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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사무엘상.하

사무엘상 22:1-2, 아둘람 공동체의 비전

by Message.K 2024.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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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엘상 22장 1-2절의 본문에는 다윗과 그를 중심으로 모여든 아둘람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 후에는 다윗의 왕조의 개국공신이 된 것을 보면서, '아둘람 공동체의 비전'이라는 주제로 설교한 내용을 공유하고자 한다.

 

 

사무엘상 22장 1-2절, 아둘람 공동체의 비전 설교
사무엘상 22장 1-2절, 아둘람 공동체의 비전 설교

 

 

 

넘져말아야 할 선, 마지노선

  • 마지노선: 제1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가 독일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하여 양국의 국경을 중심으로 독일에 대한 방위선으로서 구축한 대규모의 근대적 요새선(要塞線).

 

 당시의 육군장관인 A.마지노(1877∼1932)의 이름을 따서 붙인 명칭으로, 총연장은 약 750km로서, 북서부 벨기에 국경에서 남동부 스위스의 국경까지 이르고, 중심부는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을 따라 이어진 영구 요새선이었다. 1927년에 착수하여 10년 뒤인 1936년에 완성하였는데, 총공사비는 160억 프랑이나 들었다.

 

  이 마지노 요새선은 당시의 축성기술(築城技術)의 정수(精粹)를 모았고, 지형의 요해(要害)를 이용하였으며, 완전한 지하설비와 대전차(對戰車) 방어시설을 갖추어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였다. 그러나 1940년 5월 독일 기갑병단의 기습과 전격작전으로 그처럼 공을 들이고 기대했던 마지노선은 충분한 가치를 발휘하지도 못하고 벨기에 방면의 일각이 돌파당하여 함락되고 말았다.

 

  사람이 살다보면 자기가 생각하는 마지노선(dead line)을 넘을 때가 있다. 그 마지노선을 나는 절대 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살지만, 사람이 급박한 순간이 되면 그 마지노선을 본의 아니게 넘을 때가 있다.

 

 

 

마지노선을 넘어버린 다윗

 다윗은 사울로부터의 끊임없는 도주행각 가운데 피하다 피하다가 결국은 블레셋으로 넘어간다. 블레셋은 사울의 이스라엘이 평생 싸웠던 적군, 원수 나라였다. 다윗은 마지노선을 넘어선 것이다! 오죽하면 그렇게 넘어갔을까 하는 그런 동정적인 의견도 던져본다. 그러나, 다윗은 기름 부음 받은 자였다. 앞으로 이스라엘 일국의 왕으로 등극할 사람이다. 그런데, 다윗은 급박한 나머지 21:10에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아기스는 마옥의 아들이며 블레셋 가드의 왕이다. 다윗은 망명하러 아기스 왕을 두 번 찾았다(10절; 27:1-7).

 

 아무리 믿음의 사람, 다윗이라지만 다윗은 블레셋으로 넘어가면 안 되었다! 완전 매국노 같은 행위였다. 21:10에 뭐라고 하는가?

 

그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계속 쫓기는 몸이라 다윗도 진절머리가 났을 것이다. 그래서 원수의 나라로 망명을 신청한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잘못 선택한 것이다. 다윗은 언약백성이다.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은, 차세대 왕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방의 나라로 망명을 신청하다니! 아무리 위협적인 상황과 환경이 닥쳐와도, 애국자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 차세대 국왕의 면모가 아닌가? 그래선 아니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가서도 일이 꼬였던 것이다. 예전에 다윗이 물리친 장수, 키가 거의 3미터에 달하는 장수 이름이 누구? 바로 골리앗이었다! 골리앗의 국적인 블레셋이었다. 엘라골짜기에서, 그 때 다윗은 골리앗을 무찌름으로써 한방에 스타덤에 올랐다. 블레셋은 승리는 거의 따놓은 당상이었던 전쟁에서 갑자기 판도가 바뀐 것이다. 이 소년이 등장함을 통해서 말이다. 블레셋 군대에겐 이 다윗의 명성이 대단했다. 본국 이스라엘에서 뿐만 아니라 적국에서도 그 명성 그대로,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11절)

 

 이 말을 들은 다윗은 오히려 자신이 절대 와서는 아니 될 호랑이 굴에 들어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미치광이 흉내를 내면서 이 위기를 모면하려고 한다. 그 행동이 어떠했는지 13절에 잘 나타난다.

 

  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고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결국 그가 그곳을 떠나 아둘람 동굴로 정신병자 흉내를 통해 줄행랑치게 된다.

 

 

 

아둘람 공동체에 모인 사람들

그런데, 거기서 다윗은 새로운 지지세력을 얻게 된다. 1-2절을 다시 한번 읽어보자.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이젠 끝이라고, 길이 없다고, 모든 것이 끝이라고 이야기하는 그때에도 하나님은 우리와 동행하심을 믿길 바란다! 하나님은 여전한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라!

 

신변에 위협을 느낀 다윗의 온 가족들과 400명에 달하는 그의 추종자들은 세 종류의 사회적 억압과 학대를 받는 자들로 구성된다. 환난 당한 모든 자(콜 이쉬 마초크)라는 어휘는 '사회적으로 약한 자들'을 말한다. 빚진 모든 자(노세)는 고리대금업자란 뜻이므로 '그들에게 빚을 지고 종살이하다 도망한 자들'이란 뜻이고, 마음이 원통한 자(마르 네페쉬)는 문자적으로 쓰디쓴 영혼 이란 뜻으로 '고생의 쓴 맛을 보고 마음이 분통한 자들'이란 말이다. 이 세 종류의 사람은 곧 사회적으로 약자이고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을 말한다. 이런 종류의 400명이 모였으니, 사울의 정상적인 군대와는 대조적이다. 다윗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 통솔자(샤르)가 되었다.

 

  다윗은 사울의 쫓기는 신세였다. 그런 와중에 다윗의 가족 모두 위협을 느꼈다. 그래서 22:3-5에 다윗은 그의 부모의 안전을 위해 모압으로 이주시킨다. 다윗은 선지자 갓의 조언에 따라 다시 유다 땅으로 들어갔다. 갓의 조언은 다윗이 약속의 땅과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떨어져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과 다윗의 유일한 은신처와 요새가 여호와라는 사실을 주지시키는 메시지였다. 앞으로 대권을 물려받을 인물이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보면, 해외에서라도 이승만이나 백범김구처럼 독립운동을 해야지, 자기 목숨만 살겠다고 해외로 멀리 도망만 다니면 과연 그런 사람에게 나라의 대권을 맡기겠는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다윗은 블레셋의 스파이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것만큼은 막으신 것 같다. 역사적인, 치명적인 실수로 인해 다윗이 다윗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윗이 피난했던 아둘람 동굴(혹은 요새)은 여호수아에게 정복당한 뒤 야르뭇과 소고와 아세가와 더불어 유다 지파에게 돌아간 성읍(수12:7,15;수15:20,35)으로 ‘피난처’ ‘은신처’란 의미에 걸맞게 인근 산에 비해 산림이 유독 우거진 야산 숲 속에 있다. 석회암의 수많은 동굴이 널려 있는데다 엘라 골짜기나 고대 도로에서 골짜기 하나씩을 뒤로하고 있어 인적이 뜸한 곳이다. 동굴이 많기도 하고, 큰 동굴은 400명씩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둘람 동굴 앞에 서면 베들레헴 언덕까지 훤히 올려다 보인다. 그리고 베들레헴에서 엘라 골짜기에 이르는 직선 길이 선명하다. 그가 고향에서 부모님의 심부름으로 엘라 골짜기에 진치고 있던 사울 군대 형제들의 안부를 물으러 오갔던 길이다.

 

  아둘람에 서서 당시 다윗의 심정을 상상해 보라. 자신의 고향 베들레헴의 언덕을 지척에 두고도 가지 못하는 쫓기는 신세다. 앞산 너머 엘라 골짜기에서는 물맷돌 몇 개로 골리앗을 때려 눕혔던 화려한 과거가 있었다. 사울의 환대뿐만 아니라 온 국민의 환대를 한 몸에 받던 그가, 유대 땅과 적군 블레셋의 중간지대 아둘람에 짱박혀 은신해 있다. 골리앗의 칼(무기)를 들고서 말이다.

 

 

 

다윗의 삶의 분기점이 된 아둘람 공동체

그러나 아둘람, 아둘람공동체는 다윗의 삶에 분기점이 되는 곳이다. 다윗이 아둘람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과 여러 무리들이 그에게로 몰려들었다. 고통당하는 자, 빚진 자, 삶의 불만자로 당시 사회 저변층 사람들이었다. 가장 비참한 인생의 바닥까지 내려간 다윗, 그리고 그를 찾아온 사회 저변의 눌린 자들. 그러나 하나님은 훗날 이 다윗과 그와 함께한 아둘람 사람들을 이스라엘의 역사를 새로 쓰는 주역들이 되게 했다.

 

 아둘람 공동체의 우두머리로 서 있는 다윗을 상상해보라!

 문득 저는 우리 청년 대학부 공동체가 아둘람 공동체가 되었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새벽에 말씀을 달라고, 메시지를 달라고 기도하는데 이 내용이 스치고 지나갔다. 다윗은 사울에게서 쫓기고, 다윗의 가족들과 삶의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는 추종자들이 다윗을 중심으로 모였던 것이다.

 

2절: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사회적으로 약하고, 물질적으로 궁핍하고, 쓰디쓴 영혼을 가진 자들이 다윗을 중심으로 하나되었던 것이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다윗도 쓰디쓴 영혼(마르 네페쉬), 사회적인 약자였던 것이다. 상처받은 자들이 여기서 상처를 공감대로 하여 모인 것이다. 우리 공동체가 ‘아둘람 공동체’가 되었음 좋겠다!

 

  아둘람 동굴, 아둘람 요새를 여러분이 인터넷에 찾아보면 알겠지만 굉장히 척박하다. 광야 가운데 있는 건조한 석회암 동굴이다. 거기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는가? 하지만 하나님은 그 광야에서 이스라엘, 2대 왕인 다윗은 연단하시고, 새로운 정부를 출범시킬 세력을 키우고 계셨던 것이다. 건국 멤버들! 후에는 400명이었던 사람이 나중에는 600명으로 더 확대된다. 광야같은 땅! 아둘람! 하지만 거기에는 다윗의 기도와 묵상과 다윗의 찬양이 있었던 것이다! 시편 57편이 대표적인 시이다. 그러기에 거기에 회복의 역사가 있었던 것이다.

 

  문득 나는 우리 교회를 생각했다. 이 일대는 발전이 저조한 지역이다. 그래도 교회가 있어서 희망이 있다! 슈퍼마켓도, 마트도 잘 없고, 커피샵도 하나 덩그러니 있고, 교회커피샵은 밤손님을 받지 않는다. 이 교회커피샵을 좀 잘 운영했음 좋겠는데, 좋은 방안이 없는가? 그래서, 나는 한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중보)기도는 정성이고 태도이고 마음

우리가 이 주변, 교회주변의 땅을 위해서 기도해보지 않겠는가? ‘기도로 우리의 마을과 동네를 변화시키자’는 제언을 지금 저는 하고 있다.

기도는 정성이고, 태도이고, 마음이다.

 

한밤의 기도회 마치고 가는 포장마차 아줌마 이야기-일을 2시에 마치고, 7시까지 오뎅국물을 정갈하게 내기 위해서 잠도 자지 않고 지킨다는! 자다 일어나다 보면 타이밍을 놓친다고, 왜 의자에 앉아서 조금이라도 쉬지 않느냐고? 의자에 앉다보면 눕고 싶다. 오뎅 하나를 먹는 손님도 귀챦지 않게 생각하고, 한 사람이라도 기다리는 자세! 그런 자세, 우리의 기도자세여야 하지 않겠는가!

 

 

 

결렬된 땅조차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중보기도자의 능력

중남미에 100평방킬로미터나 되는 넓은 땅이 있었다. 그 땅에는 풀도 잘 자랐고, 물도 충분했고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아주 좋은 옥토로 알려졌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그곳에 비가 내리지 않았다. 풀들이 죽어갔다. 나무들도 죽어갔고 물들이 말랐다. 사람들도 하나 둘 씩 떠나가 버렸다.

  그래서 나중에는 그 땅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다. 이른 바 황무지가 되어 버렸다. 더 나아가 많은 사람들이 그 땅을 통과하는 것조차 꺼리게 되었다. 거기만 들어가면, 유령이 떠나니는 소리가 난다는 것이었다. 영화‘silent hill’처럼 음산한 곳이었다. 공포와 두려움으로 뒤덮인 어둠의 땅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전도여행 팀이 그곳을 방문했다. 그들은 그 땅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므로 알게 되었다. 그 땅에 거하고 있던 사람들이 공평치 못하고 불의했던 것이다. 가진 자가 갖지 못한 자를 탈취하고, 권력을 남용하고 압제하고, 믿는 자들이 믿는 자로서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겔 22장처럼 모든 이들이 타락하고 범죄하였던 것이다. 땅이 슬퍼하기 시작했고 땅의 저주가 감돌기 시작했다. 옥토가 박토가 되어 버렸다.

  중보기도 팀이 그 자리 안으로 들어갔다. 그 땅의 결렬된 틈을 찾아 들어갔다. 하나님 앞에서 긍휼을 구하기 시작했다. 그 땅을 회복하는 길은, 그 땅에 악을 행한 자의 피를 내는 것이다. 피흘림 받은 땅의 속함은 피 흘리게 한 자의 피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정결하게 되는가? 이전에 악을 행하던 사람들을 다 모아서 불로 태우고 중세시대의 ‘마녀사냥’처럼 화형을 시켜야 하는가?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속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그들을 대신해서 피 흘리게 하셨다.

 

  그래서 중보기도 팀은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이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이 땅을 적셔 주옵소서, 이 땅을 정결해 주시옵소서”하고 부르짖고,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전능하심을 찬양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그 땅에 오랜만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풀이 돋아나고 땅이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뉴질랜드는 얼마나 아름다운 땅인가? 일년 내내 꽃이 피어 있고, 너무나 아름다운 꽃과 나무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 처음 그곳에 사람들이 이주했을 때, 그 땅은 죽음의 땅이었다. 어떤 나무도 잘 자라지 못하는 죽은 땅, 버려진 땅이었다.

  그런데 청교도들이 그 땅에 들어가면서 주님 앞에 중보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그 땅을 축복된 땅으로 바꾸셨다.

  중보기도는 땅을 회복하는 능력이 있다. 중보기도는 우리의 땅, 우리의 필드, 우리의 지경을 회복시키는 능력이 있다. 중보기도자들이 기도할 때, 그 결렬된 틈 사이로 들어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변화시켜 주신다.

우리 교회가 여러모로 어수선하다. 하지만 우리가 먼저 기도하면, 보이지는 않지만 영적인 면에서 주님께서 풀어 주신다.

 

사랑하는 청년. 대학부 여러분!

여러분이 이 교회의 주인이 되고 싶지 않은가? 우리 교회의 비전은 다음세대를 세우고 키우는 비전이다. 유초등부, 중고등부, 대학부. 근데 우리는 이제 성인이라서 다음세대에 대한 별 관심이 없지는 않은가? 주일학교, 중고등부는 막 부흥하는데, 대학부는 멈춰 있으면 여러분 자존심 상하지 않는가? 나는 물론이다! 다른 교육부서는 교사라도 많다. 20명이 넘는 교사와 스탭들,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이 포진해 있다. 우리 대학부, 청년부? 지도장로님 외 집사님 두 분! 저! 끝이다. 누가 일해야 하는가? 여러분이 일해야 한다. 여러분, 임원들, 리더들이 일해야 한다. 여러분이 이 대학부, 청년부의 심장이다. 그런데, 심장이 움직이진 않고 멈춰 있다면 문제가 아닌가? 공동체와 교회에 대해서 다들 할 말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기도하지 않고 평가와 비난만 하는가? 그것만큼 사악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제안하고자 한다. 기도하자! 한밤의 기도회 아니면 토요기도회에 나와 함께 기도하는 새벽이슬 같은 청년이길!

 

   어디든 갈라지고 결렬된 곳,
하나님과의 사이가 벌어진 곳,
그 곳이 바로 중보기도자,
예배자가 있어야 할 자리이다.

 

  여러분이 이 교회의 결렬된 틈을 위해, 주변 동네를 위해 기도하지 않겠는가? ‘꿈을 꾸지 않는다면 이루는 것도 없을 것이다!’ 여러분이 이 지역과 교회를 위해서, 황무지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겠는가? 휘황찬란한 네온사인과 분주한 상점들이 이 동네에 들어서기를 기도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이 풍요로운 땅이 되도록! 가난과 궁핍함을 벗고 하나님의 부요함으로 옷입는 이 땅이 되도록! 청년.대학생들이 몰려오고 싶은 하나님의 땅이 되도록! 기도하지 않고선 이뤄지는 것은 없다. 6월 2일에 있을 행복나눔축제 ‘Present’를 가질 것이다. 6월 2일이라 대학부지체만 62명을 목표로 잡았다. 그냥 스치고 지나갔던 학교친구들, 애들을 생각하면 기도로 한 번 품어보자. 한번도 교회가자는 말, 예수 믿어보지 않을래?라는 말을 해준 적이 없는 친구들이지만 기도하면서 그들을 가슴에 품고 기도했음 좋겠다! 전도하기 무지 힘든 시절에 하나님, 사람을 보내어주소서라고 기도하는 우리가 되길 소망한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찾으시고 계신다. 어렵고 힘든 시기에 하나님을 위해 자기의 상처와 문제를 껴안고, 교회를 껴안고, 가정을 껴안고, 대학부와 청년부를 껴안고 기도할 중보기도자를 찾으신다. 우리 동네와 교회 주변을 껴안고 기도하는 사람을 찾고 계신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라! 아둘람 공동체는 다윗시대 뿐만 아니라 바로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태동하고 있음을 기억하라!

 

 

 사무엘상 22장 1-2절에 나타난 다윗을 중심으로 구성된 아둘람 공동체의 비전에 대해 같이 이야기해 보았는데, 정말 절망의 끄트머리까지 갔던 다윗이지만, 그의 중심을 지켜줬던 아둘람 공동체, 그리고 그 공동체를 더 견고하게 했던 중보기도의 능력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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