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교회 100주년기념 해를 맞이해 모교회 출신 목사들을 초빙하여 설교를 부탁받았고, 필자가 준비한 설교는 고린도후서 4장(1-18절)의 본문이며, 제목은 '낙심하지 않습니다'이다. 낙심하지 않습니다는 헬라어로 '우크 엔카쿠멘'이다.
1 prologue –축하와 인사말
먼저 고향교회 100주년을 맞이하여, 고향교회 담임목사님과 모든 당회원들, 그리고 성도님들께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저를 불러주셔서 황송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또한 여러분의 기도와 사랑과 후원이 없었다면 저 또한 이렇게 이 자리에 설 수 없음을 알기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저의 학창 시절을 지도해주신 A장로님, C장로님께 감사드립니다. 여름성경학교에서 자신이 지은 죄를 모닥불에 태우면서 회개했던 캠프파이어의 추억들, 기억들, 중학교 1년이 되어 학생회에서 매년 올랐던 Y산 등반대회나 학창시절의 무수한 수련회에서 불렀던 찬양과 기도와 교제, 이런 영적 순례의 여정이 저에게 얼마나 소중한 추억과 감사의 이유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2 제 인생의 절반을 고향교회에서 보낸 셈
오늘은 제가 언제 또 이 자리에 설 수 있을지 모르니 제 개인적인 이야기도 좀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공유하길 원합니다. 제가 얼추 계산해보니 모교회에서 신앙생활한 시간이 제 인생의 절반 쯤 됩니다. 제 인생의 절반은 모교회 안에서 보냈고, 나머지 절반은 모교회 밖에서 이뤄졌습니다. 정말 저는 모교회를 떠났다고 생각하는데, 제 인생의 절반이 모교회에서 이뤄졌다고 뿌리가 이 교회라는것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새삼 놀랬습니다.
3 첫 사역지가 바로 모교회 전도사였다
제가 신학교 3학년 때 모교회에서 전도사 사역을 하라고 하셔서 당시 21살의 제가 너무나 어리고, 부족해서 할 수 없다고 했는데. 당시 제가 훈련받았던 선교단체에서도 너무 어릴 때 사역을 하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때 성경을 큐티를 하는데 두 번씩이나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사역을 하라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더군다가 그 당시 영적 리더와 같은 선배도 제가 사역하는 것에 동의를 하니 정말 하나님께서 전도사를 하라고 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말씀을 통해 확증하며 시작했던 저의 첫 사역이 너무나 보잘 것 없었고 부족했던 기억이 납니다. 나는 감당할 그릇이 안 되는데,
‘하나님께서 왜 전도사로 모교회에 불러주셨지?’
그런 생각 진짜 많이 했습니다. 그때는 너무 어렸고 융통성이 없었지만, 그걸 다 지켜봐 주시고 인내해주신 여러분 덕에 제가 여기까지 온 것 같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설교했던 순간도 모교회 새벽기도회 설교였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저의 인생의 출발이 모교회였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하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4 낙심은 멘붕의 극대값, 절망의 최대값
오늘 설교제목이 ‘낙심하지 않습니다’라는 다소 생뚱맞은 설교제목을 들고 이 자리에 섰는데, 100주년 기념 설교치고는 좀 어울리지 않지만 일단 시작하려고 합니다.
‘낙심’이란 말은 벼랑이나 절벽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 기운을 잃어버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소위 말하자면 멘붕의 극대값, 절대값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5 내 인생에 첫 번째 낙심은 4살 때 교통사고
제 인생에 있어 가장 큰 낙심은 4살 때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그때 교회 앞에서 놀다가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기억나시는가요? 벌써 40여년이 더 흘렀습니다. 주일날 예배드리는 와중에 가족들과 모든 성도들님이 버스와 부딪힌 교통사고를 통해 너무 놀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인데, 이번에는 대형사고를 쳐버렸습니다. 교통사고라니 말입니다.
저는 기억도 나지 않지만 부모님께서 다친 저를 K으로, K에서 다시 Y으로, Y에서 다시 K병원으로, K병원에서 다시 K신경외과로 옮겨가면서 수술을 받았습니다. 정말 죽을 수밖에 없었던 제가 살아난 것은 기적이었습니다. 그 기적은 성도님들의 간절한 기도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 후에 다시 인공뼈를 넣는 재수술을 해야한다고 했지만, 부모님께서 믿음으로 재수술비를 하나님께 바치고 저는 재수술하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병무청에서 신체검사를 받으라고 해서 혹여나 뇌수술 받은 것 때문에 병역면제가 되지 않을까 싶어 K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병무청에 갔는데, 병무청에서 또 검사를 하더군요. 그러더니 희한하다고 하면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면서 병역면제는 받지 못했습니다.
정말, 여러분의 기도가 없었다면 저는 이 자리에 없었을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 사고 이후로 저는 제 뒷통수에 뇌수술 흉터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달라진 것은 부모님께서 서원기도를 했다면서 ‘목사를 해야 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거의 부모님께 세뇌되다 싶이 목사가 내 장래희망이 되었는데,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되면서
‘내가 왜 목사를 해야 하지?’
라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고등학교 들어가면 의례히 제출하는 서류의 장래 희망란을 비워두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때 놀라운 변화가 바로 고향교회 찬양밴드(K밴드)의 탄생이었습니다. 그때 찬양밴드를 하면서 저는 지금의 모교회의 3층에서 여름방학 때 혼자서 눈물로 기도하면서 제가 목사를 하겠다고 서원기도를 재차 드린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그 찬양밴드는 여기 앉아 계신 A장로님, 진짜 A장로님은 당시 밴드를 같이 했던 6명의 남자(P, A, C, CH, K, 그리고 저)들 중에 제일 먼저 교회를 떠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변함없이 모교회를 섬기는 것, 장로님으로 봉사하는 것에 무한한 리스펙과 존경을 보냅니다. 믿음의 역사성이 찐으로 보여지는 광경입니다. D에서 K의 음악학원을 CH집사와 제가 왔다갔다 하면서 악기를 배웠습니다. 그 찬양밴드활동이 저의 개인적인 이력에 있어 찬양전도사, 찬양목사로 오랫동안 부교역자생활을 하는데 큰 뿌리가 되었습니다.
6 H측(교단)이 아닌 K측(교단)을 선택한 이유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제가 왜 H측 목사가 아니고 K측 목사가 되었는지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 같아 이 이야기를 잠깐 하겠습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나
“B목사, 오늘 설교 언제까지 하려고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놓나?”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텐데, 제가 B목사라서 설교를 배double로 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오늘 안에 분명히! 반드시! 끝나니깐 너무 염려하시지 마시길 바랍니다. 제가 또 언제 이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오늘의 설교가 여러분에게 따분하고 지루한 한 편의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함께 감사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었음 좋겠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신학대학원을 가야 하는데, 당연히 H측 C신학대학원을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제가 사역했던 교회가 K 측이었고, 담임목사님이 저의 외삼촌이었는데, 외삼촌께서 C도 지원하고 K신학대학원도 지원하라고 하셨습니다. 원서 넣는 것은 쉽습니다. 합격하는게 어렵죠.
제가 준비를 많이 하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매일 영화를 두 편이나 보면서 한량이나 다름없이 지내면서도 힘들어했던 청춘의 시기였습니다. 일단 두 곳에 다 서류를 넣었습니다. 그런데, C신학대학원을 시험을 치는데, 성경문제가 제가 예전에 큐티했는 내용에서 엄청나게 많이 나왔고 논술주제도 제가 대학교 졸업논문에서 다뤘던 주제였습니다. C대원 시험을 치고 K신대원 시험을 치러 기차를 타고 가는데, C신대원 합격문자가 날라왔습니다. 친구가
‘C 갈건데, 왜 굳이 K신대원 시험을 치러가느냐? 빨리 내려와!’
라고 했고 당시 외삼촌이신 담임목사님은 최선을 다해서 시험을 보고 오라고 했습니다. C신대원 시험보다 성경시험이 더 어렵더군요. C신은 다 객관식인데, K신은 주관식도 좀 있었습니다. 다행히 논술주제가 제가 몇 주전에 설교했던 내용과 비슷해서 만족스럽게 적고 내려오면서 내심 생각했습니다.
‘이러다가 두 군데가 다 되는거 아냐?’
근데, 제가 K신대원에서 시험치기 전날 도착해서 기숙사에 3명이서 같이 지내는데, 두 사람은 서로 아는 사이였습니다. 저는 그 두 전도사님에게 저는 ‘C신대원을 합격했기 때문에 C 갈거니깐, 걱정하시마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늦게까지 공부를 했고 저는 그날 큐티를 하고 9시에 잤습니다. 꿀잠을 잤습니다. K신대원은 제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에 시험에 대한 걱정이 없어서 일찍 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진짜 두 군데 다 합격했습니다. 저는 당연히 제가 소속된 H측 C신대원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K신대원 입학등록이 주일 다음날인 월요일에 해야 하니 주일 사역을 마치고 담임목사님이신 외삼촌에게 C신대원을 가기로 했다고 말씀을 드리니 외삼촌이 화를 내시면서 저를 막 나무라시는 겁니다.
‘요즘 사역자들 중에 자리가 없어서 얼마나 힘들어하는데, 굳이 네가 총신을 가느냐?’
라는 어투였습니다. 벌써 20년 전의 일인데 총신이 레드오션이었다는 이야기인데요(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니 모든 사역지, C신이나 K신이나 레드오션이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그날 주일이었는데, 집에 가서 자지 말고 기도해보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 밀린 큐티도 하고 찬양을 하면서 성경을 보고 찬양하고 성경보고 그랬습니다. 그때 읽고 있던 성경이 에스겔이었는데, 갑자기 눈에 확 꽂힌 성경구절이 있었습니다.
에스겔 20:46 인자야 너는 얼굴을 남으로 향하라 남으로 향하여 소리내어 남방들의 삼림을 쳐서 예언하라.
그때 이 말씀이 저의 레마가 되었습니다. C신대원은 경기도에 있었고, K신대원은 그 아래에 있었으니 K신대원이 남쪽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부모님의 교단인 H측이 아니라 K측을 선택하기로 했는데, 부모님도 아들이 말씀을 받았으니, 타교단이 가는 것을 마지못해 허락하셨을 것입니다.
당시 선배 목사님이 이런 저의 결정과 이야기를 듣고서 하신 말씀이 있었는데,
‘교단이 우리를 부른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불렀다’
라는 말을 해주셨습니다. 함께 이 찬양을 부르고 계속 말씀을 전했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이 땅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 은혜”
7 K신교단에서 느낀 낙심의 벽
저는 K신교단에 가면 대단한 업적과 영광을 누릴 것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신학대학원에 입학하면서부터 낙심의 벽에 부딪혔습니다. 1학년 1학기 동안 새벽마다 울었습니다. 너무나 낯설고 고리타분해 보이고 답답해 보이는, 소위 말하자면 ‘돌K’의 신학교의 분위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저를 붙잡았던 것은 ‘경배와 축구’였습니다. 축구는 잘 못하지만, 축구로 스트레스를 풀었고, 고등학교 때 고향교회에서 찬양밴드를 한 덕에 찬양전도사로, 신대원 채플 시간에 찬양인도도 하게 되었고, 후에는 찬양목사로 사역을 오랫동안 했습니다.
(보통 신학교에는 몇 가지 파가 있는데, 첫째, 공부만 죽어라 하는 학구파(도서관파), 둘째, 축구와 운동을 죽어라 하는 족구파, 셋째, 보따리파(학교 공부에는 집중하지 않고 다른 세미나와 집회만 찾아다니는 부류), 넷째, 기도파(Only 기도!)가 있다고 하는데, 저는 둘째 족구파(축구파)에 해당하면서 '경배와 축구'에 전념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떤 주일은 축구를 1주일에 두번씩 했는데요. 신대원
스케줄이 굉장히 타이트해서 일주일 축구를 두번씩 하는 것은 솔직히 무리입니다. 졸업하기 위해선 시험도 쳐야 하는데, 그 시험을 패스하지 못하면 유급을 해야 하는 상황이기도 한데, 저는 그래도 축구를 두번씩 했는데, 그러니깐 제가 축구를 하다가 다리를 다쳤습니다. 그리고서 처음으로 목발을 짚고 생활해야 했는데, 생전 처음으로 목발을 짚고 생활하면서 3학년 2학기는 축구를 쉬어야 했습니다. 그때문에 제가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목발 짚고 생활한 것도 돌이켜보니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신대원을 입학하고 2학년이 되었는데, 신대원 시험을 칠 때 같이 기숙사를 썼던 전도사님이 신입생으로 들어온 겁니다. 그분들도 놀랐겠죠. 제가 그때 입학하지 않았으면 그분들이 합격했을 수도 있으니깐요. 재수를 하고 들어온 그분에게 진짜 미안하다고, 여차저차해서 C신을 가지 않고 K신을 오게되었다는 이야길 살짝 했던 기억이 납니다. 진짜 내일은, 내일 일은 우리가 장담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8 개척하기 전에 받은 말씀
그러던 와중에 지금의 K에 조용한 동네에 개척을 하게 되었습니다. 무언가 대단한 사역을 할 것 같았고 그래서 나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 화려하고 눈에 보이는 몇 백명, 천 명이 넘게 모이는 교회를 찾아다니며 부목사 생활을 했던 저에게 개척교회는 완전 생판 다른 장소였습니다. H측 신학교 동료들을 뒤로 하고, 부모님의 교단을 떠나 K신교단으로 이적을 한 저에게 하나님께선 엄청나고 대단한 것을 안겨주시기보다 더 낮은 곳으로 인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부교역자 생활 할때는 정말 명절 때 성도님들께 받은 선물이 너무 많이 받아서 트렁크에, 뒷자리에 공간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전도사 때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개척을 하니 누가 알아줍니까? 명절에 선물 하나 들어오면 진짜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내가 얼마나 허세가 넘쳤는가? 성도들의 값진 예물과 헌신이 얼마나 소중한지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개척은 저에게 얼마나 소박하고 낮아지고 깨어지는 시간을 제공하는 것 같습니다. 존 비비어가 그의 책에서 ‘광야는 하나님의 준비된 장소’라고 했던 기억이 나는데요.)
개척하기 전에 막막하기 그지 없던 저에게 큐티를 하던 와중에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신명기 1:33 그는 너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십니다.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신실하신 분이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정호승 시인의 시 ‘봄길’에 보면 그런 싯구가 있습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제가 스스로 봄길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길이 되고자 기도합니다.
9 충성이란 무엇이냐?
과거에 예수전도단 대표였고, 지금은 높은뜻 푸른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문희곤 목사님이 너무 답답한 나머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물었다고 합니다.
“뭐가 그렇게 시원하신데요? 제가 뭐를 했다고요?”
이렇게 물었더니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응답을 주셨습니다.
“네가 사역을 얼마나 잘하는가는 다음 문제고
넌 지금 내가 있으라는 곳에 있지 않냐.
내가 있으란 곳에 아직도 있는 네가 나를 시원케 하는구나!”
그 말씀은 잠언 25장 13절의
“추수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는 그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추악한 자신이 ‘하나님을 시원케 한다’는 말 한마디에 마음에 쌓였던 응어리와 원망과 불평과 어려움이 눈 녹듯이 녹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무수한 업적과 성취를 남기면 좋겠지만, 하나님이 그것으로 우리를 판단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있으란 곳에 아직도 네가 있느냐?’,
‘네가 내 마음을 시원케 하느냐?’
로 평가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하시는 K교회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10 낙심하지 않습니다 –3가지 주제
자 이제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합니다.
여러분, 오늘 바울이 고후 4장에서 자신은 낙심하지 않는다고 3가지를 이야기하는데, 낙심하지 않는다는 말은 1절, 8절, 16절에 3번 등장합니다.
11 첫 번째, 바울은 자신의 직분 때문에 낙심하지 않습니다(1-6절)
여러분, K교회가 100년의 장구한 세월을 달려오면서 위기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건재하게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직분 때문에 낙심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바울이 복음을 전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3절에 보면 복음은 망하는 자에게 가리어진 것, 3:13, 18절에 나오는 수건‘(veiling)’을 이야기합니다. 원어로는 ‘칼뤼마’(kalyma)인데, 이는 믿지 않는 이들의 마음을 덮은 수건으로 가려진 것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4절에 보면 복음을 받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이 세상의 신이 혼미하게 하기 때문에 마치 수건을 그들의 눈과 귀를 막아 놓은 것 같다고 표현입니다.. 바울이 끊임없이 복음을 선포하지만, 5절의 예수그리스도는 주되신 것, 예수를 위하여 바울이 너희의 종된 것을 선포하지만, 사람들이 믿지 않고 거부하기 때문에 바울이 자신의 직분에 대해 회의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전도자의 직분, 선교사의 직분에 대해 낙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1절). 왜냐하면 긍휼하심을 입은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역자, 중직자, 직분자들을 맡은 것 때문에 낙심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릴 부르셨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뜻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면 됩니다.
12 복음은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져야 한다
여러분, 대한민국이 저출산, 고령화사회로 인해 시골교회는 점점 문을 닫거나 주위에는 교회 2곳을 하나로 합병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다음세대, 아이들이 줄어들면서 교회가 사라질지도 모를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제가 막내 7살 딸애를 데리고 동사무소에 갔는데, 늘 나이드신 분들만 출입하던 그 곳에 생기가 넘치는 겁니다. 아이를 찾아보기 힘든 동네에 딸애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이쁜 짓을 하니 모두가 과자를 챙겨주고 다음에 또 놀러오라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 교회는 기성세대와 그들을 잇는 다음세대가 살아있어야 복음이 전수됩니다. 기성세대의 때에 복음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세대로 이어져야 합니다.
13 직분의 위기에 놓인 시대
하지만, 지금 한국사회는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리고 신학교에 학생들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K신교단의 신학대학원에서는 ‘한 교회에서 한 명의 신학생을 책임지자’는 슬로건으로 사활을 걸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녹녹치 않습니다. 다들 먹고 살기도 힘들고 저마다 경제적인 자유를 외치며 20-30대들이 결혼도 주저하는 시대,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힘든 시대, 비혼주의, 결혼했지만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딩크족, 그리고 노후걱정을 하는 젊은 친구들도 많습니다. 이런 시대의 분위기 속에 우리의 직분이 무슨 의미가 있나?
디모데후서 4:3-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말세의 징조는 귀가 가려워서 진리를 듣기를 거부하고 허탄한 이야기, 가짜 뉴스와 정보에 귀가 솔깃해집니다. 요즘 유튜브, SNS에서 얼마나 거짓된 정보와 뉴스에 우리가 노출되어 살아갑니까? 그것이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는 수건(칼뤼마)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유튜브에서 2시간짜리 영상을 정주행한 적이 있는데, 이게 110만명이 봤다는 겁니다. 거기서 이야기하는 골자는 ‘치열’입니다. 사람들이 다들 분주하게 살아가는데 한 가지 일에 치열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밥을 먹을 때나 친구를 만날 때나 공부를 할 때나 스마트폰에 시선을 두고 산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허무하고 헛헛한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 밥에 대한 예의를, 친구를 만날 때 친구에 대한 예의를, 공부를 할 때는 집중하는 치열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한 가지에 집중에서 치열하면 하루를 마칠 때 자기 전에 뿌듯함과 보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왜 허무한가? 사람들이 목적을 두고 치열한 현 시대의 특징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목적, 사람들의 최고의 관심사는 ‘돈’입니다. 돈이 1000만원이 목표였다면, 1000만원을 달성하면 2000만원을 모으고자 하는 새로운 목표가 생기지만, 또 한편으로 그 1000만원을 잃어버릴까하는 불안과 초조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허무하고 또 그 목표를 이루고나도 허무한 것입니다. 그 강사가 말하길 목표를 정하지 말고 치열해야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 강사가 이야기하길 고성장시대는 끝이 났는데, 이전 기성세대들이 돈 벌어 집 사고, 차 사고 자산을 증식하는 것 조차 힘든 시대가 되었는데, 똑같이 현 세대들이 저성장시대의 지금도 거기에 매몰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 강사는 중요한 이야길 하는데요. 물론 이게 기독교적인 검증이 필요하지만,
‘목적 없이 치열할 필요가 있다’
는 것입니다. 우리가 특별히 목적이 있어서 밥을 먹고, 김장을 담고, 농사를 짓고, 공부를 하고 자식을 키우는 것입니다. 무언가 대단하지 않은 일상이라도 그 하나 하나에 치열하면 거기에 삶의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돈이 되지 않으면 직업도 의미가 없고, 일상도 의미가 없다는 식으로 치부되는 현 시대의 모양새입니다. 요즈음은 전부 ‘돈’으로 환산되고 평가되고 추구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돈이 되니깐 어린 아이들도 유튜버가 꿈이라고 합니다.
딤후 3장에 보면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이렇게 하면 고통스럽지 않아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말세에 고통하는 때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시대에 과연 직분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복음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롬 5:20)는 말씀처럼 복음은 과거-현재-미래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에 적용되는 복음입니다. 시대가 어수선하고 골치 아픈 시대이지만 여전히 우리는 복음 때문에, 직분 때문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복음의 긍휼하심을 입어 직분자가 되었고 성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낙심하지 아니합니다. 헬라어로 ‘우크 엔카쿠멘’입니다.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의기소침해하지 않습니다
-그 무엇도 우리를 괴롭힐 수 없습니다
바울은 기독교 사역의 영광스러움 때문에, 수많은 위기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크 엔카쿠멘’,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14 두 번째, 상황 때문에 낙심하지 않습니다(7-15절)
여러분, 우리가 8-9절에서처럼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할 수 있고 답답한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박해를 받을 수도 있고, 거꾸러뜨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낙심하지 않는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여러분, 인생은 두려움의 연속입니다. 불안의 연속입니다. 두려움의 정체에 대해서 어린이 새소식반의 정의를 빌리자면
‘나쁜 일이 꼭 일어날 것만 같다고 느끼는 마음’
이라고 했습니다.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일어날 것을 미리 예상을 하고 걱정하고 염려합니다.
우리 주님은 누가복음 12장에서 분명히 경고하셨습니다.
29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30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31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에서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여러분 모든 가정에 불행한 요소가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다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가정마다 다 저마다의 문제와 아픔과 상처와 비극이 있습니다. 어쩔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것은 거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의 상황으로 절망할 수 있고 낙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사에 수많은 복잡한 문제들과 갈등이, 지지고 뽂는 상황이 연출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선 제대로 변화되어야 하고 개과선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딱 하나,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하게 변하여 성화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자연현상 가운데 태풍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벼락과 천둥과 번개가 없다면 얼마나 평화로울까요? 아닙니다. 그런 자연재해가, 태풍과 벼락과 천둥 번개가 있기 때문에 지구가 건강할 수 있습니다. 그 재해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숨쉬고 먹고 마실 수 있습니다. 그게 없으면 우리 지구는 황무지가 될 것입니다.
15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바울이 7절에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우리는 질그릇같은 존재입니다. 깨지기 쉽고 다치기 쉽고 상처받기 쉬운 인간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복음을 담고 있는 그릇, 질그릇을 우리의 연약한 몸, 육체(soma)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인간의 몸에는 카탈로그를 붙여져 있습니다. 택배가 오면 택배 상자 겉에
‘취급주의: 깨어지기 쉬움fragile’
라는 말이 붙여 있듯이 우리의 몸도 그렇다는 것이죠. 그런 우리의 질그릇 안에 보배로운 복음을 하나님이 맡기셨습니다. 질그릇이 어떠냐에 따라 복음이 나타나는 방향성과 영향력도 달라지겠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질그릇)에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16 질그릇의 soma에게 부활이 있음에
하나님은 모교회라는 질그릇에 100년 동안 복음을 담아주셨습니다. 여러 가지 낙심거리가 없지 않았지만, 모교회는 건강하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무수한 상황과 무수한 깨질 위험의 질그릇의 상황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교회가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의 세대가 지나가고 다음세대까지 그 복음의 생수의 강이 이어지길 기도하고 바랍니다.
11절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언젠가는 죽습니다. 우리의 소마, 우리를 둘러싼 무수한 상황들도 다 지나갈 것입니다. 우리는 순간 낙심할 수 있지만 영원히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14절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17 세 번째, 바울은 우리의 육체의 한계(가시)때문에 낙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16-18절)
고후 12:7에 ‘내 육체의 가시...를 주셨으니’라고 했는데, 하나님은 이 가시를 제거해 주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정말 너무나 큰 은혜와 계시를 받았지만, 그것 때문에 자고하지 않게, 교만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 ‘육체의 가시’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2:9에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라고 합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하려 함’이라는 어구를 세 번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그저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은 고린도전.후서의 강조점입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의 약함 가운데서 드러나고 하나님의 힘이 죽음을 통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18 Living is dying
인간에게는 들숨과 날숨이 있습니다. 들이마시는 숨은 생명이고 내쉬는 날숨은 죽음입니다. 우리는 매일 생명과 죽음을 오갑니다. 사람이 죽을 때 날숨을 뱉으면서 죽습니다. 그래서
living is dying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즈음은 백세 시대를 살아갑니다. 우리가 언제 죽을지 다 알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
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갑니다. 우리는 언젠가 죽습니다. 그런 와중에 우리 죽을 몸의 약함, 육체의 가시와 한계를 느낀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빡세게 기도해서 모든 육체의 가시와 두통과 육체의 질병과 약점과 연약함과 심리적인 약점이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정말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성경적인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그분의 능력이 우리에게 거하도록 종종 의도적으로 우리를 약함 가운데 두신다는 것입니다.
19 When I am Weak, then I am Strong!
모교회가 100년을 달려오면서 육체의 가시가 있을 수 있고, 한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한계 가운데 약할 때 더욱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육체의 가시 때문에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16-18절에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4살 때 교통사고 당해서 죽을 고비를 넘긴 꼬마도 이제는 중년의 나이를 넘어가고 있습니다. 겉사람이 낡아지고 후패하는 것은 인간의 속성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점점 낡아져 갑니다. 하지만 우리가 시간이 축적될수록 속사람이 더욱 강건해질 것입니다. 여러분,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합니다. K 모교회는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되셔서 100년을 달려왔듯이 앞으로도 또 100년을 향해 힘차게 달려갈 것을 기도합니다.
20 끝까지 인내해야 성공한다
토머스 섯클리프 모트라는 사람이 19세기 식품을 냉장하는 문제를 푸는 데 몰두했습니다. 그는 이 일을 3년이란 시간에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실제로 26년이 걸려 버렸습니다. 결국 그는 냉장된 고기의 첫 배송품이 호주를 떠나는 것을 보았지만, 그 고기가 도착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모트의 서재 곳곳에는 그의 좌우명이 적혀 있었는데요. 모트는 맨 벽 맨 위쪽 둘레에 자신의 좌우명을 스무 번이나 적어 놓았습니다.
“끝까지 인내해야 성공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인내하는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 당대에 이루지 못한 꿈들이 다음 세대에 이뤄질지도 모르니 끝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끝까지 인내해야 할 줄 믿습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 거실에 걸린 문구
한번 뿐인 인생 곧 지나가리라. 그리스도를 위해 한 일만 영원하리라
사랑하는 모든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K 고향교회는 직분 때문에 낙심하지 않으며,
상황 때문에 낙심하지 않으며,
육체의 한계 때문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동안에 하나님 아버지께 날마다 기도하며 그분의 은혜를 구하며 사는 복된 질그릇의 인생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축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우신 사랑과 성령 하나님의 친절한 인도하심이 교회설립 100주년을 맞이한 K 모교회 담임목사님과 당회원들과 중직자들과 모든 성도들 머리 위에, 그들과 가정과 자녀들과 앞으로 펼쳐질 고향교회 위에, 더 나아가 한국교회 백년대계 위에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설교 후에 느낀 대목
- 설교를 하면서 느끼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청소년 시절에 유독 기억나는 친구의 에피스도가 있었지만 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지금 돌아보면 웃을 수 있는 실수이고 헤프닝이었지만, 그 이야기와 관련된 가족이 들을때는 혹여나 기분이 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설교단은 개그콘서트가 아니기에, 사소한 이야기로 인해 청중의 감정이 상하면 말씀증거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
- 그리고 모교회이기 때문에 우리 가족 이야기는 최대한 배제했다. 모교회에서 내가 처음으로 전도사 사역을 할때, 나의 부친이 부장 장로님이었고, 중고등부 시절에는 나의 모친이 교사이기도 했고 최초의 여성 부장 권사님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다 배제했다. 나는 모교회에서 부모님의 신앙교육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자랐다. 그게 그 시절에는 너무 싫었는데, 고향 교회를 떠나 사역을 하다 보니 부모님과 함께 신앙교육을 받은 그것이 내게 엄청난 큰 에너지와 영적 근육의 기초가 되었다. 하지만, 다 배제했다. 우리 가족이야기를 설교에 하면 우리 가족은 좋아할지 모르지만, 다른 성도들은 불필요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그 이야긴 가족 모임때 하면 되지 굳이 설교단에서 하지 않아도 된다.
- 괄호 친 이야기는 설교 후에 생각난 대목이라 그냥 추억돋아 적은 부분이 직접 설교하진 않았다.
- 솔직히 이 설교를 앞두고 기도부탁을 가까운 지인들에게 했다. 부담이 많이 되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 설교준비하면서 옛 추억과 은혜에 감사해서 많이 울었다. 모교회가 이런 힘이 있구나 그런 감동을 거머쥔 시간이었다.
- 나는 보잘것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모든 정보는 알파벳 처리했다. 무명으로 오랫동안 글을 쓸 수 있기를 바란다.
오늘은 고린도후서 4장 1-18절의 본문을 가지고 '낙심하지 않습니다'(우크 엔카쿠멘)이란 설교를 한 내용을 공유했다. 고향교회 설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방문해서 설교로 섬긴 부분과 그에 대한 느낀 대목도 같이 공유해 보았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여러분에게도 그러하기를!
- 과거에 설교했는 고후 4장의 '우크 엔카쿠멘' 또 다른 설교이다. 서로 비슷하기도 하지만 서로 분명 다른 부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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