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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사사기.룻기

사사기 6장 7-24절,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다

by Message.K 2023.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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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사사기 6장 중반부에 해당하는 7-24절의 본문을 통해 '기드온의 소명'에 대한 이야기를 포스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이 부르짖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또다시 사사 judge를 보내시는 장면이 등장하는데요. 바로 기드온입니다.

 

 

 

오늘 저는 이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기드온에 대해서는 별 관심 없습니다. 기드온이 히브리서의 믿음 장에서도 분명히 영적 선배로 등장하고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제가 사사기 강해를 두어 번 하면서 느낀 것은 기드온이라는 사람 냄새가 너무나 많이 났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냄새가 납니다. 죄인의 냄새, 욕망의 냄새... 인간은 원래 욕망의 존재이기 때문에 죄의 존재이기도 합니다. 일단 저는 기드온의 행동, 리액션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은 뒤로 하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가에 대해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꾸짖을 한 선지자를 보내십니다. 그 다음에는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기드온을 찾아왔습니다. 천사는 기드온을 찾으러 어디로 갔습니까? 기드온은 지금 바위틈에  숨어서 밀을 타작하고 있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의 눈을 피해 소위 말하자면 '짱 박혀 숨어서' 타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미디안의 약탈과 강탈이 심했던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 그리고 천사(여호와의 사자)의 메시지가 등장하는데요. 사사기 기자는 여기서 여호와의 사자가 말하지만, 주어를 여호와 께서라고 쓰고 있는 것이 의미심장합니다. 메신저가 왔지만 메시지는 분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오늘 하신 일과 말씀에 대해 한번 간추려 보았는데요. 아래의 괄호 안의 숫자로 쓰인 부분이 그러한 대목입니다. 

 

 

 

 

사사기 6장 7-24절 본문

7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었으므로

8 ①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시니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며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여
9 애굽 사람의 손과 너희를 학대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고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었으며
10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 너희가 거주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니라
11 ②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③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
13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또 우리 조상들이 일찍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우리를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14 여호와께서 그를 향하여 이르시되 ④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시니라
15 그러나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하니
1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⑤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하시니라
17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만일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18 내가 예물을 가지고 다시 주께로 와서 그것을 주 앞에 드리기까지 이 곳을 떠나지 마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⑥내가 너 돌아올 때까지 머무르리라 하니라
19 기드온이 가서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고 가루 한 에바로 무교병을 만들고 고기를 소쿠리에 담고 국을 양푼에 담아 상수리나무 아래 그에게로 가져다가 드리매
20 ⑦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고기와 무교병을 가져다가 이 바위 위에 놓고 국을 부으라 하니 기드온이 그대로 하니라
21 ⑧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병에 대니 불이 바위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한지라
22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알고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하니
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⑨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4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살롬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

 

 

제가 주목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말씀을 한번 정리해 봅시다.

①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시니(8-10절):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모든 불행과 고통, 미디안의 압제는 바로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있다고 지적합니다.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8 ①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시니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며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여
9 애굽 사람의 손과 너희를 학대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고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었으며
10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 너희가 거주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니라

 

 

 

 

근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 선지자가 누구에게 이야기했냐는 것인데요. 8절에 보면 '그들에게'라고 나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볼 수 있는 대목은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해서 다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해서 다 부르짖은 것이 아닙니다. 7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부르짖었다'라고 했는데요. 이스라엘 자손이 모두 다 부르짖었을까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50% 부르짖었을까요? 그건 모를 일입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다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다 부르짖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 몇 명이라도 부르짖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 비율이 얼마일지는 알 수 없어도 기도하는 사람이 부르짖었기 때문에 선지자를 통해서 그들의 잘못을, 고통의 이유, 불행의 원인에 대해서 메시지를 주신 것입니다.

 

 

 

환자가 아프면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고 원인을 분석하고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질병을 치료할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 얼마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죄에 대한 지적을 일단 인식했다는 것인데요. 중요한 것은 한 선지자가 기드온에게 바로 나타나지 않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게 중에 과연 기드온이 있었는지는 모를 일인데요. 왜냐하면 기드온이 13절에서 "왜 이런 고통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일어날 수 있느냐?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왜 이런 불행이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느냐?"라고 질문하는 데서 알 수 있습니다. 분명히 한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고통의 원인과 이유를 지적했음에도 기드온이 여호와의 사자에게 이렇게 반응한다는 것은 의아할 따름입니다. 이것은 기드온이 선지자가 메시지를 증거 할 때 그 자리에 없었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 기드온이 그 자리에 있었어도 영적으로 둔감하여 깨닫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그렇지 않은가요? 한 번 듣는다고 다 깨우치고 깨달으면 우린 벌써 다 영적 달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우둔한지를 우리 스스로 자각하고 깨달아야 하는 것이기도 한 대목입니다. 반복 repeat이 얼마나 중요한가요? 신앙생활, 훈련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니면 하나님의 사자나 메신저를 통해서, 설교자를 통해서 이야기해도 우리는 영적으로 민감하지 않으면 늘 원인도 망각한 채 영적 표류기의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의 사자: 한 선지자가 나오고, 그 다음에 12절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③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

 

여기서, 저는 하나님께서 이 여호와의 사자를 통해 기드온에게 던진 이 문장이 너무나 어이없다고 생각합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했다는 말씀인데요. Mighty Warrior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어 어순은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큰 용사여!"가 됩니다. 기드온이 지금 동굴에서 과실이나 곡식의 알갱이를 막대기 같은 것으로 떠는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떤다'는 것은 매우 소심하고 비정상적인 타작 방법을 말하는데요, 그만큼 기드온이 소심하고 겁이 많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겁쟁이, 소심쟁이인 기드온에게 '큰 용사여'라고 하는 대목이 진짜 의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다가오실 때는 언제나 미래적인 문장으로 접근하십니다. 베드로를 제자로 삼고자 하실 때 예수님은 요한복음 1장 42에서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게바Cephas는 아람어식의 표현인데, '바위, 반석'이란 의미입니다. 히브리어식 표현으로 베드로입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이렇게 베드로에게 '게바'란 아람어 이름을 부른 이유는 베드로가 앞으로 장차 그런 인물로 성장할 것이며,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믿어주시는 것인데요. 가장 중요한 것은 기드온이든, 베드로이든 간에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강한 용사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렇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기드온에게 무슨 선한 것이 있겠습니까? 겁쟁이에다 소심하고 하나님의 사자가 소명을 주시는 장면에서도 나중에는 믿기지 않는다면서 양털과 이슬 테스트(6장 36-40절)를 하지 않나요? 근데 '양털과 이슬 테스트'가 일어난 시간적인 순서가 기드온이 자기 집안의 아세라 우상을 쳐부수고 '여룹바알'이란 이름을 얻은 후에 이런 제안을 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반신반의하면서 아버지의 바알 제단을 헐고 아세라 상을 찍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의심의 기운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기드온에게 얼마나 믿음이 없는가? 기드온은 얼마나 유약한 존재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강한 용사'로서를 가르치고 훈련시키기 위해 기드온을 다듬어가시는 것을 7장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기드온에게 미디안과 싸울 백성을 33,000명에서 계속 줄여 300명으로 만든다는 점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게 영화 <300>에서 나오는 대단한 스파르탄의 특수부대 정예군이 아니었고 그냥 어중이떠중이 백성들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전쟁은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고 의지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은 기드온은 '강한 용사'로 세워가시는 장면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 우리의 인생의 수많은 사안은 영적 전쟁과도 같다고 할 수 있는데요. 중요한 것은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무엘상 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성경 속에서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은 전쟁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관이라는 것,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 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자주 이 사실을 망각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것 같고 내가 인생을 주관하는 것 같지만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바닥 안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의지하는 자에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할 것이지만, 이 사실을 망각하고 이것에서 멀어질 때 그 사람은 별 볼일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다시 한번 주시는데, 16절에서도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⑤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함께하심, 하나님의 임재를 늘 충분하게 누린다면 두려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주 변하고 자주 낙심하고 자주 무너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에 대해 감이 없습니다. 그냥 사는 것입니다. 미디안의 7년 압제 하에 있던 이스라엘의 배후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았습니까? 함께 계셨습니다. 인식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이 죄를 지어서, 영적으로 불순종하고 우상숭배함을 통해 그들의 영적 감각이 마비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가 거기 계십니다. 프란시스 쉐퍼의 책 중에 그런 책제목이 있습니다.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 그런데 영어제목이 좋습니다.

 

"He is there, He is not silent"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모든 것을 감찰하고 계십니다. 머리털이 숫자까지도 세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머리카락이 몇 올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신다고 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니깐요. 우리가 사람들을 만나 어떤 말을 할지 고민할 때도 하나님은 이미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지 다 아신다고 했습니다. 

 

시편 139: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것이 있다면 우리가 그분을 하나님이라고 부를 필요도 없고, 섬길 필요도 없고, 예배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분이 나보다 나은 것도 없는데 뭣하러 예배합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침묵하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에 미디안에게 압제당하던 7년 동안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싶으셨지만, 이스라엘이 들을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막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에는 항상 우리의 죄의 벽이 끼여 있습니다. 죄라는 장애물을 항상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모든 고통과 불행과 아픔의 원인이 모두가 다 죄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대다수가 거의 우리의 죄에서 연유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미디안의 침략도 결국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제야, 7년이란 긴 시간 동안 침묵하시다가 이제야 나타나셔서 선지자를 보내고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고 기드온을 부르시는가요? 그것은 바로 7절에서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7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었으므로

 

 

저는 이 7절을 대하면서 충격을 좀 받았습니다. 우리는 영적 미디안을 싫어합니다. 이스라엘이 미디안을 싫어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추수해서 뭐 좀 먹으려고 하면 와서 밥상을 강탈해가는 미디안이 얼마나 싫었겠습니까? 7년 동안 계속 이런 악순환이 반복이 됩니다. 오죽 답답하면 숨었겠습니까? 사사기는 영적 공황기, 영적 혼돈기, 영적 리더십의 부재시대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구심점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들의 영적 불순종,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신들에게 스트레스를 해마다 주며 괴롭히는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미디안은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일 수도 있고 먼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상황이나 환경일 수도 있습니다. 경제적인 부채나 빚일 수도 있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모든 것들이 미디안입니다. 왜 이런 미디안이 나에게 발생했는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반응하십니다. 한 선지자를 보내시고, 또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시고, 또 한 사람, 한 사사 기드온을 준비시키십니다. 그리고 그 기드온을 중심으로 기도제목의 핵심이었던 '미디안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움직이십니다.

 

 

 

 

 

 

 

기도는 쉽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기도생활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하지만 그 기도가 때로는 우리에게 부담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위기가 찾아왔을 때, 우리에게 미디안이란 리스크가 다가온다면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르짖어야 합니다. 부르짖을 때 무슨 예의나 무슨 형식이나 무슨 절차가 필요합니까? 그런 거 필요 없습니다. 그냥 '주여!'라고 해도 됩니다. '만군의 여호와여!'라고, '예수님 도와주세요!'라고 외치기만 해도 됩니다. 부르짖는 것에는 복잡한 것이 필요치 않습니다. 내가 지금 죽게 생겼는데, 내가 지금 미디안 때문에 굶어 죽게 생겼는데, 내가 지금 내 문제들 때문에, 내 가정사 때문에, 돈 때문에, 마음 때문에,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에 죽게 생겼는데 절차 필요 없습니다. 그냥 부르짖으면 됩니다. 어쩔 수 없이 해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부르짖는 것입니다. 답답한 것이 없으면 부르짖지 않습니다. 절박하지 않으면 외치지 않습니다. 한국교회가 몇십 년 전 만 해도 기도원이나 교회에서 많이 외치고 부르짖고 했습니다. 그때는 경제적으로 너무 힘겨운 시기였습니다. 먹고살기가 힘들었으니깐 말이죠. 하지만 요즘 현대는 너무나 즐기고 싶은 것이 너무나 넘쳐나는 시대이고 정보도 흘러넘칩니다. 그냥 편안하기 그지없는 세상이 도래했습니다. 스마트폰 하나로 의식주가 다 해결되는 세상입니다. 인공지능 AI이 나와서 인간을 대체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Chat-GPT가 나와서 또 난리가 났습니다. 신이 보이지 않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을 찾으래야 찾을 수가 없는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찾기에는 너무나 눈앞을 가리는 안개자욱이 가득합니다. 그때 우리에게 '미디안'이 찾아온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찾으라는 신호라 생각하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원래 가시나무라서 내 안에 '당신의 쉴 곳 없네'라는 가사처럼 하나님을 둘 여백이 없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미디안이 있어야만 부르짖는 습성이 또 우리에게 있습니다. 

 

(        )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었으므로

 

 

이스라엘이 들어갈 자리에 자신의 이름을 넣고 한번 읽어보세요. 그런 부르짖는 역사가 일어날때 우리에게 강한 용사 기드온의 기적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굉장히 섬세하시고 디테일하십니다. 기드온이 자꾸 자신은 할 수 없다, 집안이 작고 미약하다, 자신은 용기도 없고 소심하다, 부족하다, 안 된다, 못 한다, impossible이다라고 대꾸하지만 하나님이 이끌어가십니다. 그의 모든 응석과 불평을 다 받아주시면서 친절하게 강한 용사로 만들어가십니다. 물론 여러분이 기드온의 인생의 시작과 끝을 다 아시겠지만 강한 용사로 만들어주니 기드온도 결국 인간인지라, 자기가 진짜 강한 용사인 줄 아는 것이 문제 이긴 했습니다.

 

시편 77:1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요즘 시대는 편리함을 추구하는 시대가 되다 보니 예전에는 전화통화나 우편으로 대화를 하다가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전자메일이 등장하더니 이제는 스마트폰으로 문자나 카톡으로 모든 것이 대체되었습니다. 직장을 그만두는 경우는 조금 낫겠지만 알바를 그만 두거나 중요한 사안을 이야기할 때도 문자나 카톡으로 쉽게 마무리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대면해야 뭔가 이벤트가 일어나는데 말이죠. 우리는 이런 시대 속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쉽지 않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길 원치 않으시기에 우리에게 미디안을 허락하십니다. 물론 그 영적 미디안은 우리의 죄와 잘못과 시행착오에서 연유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천국 가는 그날까지, 우리의 인생이 다하는 그날까지 우리가 건강하게 믿음생활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편리함에 병들어선 안 됩니다. 밀림의 생태계처럼 천적들이 항상 등장해서 긴장감을 가져야 야생성이 길러집니다. 아니면 밀림이 왕자 사자라도 이빨도, 발톱도 무뎌지게 되면 사냥을 할 수도 없고 먹잇감을 해결할 수도 없는 신세가 되고야 맙니다. 시편기자는 '내 음성으로', '내 음성으로'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로다'라고 했습니다. 부르짖는 것은 내 음성으로 부르짖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다른 외모만큼 수많은 사람들의 다른 음성이 있습니다. 그중에 유일하고 독특하고 하나밖에 없는 '내 음성'이 있습니다. 싫든 좋든 내 음성입니다. 내게 다가온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내 음성으로 부르짖어야 합니다. 거기에 기드온의 기적이, 거기에 사사의 보내심이, 거기에 하나님의 메시지와 하나님의 친절하심이 드러날 줄 믿습니다. 

 

 

 

 

오늘은 사사기 6장 7-24절의 본문 속에 나타는 기드온의 소명에 대한 부분을 살펴보았는데요. 하나님께서 사사시대에 어떻게 이스라엘에게 접근하시는지, 바로 원수 미디안의 괴롭힘을 통해 이스라엘이 부르짖은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나눠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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