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사사기.룻기

사사기 13장 1-8절, 16장4-6절, 16-22절,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by Message.K 2023. 4. 18.

구약성경 사사기의 삼손의 이야기는 13장부터 16장까지입니다. 삼손의 일대기를 한꺼번에 살펴보면서 그가 왜 일그러진 영웅이 되었는지 돌아보고 그 모습이 우리에게도 있었음을 살펴보는 포커스로 과거에 설교했던 내용을 포스팅합니다.

 

사사기 13-16장,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사사기 13-16장,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프롤로그...'현대판 삼손'이었던 '람보'영화에 환호했던 과거 소련의 관객들

아주 오래 전에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실베스터 스탤론이 주연한 유명한 영화 ‘람보’를 기억하는가? 냉전의 시대에 있어 하나의 거대한 스트레스와 기분전환을 위해서 더 없이 좋았던 영화였다. 그는 총을 맞아도 상처만 입을 뿐 죽지 않았고 적진의 한 가운데 오직 이 한 사람만이 단신으로, 홀로 뛰어들어 적을 다 때려 부수는 우리들의 영웅이 바로 람보였다. 적들은 개미떼처럼 몰려 와 이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지만 그는 결코 죽지 않은 불멸의 영웅이었던 것이다. 그는 달려 오는 수 많은 적들에게 보란 듯이 자기의 근육질의 육체를 자랑하며 굳굳히 일어선 채 기관총과 바주카포를 쏘아대는 그의 그 끄지지 않는 생명력-그것이 비록 비현실적인 장면임에도 불구하고-에 우리는 환호하며 즐거워한 기억이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 있다. 람보시리즈가 3탄까지 나왔는데 그 중에서 어느 한 편이라도 감상한 흔적이 여러분의 기억의 저편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의 입장에서 당연히 우리는 람보편이 되었기에 우리는 그 통쾌한 기분과 짜릿한 스릴을 만끽할 수 있지만 만약 람보에게, 그 유일한 미국인 장교 한 사람에게 총 맞아 죽는 베트콩이나 소련군의 입장에서 보면 얼토당토 않는 것이다. 언젠가 잡지에서 본 기억으로 ‘람보’라는 영화가 소련에서 뒤늦게 상영되게 되었는데 그 영화가 젊은이들을 환호케하고 열광케하여 흥행에 성공했다는 얘길 접했다. 헐리우드 영화의 위력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하지만 그 소련 젊은이들, 관객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이 그렇게 열광하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람보의 적으로 등장하는 무리는 바로 ‘소련군’이라는 것이다. 소련의 관객들은 자기 민족의 진영에 혈혈단신으로 뛰어들어 아군인 소련군을 모조리 죽이고 박살내는 그 미국인 ‘람보’를 그렇게 환대하는 것이 얼마나 매국적인 처사인가?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를 열광하는 그 사회주의 민족의 젊은이들이라지만 이런 현상은 참으로 얼토당토 하지 않은 일이다. 미국인들에게 람보는 그 당시에 ‘희대의 영웅’이라는 찬사를 받아 마땅하겠지만 소련의 입장에서는 람보는 ‘죽여 마땅할 영웅’이라는 것이다. 소련에서조차도 그렇게 람보 영화가 흥행을 하게 되었으니 람보는 소련에서도 영웅이 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람보는 소련인들에게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라는 표현을 써도 무방할 것이다. 그 근육질의 육체와 미끈한 얼굴, 마스크, 그의 그러한 육체에 버거울만한 다양한 무기들을 둘러맨 채 람보는 소련의 젊은이들에게 하나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오늘은 '고대판 람보'인 삼손이야기

오늘 우리가 살펴 볼 인물도 람보와 견줄만한 남아이다. 그는 바로 여러분이 잘 아는, 어린 시절 성경속에 ‘머리털, 머리카락’이라는 말만 나오면 우리의 뇌리를 때리고 지나가는 인물, 그 유명한 인물 ‘삼손’이 등장한다. 람보는 ‘현대판 삼손’이라면 삼손은 ‘고대판 람보’라 칭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한 삼손을 오늘 우리는 살펴볼 것이다. 그런데 왜 삼손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인가? 그 이유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여러분은 이미 삼손의 이야기의 전말을 다 알고 있으리라. 근데 만약 왜 삼손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인가? 질문하는 분이 있다면-정말 그 의미를 몰라서-찬찬히 저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주기를 바란다.

우리는 삼손을 먼저 살펴보기 전에 삼손의 이야기가 실린 이 성경책, 구약 359페이지에서 401페이지에 기록된 ‘사사기’라는 성경에 대해, 그 배경에 대해 잠시 살펴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본론...영적 진공상태 같은 사사 시대

<여호수아>와 <룻기> 사이에 위치해 있는 <사사기>는 시기적으로 ‘여호수아가 죽은 후(1;1)’로부터 ‘이스라엘에 왕’이 생기기 전(25;5)까지, 즉 출애굽과 군주 정치 사이의 기간을 다룬다. 모세와 여호수아에 의해 대표되는 권위의 시대와 다른 쪽으로는 다윗과 솔로몬에 의해 대표되던 권위의 시대 사이의 중간기 인 것이다. 마이클 윌코크는 이 시기를 표현하기를 ‘이스라엘은 마치 큰 벼랑 사이에 허약하게 흔들리면서 매달려 있는 밧줄을 타고 있는 듯이 보였다.’라고 했다.

 이 사사시대의 특징을 잘 대변해 주는 구절이 있다.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실로 가관이었던 시절이다. 사람들에게 있어 그들을 통치할 지도자, 왕이 없었고 그들의 영적인 무지와 무감각을 깨우치고 지적할 선지자도 없었던 것이다. 출애굽 당시의 그 위대한 지도자이며 리더였던 모세와 같은이도 여호수아와 같은 이도 없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영적인 진공상태라고나 할까? 이 사사 시대에는 하나님이 사사를 세우심을 통해서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조금 돌아오는가 싶더니 사사가 죽고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 버릴 때면 이스라엘은 여지없이 우상숭배와 타락의 길로 들어섰던 것이다. 사사기를 전체적으로 통독해보면 알겠지만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반역하고/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보응하고/그러자 이스라엘이 다시 회개하고/그러고 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겨 사사를 보내시는/ 이런 4가지의 단계가 반복된다.

 

반역/보응/회개/구원/

 

 

 

이러한 사이클이 계속적으로 반복되고 번복되기 때문에 성경 <사사기>를 읽는 독자는 사사기의 내용에 혀를 차며 혀를 내두를 지도 모를 일이다. 제가 언젠가 사사기로 ‘말씀묵상’Q.T하다가 그 반복적인 내용에 너무나 질려 짜증이 난 적도 있었다. 그 짜증은 ‘사사기’라는 성경에 대한 짜증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속적인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보란 듯이 내팽개치고는 죄의 굴레로, 죄악의 나락으로 끊임없이 달음박질하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것이었다.

출애굽기의 그 위대한 여정과 가나안 정복이라는 그 엄대한 사역을 모세와 여호수아, 이 두 굵직한 믿음의 거인들이 감당하였던 반면에 이 사사시대는 총 12명의 사사들이 등장한다. 옷니엘, 에훗, 삼갈, 드보라, 기드온, 돌라, 야일, 입다, 입산, 엘론, 압돈, 삼손/ 그 12번째 사사로 삼손이 등장하고 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우리 모두 삼손을 발자취를 추적하는 여행을 떠나보기로 하자. 삼손은 그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아주 특별한 인물일 것이라는 암시를 주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13장에서 읽은 일부분을 살펴보더라도 그런 냄새는 충분히 맡을 수 있다. 사사기를 쓴 기자는 그가 출생하기 전, 당시의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서술함으로써 그 당시의 정황을 설명하고 있다.

 

 

 

13:1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니라...

 

앞에서 말했던 반역/보응/회개/구원의 싸이클이 지금도 여지없이 돌아가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 다시 하나님을 무시하고 반역하고 배역하는 죄악에 빠져들고 있었다.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시지만 그들속에, 그들의 삶 속에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이나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그런 구석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이스라엘의 일곱 번 째 배교(3;5-7,12-14,4;1-3,6;1-2,8;33-35,10;6-9)는 사십년 간이라는 오랜 기간의 압제를 가져왔다. 역사는 아주 암울하고도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는 시기였다. 여러분이 사사기를 살펴보시면 알겠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사기 전편에서는 자신들의 죄악에 대한 참된 회개, 아니 적어도 자신들의 죄악에 대한 일말의 후회함이 있었다. 그러나 사사기 후편으로 가면서 그런 회개나 후회는 점점 더 희미해지고 있다. 사람들이 그만큼 죄악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흐릿해진 영적인 기상도를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친히 자기 백성들을 돌아보시는 광경을 목도하게 된다.

 

 

삼손의 등장배경

삼손의 등장은 다른 열 한명의 사사들과 아주 다르게 나타난다. 다른 사사들은 그 사람, 그러니깐 기드온이면 기드온 그 자신에게, 옷니엘이면 옷니엘 그 자신에게 친히 나타나셔서 그를 사사로 세우시지만 삼손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삼손의 출현은 삼손 그 자신에게가 아닌 그의 부모를 통해서 예고하고 있다는 것이다. V.2에 그의 부모의 이름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이야기는 시작되고 있다. ...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 중에 마노아라 이름하는 자가 있더라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더니...다른 사사들의 출현 배경을 살펴보면 여러분들도 쉽게 알 수 있겠지만 삼손의 출현은 아주 기이하게 출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노아와 그의 아내, 이 두 부부는 아주 경건한 부부였다.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이 있었던 자들이었다.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의 아내에게 임하였다.(V.3) 그러면서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는 희소식을 전한다. 이 부부에게는 어떤 연유에서든지 임신이 불가능한 상태였다라고 사사기 기자는 적고 있다.(..네가 본래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였으나...) 그러나 이러한 불임이라는 한계 상황을 뛰어 넘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아이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아이는 하나님께 바친 아이, 즉 나실인이라는 것이다. 아주 특별한 하나님의 사람이기에 특별히 지켜야 할 사항들을 지시한다.(V.4-5)이 지시사항은 단지 태어날 아이뿐만 아니라 그 어미에게도 쥐어진다.V.4...너는 삼가서...마시지 말며...먹지 말지니라(마노아의 아내에게 한 말)V.5...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태어날 아들에게 한 말)

 

 

 

삼손의 부모, 마노아 부부

이러한 기이한 소식을 전해들은 마노아의 아내는 너무나 놀라고 전율한 나머지 자기의 남편에게로 달려가서 자초지정을 얘기한다. 근데 중요한 것은 마노아가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반응하고 있느냐이다. 그는 아내의 말도 안되는 듯한 기이한 소식에 대해 ‘아내가 실성을 했냐’는 식의 질책이나 꾸짖음의 화를 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고 있는가? V.8마노아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 아내의 영적인 체험에 대해 토를 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면을 살펴보면 그 두 부부가 얼마나 영적 교감이 충만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함으로 또 다시 블레셋의 손아귀에 놀아나고 있을 때, 이스라엘 자손들은 죄악의 잠을 자고 있을 때 이 부부는 깨어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경건했다. 마노아의 기도내용을 살펴보면 더 가관이다.V.8주여 구하옵나니 주의 보내셨던 하나님의 사람을 우리에게 다시 임하게 하사 그로 우리가 그 낳을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게 하소서...마노아는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의 사실 여부를 가타부타 하지 않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다음의 일을 걱정하고 있다. 아이가 하나님의 아이요, 나실인이라면 그 애를 어떻게 교육하고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해 걱정하며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나타나셔서 부족한 인생에게 가르쳐달라는 것이다. 그러자 그 후에 어떤 일이 발생하였는가? V.9하나님이 마노아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여인이 밭에 앉았을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다시 그에게 임하셨으나...

 

 

 

삼손과 나실인의 규례

그 다음이야기는 그 하나님의 사자가 나실인에 대한 규율을 얘기하고 마노아와 그 아내는 그 사자에게 염소 새끼 한 마리를 취하여 제물로 드린다. 그것은 곧 불꽃이 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단 불꽃 가운데로 좇아 올라가는 장면과 함께 이 두 부부는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하심임을 깨닫게 된다. 그 나실인에 대한 법은 민수기 6;1-12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중에 일부를 소개하면,

 

 

V.3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의 초나 독주의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
V.4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 말지니...포도주나 포도즙이 악해서가 아니라, 감각적이고도 향락적인 삶을 표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V.5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삭도를 도무지 그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날이 차기까지 그는 거룩한 즉 그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할 것이며...머리털은 힘과 생명력을 상징하였다. 따라서 머리털을 자르지 않는다는 것은 힘과 정력을 하나님께 모두 드림을 뜻했다.
V.6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날 동안은 시체를 가까이하지 말 것이요...이는 죽은 시체와 접촉하는 것은 의식상 부정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은 일체 모든 도덕적 더러움 뿐만 아니라 의식적인 부정에서도 분리된 삶을 살아야 했다.
삼손은 이러한 불가능한 부모의 태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출생하게 된다. 그는 단지 자연적으로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초자연적으로 태어나게 된 하나님의 은혜의 사람인 것이다.
V.24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V.25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신이 비로소 그에게 감동하시니라

 

이러한 출생의 기이한 비밀을 안고 세상을 향해 태어난 삼손이었다. 그는 가망없는 어미의 태에서 출생했다. 그것은 곧 가망없는 이스라엘의 타락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시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삼손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자이다. 우리는 이 사사기에 마지막을 등장하는 사사, 열 두 번째 사사인 삼손은 아주 특출한 경우임을 알 수 있다.

 

 

 

삼손의 괴력이 나타난 라이프스토리

14장부터 시작해서 15장까지의 그의 삶의 파편들을 훑어보면 입이 쩍 벌어질 것이다. 그의 지나친 여성편력-그것도 이방여인 블레셋-,어린 사자를 염소새끼 찢듯이 찢어버리는 엄청난 괴력, 어리석고도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기로 인한 아스글론에서의 삼십 명을 쳐죽이고 겉옷을 노략한 사건, 여우 삼백 마리를 붙들어 꼬리와 꼬리에 횃불을 달고서 블레셋의 곡식 밭을 불바다로 만든 사건(기드온의 삼백용사보다 더 한 충격적인 사건이다. 이번에는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었다!), 나귀의 턱뼈로 그를 잡으러 온 블레셋 사람 일천 명을 홀로 죽인 사건...이 모든 사건들은 우리의 이해와 경험을 뛰어넘는 불가사이한 일이다. 정말 람보보다도 더한 삼손이다. 람보에게는 총이 있었지만 삼손에게는 맨 주먹 아니면 고작 나귀의 새 턱뼈였던 것이다. 한 편의 월트디즈니의 동화같은, 전설같은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사 시대에 내려진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기드온은 항아리와 횃불을 든 삼백 용사로서 미디안의 그 무수한 메뚜기 떼와 같은 무리들을 섬멸하는가 하면 삼갈은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이는가 하면(3;3), 에훗은 왼손잡이-히브리어로 저자는 ‘오른손을 사용하는데 제한을 받고 있었다’-였음에도 불구하고 자객으로 둔갑하여 모압 왕 에글론을 죽이고 모압 사람 일만 명 가량을 죽였다(3;12-31).삼손이 블레셋사람 일천명을 나귀의 새 턱뼈로 죽이고서 지쳐서 목이 말라 죽어갈 것만 같은 갈증에 시달릴 때, 그가 여호와께 구했을 때 우묵한 곳을 터치시니 물이 솟아나 삼손이 정신을 회복하고 소생케 된 그 광경을 보라.(15;14-20) 엔학고레 ‘부르짖는자의 샘’의 삼손을 보라!

 

 

 

이 모든 가망 없고 희망 없는 것들로 희망을 있게 하시고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보라! 죄인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보라! 더욱 풍성한 은혜를 보라! 롬5;20...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바울의 이 고백을 절실히 느끼게 하는 곳이 바로 이 사사기가 아닌가 싶다. 반역/보응/회개/구원...

 

 

 

삼손과 세 여자

삼손은 일생동안 세 명의 여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 첫 번째가 딤나의 블레셋 딸과 결혼할려다 파경에 이르게 되었고, 두 번째는 가사라는 지방의 한 기생이었다. 세 번째는 바로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는 들릴라이다.

16:4이후에 삼손이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 이름하는 여인을 사랑하매

 

삼손의 몰락을 예견하게끔 만드는 이 여인과의 만남은 삼손의 인생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들게 한다. 물론 그것은 삼손의 약점이었고 핸디캡이었다. 누군가 이 ‘삼손과 데릴라’ 이야기를 보면서 <남자는 여자를 잘 만나야 된다>라고 얘기할 수 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말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삼손에게 있어서는 ‘데릴라’라는 여자로 인한 문제만은 아니었다. 물론 들릴라는 삼손의 그 괴력의 비밀을 알아내는 대가로 은 일천 일백을 받을 수 있다는 것에 혹하는 ‘돈의 여자’였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삼손이 만났던 그 이방여자들은 다 똑같은 부류의 여자들이었다

 

 

 

그 첫 번째 여자인 블레셋 여자는 삼손에 대한 사랑보다 자기민족과 자기 가족과 자신의 안전에 더 염두를 둔 나머지 삼손을 유혹하여 겉옷 삼십 벌이 걸린 수수께기 문제의 해답을 자기 민족 블레셋 친구들에게 고자질해서 결국 결혼에 실패하게 되는가 하면 -결과론적으로 그녀와 그 아비의 집은 결국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불사름을 당하였다-, 두 번째 여자인 가사의 그 기생도 결국은 삼손을 두려워하는 무리들에게 삼손을 넘김으로써 배신의 열패감을 느꼈다. 이 세 번째 여자, 들릴라에 대해선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그는 삼손의 그 엄청난 힘의 근원이 어디에서 나오는지에 대한 집요한 추궁과 유혹-물론 그것은 들릴라의 단순한 호기심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라 ‘은 일천 일백’을 가지고 싶은 물질에 대한 욕망에서 출발되어졌다-으로 말미암아 속담에도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더니 3번 실패하고 4번째 성공하게 된다. 마치 김대중 대통령의 대선을 승리하는 그 여정처럼 말이다. 또 다시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에게 삼손을 팔아넘기는 비굴한 처사가 나타난다. 그는 결국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잡힘을 당하고 머리카락을 깍힌 채 눈이 빼임을 당하고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는 이빨 빠진 사자처럼, 발톱 잃은 독수리처럼 넉다운되어 있다. 삼손의 이름의 뜻/‘태양’,‘강한 자’,‘태양처럼 강한 자’는 어디에 있는가? 그처럼 휘황찬란한 힘의 용사였던 삼손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의 그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두려워한 나머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 있을 때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셨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창3:9)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삼손이 지나온 발자취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지 모르겠다. 어떻게 그 경건한 부모님의 가망없는 태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고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태어난 이 남아, 출생부터가 하나님의 은혜로 뒤범벅되어진 이 삼손이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말이다. 그가 시대를 잘못 타고 나서인가? 뭐 그런 말이 있지 않는가? 천재와 영웅은 아무리 특출나고 기가막힌 재능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시대를 잘 못 타고나면 허사라는 말...그러나 삼손은 시대를 잘 못 타고난 것도 재능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14장으로 돌아가서 얘기해야 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신에 의해 감동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딤나의 블레셋 딸 중 한 여자에게 특히 그의 주의를 끌게 되어진다. 데이비스는 삼손의 눈과 입이 쩍 벌어진 것을 상상해 보라고 권한다. “이제 여기에 진짜 여자가 있구나!” 저자는 세 절에서 세 번에 걸쳐 그 불미스러운 이름을 강조하면서(“그녀는 블레셋 사람이었다. ‘그녀는 블레셋 사람입니다’ 라고 삼손은 말했다. ‘그녀는 블레셋 사람이냐?’ 부모들은 말했다.”), 애국적인 이스라엘 사람에게 그것이 얼마나 적절하지 않은 결혼인가를 분명하게 말한다. 하나님의 그 엄중한 명령, 다른 이방 민족과는 절대 결혼하거나 피를 섟어서는 아니된다는 그 명령을 저버리게 된다. 삼손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무엇을 요구하시느냐가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요구하고 있느냐이다. 그는 그녀를 원한다는 사실뿐이었다.(14:3하)

 

 

 

그 시대가 그러했다. 사사기의 마지막 구절이 무엇인가?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1;25)...이것은 사사시대의 특징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 시대 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동일하다. 지나친 개인주의와 반권위주의적인 시대의 분위기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상업적인광고나 CF가 무엇을 말하는가? 자기 자신의 소견대로 행하는 것을 부추기고 있지 않는가? 제가 학생회 애들에게도 당부했지만 지금 우리나라를 강타하고 있는 영화 ‘타이타닉’은 예매를 해야만이 영화를 볼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만약 그 영화를 한 사람이 보면 외국으로 바로 2달러씩 유출된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가 집에 꼭꼭 숨겨두었던 금을 끌어 모아 금모으기 운동을 한 그 노고가 물거품이 된다고 매스컴에서는 경고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 영화를 보기 위해 줄 지어 서 있는 무리들이 아직도 있다는 것이다. 문구센터나 선물가게에 가면 전부 타이타닉포스터로 도배를 해 놓은 판이다.

 

 

 

다시, 삼손과 나실인 규례

삼손의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은 14:5에 딤나의 포도원으로 가는 발걸음에도 드러난다. 앞에서 나실인에 대한 금령을 말한 바 있는데 삼손은 포도원에 이르렀던 것이다. 민수기 6;3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의 초나 독주의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

V.4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 말지니

 

그 뿐 아니라 삼손은 어린 사자를 죽이는 사건에서도 그의 불순종이 은근하게 완곡한 표현으로 드러난다. V.8얼마 후에 삼손이 그 여자를 취하려고 다시 가더니 돌이켜 그 사자의 주검을 본 즉 사자의 몸에서 벌떼와 꿀이 있는지라 민수기6;6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날 동안은 시체를 가까이하지 말 것이요

 

 

삼손은 여기서 나실인이 지켜야 할 사항을 준수치 않고 있음을 발견한다. 마이클 윌코크는 이에 대해 이렇게 해석한다. ‘아마도 그는 스스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말하면서, 즉석에서 사자를 처리했던 것처럼 자기 양심을 처리했을 것이다. 그 두 가지란 첫째, 그 서원이 민수기 6장 시대 이래 개정되었으며-’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는 대신에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로 (13:7)-사자의 시체를 만지기는 했지만 그가 먹은 것은 벌의 꿀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그 서원은 그와 그의 어머니가 분담해서 지켜야 하는 것으로, ’시체‘부분은 그가 지켜야 할 몫이 아니라 그의 어머니가 지켜야 할 몫이라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삼손이 14:6에서 자신이 행한 일을 부모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사자에 대한 조심성때문이거나 포도원에 간 것을 수치스럽게 느껴서 일지 모르지만, 14:9에서 죽은 고기를 만진 것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은 수치와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한 추측이다’

특별히 주목할만한 것은 14장에서 내려갔다는 말이 5번씩이나 등장한다는 말이다.(V.1,5,7,10,19) 삼손도 요나처럼 은근히 내려가는 삶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민수기 6;6의 사항을 또 다시 범하게 되는데 그것은 나귀의 새 턱뼈로 블레셋 사람 일천명을 죽일때에도 드러난다. 성경은 분명히 ‘나귀의 새 턱뼈’라고 말한다. Dead donkey

 

 

삼손과 temptation: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

이처럼 삼손의 비극적인 종말을 성경은 이미 암시해 주고 있다.

그는 이러한 나실인의 금령, 규칙들-죽은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고, 포도주를 가까이 하지 말고,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중에서 다른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지만 오직 한 가지, 머리카락을 자르는 일에는 꼭 지켜야 겠다는 어떤 신념이나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다른 것들은 못 지켜도 괜챦지만 이것 하나 만은 결코 안 된다 라는 식의 생각이 삼손의 머리에 깊숙히 박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삶겨진 개구리 꼴이었다. 아무리 발버둥칠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삶겨진 개구리는 빠져 나오지 못 하는 것이다.

16:16에 삼손의 고민하며 번뇌하는 모습을 보라!...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들릴라(세상)이냐? 하나님이냐?/처절하게 고민하는 삼손을 보라.

삼손은 결국 들릴라에게 실토하고 만다. 그러고서 그가 취한 행동은 아비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들릴라의 무릎을 베고 잠에 빠져 들었다. 삼손은 이 때 깨달아야 했었다. 자신의 첫 번째 여자와 두 번째 여자에게 당하였던 그 배신과 속임수의 현혹됨을...그러나 삼손은 잠을 자고 있다.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영적인 수면에 빠져 있다. 망각의 몸부림을 치며 잠의 늪에 빠져 있다. 그리고서 삼손은 머리를 깍였고 그 엄청난 힘이 사라져 버렸다. 하나님은 그가 비록 나실인의 다른 규칙과 계명을 저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머리카락에 삭도를 대지 않겠다는 그 하나의 믿음을 보시고서라도 그에게 권능을 베푸셨다. 그가 바로 엔학고레의 삼손이었다. 그러나 그 믿음도 먼지가 되어 날려가 버리자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16;20...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여도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여기에 삼손의 무지가 있다. 얼마나 우스광스러운가? 힘이 있는 줄 알고 마구 발버둥치는 삼손을 상상해 보라. 정작 그에게는 힘의 근원이 상실되어 있었다. 그것은 머리털이 밀렸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한 갈피의 믿음이 들릴라를 향한, 세상을 향한 욕망에 의해 밀려 버렸기 때문이다. 삼손은 이제 더 이상의 괴력을 떨치는 거인이 아니라 보잘 것 없는 미물의 자연인에 불과하다. 그것은 바로 그 위에 임했던 하나님의 능력이 상실되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죤 밀턴은 ‘삼손(Samson Agonistes)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 마지막 장면을 단 한 줄로 된 드라마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곧 가사에서 눈 멀어 종들과 함께 맷돌에 있는 타락한 영웅이다.’

 

저는 오늘 우리의 이 극박하고도 힘겨운 IMF시대, 우리가 처한 이 환경과 상황을 생각하면서 마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삼손을 생각해냈다. 그 가망없는 시대에 가망없는 가정에 일말의 가망의 씨앗을 이 한 사람, 사사시대의 운명이 이 한 사람, 이 삼손에게 달려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망의 씨앗을 잘라버리고 밟아버리는 이 사람을 주목하라. ‘곧 가사에서 눈 멀어 종들과 함께 맷돌에 있는 타락한 영웅’을 보라.

‘곧 세상에서 눈 멀어 종들과 함께 맷돌에 있는 타락한 영웅, 하나님의 백성’을 보라.

저는 여기서 IMF위기는 그리스도인이 잘 못 살았기 때문이다라는 공식에 대해서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그 말은 우리가 너무나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러분, 삼손을 보라. 그 맷돌을 갈고 있는 처참한 삼손을 보라.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보라. 그 모습이 바로 우리이다.

 

 

 

에필로그....'힘이 있을 때 겸손해야 합니다'

삼손, 그 위대한 괴력의 소유자는 늘 행동했다. 그는 그의 보이는 육체의 힘으로 행동, 행동, 행동했던 것이다. 블레셋 딸에게 호감을 보이며 결혼을 서스름없이 부모에게 말하였던 것이나 딤나의 포도원에서 어린 사자가 단지 으르릉거리면서 그를 맞아 소르질렀다고 해서(14;5) 그를 찢어 죽어 버렸고 자기의 블레셋 동무들을 유쾌하게 만들기 위해 수수께기를 내어 오히려 진 결과를 초래하였고 첫 번째 여자인 자신의 블레셋 딸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여우 삼백 마리로 블레셋 곡식 밭을 불바다로 초토화시킨 일 등 이 모든 것은 삼손의 행동이었다. 삼손은 하용조 목사의 어느 설교집의 제목을 기억해야 했을 것이다. “힘이 있을 때 겸손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위기는 우리들의 그릇된 행동으로 인한 결과 이다.

이제는 자기의 소위를 돌아보며 성찰하며 생각할 시기이다. 삼손은 맷돌을 돌리면서 그의 멀어 버린 눈 앞에 지나온 시간들을 재상영하며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시며 삼손을 일으키신 하나님이 이 어둡고 칙칙한 그 옥중에서 맴돌을 돌리고 있는 삼손을 다시 쓰시기 위해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라.

V.22그의 머리털이 밀리운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구약성경 사사기 13-16장에 나타난 삼손의 일대기를 전반적으로 훑으면서 IMF당시의 위기의 상황과 결부하여 삼손의 이야기가 곧 우리의 이야기라고 연결하면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대한 메시지로 과거에 설교했던 내용입니다.

 

 

 

 

사사기 16장 28-31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오늘 저는 삼손의 최후의 장면이자, 삼손의 마지막 기도를 담은 고백을 살펴보고자 한다. 저는 개인적으로 삼손이 죽어가면서 최고의 회복, 무엇보다 ‘고백과 회복’, 이 두 주제를 동시에 잘

kkarl21.tistory.com

 

사사기 16장 주해

대학원 시절, 선택과목이었던 (아마도?) 수업시간에 교수님께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본문 1장을 택해서 주해하라는 과제가 나왔다. 본인은 '사사기 16장'을 선택 해나름대로 주해한 내용이

kkarl21.tistory.com

 

사사기 14장 묵상, 삼손을 통해 블레셋을 쳐부수기 시작하시는 하나님

구약성경 사사기 14장은 삼손이 성인이 되면서 사랑에 목매는, 좀 더 근본적으로는 성욕에 목매는 장면이 등장하는데요. 이런 욕망조차도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대면하게 됩니다. 한 개인

kkarl21.tistory.com

 

사사기 13장, 삼손의 출생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은 계속된다

구약성경 사사기 13-16장까지의 이야기는 사사 삼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3장은 삼손의 출생비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사사기가 그러하듯 삼손의 이야기는 보편적인 통념을 깨는 이야

kkarl21.tistory.com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