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는 사사시대를 다루고 있다. 혼란과 불신앙의 시대에 사사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출애굽의 감격과 가나안 정복의 용기를 잃어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으며 도덕적으로 타락한 시대였다. 이런 시대에 룻기는 한 가정을 주목하며 이야기를 다룬다. '여호와의 손'이라는 주제의 설교이다.
룻기 1:1-14 본문
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3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4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5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6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7 있던 곳에서 나오고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
8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9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10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하는지라
11 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12 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13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
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룻기를 기록한 두 가지 목적
사사기가 국가적이고 사회적인 시야에서 다루어진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면, 룻기는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한 가정사를 간단히 다루고 있다. 이 룻기가 기록된 것은 대체로 두 가지 목적이 있다.
- 첫째,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 개인의 생활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알려주기 위한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사건과 삶 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도록 교훈함으로서 삶을 내다보는 신앙적인 안목을 갖게 하기 위한 것이다.
- 둘째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로 안내하기 위해서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룻의 가계를 통해서 탄생하셨다. 우리는 여기서 이방 여인인 룻의 개종과 신앙을 통하여 메시야의 한 혈통이 되게 하신 사실과 이방 세계를 향하여 열려진 그리스도의 복음을 엿볼 수 있다.
나오미의 가족사
V.1-2...본문은 먼저 이 가족사가 자리하고 있는 역사의 배경을 희미하게나마 말해준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V.1)- 이 구절 하나 만을 가지고는 사사시대 중 어느때 이 일이 발생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아마 사사시대 초기일 가능성이 많다. 왜냐하면 룻과 결혼하게 되는 보아스는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벌하기 전에 보냈던 정탐꾼을 숨겨주었던 라합의 아들이기 때문이다(마1:5).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임에도 불구하고 흉년이 들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지니지 못하고 있을 때 약속된 축복들 대신에 재앙과 심판이 이르게 됨을 보여준다.
나오미와 엘리멜렉의 주소가 ‘유다 베들레헴’이라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먼 장래에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견이라도 하듯 이들의 주소가 베들레헴이었다. 엘리멜렉이란 이름은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이름은 세상의 왕은 없어도 하나님이 홀로 세상을 다스리시고 이스라엘을 통치하시는 현실을 기뻐하는 신앙고백을 담은 이름이다.
모압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엘리멜렉이 자신의 처 나오미와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흉년을 피하여 약속의 땅을 떠나 모압지방으로 내려갔다. 이것은 단순히 흉년을 피한 이삿길이 아니었다. 이에 대해선 조금 후에 다시 다루고자 한다.
V.6-14
나오미와 두 며느리가 모압으로부터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광경을 기록하고 있다. 흉년을 피하여 이스라엘을 떠나 모압으로 갔으나 그 땅에서 얻은 것은 남편의 죽음과 두 아들의 죽음 뿐이었다. 나오미의 슬픔은 배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남편 죽고 10년후에 두 아들의 죽음을 맛보았으니 말이다. 자식이 어미보다 먼저 죽어버린 불행이 발생했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의 우여곡절 속에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뼈대가 계속 이어져가고 있음을 누가 알았겠는가? 주위 사람들은 그들을‘과부천지’라고 비난하고 경멸하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을지도 모른다. 그 당시 성문화된 말씀은 없었지만 하나님의 법은 구전되었을 것이다. 입에서 입으로 내려온 그 조상들의 겪은 삶을 잠시나마 생각했을 것이다. 그나저나 나오미에겐 이러한 시련과 역경이 정말 견디기 힘든 것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나오미가 양식을 찾기 위해 가나안을 떠나 모압땅으로 내려왔다. 양식은 찾았지만 잃어버린 것이 너무나 많았다. 그것은 곧 절망이었다.
아마도 이스라엘 땅에 기근이 들었을 때 요단에 있는 모압 지방에는 풍족한 식량이 있었던 것 같다. 하나님은 가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더욱 풍성히 내려주시는 것 같은 때가 있다. “이스라엘이 그릇 그릇마다 비게 되었을때 모압은 예로부터 평안하였다”(렘 48:11). 이는 하나님이 모압을 더 사랑한 것이 아니라 저들은 이 세상에서 저들의 유업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에 뉴스위크 기사에는 “사라져가는 지옥Why We Need Hell, Too”이라는 제목을 내걸고 기사가 실렸다. 그 기사에는 (지옥은 이제 종교인들의 뇌리에서 잊혀진지 오래며, 오히려 영화관Multiplex 같은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소재일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현대 신학자들에 따르면 지옥은 영원한 고문실eternal torture chamber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단절을 의미한다는 것이라고 재해석하고 있다). 이것은 현대인들이 지옥을 어떻게 생각하고 자기나름대로 해석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렇게 현세적이고 세상적이고 <땅>중심적인 우리 시대의 모압인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유업을 받고 있는 것이다. 비그리스도인들이 더 잘 먹고, 더 잘 살고, 더 큰 소리 치고 그런 모습은 그들의 소망이 ‘이 땅’이기 때문에 더 그러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의 유업은 무언가?
우리가 누리게 되는 유업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다. 하나님은 당신이 다스리는 땅이 언제나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로 넘치고 그 백성들이 그것을 누리며 살기를 기뻐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그 백성들의 누림보다도 그것을 누리며 그 백성들이 ‘당신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느냐’하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들의 땅인 가나안이 이방사람들의 땅인 모압보다 더 고통스러운 땅이 되게도 하셨다. 우리는 비록 이 세상의 땅을 디디며 살지만, 하늘소망을 둔 <천상적 인물>들이다. 이 세계에 터전을 내리고 있는 듯하지만 우리의 소망은, 우리의 영원한 터전은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이전에 우리는 먼저 그 하나님 나라의 왕이시며 주인되시는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에 가는데 하나님과 친해지지 않고, 영원한 사귐이 없다면, 하나님의 임재가 없다면 그런 사람들에겐 하나님 나라도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지옥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하늘 백성이 되기 위한 순례자의 삶을 우리는 이 땅에서 살고 있음을 명심하라.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이르되...”(V.8)-말론과 기룐이 다 죽고 나자 나오미는 과부된 두 며느리에게 자기들의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권하였다. 두 며느리 중 오르바는 모압으로 돌아갔으나 룻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것은 인간적으로 룻의 효성과 헌신을 보여준다.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따라가기를 원했다. 또 한편 신적으로는 이것은 언약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는 그녀의 신앙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그렇게 좋더라는 룻의 고백이다. 그녀는 이방여인이었지만 믿음의 세계로 발을 내디디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나오미와 두 며느리와의 고부관계
우리는 여기서 오늘날의 어그러진 <고부관계>와 다른 나오미와 두 자부의 관계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오미는 항상 두 자부에게 미안함을 가지고 있었다. 이젠 그것을 표현하면서 위로하고 있다.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로 각각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V.8-9)
그러면서 입맞추고 두 자부와 시어머니가 소리를 높여 우는 장면이 나온다. 오르바와 룻이 두 아들과 결혼 후 십년에 두 아들의 죽음으로 같이 삶을 부대꼈던 세 여자의 동거함은 과히 쉽지만은 않았지만 그들에겐 사랑이 있었다. 그 사랑은 이별을 앞두고 서운함과 슬픔과 눈물로 표현되고 있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의 시어머니를 뛰어넘는 영적인 어미였던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나의 태중에 너의 남편될 아들들이 오히려 있느냐"(V.11)-이것은 이스라엘의 결혼제도를 가르쳐준다. 즉 결혼한 후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다른 형제가 과부된 그 형제의 아내(형수 혹은 제수)에게로 들어가서 손을 잇게 해주고 가계가 끊어지지 않게 만들어주는 율법적인 제도를 암시한다(신 25:5-6)..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V.13)
-나오미는 고난 가운데서 자신을 정죄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책망은 그녀에게 내려졌다. 나오미는 가나안 땅의 흉년과 그것을 피하기 위하여 이방의 땅으로 내려간 것과 거기에서 남편과 아들을 잃어버린 일련의 비극들을 하나님과긔 관계에서 돌아보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의 백성과 다른 것은 고통을 당할 때 그것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석하고 돌아볼 수 있는 신앙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나오미 가족들이 모압땅으로 내려간 것은 약속의 자손들이 이방의 땅으로 내려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환경과 상황과 조건들에 의해 내몰리게 될 때 하나님은 그것에 대해 반드시 징계하신다는 기억하자
아브라함이 흉년과 기근을 통하여 애굽 땅으로 내려간 것을 기억할 것이다. 생계를 위해 내려간 애굽이었지만 그 곳에선 언제나 두려움과 불안의 연속이었다. 사랑하는 아내 사라를 다른 이방의 왕에게 빼앗길 뻔한 위험에 처하기도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과 함께 한 약속을 지키지 않고 가나안 땅 세겜에 안주하여 정착하였을 때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가? 자신의 딸 디나가 겁탈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여러분, 다윗을 알지 않는가?
다윗은 사울의 추격전에서 도피하여 이방의 땅 블레셋으로 도주하였다. 블레셋왕으로부터 시글락이란 곳을 양도받아 그곳에서 자신의 가족들과 부하들을 정착시켰다. 하지만 다윗은 블레셋으로 가지 말았어야 했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사울은 일평생 블레셋과의 전쟁에 몰두하였다. 사울은 블레셋과 전쟁을 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블레셋왕 아기스는 이번 전쟁을 통하여 출신성분이 이스라엘이지만 용감한 장수 다윗을 자신의 편에 서게 함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사람으로 만들 수 있겠다는 기회로 생각하고 이를 좋게 여겼다. 그러나, 아기스의 입장과는 달리 신하들이 강력히 반대하고 일어섰다. 이스라엘 지방의 장수인 다윗이 어찌 블레셋의 전쟁에 선봉장으로 설 수 있단 말인가 하며 반기를 들었다. 그러자 더 가관인 것은 다윗의 반응이다.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내가 당신의 앞에 오늘까지 있는 동안에 당신이 종에게서 무엇을 보셨기에 나로 가서 내 주 왕의 원수와 싸우지 못하게 하시나이까”(삼상 29:8)
라고 대뜸 항의하고 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다윗이 만약 이 전장에서 자신의 조국인 이스라엘을 대항하여 싸웠다면, 비록 그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된 사울이었지만, 그는 이스라엘의 통일왕국의 군주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누가 <매국노>같이 자신의 나라와 원수되어 적장에서 싸운 사람을 자신들의 왕으로 모시고 싶은 맘이 있겠는가? 다윗은 낙담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블레셋 군대와 블레셋 민족을 기대었던 다윗의 맘이 상처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다윗의 행동은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가?
삼상 30장에서 시글락으로 돌아온 다윗은 기겁하게 된다. 아말렉 사람들이 침로하여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대소 여인들과 자신의 아내와 자녀들을 다 사로잡아 갔던 것이다. 황폐한 시글락을 보면서 삼상 30:4다윗과 그와 함께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 고 기술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백성들은 다윗을 돌로 쳐죽이자는 말까지 나왔다. 이러한 장면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끔 한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스라엘 위대한 군주로 만들어가시는 과정 가운데서 그를 기름부으신 것을 책임지고 환란에서 빠져나오게 하셨지만 그가 불순종하고 어그러진 길을 걸은 것에 대해 하나님은 그 책임을 물으셨고 그 불순종의 댓가를 찾아가시는 모습이 엿보인다. 이것은 다윗이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결과였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상사람들은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흥하고 잘 쇠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망한다.
아브라함이 그러했고, 야곱이 그러했고, 다윗이 그러했으며 오늘 본문에 나온 나오미의 가문이 그러했다. 성경속에 등장하는 수 많은 믿음의 선배들의 삶이 그러했다.
‘여호와의 손’-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인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인 것이다
하나님은 나오미의 가문을 통하여서 룻에게 믿음의 반열로 들어오게 하셨고 나오미의 역경과 환란으로 말미암아 모압지방에서 다시 유다지방으로 돌아오게 하셨고 또한 라합의 아들 보아스를 만나게 하셨다. 이방여인의 아들, 보아스와 이방여인인 룻을 짝지워주셨다. 이들은 하나님의 믿음의 반열에 들어서기로 결단 자손들이었다. 이 두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장면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그들이 바로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다윗의 증조부가 되는 영광을 누렸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들어가는 영광을 누렸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만지시고 터치하시고 개입하시는 환경과 상황들이 있는가? “여호와의 손”이라고 느끼는 그런 삶이 있는가?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라. 내 삶에 말씀대로 살지 않았던 불행한 역사가 없는지를...그리고 잠잠히 우리 자신의 잘못과 범죄를 회개하자.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선하게 역사해 달라고 간구하자. 주의 인도하심을 구하자.
룻기 1장 1-14절의 내용을 통해 나오미의 가족에 임했던 '여호와의 손'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한 가족을 향한 단순한 가족사를 넘어 구속사까지도 아우르고 있는 룻기의 서두 이야기를 가지고 설교한 내용이다. 하나님의 공의이자 하나님의 사랑이 여호와의 손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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