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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사사기.룻기

사사기 16장 28-31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by Message.K 2022. 3. 5.

 오늘 저는 삼손의 최후의 장면이자, 삼손의 마지막 기도를 담은 고백을 살펴보고자 한다. 저는 개인적으로 삼손이 죽어가면서 최고의 회복, 무엇보다 ‘고백과 회복’, 이 두 주제를 동시에 잘 아우르는 생의 정점을 찍는 본문이라고 생각한다.

 

 

 

 신학대학원 시절, 구약해석학 수업을 수강했다. 그때 교수님께서 구약본문 중에서 자기가 원하는 본문 1장을 주해하는 페이퍼를 제출하라는 과제가 있어서 그 때 꽤나 공을 들여 연구한 자료(사사기 16장 주해)를 토대를 오늘 설교가 나왔다.

 

 

사사기 16장 주해

대학원 시절, 선택과목이었던 <성경해석과 설교>(아마도?) 수업시간에 교수님께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본문 1장을 택해서 주해하라는 과제가 나왔다. 본인은 '사사기 16장'을 선택 해나름

kkarl21.tistory.com

 

  

 

왜 사사기여야 하는가?

  구약의 사사기(Judges)는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므로’(삿 21:25)라는 문구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는, 무정부(Anarchy)상태의 시기이다. 가나안 정복 시기와 왕정 시대의 중간기였던, 이를테면 과도기적 시기였던 당시는 왕이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왕’이란 것은 신정정치theocracy 체제의 이스라엘이란 국가에 진정한 하나님의 하나님 됨Kingship의 부재(不在)를 말해 준다. 사람들마다 자기 안에 하나님 두기를 무엇보다도 싫어하였던, 말 그대로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던’ 시기였다. 이러한 사사기의 삶의 정황(Sitz im Leben)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현대인들의 정황과 너무나도 흡사하다. 사사기만이 내뿜는 배경의 장(場), context의 매력이 이 본문을 선택케 한 나의 첫 번째 동기motive라고 할 수 있다.

 

 

 

 

 

왜 16장이어야 하는가?

  사사기의 여러 본문들 가운데 이 본문은 삼손에 대한 비극적 향수를 뿌리는 대목이다. 지극히 인간적인 애정과 지극히 신적인 파워를 느끼게끔 한다. 그러기에 나는 개인적으로 ‘사사기 16장’을 ‘가장 인간적이면서도 가장 신적인’ 본문text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오늘날 시대의 문화코드의 주된 테마는 ‘사랑’과 ‘성(性)’일 것이다. ‘사랑’은 우리의 생이 다하는 날까지,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영원히 우리들의 주된 화두(話頭)일 것이다. 이런 테마들이 담겨진 16장의 text가 주는 매력이 이 본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나의 두 번째 동기라고 하겠다.

 

  이러한 두 가지 개인적인 동기에 의해 오늘 본문을 택하게 되었다. 밀턴(Milton)은

 

‘오, 우리의 변덕스러운 상태를 보여주는 거울이여!

 

라고 삼손에 대해 언급했다. 그렇다면 그 거울을 한 번 들여다보자.

 

 

 여러분, 삼손이 누구인가? 그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삼손은 나실인이고 하나님께 구별되어진 사람이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야 할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16장에 와서 이방의 땅, 가사에 와 있다. 역사적인 구도에서 블레셋과 이스라엘은 그리 원만한 관계를 가지지 못했으며, 더 나아가 적대적인 관계에 놓여 있었다. 그러기에 삼손이 아무리 블레셋 이웃과의 관계에서 마음이 편하게 느낀다 하더라도, 삼손 자손이 그 땅에서 결코 환영 받지는 못할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거기에 있었다.

 

 

 

 

   14:1-4에서 보면 삼손이 딤나로 내려가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거기에 있는 블레셋 처녀들 가운데 한 명이 특히 그의 주의를 끈다. Davis는 삼손의 눈과 입이 쩍 벌어진 것을 상상해 보라고 권한다. 유독 이성에게 약점이 강했던 삼손은 “이제 여기에 진짜 여자가 있구나!” 저자는 세 절에서 세 번에 걸쳐 그 불미스러운 이름을 강조하면서(“그녀는 블레셋 사람이었다. ‘그녀는 블레셋 사람입니다’ 라고 삼손은 말했다. ‘그녀는 블레셋 사람이냐?’ 부모들은 말했다”), 애국적인 이스라엘 사람에게 그것이 얼마나 적절하지 않은 결혼인가를 분명하게 말한다. 그러나, 삼손에게 중요한 것이라고는 그가 그녀를 원한다는 사실뿐이다(14:3하). 삼손이 오늘날의 현대인과 너무나 비슷한 점이다. 오늘날의 젊은이들과 유사한 점이다. 바로 남들이 머라든지 간에 자기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사고방식이다. 자기의 국가가 뭐라고 하는지, 부모님이 뭐라고 하는지, 형제가 뭐라고 하는지,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뭐라고 말하는지 간에 자기만 좋으면, 자기가 끌리면 독불장군처럼 그 일을 용감하게 한다는 것이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모든 권위와 권세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복종하시길 바란다. 여러분의 감정과 기분과 생각의 권세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권세에 순복하시길 바란다! 그러할 때 하나님께선 우리의 욕망까지도 채워주실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욕망의 권세에 순복할 때, 그 욕망으로 인해 우리는 패망의 길을 맞이할 것을 기억하라!

 

 

  

  고대 근동 전역에서 결혼은 상대방에게 연정을 느끼는 두 사람을 짝지어 주는 것이기보다는, 가문의 지위와 관련된 씨족간의 협력(종종 경제적인 동기가 개입된)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그러한 협력 관계를 정하는 일은 가장에게 달려 있었다. 언제, 누구와 결혼할 것인지는 부모가 결정했다. 또한 같은 부족이나 마을 출신의 사람과 결혼하는 동족결혼이 흔한 관행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전통적인 관행을 무시하고 자신만의 욕망과 생각을 쫓아 결혼을 감행한 삼손이라는 인물은 긍정적으로 보자면, 독립심이 충만한 것이고, 부정적으로 보자면, 방종의 극치를 달리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나실인이 아니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이러한 평가가 어느 정도 구색이 맞춰지겠지만 불행히도 그는 나실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혼을 시도한 것은 그의 믿음의 위치가 어디 있는지 되묻지 아니할 수 없다. 어쩌면 삼손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있지 않을 때 그는 여느 이스라엘 사람과 똑같이 되었으며, 대부분의 시간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이성의 유혹에 약한 삼손이 정말 만나서는 안 될 여자를 만났다. 누군가 들릴라와 삼손의 만남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들릴라는 아름답지만 믿을 수 없고, 삼손은 강하지만 약하며...” 그 큰 비극은 그 후 종종 회화와 음악과 영화에 등장해 왔다.

 

 

 

  소렉 골짜기는 삼손의 활동이 대부분 이루어진 지역이다. 삼손은 여기서 이전의 욕망이 아닌 사랑을 만난다. 삼손이 ‘사랑’한다고 언급한 여인은 들릴라뿐이다. 블레셋인들이 삼손에게 던진 질문 형식의 수수께기의 대답은 삼손의 사랑 행각의 위험성을 잘 드러낸다. “무엇이 꿀보다 달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한가?” 그것은 사랑이 아닌가? 삼손은 이미 14-15장에서 겪은 사건으로 말미암아 어떠한 형태의 감정적인 개입(sentimental involvement)이든, 그의 사랑의 증거를 제공하기 위해 다시금 설득당하는 어떤 상황들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삼손은 또 다시 허물어지고 있다. ‘적과의 동침’과 같은 이 사랑은 삼손에게 치명적인 데미지를 가져오게 된다. 여기서 위기의 삼손을 우린 목도하게 된다.

 

 

 

  지금까지 삼손과 관계된 여인은 딤나에서 결혼한 여자와 가사의 기생 등 모두 두 명 이었으나 성경에는 그녀들의 이름이 명시되지 않았다(14:2,3,10; 16:1). 이는 고대 시대는 남성 위주의 사회였으므로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여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렉 골짜기에 살고 있는 여인, 이제 삼손이 사랑하여 그로 인하여 삼손의 운명이 판가름 나게 될 여인의 이름이 본문에 소개되고 있다. 이는 그녀가 삼손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여자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이름 ‘뗄릴라’에는 삼손의 장래 문제에 관한 암시가 담겨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들릴라’로 번역된 ‘뗄릴라’는 ‘~에 매달리다’(잠 26:7), 혹은 ‘연약하다’(사 38:14)는 의미를 가진 동사 ‘딸랄(lld)’에서 유래한 명사형으로서 ‘매달린 자’, 혹은 ‘약한 자’, ‘약하게 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먼저 ‘뗄릴라’가 ‘매달린 자’라는 의미라면 이는 삼손의 힘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기 위해서 날마다 졸라대(V.16) 결국 그 비밀을 알아낸 그녀의 기질을 암시하며, ‘약한 자’나 ‘약하게 하는 자’라는 의미라면 자신의 여성적인 매력과 연약한 모습을 이용하여 결국 삼손의 비밀을 알아내 그의 머리털을 잘라 그를 약하게 만든 그녀의 행적(V.19)을 암시한다고 볼 수도 있다. 또한 만약 그 이름을 아람어 지시 대명사 ‘드(d)’와 ‘밤’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라옐라(hlyl)’가 결합된 것으로 본다면 들릴라는 ‘밤의 여인(she of the night)’이란 이름 뜻을 가진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는 그녀의 천박한 도덕성을 암시해준다. 공교롭게도 삼손의 이름의 뜻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작은 태양’이란 뜻이다. 삼손의 빛, 작은 태양빛“태양처럼 빛나는(sunny)”을 어두움으로 감싸버리는 그녀의 역할을 암시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처럼 삼손이 생애 마지막으로 사랑한 여인 ‘뗄릴라’의 이름 속에는 삼손에게 치명타를 줄 수 있는 독소가 숨겨져 있었으나, 사랑에 눈 멀고 영적 감각이 상실된 삼손으로서는 그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삼손은 사랑에 눈 멀었지만, 들릴라는 은 돈(은)에 눈이 멀었던 인물이다. 19절에 삼손은 들릴라의 무릎을 베고 잤다에서 사용된 ‘자다’의 동사 ‘야쉔’은 생리적인 잠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져 멸망을 자초하는 것도 의미한다.1)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빛으로, 삼손으로 불러주신 줄 믿는다. ‘작은 태양’으로 우릴 불러주셨는데, 우리는 세상에 ‘뗄릴라’가 되어 눈 멀진 않았는가?

 

 

 

삼손에게서 힘이 떠난 직접적인 원인은 ‘잘려진 머리카락’ 때문이었으나 궁극적인 원인은 ‘여호와께서 삼손을 떠나셨기 때문이었다’. 그의 힘은 머리카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에게서 나오는 것이었다. 여호와의 신이 떠난 삼손은 한낱 ‘육신의 정욕으로 타락한 영웅’에 불과했다. 이제 두 눈 까지 뽑힌 삼손은 대적 블레셋의 신전의 맷돌을 돌리는 노역에 시달리게 되었다. 큰 맷돌은 대개 가축이 돌렸고, 간혹 노예나 죄수가 이 일을 하기도 했다. 밀턴은 ‘삼손(Samson Agonistes)’란 작품에서 삼손을 이렇게 표현했다.

 

 

 

‘가사에서 눈멀어 종들과 함께 맷돌에 있는 타락한 영웅’

삼손은 나실인의 규정을 세심하게 지키지 않았다. 따라서 나실인 규정을 어겼을 때에도, 이에 해당하는 의식을 통해 하나님께 다시 헌신하는 예를 취하지 않았다. 따라서 삼손은 이제 의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의 삶을 통해서라도 나실인 규례를 지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원래 시체를 만지거나 나실인의 규정을 어기면 칠 일 동안 정결하게 지낸 다음 제 칠일에 머리를 밀도록 되어 있다(민 6:9). 그전의 나실인 서약이 무효임을 이런 식으로 표시하는 것이다. 그러고는 제 8일에 산 비둘기 두 마리나 집 비둘기 두 마리를 가지고 와서 하나는 속죄 제물로, 다른 하나는 번제물로 드리도록 되어 있다. 그 다음에는 여호와게 새로 나실인 서약을 할 날을 정하고 일년 된 수양을 가져다가 속건제로 드리도록 되어 있다(민 6:10-13)

 

삼손에게 있어 두 눈이 뽑히게 된 것은 매우 특기할 만하다. 그는 두 마리의 비둘기로 속죄 제물과 번제물을 드리는 대신, 삶으로, 몸으로, 바로 두 눈을 드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삼손이 자기 스스로는 머리를 깍진 않았으나, 들릴라의 간교한 술책으로 인하여 강제적으로 머리를 깎게 될 때 그 이전까지의 날들은 모두 무효가 되고 나실인의 삶이 새롭게 시작되는 것이었다(민 6:12). 그러므로 본문에서 삼손의 머리털이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의 본의든 본의가 아니었든지 간에 삼손에게 있어서 지나간 부정했던 삶은 모두 끝나고 나실인으로서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짧은 구절을 통해 더욱 강렬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의 머리카락이 자라감에 따라 그의 힘이 되돌아왔다는 추론이 특별하게 진술되어지진 않는다. 본문에서 그러한 증거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감옥에서의 감금상태에서 그의 생의 수치와 실패를 깊이 생각하면서, 다소간의 회개의 불꽃(some spark of repentance)을 태웠을 것이라고 성경학자들은 이야기한다.

 

23절: 블레셋 고위층을 비롯한 백성들이 지붕에만 3,000여명이었다는 것은 엄청난 숫자상의 인파가 모여 성황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삼손을 생포한 사건이 블레셋 족속에게 있어서 국가적인 차원의 큰 관심사였고 축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편 본문에는 ‘우리’라는 뜻의 1인칭 복수 접미어 ‘에누(wny)’가 세 번이나 반복되어 나온다. 그리고 24절에는 다섯 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참고로 한글 개역 성경에는 24절에 ‘우리’라는 말이 모두 네 번 나오지만 원어 성경에는 모두 다섯 번 나온다. 이처럼 블레셋 방백들과 백성들은 ‘에누(우리)’라는 말을 모두 8회나 사용하였는데, 이는 그들의 연합성을 강조하는 표현인 동시에 블레셋 감옥에 홀로 외롭게 있던 이방인 삼손을 철저히 소외시키는 함성이기도 했다. 즉 그들은 홀로 외롭게 있는 삼손을 대항하여 철저히 하나가 되어 삼손을 더욱 무기력하고 초라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의 원수를 우리의 손에 붙였다’라고 블레셋 사람들은 즐거워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뜻밖의 아이러니이다. 정작 이 구호를 외칠 사람은 블레셋이 아니라 이스라엘이기 때문이다.

  이 아이러니는 블레셋 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원수를 벌했다. 그들은 삼손의 머리털이 다시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머리가 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의 힘과 머리털의 길이는 마술적인 관련이 전혀 없다고(상당히 올바르고 건전하게) 가정했음에 틀림없다. 한 번 머리를 깎음으로 해서 그 서원은 깨어졌고, 여호와께서는 그를 떠나셨다. 언약에는 더 이상의 갱신도, 회복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성도 여러분,

세상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일회용품처럼 그렇게 소모되어버려지는 소모품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는 영원한 것이다. 한번 그분에게 걸리면 끝까지 가는 것이다.

 

블레셋인들은 모든 것이 끝이다. ‘상황 종료이다!’고 하면서 희희락락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분! 삼손의 머리카락은 자라고 있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그들이 알지 못했던 어떤 것, 아니 어떤 분이 계셨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도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하나님이 오래 전에 삼손이 ‘죽을 날까지’ 나실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몰랐다(13:7).

 

그가 내게 이르기를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부터 그가 죽는 날까지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하더이다 하니라

 

  자신의 종이 잡혀 갔을 때, 그 분이 그를 버리신 것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삼손이 아무리 그 약속을 무시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유효하다. 죄인들의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가 있다. 사사기의 메시지를 마이클 윌코그는 ‘죄인의 괴수에게 은혜가 넘치도다’라고 표현했다! 이 문구는 존 번연(John Bunyan)이 ‘천로역정’을 출판하기 열 두 해전에 자신의 영적 자서전에 붙인 제목이다.

 

 성도 여러분, 기억하라!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과 인격을 거역할수 없는 분이시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딤후 2:13).

 

삼손은 우여곡절 끝의 인생에서 이제 블레셋 신전의 지붕을 받치고 있는 두 기둥을 잡게 되었다. 그리고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28절을 읽자!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28절: ‘부르짖어’에 해당되는 ‘와이크라’의 원형 ‘카라(arq)’는 큰 소리로 부르짖는 것(겔 8:18; 미 3:5)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당시 삼손은 묵상적으로 소곤소곤 작은 소리로 기도하지 않고, 신전에 운집해 있는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소리로 기도했다. 머리카락이 잘리우고, 두 눈이 뽑히우고, 노예로 전락하여 맷돌을 돌리면서, 그리고 이방인들 앞에서 재롱을 부려야하는 모욕과 수치를 당하여 말할 수 없이 비참하고 괴로웠던 모든 감정을 다 토해 내는 심정으로 크게 외쳤던 것이다. 그 부르짖음은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자기가 느껴왔던 고통을 하나님께 호소하는 외침이요, 나실인으로서 범죄하였던 지난날을 회개하는 부르짖음이었으며, 자신의 신세를 그렇게 만들고 동족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있는 원수 블레셋을 멸절시켜 달라는 도움의 간구였던 것이다.

 

 

  또한 ‘나의 주 여호와여 바라건대 당신은 나를 기억하소서’(직역)에서 ‘주’로 번역된 ‘아도나이’는 ‘다스리다’는 의미에서 유래하였고, ‘나의 주님’, 혹은 ‘나의 주권자’라는 의미이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그가 여호와를 ‘아도나이’라고 부른 것은 큰 의미가 있다. 그는 태어나기 전부터 여호와께 나실인으로 바쳐진 자였음에도 불구하고(13:7) 사실 나실인답게 살지 못했다. 즉, 그는 여호와의 주인됨과 다스리심을 인정치 않는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결국 그의 운명은 처참하게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이제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그는 여호와를 ‘아도나이’라고 부름으로써 지난날을 회개하고, 여호와의 주인되심(Lordship)과 자신이 그 분의 소유됨을 새롭게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고통의 시간을 거쳐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는 삼손 자신에게 있는 초인적인 힘의 근원이 예전의 사고방식처럼 단순히 자신의 머리카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 있음을 분명히 인정하는 표현이다. 들릴라의 집요한 유혹 앞에서 삼손은 17절에서 들릴라에게 ‘내 머리카락이 밀리우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난다’고 말함으로써 그에게 있는 힘이 원래 자기 자신의 것인 양 말했었다.

  그러나, 그는 고통의 터널을 지나면서 철저하게 겸손해지고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는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았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신(jwr, 루아흐)으로 임하시고 함께 하셔야만 비로소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시 자란 머리카락을 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당신이 나를 강하게 하셔야 합니다’ 라고 겸손하게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로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복수하게 하옵소서’(직역)

  삼손의 절규에 찬 기도(solemn prayer)를 잘 표현한 시가 있다.

 

 


한번만 나에게 기회를 주소서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여 주소서
짙은 어둠 속에서 앞을 볼 수 없는 지금 난 당신을 더 가까이 느끼네
분별력을 잃었던 하나님의 나실인 이 순간 나의 마지막을 당신을 위해
 
오 주님 그 때는 내 욕심으로 살아가는 것 참 멋이 있게 보였죠
주의 힘을 받은 그 참된 의미를 너무도 쉽게 잊어버리며 살았네
분별력을 잃었던 하나님의 나실인 이순간 나의 마지막을 당신을 위해
 
이 땅의 죄들을 떠받친 두 기둥 하늘의 힘으로 무너지게 하소서
부활을 꿈꾸며 당신 이름으로 그 두 기둥 사이에 나 서리

 

 

  한편 구약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족속에게 ‘원수를 갚는다’는 의미는 실제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신학적 관점에서도 매우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원수를 갚는 것’은 합법성과 정의, 그리고 구원이라는 개념과 그 의미가 통한다(렘 15:15; 나 1:2; 민 31:2). 이스라엘의 전쟁은 대부분 하나님을 대신해서 싸우고 하나님의 원수를 대적하는 거룩한 전쟁이었으며, 이는 하나님께서 싸우시는 것이었다! 물론 이 때 원수에 대하여 복수를 행하시는 궁극적 주체는 바로 하나님이시다(신 32:35,41).

 

 

  사사들은 “내적인 개혁을 촉구하고 외적인 공격에 방어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주님이 선택하시고 임명하신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삼손의 마지막 기도는 언뜻 보면 마치 자신을 불구로 만든 자들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심에서 나온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영적 각성 아래 이미 교만을 버린 삼손의 마지막 절규 어린 기도는 자신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고 우상을 찬양하며 여호와를 모욕하는 하나님의 원수를 갚게 해 달라는 기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처럼 블레셋이 하나님의 원수라는 의미가 부각된다면 하나님께서 싸우실 명분을 충분히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극심한 고통 중에서야 삼손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모든 상황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그 고통 중에서 하나님의 원수를 갚음으로써 늦게나마 자신의 사사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려는 삼손의 심정이 본문의 이면에 가득 차 있다. 처음에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구원을 요청하지 않는 상황에서 먼저 마노아의 부인에게 나타나 아들이 태어날 것을 말씀하시며 이 아이가 나실인으로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기 시작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삼손도 이렇게 그의 인생을 마감할 수가 없었다. 그는 때는 늦었지만 이제라도 하나님께 자신의 전부를 드리기로 결심하였던 것이다. 이 삼손의 고백은 삼손의 사사됨을 회복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29절: ‘껴 의지하고’를 직역하면 ‘그리고 삼손은 더듬거렸다…그리고 그는 그것들을 지탱하였다’이다. 삼손은 기도를 마치고 다곤 신전을 떠받치고 있는 두 기둥을 더듬어 확인하고서는 힘을 주기 위해 최종 자세를 취하였던 것이다.

 

30절: 여기에 사용된 동사는 비틀어 돌리는 행위를 시사하며, 그로부터 삼손이 돌 받침대에서 기둥을 돌려 빼내어 지붕을 버티고 있던 받침대를 제거해 버렸으며, 그럼으로써 지붕이 무너지게 했으리라고 추론할 수 있다.

 

 

 

  스스로 목숨을 버리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는 삼손의 각오는 훗날 대제국 페르시아의 황후 지위와 더불어 목숨까지 버리면서 동족을 구원하고자 결단하고서 ‘죽으면 죽으리라’(에 4:16)라고 고백한 에스더의 비장한 각오를 연상케 한다. 우리는 삼손의 이러한 희생적인 죽음을 단순히 자살로 보아선 안 된다. 그의 죽음은 이방 블레셋의 압제로부터 동족을 구하기 위한 마음에서 비롯된 거룩한 순교였다. 이것은 또한 스스로를 희생하면서 목숨까지 내어 놓으신 그리스도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원어 성경상 본문에는 ‘죽다(to die)’란 표현이 세 번이나 나오며, 본절 전체적으로는 모두 다섯 번이나 나오고 있다. 한 절에 ‘무트’라는 단어가 이와 같이 여러 번 쓰이는 것은 죽음을 강조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 때문이다. 물론 블레셋 족속 전체의 씨를 말리지는 못 하였지만, 다섯 방백을 포함한 영향력 있는 블레셋의 고위관직들과 지도자들의 죽음은 블레셋의 이름이 사사 시대의 무대에서 사라진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비록 삼손이 머리를 다시 성결케 하면서 일년 된 수양은 드리지 않았으나, 대신 자신의 몸을 드렸다. 그의 제물은 순결한 것이 아니었다. 두 눈이 빠져, 흠이 있는 제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이 제물을 기뻐 받으셨다.

 

30절: 나실인인 삼손은 꺾여졌고 궁극적으로는 감각적인 열정과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분리의식의 결여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이 마지막 구절은 15:20을 반복하고 있다.

  

  “삼손이 이스라엘 사사로 이십 년을 지내었더라”

 

 대사사 가운데 아비의 장지에 장사되었다는 기록은 삼손 외에는 기드온에게만 나온다(8:32). 구약 시대 히브리인에게 있어 아비의 묘소에 장사되는 것은 그의 삶이 조상들의 전통에 부응하는 삶이었음을 인정받는 것으로서 영예로 여겨졌다. 자신의 욕망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일그러진 영웅, 삼손은 그의 종말의 마침표를 잘 찍음으로 말미암아 실추된 사사됨, 사사의 명예를 회복하고 있다

 

 

 

 

 

 

Epilogue…

  이 열 두 번째 사사의 몰락에 대한 기사가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삼손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그는 비극적인 교훈을 준다. 그 면모란 은혜에 의해 부르심 받고, 서원에 의해 속박되며, 계속 되풀이해서 권능을 부여 받고 큰 은사를 받지만, 서원에 의해 그럼에도 신실하지 못하고 방종하고 원수들과 너무나도 기꺼이 친하게 사귈 채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 죄인들이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삼손은 무시무시한 경고의 역할을 한다. 그는 엄청난 잠재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서, 거룩한 삶에 대한 성령님의 부르심이 성령의 은사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좀 더 넓게 보면 하나님의 계획은 굽음 없이 계속 진행되고 있었으며, 삼손은 비록 비극적인 인물이지만, 그를 통해 여호와의 신은 그의 백성을 구원하신다. 그는 결국 ‘다른 사람과 같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힘의 비밀이 밝혀지기만 하면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했지만 말이다(16:7,11,13,17). 바로 그 때문에 그는 두 번에 걸쳐 그리고 참으로, 이스라엘의 ‘사사로 지내었다’고 나와 있으며, 또한 정당하게 히브리서 11장에 나와 있고, 또한 그의 탄생과 죽음이 희미하긴 하지만 수세기 후에 있을 또 다른 탄생과 죽음을 진정으로 반영하는 것이다.

 

  사사기는 진정한 영웅들의 카리스마(carisma;charisma)의 통치 이야기이다. 혹자는 ‘삼손에게 무슨 카리스마가 있는가?’ 라고 대꾸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가 자발적으로 하나님 앞에 굴복하지 않고 환경과 상황과 여건들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의 죽음에 대해선 그의 자발성(spontaneity)이 드러난다. 머리카락이 밀리우고 두 눈이 빼임을 당한 후 나실인에 대한 자신의 소명the Call을 깊이 묵상했던 맷돌 돌리던 시간, 그 낮음과 비천함과 약함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충분히 경험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침묵의 시간(Solitary Times)’의 보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의 인생은 우리에게 바울서신의 말씀을 상기시켜 준다.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For when I am weak, then I am strong.(고후 12:10)’

 

 은사는 헬라어로 카리스마이다.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카리스마를 받아 누렸는가? 그리고 그 은사로 인해 얼마나 많은 열매를 남겼는가?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받은 카리스마가 아니다! 영원한 카리스마이신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어야 하겠다.

 

 

 받은 은사보다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길 바란다. 거룩한 삶에 대한 성령님의 부르심이 성령의 은사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기억하시길 바란다. 우릴 부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리가 하는 사역과 활동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기억하라!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 거룩한 삶으로 초대에 날마다 반응하며 감사하며 생활하는 믿음의 카리스마들 되시길 소원한다.


1) 시편 13: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제가 가장 즐거워했던 작업인 '사사기 16장 주해' 페이퍼

 

사사기 16장 주해

대학원 시절, 선택과목이었던 <성경해석과 설교>(아마도?) 수업시간에 교수님께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본문 1장을 택해서 주해하라는 과제가 나왔다. 본인은 '사사기 16장'을 선택 해나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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