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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사사기.룻기

사사기 16장 주해

by Message.K 2022. 3. 18.

 

BST강해시리즈 중 사사기 의 표지를 찍은 사진
사사기 16장 주해

 

 

대학원 시절, 선택과목이었던 <성경해석과 설교>(아마도?) 수업시간에 교수님께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본문 1장을 택해서 주해하라는 과제가 나왔다. 본인은 '사사기 16장'을 선택 해나름대로 주해한 내용이 바로 결과물이다. 

 

 

 

-‘오, 우리의 변덕스러운 상태를 

보여주는 거울이여!’

 

 

 

Prologue 왜 사사기여야 하는가?

 

  구약의 사사기(Judges)는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므로(삿 21:25)라는 문구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는, 무정부(Anarchy) 상태의 시기이다. 가나안 정복 시기와 왕정 시대의 중간기였던, 이를테면 과도기적 시기였던 당시는 당연히 왕이 없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이란 것은 신정정치theocracy 체제의 이스라엘이란 국가에 진정한 하나님의 하나님 됨 Kingship의 부재(不在)를 말해 준다. 사람들마다 자기 안에 하나님 두기를 무엇보다도 싫어하였던,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던 시기였다. 이러한 사사기의 삶의 정황(Sitz im Leben)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현대인들의 정황과 너무나도 흡사하다. 사사기만이 내뿜는 배경의 장(場), context의 매력이 이 본문을 선택케 한 나의 첫 번째 동기motive라고 할 수 있다.

 

 

 

왜 16장이어야 하는가?

  사사기의 여러 본문들 가운데 늘 내 맘에 와서 비극적 향수를 뿌리는 대목은 아마 사사기 16장의 삼손의 사랑과 최후에 관한 기록일 것이다. 지극히 인간적인 애정과 지극히 신적인 파워를 느끼게끔 한다. 그러기에 나는 개인적으로 사사기 16장가장 인간적이면서도 가장 신적인 본문text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오늘날 시대의 문화코드의 주된 테마는 사랑성(性)일 것이다. 사랑은 우리의 생이 다하는 날까지,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영원히 우리들의 주된 화두(話頭) 일 것이다. 이런 테마들이 담긴 16장의 text가 주는 매력이 이 본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나의 두 번째 동기라고 하겠다.

 

  이러한 두 가지 개인적인 동기에 의해 사사기 16장을 주해하게 되었다. 밀턴(Milton)은 오, 우리의 변덕스러운 상태를 보여주는 거울이여!라고 삼손에 대해 언급했다. 그렇다면 그 거울을 한 번 들여다 보자.

 

 

NKJ 16:1. Now Samson went to Gaza and saw a harlot there, and went in to her.

 

וַיֵּ֥לֶךְ שִׁמְשֹׁ֖ון עַזָּ֑תָה וַיַּרְא־שָׁם֙ אִשָּׁ֣ה זֹונָ֔ה וַיָּבֹ֖א אֵלֶֽיהָ׃

 

 

 

  삼손은 나실인이고 하나님께 구별된 사람이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야 할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이방의 땅, 가사에 와 있다. 역사적인 구도에서 블레셋과 이스라엘은 그리 원만한 관계를 가지지 못했으며, 더 나아가 적대적인 관계에 놓여 있었다. 그러기에 삼손이 아무리 블레셋 이웃과의 관계에서 마음이 편하게 느낀다 하더라도 삼손 자손이 결코 환영받지는 못할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거기에 있었다. 14:1-4에서 보면 삼손이 딤나로 내려가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거기에 있는 블레셋 처녀들 가운데 한 명이 특히 그의 주의를 끈다. Davis는 삼손의 눈과 입이 쩍 벌어진 것을 상상해 보라고 권한다. 이제 여기에 진짜 여자가 있구나! 저자는 세 절에서 세 번에 걸쳐 그 불미스러운 이름을 강조하면서(그녀는 블레셋 사람이었다. 그녀는 블레셋 사람입니다’라고 삼손은 말했다. 그녀는 블레셋 사람이냐? 부모들은 말했다), 애국적인 이스라엘 사람에게 그것이 얼마나 적절하지 않은 결혼인가를 분명하게 말한다. 그러나, 삼손에게 중요한 것이라고는 그가 그녀를 원한다는 사실뿐이다(14:3하).

 

 

 

고대 근동 전역에서 결혼은 상대방에게 연정을 느끼는 두 사람을 짝지어 주는 것이기보다는, 가문의 지위와 관련된 씨족 간의 협력(종종 경제적인 동기가 개입된)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그러한 협력 관계를 정하는 일은 가장에게 달려 있었다. 언제, 누구와 결혼할 것인지는 부모가 결정했다. 또한 같은 부족이나 마을 출신의 사람과 결혼하는 동족결혼이 흔한 관행이었다. 이러한 전통적인 관행을 무시하고 자신만의 욕망과 생각을 좇아 결혼을 감행한 삼손이라는 인물은 긍정적으로 보자면, 독립심이 충만한 것이고, 부정적으로 보자면, 방종의 극치를 달리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나실인이 아니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이러한 평가가 어느 정도 구색이 맞춰지겠지만 불행히도 그는 나실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혼을 시도한 것은 그의 믿음의 위치가 어디 있는지 되묻지 아니할 수 없다. 어쩌면 삼손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있지 않을 때 그는 여느 이스라엘 사람과 똑같이 되었으며, 대부분의 시간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삼손은 14장에서 시도한 블레셋 여자와의 결혼이 실패하고, 16:1에서 또다시 블레셋 가사로 내려왔다. 그가 공적인 사역을 위해서 그곳에 가지 않았고 또한 그는 그 블레셋 여자가 직업적인 매춘부인지를 알고 들어갔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어떤 측면에서 사사인 삼손은 공적인 사역을 등한시하며 딴짓을 하고 있는 반면에 이방 기생 여인은 자신의 공적인 직업의 일을 충실히 하고 있는 면은 대조적이라 할 수 있겠다. 

  기생으로 번역된 조나간음하다, 매춘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자나()의 능동 분사 여성형이다. 이것은 본절에 나오는 기생이 매춘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직업적인 창녀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창 38:15; 수 2:1). 1절의 동사만을 본다면 ‘…가서, 보고, 들어갔다 … 들어갔다’이다. 삼손이 이런 ‘감 went to‘봄 saw’은 곧 ‘‘들어 감 went in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행동들이다. 그가 가지 않았다면 보지 않았을 것이고, 보지 않았다면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들어감은 현대인의 성경에서 그 의미가 잘 드러난다.

 

 

어느 날 삼손은 가사로 가서 그곳의 어떤 창녀를 보고 그녀의 침실로 들어갔다

 

 

 

  원문상으로 보더라도 그에게로 들어갔더니로 번역된 ‘‘와야보 엘레하는 남성이 여성과 성관계를 맺으러 침실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삼손의 치명적인 약점이 바로 여성에 대한 욕망’ 임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위대한 영웅, 삼손의 아킬레스 건은 바로 성적인 욕망(Sexual desire; Libido)이었다. 그의 욕망은 블레셋의 평범한 처녀를 지나 블레셋의 매춘부에게로 넘어가고 있다. 거룩한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여인과 가까이해서는 안되었다. 그러나 삼손은 적의 땅에서 창기와 함께 정욕을 채우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삼손의 이러한 처사는 우발적이거나 돌발적인 행위가 아니라 이미 죄가 축척된 과정의 결과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삼손은 14:18-9에 그 여자를 취하려고 다시 가며, 사자의 몸에 벌떼와 꿀이 있는 것을 보고는, 분명 나실인의 서약을 저버린다. 아마도 그는 스스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말하면서, 즉석에서 사자를 처리했던 것처럼 자기 양심을 즉석에서 처리했을 것이다. 그 두 가지란 첫째, 그 서원이 민수기 6장 시대 이래 개정되었으며-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는 대신에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로(13:7)-사자의 시체를 만지기는 했지만 그가 먹은 것은 벌의 꿀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 그 서원은 그와 그의 어머니가 분담해서 지켜야 할 몫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삼손이 14:6에서 자신이 행한 일을 부모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사자에 대한 조심성 때문이거나 포도원에 간 것을 수치스럽게 느껴서일지 모르지만, 14:9에서 죽은 고기를 만진 것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은 수치와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한 추측이다. 또한 그는 술이 많이 소모되는 결혼식 잔치를 베풀었다(14:10). 더욱이 그는 나귀의 새 턱뼈로 블레셋 인들을 살상했다. 성경 기자는 여기서 나귀 턱뼈가 새것, 싱싱한 것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또 한 번 나실인으로서 부정한 것을 멀리하지 않았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가 있다.

 

 

NKJ 16:2 When the Gazites were told, "Samson has come here!" they surrounded the place and lay in wait for him all night at the gate of the city. They were quiet all night, saying, "In the morning, when it is daylight, we will kill him."

 

לַֽעַזָּתִ֣ים׀ לֵאמֹ֗ר בָּ֤א שִׁמְשֹׁון֙ הֵ֔נָּה וַיָּסֹ֛בּוּ וַיֶּאֶרְבוּ־לֹ֥ו כָל־הַלַּ֖יְלָה בְּשַׁ֣עַר הָעִ֑יר וַיִּתְחָרְשׁ֤וּ כָל־הַלַּ֨יְלָה֙ לֵאמֹ֔ר

עַד־אֹ֥ור הַבֹּ֖קֶר וַהֲרְגְנֻֽהוּ׃

 

 

레온 모리스는 사사 시대의 가장 심각한 존재가 블레셋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힘의 장사, 블레셋의 가장 적대적인 원수 삼손의 등장은 세인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삼손 13장부터 자신의 이름과 명성을 널리 퍼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손은 반 세기 이후에 등장하는 블레셋의 영웅, 골리앗을 연상케 한다. 블레셋 인들은 삼손이 묵고 있는 거처를 포위했다. 그리고 밤새 매복한 채로 기습작전을 세웠다. 삼손의 괴력에 대한 두려움을 그들은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블레셋 인들의 간장을 녹아내리게 할 정도로 충분한 것이었다. 15장의 엔학고레의 삼손, 일천 명을 죽인 삼손의 괴력은 3절에서도 또다시 입증된다.

 

 

NKJ 16:3 And Samson lay low till midnight; then he arose at midnight, took hold of the doors of the gate of the city and the two gateposts, pulled them up, bar and all, put them on his shoulders, and carried them to the top of the hill that faces Hebron.

 

וַיִּשְׁכַּ֣ב שִׁמְשֹׁון֮ עַד־חֲצִ֣י הַלַּיְלָה֒ וַיָּ֣קָם׀ בַּחֲצִ֣י הַלַּ֗יְלָה וַיֶּאֱחֹ֞ז בְּדַלְתֹ֤ות שַֽׁעַר־הָעִיר֙ וּבִשְׁתֵּ֣י הַמְּזוּזֹ֔ות וַיִּסָּעֵם֙

עִֽם־הַבְּרִ֔יחַ וַיָּ֖שֶׂם עַל־כְּתֵפָ֑יו וַֽיַּעֲלֵם֙ אֶל־רֹ֣אשׁ הָהָ֔ר אֲשֶׁ֖ר עַל־פְּנֵ֥י חֶבְרֹֽון׃ פ

 

 

 

  밤중까지에서 에 해당되는 하치분리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하차()에서 파생되어 절반, ‘한가운데’라는 의미를 가진 명사이다. 이러한 표현으로 보아 삼손은 밤에 깊이 잠들었다가 문득 일어난 것이 아니라, 사전에 이미 블레셋 사람들의 음모를 알고 한밤중까지 기다렸던 것으로 보인다. 삼손이 어떻게 자신을 죽이려는 블레셋 사람들의 음모를 눈치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과거 가나안 정복 시대 여리고에 살던 기생 라합이 정탐꾼들에게 우호적이었던 것처럼 호의를 품고 가르쳐 주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수 2:16). 그러나 이러한 추측은 다소 가능성이 희박한 견해이다. 비록 삼손이 창녀, 즉 기생의 집에 출입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기 때문에 삼손은 의도적으로 잠을 자지 않고 밤에 일어나 블레셋 인들에게달밤에 체조를 한 것이었단 말인가? 물론 이전에 블레셋 딸 중의 한 여자를 좋아한 삼손의 연정을 통해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서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던(14:4) 그때의 상황과 비슷한 경우라고 하기엔 설득력이 좀 부족하다. 어떠한 동기에서 출발했던지 간에 삼손은 ‘‘성 문짝들과 두 설주와 빗장을 빼어 헤브론 앞산 꼭대기까지 갔’다.

 

 

  한편 헤브론연합, 교제를 의미하는 명사 헤베르()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결합이란 이름 뜻을 가진 성읍이다. 헤브론은 삼손이 간밤에 머물렀던 가사에서 동동 북쪽으로 약 60km,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남남서쪽으로 약 30k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해 있는 유다 지파의 성읍으로서 해발 927m의 높은 산악 도시이다(수 15:13). 이곳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중요한 역사적, 종교적인 의미를 지녀왔다. 즉 거기에는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사라, 이삭, 리브가, 야곱, 그리고 레아가 묻혀 있었다(창 49:31; 50:13). 또한 그곳은 믿음의 용사 갈렙이 이스라엘을 두렵게 했던 아낙 자손을 몰아내고 정복한 도시로서(수 14:6-15) 믿음의 힘이 어떤 것인지 보여 준 도시였다. 이처럼 헤브론은 이스라엘 민족의 뿌리가 보존되어 있으며,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상징과도 같은 도시였다.

 

 

  당시 성문은 그 도시의 힘이나 민족의 국력을 상징하였다(창 22:17; 24:60). 이러한 상징성을 지닌 성문을, 그것도 삼손 혼자서 그 무거운 성문 전체를 메고 갔다는 것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큰 공포를 주고도 남는 일이었다. 또한 삼손이 이러한 성문을 유다, 특히 역사. 종교적으로 상징성이 강한 헤브론 성읍 앞에 있는 한 산으로 가져갔다는 것은 블레셋이 언젠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진멸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가시적인 행위로 추정할 수도 있다.

 

 

NKJ 16:4 Afterward it happened that he loved a woman in the Valley of Sorek, whose name was Delilah.

 

וַֽיְהִי֙ אַחֲרֵי־כֵ֔ן וַיֶּאֱהַ֥ב אִשָּׁ֖ה בְּנַ֣חַל שֹׂרֵ֑ק וּשְׁמָ֖הּ דְּלִילָֽה׃

 

 

 

  이 대목은 사사기에 있어 가장 유명한 이야기이다. 들릴라는 아름답지만 믿을 수 없고, 삼손은 강하지만 약하며, 그 큰 비극은 그 후 종종 회화와 음악과 영화에 등장해 왔다. 인간사에 있어 가장 많이 회자되는 테마는 바로 사랑이 아닐까? 삼손과 들릴라의 러브 스토리는 소렉 골짜기에서 이뤄졌다.

 

 

  소렉 골짜기는 삼손의 활동이 대부분 이루어진 지역이다. 삼손은 여기서 욕망이 아닌 사랑을 만난다. 삼손이 사랑한다고 언급한 여인은 들릴라뿐이다. 블레셋 인들이 삼손에게 던진 질문 형식의 수수께끼의 대답은 삼손의 사랑 행각의 위험성을 잘 드러낸다. 무엇이 꿀보다 달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한가? 그것은 사랑이 아닌가? 삼손은 이미 14-15장에서 겪은 사건으로 말미암아 어떠한 형태의 감정적인 개입(sentimental involvement)이든, 그의 사랑의 증거를 제공하기 위해 다시금 설득당하는 어떤 상황들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삼손은 또다시 허물어지고 있다. 적과의 동침과 같은 이 사랑은 삼손에게 치명적인 데미지를 가져오게 된다. 여기서 위기의 삼손을 우린 목도하게 된다.

 

 

 

  지금까지 삼손과 관계된 여인은 딤나에서 결혼한 여자와 가사의 기생 등 모두 두 명이었으나 성경에는 그녀들의 이름이 명시되지 않았다(14:2,3,10; 16:1). 이는 고대 시대는 남성 위주의 사회였으므로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여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렉 골짜기에 살고 있는 여인, 이제 삼손이 사랑하여 그로 인하여 삼손의 운명이 판가름 나게 될 여인의 이름이 본문에 소개되고 있다. 이는 그녀가 삼손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여자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이름 뗄릴라에는 삼손의 장래 문제에 관한 암시가 담겨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들릴라로 번역된 뗄릴라~에 매달리다(잠 26:7), 혹은 연약하다(사 38:14)는 의미를 가진 동사 딸랄()에서 유래한 명사형으로서 매달린 자, 혹은 약한 자, 약하게 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먼저 뗄릴라매달린 자라는 의미라면 이는 삼손의 힘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기 위해서 날마다 졸라대(V.16) 결국 그 비밀을 알아낸 그녀의 기질을 암시하며, 약한 자약하게 하는 자라는 의미라면 자신의 여성적인 매력과 연약한 모습을 이용하여 결국 삼손의 비밀을 알아내 그의 머리털을 잘라 그를 약하게 만든 그녀의 행적(V.19)을 암시한다고 볼 수도 있다. 또한 만약 그 이름을 아람어 지시 대명사 드()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라옐라()가 결합된 것으로 본다면 들릴라는 밤의 여인(she of the night)이란 이름 뜻을 가진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는 그녀의 천박한 도덕성과 더불어 작은 태양이란 뜻이 있는 삼손의 빛을 어두움으로 감싸버리는 그녀의 역할을 암시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처럼 삼손이 생애 마지막으로 사랑한 여인 뗄릴라의 이름 속에는 삼손에게 치명타를 줄 수 있는 독소가 숨겨져 있었으나, 사랑에 눈멀고 영적 감각이 상실된 삼손으로서는 그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뗄릴라가 셈어로는 ~를 신봉하는 자라는 의미로 보고 그녀가 이방 신전에서 몸을 파는 신전 창기였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나 확인되지 않는다.

 

 

NKJ 16:5 And the lords of the Philistines came up to her and said to her, "Entice him, and find out where his great strength lies, and by what means we may overpower him, that we may bind him to afflict him; and every one of us will give you eleven hundred pieces of silver."

 

וַיַּעֲל֨וּ אֵלֶ֜יהָ סַרְנֵ֣י פְלִשְׁתִּ֗ים וַיֹּ֨אמְרוּ לָ֜הּ פַּתִּ֣י אֹותֹ֗ו וּרְאִי֙ בַּמֶּה֙ כֹּחֹ֣ו גָדֹ֔ול וּבַמֶּה֙ נ֣וּכַל לֹ֔ו וַאֲסַרְנֻ֖הוּ לְעַנֹּתֹ֑ו וַאֲנַ֨חְנוּ֙

נִתַּן־לָ֔ךְ אִ֕ישׁ אֶ֥לֶף וּמֵאָ֖ה כָּֽסֶף׃

 

 

 

  이미 많은 상처를 입은 블레셋 인들로서는 자기들의 도시에 와서 둥지를 튼 삼손이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블레셋의 지도자들은 삼손의 힘의 근원, 비밀을 캐내어서 그것을 제거하기를 원했다. 삼손의 제거는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자기 손아귀에 넣고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헤게모니를 획득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이 큰 힘을 소유한 비결이 있어서 그것을 발견한다면 그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데 사용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은 그들이 초자연적인 혹은 마술적인 요소들이 삼손의 능력의 원천이라고 여겼음을 보여 준다. 자신을 결박하라는 불가사의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아 삼손은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현대의 미신에서 늑대 인간은 은으로 된 총알로만 죽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대 전통에서는 특정한 물질이 마술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초자연적 현상을 방해하는 데 사용할 수 있었다. 이것은 히타이트 문헌에 나온 접촉 및 전이 의식이라는 마술 범주에 들어간다. 이런 의식들에서는 양털이나, 여러 가지 색 또는 재료로 된 노끈을 사용해서 마술적 속성을 중화시켰다.

  방백이라고 번역된 싸르네군주라는 뜻을 가진 명사 쎄렌()의 복수 연계형이다. 이는 블레셋의 다섯 도시(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 가드, 가사)를 다스리던 다섯 군주들을 가리킨다. 즉 명사 쎄렌은 블레셋 족속이 다윗에 의해 정복되기 전까지 그들의 영토를 다스리던 지배층이었다. 이들은 행정 사법권을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군사권도 가지고 있었다. 이들 쎄렌이 다스리는 도시는 그 주변의 영토들과 함께 블레셋 근린 동맹을 형성했다(3:3; 수 13:3). 블레셋 족속은 삼손 한 사람을 잡으려고 다섯 방백이 모두 모일만큼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으며, 이번 기회에 삼손을 제거하려는 확고한 결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블레셋 인들은 삼손의 비밀을 캐내고자 들릴라를 매수하는 작전을 세운다. 그것은 은 일천 일백이라는 돈이었다. 은 일천 일백은 엄청나게 많은 돈으로 왕의 몸값에 해당하는 금액이다(삼하 18:12). 노동자의 1년 평균 임금이 10세겔이고 넓은 면적의 땅에 대해 지불했던 돈이 400-600세겔이었던 것과 비교해 보라. 5,500세겔은 평균 연봉의 550배에 해당했을 것이다. 오늘날 평균 연봉을 3천만 원으로 잡으면, 당시의 이러한 제안은 165억 원에 해당될 것이다. 계산법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확실한 사실은 삼손의 이중첩자 노릇을 하는 대가로 들릴라는 억대의 돈을 거머쥘 수 있다는 것이며, 그 돈은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여인의 마음을 흔들기에 부족함이 없는 액수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고려해 볼만한 액수(considerable sum)였다.

 

 

NKJ 16:6 So Delilah said to Samson, "Please tell me where your great strength lies, and with what you may be bound to afflict you."

 

וַתֹּ֤אמֶר דְּלִילָה֙ אֶל־שִׁמְשֹׁ֔ון הַגִּֽידָה־נָּ֣א לִ֔י בַּמֶּ֖ה כֹּחֲךָ֣ גָדֹ֑ול וּבַמֶּ֥ה תֵאָסֵ֖ר לְעַנֹּותֶֽךָ׃

 

 

 

 

삼손을 향한 들릴라의 집요한 작전의 줄달음이 시작되고 있다. 삼손은 들릴라를 지극히 사랑하였다. 예전의 블레셋 처녀와의 결혼 가운데서 어느 정도 삼손의 감정이 동요되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이미 과거의 사건이 되었고 지금 삼손은 들릴라라는 한 여자에게 푹 빠져 있다. 반면에 들릴라는 어떠한가? 들릴라는 과연 삼손을 사랑하였을까? 삼손을 사랑하였다면 왜 삼손을 배신하는 이러한 작전을 구사하는가? 삼손을 사랑하긴 사랑하였지만 삼손처럼 사랑에 눈이 멀지 않고 거액의 돈에 눈이 멀만큼 교활한 여자였다고 해석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이상(idea)에 자신을 던지기보다 현실에 자신을 던지는 아주 현실적인 작부였다고 판단하는 것이 낫겠다.

 

 

NKJ 16:7 And Samson said to her, "If they bind me with seven fresh bowstrings, not yet dried, then I shall become weak, and be like any other man."

 

וַיֹּ֤אמֶר אֵלֶ֨יהָ֙ שִׁמְשֹׁ֔ון אִם־יַאַסְרֻ֗נִי בְּשִׁבְעָ֛ה יְתָרִ֥ים לַחִ֖ים אֲשֶׁ֣ר לֹא־חֹרָ֖בוּ וְחָלִ֥יתִי וְהָיִ֖יתִי כְּאַחַ֥ד הָאָדָֽם׃

 

 

 

마르지 아니한 푸른 칡 일곱으로 나를 결박하라는 삼손의 말은 그럴듯해 보였다. 당시의 7(일곱)이란 숫자는 완전을 의미한다고 여겼고 무언가 마술적인 요소가 개입되었음을 시사해준다. 또한 칡덩굴은 소렉 골짜기에 흔했던 식물이었다. 삼손은 들릴라의 질문이 하나의 사랑의 속삭임으로 들렸을 것이다. 들릴라의 간교한 계략을 눈치채지 못한 삼손은 사랑에 눈멀어 있었지만, 나실인의 서약을 존중하는 마음은 여전히 희미하게나마 가지고 있었으며, 그 비밀을 누설하느니 차라리 거짓말로 둘러대는 것이 쉬운 해결책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NKJ 16:8 So the lords of the Philistines brought up to her seven fresh bowstrings, not yet dried, and she bound him with them.

 

וַיַּעֲלוּ־לָ֞הּ סַרְנֵ֣י פְלִשְׁתִּ֗ים שִׁבְעָ֛ה יְתָרִ֥ים לַחִ֖ים אֲשֶׁ֣ר לֹא־חֹרָ֑בוּ וַתַּאַסְרֵ֖הוּ בָּהֶֽם׃

 

 

 

블레셋 사람들은 들릴라의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해 옮겼다.

 

 

NKJ 16:9 Now men were lying in wait, staying with her in the room. And she said to him, "The Philistines are upon you, Samson!" But he broke the bowstrings as a strand of yarn breaks when it touches fire. So the secret of his strength was not known.

 

וְהָאֹרֵ֗ב יֹשֵׁ֥ב לָהּ֙ בַּחֶ֔דֶר וַתֹּ֣אמֶר אֵלָ֔יו פְּלִשְׁתִּ֥ים עָלֶ֖יךָ שִׁמְשֹׁ֑ון וַיְנַתֵּק֙ אֶת־הַיְתָרִ֔ים כַּאֲשֶׁ֨ר יִנָּתֵ֤ק פְּתִֽיל־הַנְּעֹ֨רֶת֙

בַּהֲרִיחֹ֣ו אֵ֔שׁ וְלֹ֥א נֹודַ֖ע כֹּחֹֽו׃

 

 

 

빠헤데르~안에라는 뜻의 전치사 뻬()와 전치사가 오면 자음은 사라지고 모음만 남는 정관사 하(), 침실이라는 뜻을 가진 명사 헤데르()가 결합된 형태이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 번역되지 않은 라흐그녀에게 속한이라는 의미로서 본문의 내실이 들릴라 전용 침실임을 보여준다. 여기서 매복하는 사람이 단수형으로 사용되었지만 의미상으로 볼 때 집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들릴라는 삼손을 일곱 개의 줄로 묶어 두어 힘을 잃게 되면 삼손을 공격하여 체포하기 위해 블레셋 사람들을 불러들여 자기 침실에 매복시켰던 것이다.  블레셋 인들은삼손이 소유한 힘의 근원, 비밀이 아직 검증되지 아니한 정보이기에 아주 조심스럽게 경계하며 삼손의 행동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하지만 삼손은 블레셋인이 들이닥친 소식을 듣고선 자신을 결박하고 있던 칡넝쿨을 간단하게 끊어버렸던 것이다. 삼손의 힘의 근본은 여전히 베일에 쌓여 있게 된다.

 

 

NKJ 16:10 Then Delilah said to Samson, "Look, you have mocked me and told me lies. Now, please tell me what you may be bound with."

 

וַתֹּ֤אמֶר דְּלִילָה֙ אֶל־שִׁמְשֹׁ֔ון הִנֵּה֙ הֵתַ֣לְתָּ בִּ֔י וַתְּדַבֵּ֥ר אֵלַ֖י כְּזָבִ֑ים עַתָּה֙ הַגִּֽידָה־נָּ֣א לִ֔י בַּמֶּ֖ה תֵּאָסֵֽר׃

 

 

 

  들릴라의 교묘한 두 번째 유혹이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 헤탈르타속이다(창 31:7), 조롱하다(왕상 18:27)라는 뜻의 하탈()의 사역 능동형(Hphil) 완료 2인칭 단수형이다. 동사 하탈은 남을 속여 가볍게 취급한다는 뜻과 모욕을 주다는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들릴라는 이런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삼손이 자기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몹시 마음이 상한 것처럼 가장하여 계속하여 삼손의 힘의 비밀을 알아내려고 했다.

 

 

NKJ 16:11 So he said to her, "If they bind me securely with new ropes that have never been used, then I shall become weak, and be like any other man."

 

וַיֹּ֣אמֶר אֵלֶ֔יהָ אִם־אָסֹ֤ור יַאַסְר֨וּנִי֙ בַּעֲבֹתִ֣ים חֲדָשִׁ֔ים אֲשֶׁ֛ר לֹֽא־נַעֲשָׂ֥ה בָהֶ֖ם מְלָאכָ֑ה וְחָלִ֥יתִי וְהָיִ֖יתִי כְּאַחַ֥ד הָאָדָֽם׃

 

 

 

  새 줄은 이집트 무덤들에서는 녹색 파피루스나 대추야자 섬유질로 만든 줄들이 보존되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스라엘에서는 사막의 관목인 참새 풀 줄기가 가장 적당하고 구하기 쉬운 재료 중 하나였다. 새 줄은 비교적 튼튼하여 더 탄력이 있었을 것이다. 삼손이 이런 사항들을 고려하여 이야기하기보다는 자신이 처한 곤궁-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해야 하는 처지-을 모면하기 위해 둘러댄 궁여지책이었다. 신비적인 무언가가 있다는 블레셋 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거짓말에 불과했다. 또한 블레셋 인들은 명백하게도 이 방법을 이미 유다 사람들이 사용했던 사실을 몰랐으며 간과했던 것이다.

 

 

NKJ 16:12 Therefore Delilah took new ropes and bound him with them, and said to him, "The Philistines are upon you, Samson!" And men were lying in wait, staying in the room. But he broke them off his arms like a thread.

 

וַתִּקַּ֣ח דְּלִילָה֩ עֲבֹתִ֨ים חֲדָשִׁ֜ים וַתַּאַסְרֵ֣הוּ בָהֶ֗ם וַתֹּ֤אמֶר אֵלָיו֙ פְּלִשְׁתִּ֤ים עָלֶ֨יךָ֙ שִׁמְשֹׁ֔ון וְהָאֹרֵ֖ב יֹשֵׁ֣ב בֶּחָ֑דֶר

וַֽיְנַתְּקֵ֛ם מֵעַ֥ל זְרֹעֹתָ֖יו כַּחֽוּט׃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은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에게 가까이 이르렀다는 의미만을 전달하고 있으나, 당신 위에(KJV. NIV. RSV. NASB, upon you)라는 원문의 표현은 그들이 삼손의 목 바로 위에서 덮치고 있다는 매우 긴박한 의미를 전달해 준다. 블레셋 사람들은 들릴라의 침실에 매복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들릴라가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들이 당신의 (목) 위에서 덮치려고 합니다라는 의미로 크게 외친 것은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새 줄로 결박당한 삼손이 정말로 그 큰 힘을 발휘할 수 없는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손의 거짓말은 그가 괴력을 떨침으로 곧 탄로 난다.

 

 

NKJ 16:13 Delilah said to Samson, "Until now you have mocked me and told me lies. Tell me what you may be bound with." And he said to her, "If you weave the seven locks of my head into the web of the loom" --

 

וַתֹּ֨אמֶר דְּלִילָ֜ה אֶל־שִׁמְשֹׁ֗ון עַד־הֵ֜נָּה הֵתַ֤לְתָּ בִּי֙ וַתְּדַבֵּ֤ר אֵלַי֙ כְּזָבִ֔ים הַגִּ֣ידָה לִּ֔י בַּמֶּ֖ה תֵּאָסֵ֑ר וַיֹּ֣אמֶר אֵלֶ֔יהָ

אִם־תַּאַרְגִ֗י אֶת־שֶׁ֛בַע מַחְלְפֹ֥ות רֹאשִׁ֖י עִם־הַמַּסָּֽכֶת׃

 

 

 

  들릴라는 집요한 여자였다. 약간의 비굴함만 관여치 않는다면 눈앞의 일확천금을 가히 마다할 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들릴라의 세 번째 유혹에 삼손은 이제 상당히 상상력이 풍부해져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씨실 대신 이용하라고 제안한다. 하지만 이것은 필연적으로 마술적 절차가 될 것이다. 머리카락은 그 사람의 생명의 진수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짜는 일은 묶는 행동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일곱 가닥이란 것은 당시 남자들이 머리카락을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묶거나 심지어 곱슬곱슬하게 만드는 것이 흔한 스타일이었다. 삼손의 머리카락도 그렇게 일곱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 가닥은 등 뒤로, 나머지는 양쪽 옆으로 각각 세 가닥씩 말이다. 삼손의 거짓말은 결코 넘어서는 안 될 성역에까지 근접해가고 있다. 비록 정확한 힘의 원천에 대해선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이번엔 머리카락이라는 신체적인 부분까지 이야기가 오갔다는 것이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세 번째 시도는 진실 근처까지 가까스로 갔으며, 그것은 바로 삼손의 머리카락에 관한 것이었고, 이것은 삼손의 의지가 무너지는 장면이 나타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들릴라에 대한 사랑 때문에 조금씩 조금씩 삼손은 타협하기 시작하고 있다. 들릴라가 벌이는 그 수작들에 대한 동기의 진위를 생각해 보지 않은 채 말이다.

 

 

NKJ 16:14 So she wove it tightly with the batten of the loom, and said to him, "The Philistines are upon you, Samson!" But he awoke from his sleep, and pulled out the batten and the web from the loom.

 

וַתִּתְקַע֙ בַּיָּתֵ֔ד וַתֹּ֣אמֶר אֵלָ֔יו פְּלִשְׁתִּ֥ים עָלֶ֖יךָ שִׁמְשֹׁ֑ון וַיִּיקַץ֙ מִשְּׁנָתֹ֔ו וַיִּסַּ֛ע אֶת־הַיְתַ֥ד הָאֶ֖רֶג וְאֶת־הַמַּסָּֽכֶת׃

 

 

 

 

  들릴라는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삼손이 잠든 틈을 타서 머리카락을 베틀에 넣어 직조하는 번거롭고 주의를 요하는 까다로운 작업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다. 들릴라는 자신을 지독히 사랑하는 연인, 삼손의 종말과 운명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 오로지 자신의 팔자를 멋지게 고칠 수 있는 이 기회를 충분히 살리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이 거추장스러운 작업을 하면서 들릴라의 머릿속은 무슨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는지 추측해 보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NKJ 16:15 Then she said to him, "How can you say, 'I love you, ' when your heart is not with me? You have mocked me these three times, and have not told me where your great strength lies."

 

וַתֹּ֣אמֶר אֵלָ֗יו אֵ֚יךְ תֹּאמַ֣ר אֲהַבְתִּ֔יךְ וְלִבְּךָ֖ אֵ֣ין אִתִּ֑י זֶ֣ה שָׁלֹ֤שׁ פְּעָמִים֙ הֵתַ֣לְתָּ בִּ֔י וְלֹא־הִגַּ֣דְתָּ לִּ֔י בַּמֶּ֖ה כֹּחֲךָ֥ גָדֹֽול׃

 

 

 

 

  번의 헛수고로 말미암은 들릴라는 드디어 사랑이라는 대의명분을 걸고넘어진다.사랑한다면서 세 번씩이나 자기를 희롱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인간적으로 볼 때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다. 본문에서 어찌로 번역된 에크어떻게(How)라는 뜻의 의문사이며, 나를 사랑한다라고 번역된 아하브티크는 삼손의 입장에서 말하는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직접 화법의 말이다. 들릴라는 힘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 사랑의 시금석이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무슨 비밀이 있느냐는 것이다.

 

 

NKJ 16:16 And it came to pass, when she pestered him daily with her words and pressed him, so that his soul was vexed to death,

 

וַ֠יְהִי כִּֽי־הֵצִ֨יקָה לֹּ֧ו בִדְבָרֶ֛יהָ כָּל־הַיָּמִ֖ים וַתְּאַֽלֲצֵ֑הוּ וַתִּקְצַ֥ר נַפְשֹׁ֖ו לָמֽוּת׃

 

 

 

 

  본문을 시작하고 있는 와예히는  ~이 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하야()의 미완료형 접속사 와우()가 접수된 형태로서, 화제를 바꾸거나 새로운 화제를 도입할 때 관용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표현은 본문 이하에서 삼손이 나실인의 비밀을 털어놓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기능을 한다. 그리고 와예히 뒤에 접속사 키()가 이어지고 있는데 동사 하야에 이어 가 오면 ~할 때라는 의미가 된다. 조르매로 번역된 해치카강요하다, 압박하다, 곤경에 처하게 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추크()의 완료 여성형으로서 비밀을 밝히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들릴라가 온갖 수단을 다해 삼손을 강요하여 곤경에 처하게 하는 것을 나타낸다. 또한 재촉하여로 번역된 왓테알라체후의 원형 알라츠()도 누군가를 압박하고 재촉하여 억지로 그 무엇을 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로서 구약에서 본문에만 나온다. 이런 의미로 보건대 본문은 들릴라가 삼손을 유혹할 때 숨통 틀 겨를도 주지 않고 집요하게 졸라댔음을 보여 주고 있다.

 

 

 

  삼손의 상태가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은 그가 두 갈래 사이에서 몹시 갈등하였기 때문이다. 즉 끝까지 나실인의 비밀을 지키느냐, 아니면 들릴라의 요구에 굴복하여 비밀을 발설하고 말 것인가?하는 물음 사이에서 그는 죽을 정도로 번민하고 괴로워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이미 들릴라 쪽으로 기울진 상태였으므로, 욕정에 눈먼 감각이 냉철한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있는 상태였으므로 결과는 능히 예측할 수 있다. 삼손은 기억하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그는 또 다른 여인이 그를 재촉하여 졸라서 비밀을 알아내고 그에게 불리하게 사용했던 것을 분명 기억했어야만 했다(16:16; 14:17).

 

 

NKJ 16:17 that he told her all his heart, and said to her, "No razor has ever come upon my head, for I have been a Nazirite to God from my mother's womb. If I am shaven, then my strength will leave me, and I shall become weak, and be like any other man."

 

וַיַּגֶּד־לָ֣הּ אֶת־כָּל־לִבֹּ֗ו וַיֹּ֤אמֶר לָהּ֙ מֹורָה֙ לֹֽא־עָלָ֣ה עַל־רֹאשִׁ֔י כִּֽי־נְזִ֧יר אֱלֹהִ֛ים אֲנִ֖י מִבֶּ֣טֶן אִמִּ֑י אִם־גֻּלַּ֨חְתִּי֙ וְסָ֣ר מִמֶּ֣נִּי

כֹחִ֔י וְחָלִ֥יתִי וְהָיִ֖יתִי כְּכָל־הָאָדָֽם׃

 

 

 

  삼손이 나실인의 규례와 그 힘의 비밀을 들릴라에게 발설하는 모습을 진술하면서 저자는 와약게드로 시작하고 있다. 와약게드의 원형 나가드()는 들릴라가 삼손에게 비밀을 말하라고 졸라댔을 때 여러 번 사용되었던 단어로서(V.6,10,13,15), 한 점의 미심쩍은 부분도 없이 명백하고 상세하게 밝힌다는 의미의 동사이다. 그런데 삼손은 지금까지 힘의 비밀을 그녀에게 가르쳐 준다고 하면서 계속 거짓말을 해댔는데(V.7,11,13), 그때마다나가드 동사가 아닌 평범하게 말하다는 의미만을 지니는 아마르() 동사를 사용했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이와 다르게 나가드 동사가 사용됨으로써 드디어 삼손이 자신의 비밀에 대하여 들릴라의 마음이 흡족할 만큼 밝혔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진정을’에 해당되는 에트 콜 립보에서 에트는 목적격 조사이며, 모든(all)을 의미하며, 립보그의 마음(his heart)이란 뜻을 가진다. 그러므로 에트 콜 립보그의 모든 마음을’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그의 마음속에 조금의 비밀도 숨겨 두지 않고 그녀에게 모두 다 털어놨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상의 사실을 종합하여 본문을 다시 번역하면, 그래서 그는 그의 모든 마음을 그녀에게 명백하고 숨김없이 다 드러내어 고백했다는 뜻이 된다. 이제 삼손의 운명은 간악한 여인 들릴라의 손에 달리게 되고 만 것이다. 

  또한 내 머리가 밀리우면에서 사용된 동사 깔라흐()는 아랍어에서는 대머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 근동의 민족 간 언어 사이에는 매우 많은 유사성이 있었음을 고려할 때 본문의 깔라흐 동사 역시 머리카락을 단 몇 밀리미터(mm)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밀어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삼손은 나실인이었지만 여러 번에 걸쳐 서원을 어겼지만, 그런 상황에서는 그저 서원을 갱신하기만 하면 되었다. 이 경우는 머리카락을 미는 것이 서원을 끝내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그런데 삼손은 지금 마지막 보루까지 경시하고 있다. 

 

 

 

  물론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부여하신 초자연적인 힘은 삼손의 머리카락 그 자체에 머물러 있던 것은 아니다.  여호와의 신( , 루아흐 예흐와)이 지금까지 삼손에게 세 번이나 임하셨으며(14:6,19; 15:14), 삼손의 힘은 바로 이 하나님의 신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삼손의 머리카락은 초자연적인 힘의 원천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삼손의 말대로 그 머리카락을 자른다고 해서 힘이 없어진다고 볼 수는 없다. 단지 삼손이 이제 마지막 남은 나실인의 규례를 어기는 것, 곧 머리를 자르는 행위 속에는 그가 하나님께 자신을 나실인으로서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리는 헌신된 삶을 완전히 포기한다는 상징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며, 이러한 이유로 해서 하나님의 신은 더 이상 삼손에게 머무르지 않았던 것이다. 헌신과 거룩한 삶을 송두리째 버린 자에게 하나님의 신이 계속해서 머물러 계실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NKJV에서도 발견할 수 있듯이 삼손은 이 서원을 져 버림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과 똑같은, 더 이상 나실인이 아닌(be like any other man) 위치로 전락하게 되는 셈이다. 

 

 

NKJ 16:18 When Delilah saw that he had told her all his heart, she sent and called for the lords of the Philistines, saying, "Come up once more, for he has told me all his heart." So the lords of the Philistines came up to her and brought the money in their hand.

 

וַתֵּ֣רֶא דְּלִילָ֗ה כִּֽי־הִגִּ֣יד לָהּ֮ אֶת־כָּל־לִבֹּו֒ וַתִּשְׁלַ֡ח וַתִּקְרָא֩ לְסַרְנֵ֨י פְלִשְׁתִּ֤ים לֵאמֹר֙ עֲל֣וּ הַפַּ֔עַם כִּֽי־הִגִּ֥יד לה לִ֖י

אֶת־כָּל־לִבֹּ֑ו וְעָל֤וּ אֵלֶ֨יהָ֙ סַרְנֵ֣י פְלִשְׁתִּ֔ים וַיַּעֲל֥וּ הַכֶּ֖סֶף בְּיָדָֽם׃

 

 

 

알루올라오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알라()의 2인칭 복수 명령형이다. 당신들은 올라오시오’라는’ 의미를 지니는 이 표현은 소렉 골짜기가 블레셋 방백들의 거처보다 지형적으로 더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음을 암시하며, 삼손을 잡기 위해서는 자기 처소에서 기다리지 말고 친히 올라오는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리고 이제 한 번만으로 번역된 합파암은 정관사 하()와 일반적으로 시간, (출 8:28)를 의미하는 파암()이 결합된 형태이다. 그래서 이는 한 번이란 의미보다는 정해진 시간이라는 의미로서 다른 때가 아닌 바로 지금 이때를 가리킨다(창 18:32). 따라서 본문이 내포하는 의미는 바로 지금 당신들이 올라오는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면 삼손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전과 달리 이번에는 들릴라의 내실에 매복병이 없었다. 이는 매번 들릴라의 말을 믿고 매복을 했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더 이상 매복이 필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블레셋 방백들은 들릴라가 얻은 정보가 세 번이나 빗나갔기 때문에 그녀에 대한 신뢰를 점점 잃어가고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그녀는 삼손이 정말로 진실을 말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방백들에게 이제 마지막으로 한 번만 올라와서 확인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린 시절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우화 fable 중늑대와 양치기의 이야기처럼 블레셋 사람들이 들릴라의 말을 거짓말로 치부하고서 무시하였더라면 삼손과 들릴라의 이야기는 색다르게 구성되고 각색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그 우화처럼 전개되진 않았다. 

 

 

 

  그러나 주목할만한 것은 들릴라가 하수인이 아니라 방백들로 하여금 직접 올라오게 하였다는 것, 그것은 그만큼 성공을 확신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에 방백들은 들릴라의 강력한 요청에 부응하여 주기로 약속했던 돈을 가지고 들릴라에게로 올라갔다. 은을 가지고’라는’ 이 구가 참으로 인상적으로 그려지는 것은 들릴라가 이 고려해 봄직한 거액으로 인해 삼손을 배신했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혹자는 들릴라가 삼손을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겨준 것은 돈에 대한 탐욕 때문이기도 했지만 민족적인 감정의 이유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본문에서 들릴라를 언급할 때 민족이나 혈통의 차원에서 이야기하기보다는물질(mammon), 즉 돈에 대한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뉘앙스가 더 강하다. 사랑에는 국경도 없다 하였지만 들릴라에겐 사랑이 국경을 넘었지만 돈이라는 초소(경비대)에서 덜미를 잡힌 것이다.  

 

 

NKJ 16:19 Then she lulled him to sleep on her knees, and called for a man and had him shave off the seven locks of his head. Then she began to torment him, and his strength left him.

 

וַתְּיַשְּׁנֵ֨הוּ֙ עַל־בִּרְכֶּ֔יהָ וַתִּקְרָ֣א לָאִ֔ישׁ וַתְּגַלַּ֕ח אֶת־שֶׁ֖בַע מַחְלְפֹ֣ות רֹאשֹׁ֑ו וַתָּ֨חֶל֙ לְעַנֹּותֹ֔ו וַיָּ֥סַר כֹּחֹ֖ו מֵעָלָֽיו׃

 

 

 

 

  접속사 와우()잠자다, 잠들어 있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야쉔()의 강의형(Piel) 미완료 여성 3인칭 단수가 결합된 형태 왓테얏쉔()에 남성 3인칭 단수 목적격 접미어 후()가 접미된 형태이다. 동사 야쉔이 이처럼 강의형(Piel)으로 사용될 때에는 (누구를) 자게 만들다라는 뜻이 된다. 따라서 직역하면 그리고 그녀는 그를 자게 했다이다. NKJV를 번역하면 그녀는 그를 일러서 그녀의 무릎 위에서 잠들게 했다이다. 

 

 

 

  그런데 본문은 일차적으로는 삼손이 문자적으로 잠든 것을 의미하지만 더 나아가서는 영적으로도 깊은 잠에 빠져 있음을 보여준다. 동사 야쉔은 생리적인 잠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져 멸망을 자초하는 것도 의미한다(렘 51:39, 57; 시 13:3)는 사실이 이러한 측면을 잘 보여준다. 삼손은 자신의 모든 비밀을 털어놓고도 아무런 염려와 갈등 없이 들릴라의 무릎을 베고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잠은 그가 영적으로 얼마나 타락해 있는가를 그리고 그가 이제 사망의 잠을 향해 서서히 내달리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밀고로 번역된 앗테갈라흐를 문법적으로 볼 때는 들릴라 혼자서 삼손의 머리털을 깎았다는 의미가 되지만 대부분의 번역본들은 본문 바로 앞에 사람을 불러(vyaiêl' ar'äq. Tiw:, 왓 티크라 라이쉬)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삼손의 머리를 깎은 것으로 본다. 

 

 

 

  한편 그녀가 그렇게 삼손의 머리를 깎고 있을 때, 그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의식이 깨어 있을 때 그는 삼킬 듯이 달려드는 사자나 한꺼번에 덮치는 일천 명의 사람도 때려눕혔었지만(14:5,6; 15:14,15), 일단 깊은 잠에 빠지자 나실인인 삼손은 마지막으로 지켜야 했던 머리카락이 잘리는 것도 막지 못하고 만 것이다. 머리털을 민 들릴라로 인해 삼손은 괴로워한다. 한글 개역성경의 괴롭게 하여 본 즉의 정확한 의미는 마침내 들릴라가 삼손을 굴복시키기 시작했으며 힘이 삼손에게서 떠나게 되었다는 뜻이다. 

  삼손이 누구인가? 이스라엘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기 시작하는 사람으로 부름 받은 자였다(13:5). 그런데 누군가가 삼손을 굴복시키기 시작하고 있다. 무적의 용사 삼손을 무너뜨리기 시작한 무기는 블레셋의 철병기가 아니었다. 삼손을 굴복시키기 시작한 무기는 이방 여인 들릴라였다. 삼손은 여인의 손에 굴복을 당하는 치욕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NKJ 16:20 And she said, "The Philistines are upon you, Samson!" So he awoke from his sleep, and said, "I will go out as before, at other times, and shake myself free!" But he did not know that the LORD had departed from him.

 

וַתֹּ֕אמֶר פְּלִשְׁתִּ֥ים עָלֶ֖יךָ שִׁמְשֹׁ֑ון וַיִּקַ֣ץ מִשְּׁנָתֹ֗ו וַיֹּ֨אמֶר֙ אֵצֵ֞א כְּפַ֤עַם בְּפַ֨עַם֙ וְאִנָּעֵ֔ר וְהוּא֙ לֹ֣א יָדַ֔ע כִּ֥י יְהוָ֖ה סָ֥ר

אֲסוּרִֽים׃

 

 

 

원형 나아르()는 몸에 붙은 물질이나 먼지 등을 떨어내 버리는 것(to shake out)을 의미하는 동사로서(느 5:13;사 33:9) 몸을 흔드는 동작을 수반한다(사 33:15). 본문에서는 단순 재귀형(Niphal) 미완료로 쓰였는데, 이는 두 가지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먼저 단순 재귀형으로 쓰였다는 것은 삼손이 자기의 몸을 억압하고 있는 어떤 구속이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고 마구 흔들어 댔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본문에서 미완료로 쓰인 것은 의지 미래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는 바 미래에 반드시 이루고자 하는 일에 대한 삼손의 강한 의지를 암시한다. 즉 자신이 그 무엇에 억압당하고 있는 상태에서 반드시 자유로워져서 블레셋인을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는 삼손의 강한 의지가 미완료 시제에 담겨 있는 것이다. 

 

 

 

  한편 깨닫지로 번역된 야다알다(to know)의 의미이며(창 4:9), 기본형(Qal)으로 쓰였으므로 그 의미는 그가 알았다이다. 그런데 본문에는 (He)라는 남성 3인칭 단수 대명사 후()가 별도로 쓰이고 있다. 히브리어는 동사가 주어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인칭 대명사를 따로 쓰지 않아도 문장이 성립하는데도 불구하고 이처럼 인칭 대명사를 굳이 따로 쓰는 것은 주어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미… 떠나신’으로 번역된 싸르떠나다의 의미의 ‘쑤르()’ 동사의 완료형으로서 17,19절에도 쓰인 바 있다. 거기에서는 삼손의 힘이 떠났다는 뜻으로 쓰였으나 본문에서는 여호와께서 삼손에게서 떠나셨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쑤르’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17절에서는 삼손이 내 힘이 내게서 떠날 것이다’는 표현을 통해 힘과 하나님의 함수 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는데 반해, 본문에서는 여호와께서 삼손을 떠나셨다고 표현해 힘과 하나님 사이의 함수 관계를 명백히 보여 주고 있다. 삼손에게서 힘이 떠난 직접적인 원인은 ‘‘잘린 머리카락 때문이었으나 궁극적인 원인은 여호와께서 삼손을 떠나셨기 때문이었다. 그의 힘은 머리카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에게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삼손은 아직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심한 몸부림을 치고 있다. 마치 파리가 꿀단지 속에서 자신의 날개가 젖는지도 모르고 꿀맛에 취해 있다가 그 속에서 막상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지만 결코 빠져나오지 못하는 모습이 바로 삼손의 이미지와 맞물린다. 삼손은 자신의 힘의 비밀을 들릴라에게 누설한 것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모르고 있었다. 어쩌면 여러 번 나실인의 규정을 어겼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삼손을 도우셨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삼손은 이전처럼 힘을 쓸 수 없었다. 삼손이 이를 알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

  삼손의 이야기에는 무지, 알지 못함에 대한 경우가 많이 나와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두 번만 그것이 분명하게 알지 못하였더라는 말로 나와 있을 뿐이다(13:16-마노아; 14:4-그 부모). 이제 마지막으로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한 것은 바로 사사 자신이다. 

 

  

NKJ 16:21 Then the Philistines took him and put out his eyes, and brought him down to Gaza. They bound him with bronze fetters, and he became a grinder in the prison.

 

וַיֹּאחֲז֣וּהוּ פְלִשְׁתִּ֔ים וַֽיְנַקְּר֖וּ אֶת־עֵינָ֑יו וַיֹּורִ֨ידוּ אֹותֹ֜ו עַזָּ֗תָה וַיַּאַסְר֨וּהוּ֙ בַּֽנְחֻשְׁתַּ֔יִם וַיְהִ֥י טֹוחֵ֖ן בְּבֵ֥ית ה הָאסירים

אֲסוּרִֽים׃

 

 

 

 

  와예낙케루는 접속사 와우()파다, 구멍을 뚫다, 찌르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나카르()’의 강의 능동(Piel) 미완료 남성 3인칭 복수형이 결합된 형태이다. 따라서 본문은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의 눈을 찔러 파냈다는 의미이다. 얼굴에서 눈알을 빼내는 것은 고대로부터 적이나 중대한 죄를 저지른 자에게 수행되어온 매우 잔인한 야만적 행위인데 특히 그 사람을 모욕하는 의미로 행해졌다(삼상 11:2). 블레셋 사람들은 자기 민족에게 엄청난 피해를 안겨 준 삼손의 눈을 빼냄으로써 그에게 모욕을 되갚았고, 영원히 앞을 볼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눈이 빠지는 고통과 수모를 당한 삼손은 비록 육신의 눈은 잃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영적인 분별력을 잃고 살아왔던 지난 과거를 되돌아보고 영의 눈을 뜰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의 사사 삼손이 대적 블레셋의 노예와 같은 신분으로 전락하게 되었다는 애통스러움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리고 ‘토 헨’은 고체를 갈아서 분쇄하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 타한()(출 32:20; 민 11:8)의 능동 분사형이다. 행동의 계속을 보여 주는 능동 분사형이 사용된 것은 쉴 새 없이 계속해서 맷돌을 돌려야 하는 삼손의 비참한 처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블레셋 신전으로 끌려나갈 때까지 계속해서 맷돌을 돌리는 노역에 시달렸던 것이다. 가정에서 여인들이 사용했던 맷돌이 아닌 큰 맷돌을 돌리는 일은 대개 가축이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간혹 노예나 죄수가 이 일을 하기도 하였다. 세월이 흘러 로마와 헬라 시대까지도 죄인에 대한 형벌로 맷돌을 돌리게 하는 일이 유행하였다고 한다. 이스라엘의 사사였던 삼손이 이렇게 눈을 뽑히고 맷돌을 돌리는 수모를 당하는 것은 그의 개인적인 수치를 지나서 이스라엘 전 민족적인 수치라 할 수 있다. 

 

 

 

  시대의 judges(사사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바로 서야 할 삼손이 the Judge(여호와 하나님)를 불순종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그가 초래한 것은 시대와 세상을 judge(심판 행위)하는하는 judge(사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judgment의 자리-어둡고 칙칙한 이방의 땅 감옥 속의 맷돌이 있는 그곳-로 내몰고 만 것이다.

  그 비극은 서둘러 결말에 이른다. 삼손이 잡힌다. 다시 한번 매혹적인 여인이 그를 배반했다.         다시 한 번 그는 가사에 내려가지만, 이번에는 죄수로서 갔다. 밀턴(Milton)의 삼손(Samson Agonistes)은 이 마지막 장면을 단 한 줄로 된 드라마로 묘사하는데, 이는 그 위대한 시 전체에서 가장 기억할 만한 것이다. 곧 가사에서 눈멀어 종들과 함께 맷돌에 있는 타락한 영웅이다.

 삼손은 앞서 살펴본 대로 나실인의 규정을 세심하게 지키지 않았다. 따라서 나실인 규정을 어겼을 때에도, 이에 해당하는 의식을 통해 하나님께 다시 헌신하는 예를 취하지 않았다. 따라서 삼손은 의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의 삶을 통해서라도 나실인 규례를 지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원래 시체를 만지거나 나실인의 규정을 어기면 칠일 동안 정결하게 지낸 다음 제 칠일에 머리를 밀도록 되어 있다(민 6:9). 그전의 나실인 서약이 무효임을 이런 식으로 표시하는 것이다. 그러고는 제8일에 산 비둘기 두 마리나 집 비둘기 두 마리를 가지고 와서 하나는 속죄 제물로, 다른 하나는 번제물로 드리도록 되어 있다. 그다음에는 여호와 게 새로 나실인 서약을 할 날을 정하고 일 년 된 수양을 가져다가 속건제로 드리도록 되어 있다(민 6:10-13)

 

삼손에게 있어 두 눈이 뽑히게 된 것은 매우 특기할 만하다. 그는 두 마리의 비둘기로 속죄 제물과 번제물을 드리는 대신, 두 눈을 드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NKJ 16:22 However, the hair of his head began to grow again after it had been shaven.

 

וַיָּ֧חֶל שְׂעַר־רֹאשֹׁ֛ו לְצַמֵּ֖חַ כַּאֲשֶׁ֥ר גֻּלָּֽח׃ פ

 

 

 

 

  다시 자라기라고 번역된 ‘레 참메아흐’는 전치사 레()와 동사 ‘차마흐()’의 강의 능동형(Piel) 부정사 연계형이 결합된 형태로서 시작하니라로 번역된 아야헬의 조동사 역할을 한다. ‘차마흐’ 동사는 땅에서 풀. 나무. 싹 등이 돋아나는 것(to sprout forth)을 가리키는 단어이나(창 2:5), 피부에서 털이 돋아나는 것도 의미한다(레 13:37). 그리고 비유적으로 사용될 때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창조의 새로운 일이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사 42:8; 43:19). 따라서 본문은 그의 머리털이 돋아나기 시작함과 동시에 범죄로 인해 흐려졌던 그의  영성과 신앙이 다시 회복되기 시작하고 있다는 상징적 의미까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삼손은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는 육체적, 정신적 고역에 시달리면서도 다시 자라나는 머리털과 함께 영적으로 회복되기 시작해 비록 육체의 눈은 잃었으나 비로소 영의 눈을 떠 자신의 사사로서의 사명을 자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삼손이 자기 스스로는 머리를 깎진 않았으나, 들릴라의 간교한 술책으로 인하여 강제적으로 머리를 깎게 될 때 그 이전까지의 날들은 모두 무효가 되고 나실인의 삶이 새롭게 시작되는 것이었다(민 6:12).

 

 

 

그러므로 본문에서 삼손의 머리털이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의 본의든 본의가 아니었든지 간에 삼손에게 있어서 지나간 부정했던 삶은 모두 끝나고 나실인으로서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짧은 구절을 통해 더욱 강렬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의 머리카락이 자라 감에 따라 그의 힘이 되돌아왔다는 추론이 특별하게 진술되진 않는다. 본문에서 그러한 증거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감옥에서의 감금상태에서 그의 생의 수치와 실패를 깊이 생각하면서, 다소간의 회개의 불꽃(some spark of repentance)을 태웠을 것이다.

 

 

NKJ 16:23 Now the lords of the Philistines gathered together to offer a great sacrifice to Dagon their god, and to rejoice. And they said: "Our god has delivered into our hands Samson our enemy!"

 

וְסַרְנֵ֣י פְלִשְׁתִּ֗ים נֶֽאֱסְפוּ֙ לִזְבֹּ֧חַ זֶֽבַח־גָּדֹ֛ול לְדָגֹ֥ון אֱלֹהֵיהֶ֖ם וּלְשִׂמְחָ֑ה וַיֹּ֣אמְר֔וּ נָתַ֤ן אֱלֹהֵ֨ינוּ֙ בְּיָדֵ֔נוּ אֵ֖ת שִׁמְשֹׁ֥ון

אֹויְבֵֽינוּ׃

 

 

 

블레셋 고위층을 비롯한 백성들이 지붕에만 3,000여 명이었다는 것은 엄청난 숫자상의 인파가 모여 성황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삼손을 생포한 사건이 블레셋 족속에게 있어서 국가적인 차원의 큰 관심사였고 축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편 본문에는 우리라는 뜻의 1인칭 복수 접미어 에누()가 세 번이나 반복되어 나온다. 그리고 24절에는 다섯 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참고로 한글 개역 성경에는 24절에 우리라는 말이 모두 네 번 나오지만 원어 성경에는 모두 다섯 번 나온다. 이처럼 블레셋 방백들과 백성들은 에누(우리)라는 말을 모두 8회나 사용하였는데, 이는 그들의 연합성을 강조하는 표현인 동시에 블레셋 감옥에 홀로 외롭게 있던 이방인 삼손을 철저히 소외시키는 함성이기도 했다. 즉 그들은 홀로 외롭게 있는 삼손을 대항하여 철저히 하나가 되어 삼손을 더욱 무기력하고 초라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의 원수를 우리의 손에 붙였다라고 블레셋 사람들은 즐거워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뜻밖의 아이러니이다. 정작 이 구호를 외칠 사람은 블레셋이 아니라 이스라엘이기 때문이다. 

  이 아이러니는 블레셋 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것과 관련되어 있다. 그들은 그들의 원수를 벌했다. 그들은 삼손의 머리털이 다시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머리가 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의 힘과 머리털의 길이는 마술적인 관련이 전혀 없다고(상당히 올바르고 건전하게) 가정했음에 틀림없다. 한 번 머리를 깎음으로 해서 그 서원은 깨어졌고, 여호와께서는 그를 떠나셨다. 언약에는 더 이상의 갱신도, 회복도 존재할 수 없다는 가정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블레셋 인들은 그토록 미신적이고 마술적인 힘의 근원에 대한 과거의 추구로 말미암아 들릴라를 매수하고 그 작전은 성공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마술적인 근원을 믿지 않고 상황 종료라는 구호 아래 너무나 태평하게 즐기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모순적이지 않는가? 삼손의 머리카락은 자라고 있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그들이 알지 못했던 어떤 것, 아니 어떤 분이 있었다. 그들은, 예기치 못한 일을 행하시며(에훗), 약함 가운데서 그 힘을 완전하게 하시고(기드온), 결코 약속을 어기지 않으시는(입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하나님이 오래전에 삼손이 죽을 날까지 나실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몰랐다(13:7). 자신의 종이 잡혀 갔을 때, 그분이 그를 버리신 것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삼손이 아무리 그 약속을 무시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유효하다. 죄인들의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가 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

 

 

 

  그 신, 곧 그들의 신다곤(Dargon)이라는 이름은 물고기를 뜻하는 다그()에서 유래되었다(창 9:2). 사실 다곤은 머리와 손은 사람의 모습이고 그 외 나머지 몸통은 물고기의 모양으로 만들어진 우상으로서(삼상 5:2-4)  바다의 신으로 여겨졌다. 블레셋의 다섯 도시 중 아스돗, 아스글론, 그리고 가사 등 세 도시가 지중해 연안에 있었으므로,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의 수산 경제를 풍요롭게 한다고 여겨진 바다의 신 다곤을 물고기의 형상으로 자연스럽게 만들어 섬겼었다. 혹자는 다곤이라는 이름이 곡물을 뜻하는 다간()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여겨 곡물을 주관하는 신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곤은 농경문화가 발달하였던 메소포타미아 가나안 내륙 지방에서는 섬겨지지 않았고 블레셋이 해안 도시에서 주로 섬겨졌으며 다곤 신상의 형상 등을 고려할 때 다곤 신은 수산물을 풍성하게 해 주는 신으로 보인다. 

 

 

NKJ 16:24 When the people saw him, they praised their god; for they said: "Our god has delivered into our hands our enemy, The destroyer of our land, And the one who multiplied our dead."

 

וַיִּרְא֤וּ אֹתֹו֙ הָעָ֔ם וַֽיְהַלְל֖וּ אֶת־אֱלֹהֵיהֶ֑ם כִּ֣י אָמְר֗וּ נָתַ֨ן אֱלֹהֵ֤ינוּ בְיָדֵ֨נוּ֙ אֶת־אֹ֣ויְבֵ֔נוּ וְאֵת֙ מַחֲרִ֣יב אַרְצֵ֔נוּ וַאֲשֶׁ֥ר

הִרְבָּ֖ה אֶת־חֲלָלֵֽינוּ׃

 

 

 

헐고고 번역된 ‘마하 리브’는 물일 줄어들거나 마르는 것(창 8:13), 그리고 땅이 황폐해지는 것(시 34:10) 등을 의미하는 동사 ‘하라브()’의 사역 능동형(Hiphil) 분사로서 뒤에 을 의미하는 에레츠()가 나왔으므로 (땅을) 황폐시켰다는 의미이다. 이는 삼손이 자기 아내를 블레셋인에게 빼앗긴 후에 여우 300마리를 통해 블레셋의 밭과 과수원 등을 불태워 황무하게 만든 사건을 지칭한다. 

 

 

NKJ 16:25 So it happened, when their hearts were merry, that they said, "Call for Samson, that he may perform for us." So they called for Samson from the prison, and he performed for them. And they stationed him between the pillars.

 

וַֽיְהִי֙ כי כְּטוב טֹ֣וב לִבָּ֔ם וַיֹּ֣אמְר֔וּ קִרְא֥וּ לְשִׁמְשֹׁ֖ון וִישַֽׂחֶק־לָ֑נוּ וַיִּקְרְא֨וּ לְשִׁמְשֹׁ֜ון מִבֵּ֣ית ה הָאסירים אֲסוּרִ֗ים וַיְצַחֵק֙

לִפְנֵיהֶ֔ם וַיַּעֲמִ֥ידוּ אֹותֹ֖ו בֵּ֥ין הָעַמּוּדִֽים׃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초췌할 대로 초췌해진 몰골을 보면서 자신의 승리감에 도취되어 삼손의 재주 부리는 것을 보기를 원했다. 그리고 ‘삼손이… 재주를 부리니라로 번역된 와예차헤크의 원형 동사 차하크()는 바로 앞 문장에 쓰인 동사 사하크()와 거의 유사한 의미인데, 본문의 경우에는 쓴웃음을 웃든지 즐겁게 웃든지 웃는다는 의미에 더욱 가까운 단어이다(창 18:12; 21:6). 삼손은 이방인들의 땅에서 이방인들 앞에서 시각장애를 가진 불구자로 외로이 서서 광대 짓을 하게 된 것이다. 그의 마음에는 블레셋에 대한 분노와 증오심, 그리고 자신에 대한 자책감과 좌절감과 모멸감이 뒤범벅이 되었을 것이다. 이는 어쩌면 사랑하던 여인 들릴라에게 속아 머리를 깍이운 것보다, 블레셋에 의해 두 눈을 뽑히우고 맷돌을 돌려야 했던 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삼손이 부린 재주는 재치나 힘이 관련된 것이 아니라, 그가 눈이 먼 것과 관련되었을 것이다. 앞에 장애물들을 놓고 그를 때리거나 넘어지게 하는 것은 눈먼 사람을 익숙지 않은 곳에서 고문한 잔인한 고문법의 일부이었을 수도 있다. 

 

 

NKJ 16:26 Then Samson said to the lad who held him by the hand, "Let me feel the pillars which support the temple, so that I can lean on them."

 

וַיֹּ֨אמֶר שִׁמְשֹׁ֜ון אֶל־הַנַּ֨עַר הַמַּחֲזִ֣יק בְּיָדֹו֮ הַנִּ֣יחָה אֹותִי֒ ו וַהימשׁני הֲמִשֵׁ֨נִי֙ אֶת־הָֽעַמֻּדִ֔ים אֲשֶׁ֥ר הַבַּ֖יִת נָכֹ֣ון עֲלֵיהֶ֑ם

וְאֶשָּׁעֵ֖ן עֲלֵיהֶֽם׃

 

 

 

  본문에서 찾아서라고 번역된 ‘한 나하’는 원형 ‘야나흐()’, 혹은 ‘누아흐()’의 사역 능동(Hiphil) 명령형에 권유형 접미어가 결합된 형태로서 부탁과 명령, 혹은 간청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누아흐’ 동사는 기본적으로 머물다(창 8:4), 휴식하다(출 20:11)는 의미의 단어이나, 본문에서처럼 사역 능동형으로 쓰이게 되면 머물게 하다, 쉬게 하다는 의미 외에 ~을 ~에 두다(창 2:15), ~하도록 내버려 두다(홀로 남겨 두다)(삼하 16:11)는 의미가 된다. 이로 볼 때 삼손은 자기의 손을 잡고 있던 소년에게 자기를 기둥 사이에 홀로 남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블레셋 신전은 옥상 형태로 된 넓은 지붕을 두 개의 큰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유형이므로(Lindsey), 그 두 개의 큰 기둥만 무너지면 지붕까지 완전히 붕괴될 수 있는 구조였다. 비록 지금은 눈이 없어 앞은 보이지 않지만 포로가 되어 눈이 뽑히기 전 혈기 왕성할 때에 블레셋을 자주 드나들면서 다곤 신전을 자주 보아 그 구조에 대해 익숙해 있었던 삼손은 기둥만 무너뜨리면 이곳에 운집한 블레셋 인들을 모두 죽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런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삼손은 앞이 안 보이는 자기를 인도해 주던 그 소년에게 자기를 그 두 기둥 사이에 서서 홀로 그것을 의지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NKJ 16:27 Now the temple was full of men and women. All the lords of the Philistines were there -- about three thousand men and women on the roof watching while Samson performed.

 

וְהַבַּ֗יִת מָלֵ֤א הָֽאֲנָשִׁים֙ וְהַנָּשִׁ֔ים וְשָׁ֕מָּה כֹּ֖ל סַרְנֵ֣י פְלִשְׁתִּ֑ים וְעַל־הַגָּ֗ג כִּשְׁלֹ֤שֶׁת אֲלָפִים֙ אִ֣ישׁ וְאִשָּׁ֔ה הָרֹאִ֖ים בִּשְׂחֹ֥וק שִׁמְשֹֽׁון׃

 

 

 

  지붕에 있는으로 번역된 ‘‘웨알 학가그그리고 지붕 위에라는 뜻이다. 지붕, 즉 가그()라는 단어는 상면(위쪽의 표면)(출 30:3)과 꼭대기(삿 9:51)로도 번역되어 단어이다. 그 당시 집은 대개 단층 내지는 2층으로 되어 있었는데, 집의 맨 꼭대기 즉 지붕은 평평했으며 다용도로 사용되었다. 본문에 묘사된 다곤 신전의 지붕은 이러한 보통 가옥의 구조와는 조금 다른 하다. 이 신전은 다곤 신상을 중심으로 해서 가운데 공간을 남겨 두고 두 개의 큰 기둥에 떠받쳐진 형태로 되어 있었다. 본문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러한 구조의 신전에는 지붕 아래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을 뿐 아니라 지붕 위에도 3천 명 이상의 사람들이 앉아 있을 수 있었다.

 

 

NKJ 16:28 Then Samson called to the LORD, saying, "O Lord GOD, remember me, I pray! Strengthen me, I pray, just this once, O God, that I may with one blow take vengeance on the Philistines for my two eyes!"

 

וַיִּקְרָ֥א שִׁמְשֹׁ֛ון אֶל־יְהוָ֖ה וַיֹּאמַ֑ר אֲדֹנָ֣י יֱהֹוִ֡ה זָכְרֵ֣נִי נָא֩ וְחַזְּקֵ֨נִי נָ֜א אַ֣ךְ הַפַּ֤עַם הַזֶּה֙ הָאֱלֹהִ֔ים וְאִנָּקְמָ֧ה נְקַם־אַחַ֛ת

מִשְּׁתֵ֥י עֵינַ֖י מִפְּלִשְׁתִּֽים׃

 

 

 

 부르짖어에 해당되는 와이크라의 원형 카라()는 큰 소리로 부르짖는 것(겔 8:18; 미 3:5)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당시 삼손은 묵상적으로 소곤소곤 작은 소리로 기도하지 않고, 신전에 운집해 있는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소리로 기도했다. 머리카락이 잘리고, 두 눈이 뽑히우고, 노예로 전락하여 맷돌을 돌리면서, 그리고 이방인들 앞에서 재롱을 부려야 하는 모욕과 수치를 당하여 말할 수 없이 비참하고 괴로웠던 모든 감정을 다 토해 내는 심정으로 크게 외쳤던 것이다. 그 부르짖음은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자기가 느껴왔던 고통을 하나님께 호소하는 외침이요, 나실인으로서 범죄 하였던 지난날을 회개하는 부르짖음이었으며, 자신의 신세를 그렇게 만들고 동족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있는 원수 블레셋을 멸절시켜 달라는 도움의 간구였던 것이다. 

 

 

 

  또한 나의 주 여호와여 바라건대 당신은 나를 기억하소서(직역)에서 로 번역된 아도나이다스리다는 의미에서 유래하여 주인, 주권자라는 뜻이 된 명사 아돈()에 1인칭 단수 소유격 접미어가 붙은 형태로서 나의 주님, 혹은 나의 주권자라는 의미이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그가 여호와를 아도나이라고 부른 것은 큰 의미가 있다. 그는 태어나기 전부터 여호와께 나실인으로 바쳐진 자였음에도 불구하고(13:7) 사실 나실인답게 살지 못했다. 즉 그는 여호와의 주인 됨과 다스리심을 인정치 않는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결국 그의 운명은 처참하게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이제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그는 여호와를 아도나이라고 부름으로써 지난날을 회개하고, 여호와의 주인 되심(Lordship)과(Lordship) 자신이 그분의 소유됨을 새롭게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고통의 시간을 거쳐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나로 강하게 하사는 삼손 자신에게 있는 초인적인 힘의 근원이 자신의 머리카락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분명히 인정하는 표현이다. 들릴라의 집요한 유혹 앞에서 삼손은 17절에서 들릴라에게 내 머리카락이 밀리우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난다고 말함으로써 그에게 있는 힘이 원래 자기 자신의 것인 양 말했었다.

 그러나 그는 고통의 터널을 지나면서 철저하게 겸손해지고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는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았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신(, 루아흐)으로 임하시고 함께 하셔야만 비로소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시 자란 머리카락을 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당신이 나를 강하게 하셔야 합니다’라고’ 겸손하게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로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복수하게 하옵소서(직역)에서 ‘원수를… 갚게 하옵소서로 번역된 ‘‘웨인 노크 마 네캄’을’ 직역하면 그리고 내가 복수하게 하옵소서, 또는 그러면 내가 복수할 것입니다이다. 이 두 단어의 어근은 나캄()이며, 본문은 동사형과 명사형을 나란히 사용하여 그 의미를 한층 더 강조하고 있다. 

  삼손의 절규에 찬 기도(solemn prayer)를 잘 표현한 시가 있다.

 

 



한 번만 나에게 기회를 주소서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여 주소서
짙은 어둠 속에서 앞을 볼 수 없는 지금 난 당신을 더 가까이 느끼네
분별력을 잃었던 하나님의 나실인 이 순간 나의 마지막을 당신을 위해

오 주님 그때는 내 욕심으로 살아가는 것 참 멋이 있게 보였죠
주의 힘을 받은 그 참된 의미를 너무도 쉽게 잊어버리며 살았네
분별력을 잃었던 하나님의 나실인 이 순간 나의 마지막을 당신을 위해

 이 땅의 죄들을 떠받친 두 기둥 하늘의 힘으로 무너지게 하소서
 부활을 꿈꾸며 당신 이름으로 그 두 기둥 사이에 나 서리


 

 

 

 

  한편 구약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족속에게 원수를 갚는다는 의미는 실제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신학적 관점에서도 매우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원수를 갚는 것은 합법성과 정의, 그리고 구원이라는 개념과 그 의미가 통한다(렘 15:15; 나 1:2; 민 31:2). 왕으로 비유되는 하나님은 그의 백성과 맺은 언약에 성실하신 분으로서 심판과 전쟁이란 방식으로 그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지키시기 위해서 싸우셨다.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의 대적들은 이렇게 신앙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의 원수와 동일하게 여겨졌으므로(렘 46:10) 이스라엘의 전쟁은 대부분 하나님을 대신해서 싸우고 하나님의 원수를 대적하는 거룩한 전쟁이었으며, 이는 하나님께서 싸우시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이때 원수에 대하여 복수를 행하시는 궁극적 주체는 바로 하나님이시다(신 32:35,41). 

 

 

 

  사사들은 내적인 개혁을 촉구하고 외적인 공격에 방어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주님이 선택하시고 임명하신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삼손의 마지막 기도는 언뜻 보면 마치 자신을 불구로 만든 자들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심에서 나온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영적 각성 아래 이미 교만을 버린 삼손의 마지막 절규 어린 기도는 자신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고 우상을 찬양하며 여호와를 모욕하는 하나님의 원수를 갚게 해 달라는 기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처럼 블레셋이 하나님의 원수라는 의미가 부각된다면 하나님께서 싸우실 명분을 충분히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극심한 고통 중에서야 삼손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모든 상황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그 고통 중에서 하나님의 원수를 갚음으로써 늦게나마 자신의 사사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려는 삼손의 심정이 본문의 이면에 가득 차 있다. 처음에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구원을 요청하지 않는 상황에서 먼저 마노아의 부인에게 나타나 아들이 태어날 것을 말씀하시며 이 아이가 나실인으로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기 시작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삼손도 이렇게 그의 인생을 마감할 수가 없었다. 그는 때는 늦었지만 이제라도 하나님께 자신의 전부를 드리기로 결심하였던 것이다. 

 

 

NKJ 16:29 And Samson took hold of the two middle pillars which supported the temple, and he braced himself against them, one on his right and the other on his left.

 

וַיִּלְפֹּ֨ת שִׁמְשֹׁ֜ון אֶת־שְׁנֵ֣י׀ עַמּוּדֵ֣י הַתָּ֗וֶךְ אֲשֶׁ֤ר הַבַּ֨יִת֙ נָכֹ֣ון עֲלֵיהֶ֔ם וַיִּסָּמֵ֖ךְ עֲלֵיהֶ֑ם אֶחָ֥ד בִּימִינֹ֖ו וְאֶחָ֥ד בִּשְׂמֹאלֹֽו׃

 

 

 

 

  껴 의지하고를 직역하면 그리고 삼손은 더듬거렸다그리고 그는 그것들을 지탱하였다이다. 한글 개역성경에서 로 번역된 와일르포트의 원형 동사 라파트()는 손으로 더듬거리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인데, 룻 3:8에서는 한밤중에 보아스가 더듬거리면서 옆에 누가 있음을 확인하는 것을 묘사할 때도 쓰였다(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몸을 돌이켜’로’ 번역됨). 삼손은 기도를 마치고 다곤 신전을 떠받치고 있는 두 기둥을 더듬어 확인하고서는 힘을 주기 위해 최종 자세를 취하였던 것이다.

 

 

NKJ 16:30 Then Samson said, "Let me die with the Philistines!" And he pushed with all his might, and the temple fell on the lords and all the people who were in it. So the dead that he killed at his death were more than he had killed in his life.

 

וַיֹּ֣אמֶר שִׁמְשֹׁ֗ון תָּמֹ֣ות נַפְשִׁי֮ עִם־פְּלִשְׁתִּים֒ וַיֵּ֣ט בְּכֹ֔חַ וַיִּפֹּ֤ל הַבַּ֨יִת֙ עַל־הַסְּרָנִ֔ים וְעַל־כָּל־הָעָ֖ם אֲשֶׁר־בֹּ֑ו וַיִּהְי֤וּ

הַמֵּתִים֙ אֲשֶׁ֣ר הֵמִ֣ית בְּמֹותֹ֔ו רַבִּ֕ים מֵאֲשֶׁ֥ר הֵמִ֖ית בְּחַיָּֽיו׃

 

 

 

여기에 사용된 동사는 비틀어 돌리는 행위를 시사하며, 그로부터 삼손이 돌 받침대에서 기둥을 돌려 빼내어 지붕을 버티고 있던 받침대를 제거해 버렸으며, 그럼으로써 지붕이 무너지게 했으리라고 추론할 수 있다.

  스스로 목숨을 버리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는 삼손의 각오는 훗날 대제국 페르시아의 황후 지위와 더불어 목숨까지 버리면서 동족을 구원하고자 결단하고서 죽으면 죽으리라(에 4:16)라고 고백한 에스더의 비장한 각오를 연상케 한다. 우리는 삼손의 이러한 희생적인 죽음을 단순히 자살로 보아선 안 된다. 그의 죽음은 이방 블레셋의 압제로부터 동족을 구하기 위한 마음에서 비롯된 거룩한 순교였다. 이것은 또한 스스로를 희생하면서 목숨까지 내어 놓으신 그리스도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원어 성경상 본문에는 죽다(to die)란 표현이 세 번이나 나오며, 본절 전체적으로는 모두 다섯 번이나 나오고 있다. 한 절에 무트라는 단어가 이와 같이 여러 번 쓰이는 것은 죽음을 강조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 때문이다. 물론 블레셋 족속 전체의 씨를 말리지는 못 하였지만, 다섯 방백을 포함한 영향력 있는 블레셋의 고위관직들과 지도자들의 죽음은 블레셋의 이름이 사사 시대의 무대에서 사라진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비록 삼손이 머리를 다시 성결케 하면서 일 년 된 수양은 드리지 않았으나, 대신 자신의 몸을 드렸다. 그의 제물은 순결한 것이 아니었다. 두 눈이 빠져, 흠이 있는 제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이 제물을 기뻐 받으셨다. 

 

 

NKJ 16:31 And his brothers and all his father's household came down and took him, and brought him up and buried him between Zorah and Eshtaol in the tomb of his father Manoah. He had judged Israel twenty years.

 

וַיֵּרְד֨וּ אֶחָ֜יו וְכָל־בֵּ֣ית אָבִיהוּ֮ וַיִּשְׂא֣וּ אֹתֹו֒ וַֽיַּעֲל֣וּ׀ וַיִּקְבְּר֣וּ אֹותֹ֗ו בֵּ֤ין צָרְעָה֙ וּבֵ֣ין אֶשְׁתָּאֹ֔ל בְּקֶ֖בֶר מָנֹ֣וחַ אָבִ֑יו וְה֛וּא

שָׁפַ֥ט אֶת־יִשְׂרָאֵ֖ל עֶשְׂרִ֥ים שָׁנָֽה׃ פ

 

 

 

  나실인인 삼손은 꺾였고 궁극적으로는 감각적인 열정과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분리 의식의 결여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이 마지막 구절은 15:20을 반복하고 있다.

  

 

  삼손이 이스라엘 사사로 이십 년을 지내었더라   

 

 

  대사사 가운데 아비의 장지에 장사되었다는 기록은 삼손 외에는 기드온에게만 나온다(8:32). 구약 시대 히브리인에게 있어 아비의 묘소에 장사되는 것은 그의 삶이 조상들의 전통에 부응하는 삶이었음을 인정받는 것으로서 영예로 여겨졌다. 자신의 욕망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일그러진 영웅, 삼손은 그의 종말의 마침표를 잘 찍음으로 말미암아 실추된 사사됨, 사사의 명예를 회복하고 있다

 

 

 

 

Epilogue...

 

 성경의 다른 부분들과 마찬가지로, 이 열두 번째 사사의 몰락에 대한 기사가 하나님이 독자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분이 그것을 통해 원래 독자에게 무엇을 말씀하셨는지를 물어보아야 한다. 그들은 분명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보아야 했을 것이다. 그들은 분명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보아야 했을 것이다. 문제는 어디에서?가 될 것이다. 종종 그들의 역사에서, 그들은 삼손의 시대에 선조들이 자신과는 매우 다른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안심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어리석음에 대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마음껏 통탄하며 비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삼손이 이스라엘을 대표했다면, 그리고 그 민족 공동의 죄를 이 개인이 집중적으로 짓고 있다면, 그것이 함축하는 바를 피하기는 훨씬 어려웠다. 유혹하는 이웃 국가와 이스라엘의 미심쩍은 관계는, 길가에서 유혹하는 여자와 한 남자의 미심쩍은 관계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그 교훈은 개인적 교훈이 되면서, 보편적이고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이것은 오늘날 세상과 교회와의 관계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뱃머리라고 하지만 정작 교회와 신자들은 세상의 뒤꽁무니만을 쫓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삼손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그는 비극적인 교훈을 준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사사 각자가 보통 사람으로서 주의 깊은 독자들 앞에 본보기와 경고를 설정해주는 삶을 산 사람이었다고 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삼손의 이야기를 어쨌든 이런 식으로 읽는 것은 옳다. 그는 그리스도를 상당히 닮은 구원자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이스라엘의 면모를 그리고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우리의 면모를 틀림없이 반영하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 면모란 은혜에 의해 부르심 받고, 서원에 의해 속박되며, 계속 되풀이해서 권능을 부여받고 큰 은사를 받지만, 서원에 의해 그럼에도 신실하지 못하고 방종하고 원수들과 너무나도 기꺼이 친하게 사귈 채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삼손은 무시무시한 경고의 역할을 한다. 그는 엄청난 잠재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서, 거룩한 삶에 대한 성령님의 부르심이 성령의 은사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좀 더 넓게 보면 하나님의 계획은 굽힘 없이 계속 진행되고 있었으며, 삼손은 비록 비극적인 인물이지만, 그를 통해 여호와의 신은 그의 백성을 구원하신다. 그는 결국 다른 사람과 같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힘의 비밀이 밝혀지기만 하면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했지만 말이다(16:7,11,13,17). 바로 그 때문에 그는 두 번에 걸쳐 그리고 참으로, 이스라엘의 사사로 지내었다고 나와 있으며, 또한 정당하게 히브리서 11장에 나와 있고, 또한 그의 탄생과 죽음이 희미하긴 하지만 수세기 후에 있을 또 다른 탄생과 죽음을 진정으로 반영하는 것이다.

 

 

  사사기는 진정한 영웅들의 카리스마(χάρισμα  ; charisma) 통치 이야기이다. 혹자는 ‘삼손에게 무슨 카리스마가 있는가?’라고 대꾸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가 자발적으로 하나님 앞에 굴복하지 않고 환경과 상황과 여건들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의 죽음에 대해선 그의 자발성(spontaneity)이 드러난다. 머리카락이 밀리우고 두 눈이 빼임을 당한 후 나실인에 대한 자신의 소명 the Call을 깊이 묵상했던 맷돌 돌리던 시간, 그 낮음과 비천함과 약함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충분히 경험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침묵의 시간(Solitary Times)’의 보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의 인생은 우리에게 바울서신의 말씀을 상기시켜 준다.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 For when I am weak, then I am strong.(고후 12:10)

 

 

  언제나 우리를 압도해 가시는 하나님의 거대함을 삼손을 통해 강렬하게 느낄 수 있다. 또한 삼손 같은 카리스마적인 대리자들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의 카리스마적인 주권을 보이셨다. 그러기에 우리는 엄숙하게 고백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분은 우리의 영원한 카리스마이시다!

  

 


 

인용 문헌

 

김지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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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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