕에게 목숨을 걸고 허락을 받았다. 그는, 그리고 ‘현실에 발을 딛고’ 계획을 세운 것과 사전조사와 정보수집 이후에 사람들의 마음에 동기를 부여하고 있다.

 

 

(18)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전하였더니 그들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느헤미야는 비전에 사로잡힌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관심과 기도와 액션이 합심하는 효과를 불러왔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부정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인가? 아니면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인가? 우리 모두 꿈과 비전과 소망과 믿음의 영향력을 마음껏 끼치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길 바란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해서 모든 일이 형통한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마음이 하나가 되고 그리하여 일이 순탄하게 진행되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언제나 이런 일들은 우리 인생 가운데 있다. 느헤미야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느헤미야에게 산발랏과 도비야, 게셈은 이러한 느헤미야의 계획을 듣고 도우고자하기는커녕 위대한 제국 페르시아의 왕의 눈 밖에 날 일이 있냐고 하면서 오히려 책망하고 방해하기에 이르른다. 사람들의 상기된 꿈과 열정어린 계획 가운데 찬물을 끼얹는다. 언제나 이런 일들은 우리 주위에 산재해 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꿈과 용기를 부여잡는 결단력이 필요하다. 그러기에 관심-> 기도->그렇다면 이제 액션을 취하라! 행동하라!

 

  느헤미야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20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그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에게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 하였느니라

 

  함께 수고하지 않고 함께 마음을 모으지 않는 자에겐 아무런 권리도, 아무런 특권도 없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중요한 느헤미야의 말을 기억하자.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케 하시리니 그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느헤미야의 이러한 발언은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로 형통케 하실 것이다. 그러니 그의 종 우리가 일어나 무너진, 훼파된 성벽을, 특별새벽기도의 성벽을 건축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 경신교회의 모든 아름다운 사역, 장벽을 뛰어넘는, 사역을 완성하는, 소그룹(목장)을 정착시키는 성벽을 건축해 나갈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물론 어려움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일은 하나님의 일이기에 우리는 터널의 끝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아름다운 사역과 주의 일을 실행할 것이다. 느헤미야와 백성들이 성벽을 건축한 것처럼 말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느헤미야는 관심이 있었다!

  느헤미야는 금식과 기도로 모든 것을 준비했다. 신적인 준비가 있었다!

  느헤미야는 액션이 있었다! 인간적인 준비가 있었다. 그 결과 합심이 있었다!

  느헤미야는 현실에 발을 딛고 계획, 연구, 조사, 설계를 했다. 우리들도 믿음에 기초하여 이러한 치밀하고 계획성 있는 준비자들이 되자.

  

  느헤미야는 현실에 발을 딛고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사람들을 모으고 하나된 마음으로 일을 추진하고 행동하였다.

  하나님, 우리가 일어나 성벽을 건축하게 하소서!

 

 

느헤미야 2:17의 구절을 가지고 '일어나 성벽을 건축하자'는 주제로 설교를 포스팅했는데요. 함몰웅덩이 증상에 빠진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첫째, 관심, 둘째, 기도, 셋째, 액션 그리고 합심 이었다는 포커스를 가지고 메시지를 준비해봤습니다.

 


1) 고든 맥도날드,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 홍화혹 역(서울: IVP, 2008), 25-26.

2) 고든 맥도날드, 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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