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은 끊임없이 사울에게 자신은 결코 당신의 경쟁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울은 다윗에 대해 계속 의식하게 된다. 이 하길라 언덕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선왕 사울과 다윗의 차이점은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윗을 준비시키는지 같이 보자.
오늘도 십 사람들이 다윗의 은신처를 고발함을 통해 사울은 십 광야로 다윗을 잡으러 오게 된다.
다윗은 고작 600명의 사람들과 있었지만 사울은 3,000명의 군사를 데리고 잡으러 오는 것이다. 거의 5배의 달하는 숫자이다.
시편 54편은 십 사람이 다윗의 은신처를 빈번히 고발함으로 인해 당하는 다윗의 환난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다윗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현악에 맞춘 노래, 십 사람이 사울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다윗이 우리가 있는 곳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던 때에-이 표제어는 이 시편의 배경이 어떠한지를 명시하고 있다.
1.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2.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3.낯선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들이 나의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셀라)
4.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5.주께서는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6.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7.참으로 주께서는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이 똑똑히 보게 하셨나이다
다윗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성 넘치는 간구를 드린 기도의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그를 고난의 웅덩이에서 군주로서의 인격으로 다듬고 계시는 것이다.
반면에, 왜 사울은 이토록 다윗에게 집착하게 되는가?
무엇보다 사울이 의식하고 있는 것은 다윗에 대한 여호와의 은총과 섭리, 그것에 대한 시기심이었다. 사울은 여호와의 버림을 받았는데, 그를 버리신 하나님은 다윗의 편에서 모든 것을 이루어 가시는가? 그것에 대한 질투와 시기가 사울은 사탄적으로 만들어버렸다.
오늘 사울은 시기심과 질투의 화신이 되어 다윗을 잡으려고 안달이 나 있다. 하지만 대조적으로 다윗은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사울을 오히려 살려주는 관용과 은혜를 베풀어준다. 한 사람은 자신의 욕망, 정권과 권력을 계속적으로 유지하고픈 욕망에 집착한 나머지 살기가 가득차서 몸둘바를 몰라 하는데 비해, 또 한 사람은 자신의 욕망, 이를테면, 복수하고 싶고, 계속 치밀어 오르는 두려움과 불인의 원인제공자를 제거하고 싶은 욕망을 내려놓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사울과 다윗의 차이였다.
오늘 본문은 24장에 나오는 내용과 비슷한 점이 많다. 24장에서는 동굴속에서 사울의 옷자락을 벰으로 사울의 목숨을 살려주었던 다윗이라면, 오늘 본문에서는 적진의 진지속에 쳐들어간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고 물병과 창만 들고 오고 사울의 생명을 살려주는 사건이다. 다윗은 25장에서 나발에 대한 굉장한 분노를 느꼈지만, 지혜로운 여인 아비가일을 통해 그 노를 삼키게 된다. 남의 피를 흘리는 과오를 저지를뻔 했지만, 하나님께서 오히려 나발의 목숨을 가져가심으로 앞으로 왕이 될 그가 명분없는 피를 흘리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다윗은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임을 뼈속 깊이 느끼게 된 것이다.
오늘 이 사건 가운데서도 아비새가 사울이 깊이 잠든 것을 보고 죽이자고 하자, 다윗은 9절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기름부음받은 왕을 죽이는 것은 결코 죄가 없지 않다고 하면서 사울을 죽이는 것을 거절한다. 다시 한번 하나님의 주권에 원수 갚는 것을 맡기는 다윗을 보게 된다.
친애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떠한가? 하나님께 내려놓고 맡긴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내려놓지 못하는 집착과 아집과 욕심과 시기심은 없는가? 짐 에드먼드의 유명한 이야기 ‘세 왕 이야기’에서는 우리 모든 사람 안에는 ‘사울’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다윗이란 인물에게도 ‘사울’과 같은 질투하고, 분노하고, 시기하고, 살기등등한 모습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다윗도 계속 자기를 추격하는 사울은 한방에, 단 칼에 베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 하지만 다윗 안에 있는 사울을 다윗은 내려놓았다. 하지만, 사울은 계속 그것에 정복된 나머지 욕망의 노예로 살다가 생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여러분 안에 사울은 없는가?
승승장구하는 다른 성도나 잘 나가고 잘 되는 이웃에 대해 감사하고 칭찬해야 하는데, 오히려 비꼬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연약한 사울의 모습은 없는가? 잘 되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든지 끌어내리고 싶고, 짓밟고 싶어, 그렇개 해서 내 밑으로 두고 싶어하는 추악하고 더러운 괴물이 바로 ‘교만’이다. 사울은 그 괴물을 정복하지 못했지만, 다윗은 하나님께 그것을 맡김으로, 여호와의 주권에 맡김으로 그 괴물을 정복한 것이다.
여러분 안에 있는 사울이란 괴물을 정복하시길 바란다. 주님께 맡김으로 자유하시길 바란다.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용납할 수 없는 사건이 있는가? 그것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나는 더 망가질 뿐이고 내 영혼은 더 상할 뿐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시길 바란다. 나의 욕심, 나의 욕망, 나의 고집, 나의 시기심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길 소원하는 간절함이 우리 안에 있기를 원한다.
다윗이 두 번째 사울의 생명을 살려줄 때는 사울 곁에서 훔쳐 낸 물건이 물병과 창이었다. 물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다윗이 사울의 물병을 빼앗은 것은 곧 그가 사울의 생명을 쥐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창을 소유하는 것은 왕의 신분을 상징하기도 했다. 더 나아가 사울과 다윗의 관계에 있어 창은 의미심장하다. 사울과 다윗과의 갈등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무기는 바로 창이었다.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온 다윗이 자신을 위해 수금을 타는 다윗을 향해 사울은 창을 던져 죽이려 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이기고 돌아와 사울을 위해 수금을 탈때도 그는 창으로 다윗을 찍어 죽이려고 했다. 요나단이 다윗의 억울함을 호소하자 사울이 화가 나서 요나단을 죽이려고 던진 것도 창이었다. 그러므로 다윗이 사울에게서 창을 빼앗은 것은 사울이 더 이상 다윗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지 못할 것을 상징한다. 실제로 그렇게 될 것이다. 이 사건 이후에는, 사울이 두 번 다시 다윗을 위협하지 못했다.
적의 진지에 들어가서 이렇게 왕의 물병과 창을 가지고 올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의 용맹과 용기 보다 그 이유를 12절에서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깊이 잠들게 했기 때문에 다윗과 아비새가 무사히 사울의 물병과 창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윗의 다윗됨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성도 여러분, 오늘 하루도 우리에게 있는 모든 주도권을 주님께 내려놓자.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무수한 부정적인 감정들과 내 마음을 갉아먹는 수많은 영적 몬스터, 영적 괴물들을 대적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다윗처럼 물리치도록 기도하는 하루가 되길 소원한다.
사무엘상 26장 1-12절의 본문을 통해 하길라 언덕에서 다윗이 사울의 목숨을 두번째로 살려준 내용을 같이 살펴보면서 다윗의 성군으로 가는 자질을 구비시키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었고, 이에 반해 사울의 점점 더 몰락해가는 몰골을 보여주는 것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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