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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사무엘상.하

사무엘상 18장 1-16절, 드러나는 다윗의 이름

by Message.K 2024. 1. 18.

구약성경 사무엘상 18장의 본문을 가지고 '드러나는 다윗의 이름'이란 주제의 설교를 한 내용을 포스팅한다. 여기서 다윗이 군주로 가기 전 사울로 인한 고통스런 시기에 요나단이란 친구를 붙여주셨다는 것, 성숙에는 반드시 하드타임을 필요한 것도 알아보고자 한다.

 

사무엘상 18장 1-16절, 드러나는 다윗의 이름
사무엘상 18장 1-16절, 드러나는 다윗의 이름

 

 

 

1. 다윗(17장)과 요나단(14장) V.1-5

골리앗 사건은 다윗을 이제 이스라엘에 전면적으로 얼굴을 드러내게 하는 기회가 된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다윗을 흠모하게 된다. 이것은 우정이었다. 정말 마음을 같이하는 친구를 만나게 된다. 요나단은 다윗을 사랑하기를 that the soul of Jonathan was knit with the soul of David , and Jonathan loved him as his own soul ...다윗과 요나단의 마음이 통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왕궁생활에 접어든 다윗에게 절친한 벗을 붙여주신 셈이다. 요나단은 왕자였지만 겸손하였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의 용사였기 때문에 다윗을 더 잘 이해하였고 둘의 마음은 하나님 안에서, 믿음 안에서 공유되어질 것이 풍성하였을 것이다. 둘의 우정은 흔해 빠진 술 한잔으로 나누는 그런 천박한 우정이 아니라 깊숙한 영혼의 약조를 맺은 우정이었다. Then Jonathan and David made a covenant , because he loved him as his own soul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처럼 둘의 우정이 급속화된 것은 둘 다 젊음의 열정이 있었고, 용사의 기질과 믿음의 담력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두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연결되어진 멋진 벗인 것이다. 요나단은 애정의, 우정의 증거로 자신의 겉옷과 군복과 칼과 활과 띠-요나단은 사울과 달리 진짜 ‘사랑’이 무언지를 아는 자였다. 우정이 무언지를 아는 자였다. 먼저 자신을, 자신의 것을 주는 것으로 다윗과 교통하기를 원하고 있다-를 건네주었다. 요나단은 정말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였던 것’ 같다. 이처럼 남을, 친구를 사랑하는 요나단의 모습은 실로 놀랍기 그지없는 모습이다.

 

- V.5 사울은 본격적으로 다윗을 권력의 자리로 채운다. ‘군대의 장’을 삼게 하였다. 그것은 다윗이 모든 곳에서 너무나 지혜롭게 행하였기 때문이다.And David went out whithersoever Saul sent him, and behaved himself wisely : 그런데 단순히 다윗 개인만이 그런 처사로 인한 만족과 성취감으로 끝나버렸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겠지만 온 이스라엘과 사울의 신하들도 이에 대해 만족함을, 합당함을 느꼈다는 것은 다윗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도 탁월하기 때문이 아닐까? and he was accepted in the sight of all the people , and also in the sight of Saul's servants .

 

 

-하나님은 다윗이 ‘기름 부음 받은 자’로 서기 위해서 앞으로 많은 시련과 역경과 고통의 터널을 지나야함을 익히 알고 있었다. 사울은 단지 이스라엘 중에서 한 사람을 선택하여 얼마 있지 않아 바로 왕을 세우는 과정의 짧음을 드러내지만 다윗은 그러하지 않았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윗은 앞으로 첩첩산중이다. 사울이 권력의 보좌, 왕의 보좌로 앉게 된 지나치게 짧디 짧은 과정이라면 다윗은 의외로 긴 시간, 긴 과정 속에서 왕으로 세움을 받게 되는 것이다. 사울의 왕으로서의 등극은 고작 3장-9장/왕으로 선택된 사울, 10장/기름부음을 받은 사울, 11장/왕이 된 사울-에 지나지 않는데 비해, 다윗이 왕으로 등극하게 되는 과정은 사무엘상 31장이 다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물론 장수(章數)가 많다고 하여서 꼭 시간이 그만큼 걸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가운데 이제 막 ‘골리앗 사건’이후로 왕궁으로 인도되어지고 있다. 이제 첫 발을 내디디는 셈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비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붙여주신다. ‘하나님의 벗’을 다윗 옆에 붙여주신다. 다윗도 나름대로 많은 아픔과 많은 괴로움이 존재할 것이기에 인간적으로 위로를 줄 수 있는 친구, ‘요나단’을 옆에 동반하게 하신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배려인가? 그것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는’ 친구를 붙여주신다. 후에 알게 되는 사실이지만, 다윗은 요나단이 옆에 친구로서 늘 옆에 있었기 때문에 사울은 완전한 ‘기름 부으심을 받은 왕’이라는 사실을 망각치 않았을 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을 어찌 해할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은 ‘요나단’이 옆에 있었기 때문에 더 강하게 그를 ‘원리원칙적인 인물’로 서게 만들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닐 것이다. 하는 그런 생각이 다윗의 머리 속에 지배적이었다는 것은 그러한 사실을 대변해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찌 보면 하나님은 참 ‘다윗’을 세우시려고 엄청난 기간동안 다윗을 연단케하시고 훈련케하심을 보여준다. 그 연단과정 속에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벗’을 세우시는 장면이다.

 

 

 

2. 질투의 불꽃 V.6-9

문제의 발단은 여기서 시작된다. 다윗이 다시 왕궁으로 돌아올 때였다. 이스라엘 여인들이 나와서 사울과 다윗을 환영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민심(民心)은 크게 다윗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그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왕으로 등극한 것이 ‘누워서 떡 먹기’처럼 쉬웠던 사울과 다윗은 그 엄청난 거인 골리앗을 물맷돌이라는 말도 안 되는 무기로 쓰러뜨린 사실은 다윗이 ‘영웅’으로 추대받기에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사울의 질투의 화근은 바로 이러한 백성들의 소리였다. And Saul was very wroth , and the saying displeased him; and he said , They have ascribed unto David ten thousands , and to me they have ascribed but thousands : and what can he have more but the kingdom ?

 

사울에게 있어 이제 왕국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청지기로 관리케 하신 왕국’이 아니라 단지 ‘자력으로 세운 나라, 자기가 왕인 왕국’ 정도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안녕과 자신의 세력과 정치적인 파워를 더 생각하는 평범한 ‘정치인’에 불과했다. 그러했기에 그는 이 때부터 다윗을 ‘눈에 가시’로 여겼다. 장차 다윗이 자신에 대해 ‘쿠데타’나 ‘혁명’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생각 하에 조바심과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가 이런 순간에 하나님을 의뢰하였더라면 자신의 감정을 좀 더 정리하고 하나님의 패러다임을 볼 수 있었을텐데 그는 어쩔 수 없는 ‘몰락하고 있는 한 정치인’에 불과한 모습을 보인다.

And Saul eyed David from that day and forward .

 

-인간으로서 느끼는 이러한 감정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을 걸러내는, 정화시키는 <하나님의 무릎>이 필요했다. 우리가 우리의 감정구조를 어떻게 다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오직 『주의 말씀』뿐이다. 기도하지 않고 어찌 이러한 감정들을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인정할 것은 인정을 하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하는 삶의 지혜가 무엇보다도 필요한 시대에 사울은 ‘질투’로서 왕의 자질을 훼손시키고 있다. 영혼을 상하게 하고 있다. 장군으로서, 용사로서의 다윗의 자질들을 높이 사면서 그의 공로에 찬사를 보낸다면 그의 왕정시대는 얼마나 더 아름다웠을까? 사울은 이러한 ‘질투’의 감정으로 불필요한 ‘다윗과의 게릴라전’(?)을 펼치게 된다. 그로 인해 사울의 왕조는 끝이 나고 사울은 비참한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3. 다윗을 사랑하는 자, 다윗을 두려워하는 자V.10-16

엎친데 덮친 격으로 또 다시 악신이 사울에게 임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더 강력한 악신이었다. 이 하나님이 부리신 악신은 다윗을 더 몰아 부치고 있다. 다윗의 목숨을 표적으로 삼고 노골적으로 질투심을 표출시키고 있다. 이스라엘의 영웅을 자신의 질투심으로 살해할려고 하고 있다. 이 얼마나 참담한 경우인가?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을 옆에서 늘 ‘지켜주시는 자’가 되었다. 사울의 창을 두 번이나 피하게 하셨다. 다윗은 얼마나 황당하였을까? 골리앗을 무찌르면 모든 것이 형통할 줄 알았는데 이제 또 다시 등장한 ‘골리앗’은 다름 아닌 ‘자국의 왕, 사울’이었다. 그는 더 믿을 수 없는 애매모호한 ‘적(敵)’이 눈앞에 있는 것이다.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힌다’더니 다윗을 두고 한 말이었다. 이런 상황에 부딪혔을 때 다윗은 어찌했을까? 12절의 말씀으로 비추어 보아 그는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였을 것이다. 목동시절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 골리앗을 무찌를 때에도 함께 하셨던 주님, 그 주님 앞에 눈물로 통곡하며 호소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하나님은 ‘다윗 편(偏)’이셨다. -다윗은 한 집안에서 하나의 실(요나단의 우정)과 하나의 추(사울의 질투)를 동시에 가지게되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Kjv]삼상 18:12

And Saul was afraid of David , because the LORD was with him, and was departed from Saul .

 

다윗은 이제 사울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만인이 다윗과 함께 하는 하나님을 눈앞에서 목도하였기 때문이었고 일상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를 늘 경험하는 다윗을 어찌 목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사울은 더 초조해져 갔다.

 

사울은 다윗을 ‘천부장’으로 삼았다. 이제 그는 공식적으로 백성들 앞에서 얼굴을 내보이게 된다. 아마도 이때는 사울의 정신이 온전하였던 모양이다. 자신의 정신적인 혼란으로 인해 다윗을 죽일까봐 그를 자기 옆에 두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다윗은 만사를 지혜롭게 행하였다. 그 이유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이었다. 다윗의 이러한 처사에 대하여 두 가지 상이한 반응이 나타나는데....

 

사울이 다윗의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 그를 두려워하였으나

[Kjv]삼상 18:15

Wherefore when Saul saw that he behaved himself very wisely , he was afraid of him.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하였으니 그가 자기들 앞에 출입함을 인함이었더라

[Kjv]삼상 18:16

But all Israel and Judah loved David , because he went out and came in before them.

 

-언제나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좋은 사람들만, 맘에 드는 사람들만 만나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것처럼 ‘금상첨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꼭 다윗에게 있어 사울처럼 ‘눈에 티, 눈에 가시’같이 마음을 갈기갈기 찢고 심령을 흔드는 자들이 늘 우리 주위에 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있어 사울을 통해 다윗을 연단시키셨고, 다윗을 더 강력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강력한 군주로서의 자질을 구비케하는데 일조를 하게 하셨다. 사울이 하나님께 받을 수 있는 유일무이한 상(賞)이라면 바로 ‘다윗을 연단케한 공로’일 것이다. 이 사실은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성경 속의 다윗을 보면서 우리는 마음을 다시 한번 되짚어보아야 한다.

 

내 마음을 대단히 아프게 하는 사람들
-그들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강하게 다듬어 가시고 계신다.

 

여러분이 만약 다윗이라면 사울과 같은 ‘눈에 가시’같은 사람은 주위에 없는가? ‘정말 이 사람은 좀 없어졌으면 내 눈에 좀 안 보였으면 하는 사람’ 그 사람, 그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는 ‘여러분의 영적 성숙, 정신적 성숙’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연단시키시고 연단 한 후에 정금과 같이 나오게 하기 위해서 준비하신 인물이다. 하나님의 거대한 계획 속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사울처럼, 우리 곁에 있는 사울을 준비해 놓으셨다. 비록 여러분의 머리를 아프게 하고, 골치를 썩히게 하고, 마음을 아프게 할지라도 기도하면서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다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더 큰 축복을 주신 것처럼 여러분들에게 더 아름다운 자리로, 더 나은 삶의 장(場)으로 여러분을 초대하실 것이다. 내 삶의 사울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거룩하고, 더 순결하고, 더 성숙한 자리로의 초대장’과 같은 것임을 명심하라. 

 

하나님의 사람이 명성과 인기와 인정을 받기 시작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훈련장으로 초대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다윗이 그러했다. 다윗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을 차치하고서 지금 하나님의 훈련소에서 사울을 통해 연단을 받고 있다. 외부의 사울도 있지만, 다윗 안에 사울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진 에드워드의 <세 왕 이야기>에서는 다윗은 왕이 되기 전에는 사울을 통해서 훈련받았고, 왕이 된 후에는 압살롬을 통해서 또 다시 테스트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진 에드워드가 이야기하는 것은 다윗 안에 '사울'도 존재하고, '압살롬'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외부의 적 뿐만 아니라 내부의 적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오늘은 사무엘상 18장을 본문으로 한 '드러나는 다윗의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았다. 다윗의 다윗됨은 그저 이뤄지 않았고 다윗을 사랑하는 사람(요나단)과 다윗을 두려워하는 사람(사울)을 통해 다듬어가시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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