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로서 고린도전서를 기록했다. 그리고 자신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주었던 가르침대로 살았다. 오늘은 고린도전서 9장 1-12절의 본문을 가지고 '권리도 포기할 줄 아는 자유'의 바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권리를 포기하는 신앙
1-2절: 교회 안에서 직분을 맡게 되면 그 직분에 맡는 권리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역행하는 행위이다. 바울은 이웃을 위해서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지 않고, 자유를 포기하는 삶을 살았다. 이런 삶의 모범을 보임으로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같은 삶을 살 것을 요구한 것이다. 그는 사도로서의 권리를 포기하면서 사역을 했다. 교회 안에서의 직분은 자신의 권리이므로 그것을 주장하라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분을 주신 이유는 교인들을 섬기고 사랑하라고 주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자유인(1절)이었다.
1세기의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자유인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니지 못한 ‘노예’가 아니라는 말이다. 바울 당시 노예는 보통 남성 노예, 포도원 숙련공, 예쁜 여성 노예, 연예인이나 지식인 노예가 있었다. 이들은 대단히 비싼 상품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비싸도 그들은 노예에 불과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제약이 없는, 매임이 없는 자유인이었다.
그는 또한 사도였다.
초기 그리스도교 문헌을 볼 때, 바울은 종종 ‘사도성’을 의심받았다. 예수님의 열 두 사도에 포함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사도들과 달리 길리기아 다소 출신으로 디아스포라였기 때문이다. 전에 교회를 핍박하는 적대 세력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사건을 통해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행 9:15; 갈 1:16; 2:8). 물론 이 사건은 바울의 개인적인 체험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그것을 인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사도성을 뒷받침하는 두 가지 증거를 내세운다.
첫 번째는 다메섹 체험을 통해 직접 주님의 음성, 계시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그의 사역에 나타난 사도적 열매이다. 그가 부르심에 응해 사역을 했을 때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셨고 그 열매로 교회들이 탄생했다. 그래서 바울은 2절에서 더 강조한다.
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고린도 교회가 바로 그런 사도적 열매 가운데 하나였다. 그래서 고린도교회의 존재 자체가 바울의 사도성의 증거가 된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더라도 고린도교인들이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누구 때문에 복음을 받게 되었는데.
바울이 자유인이며 사도로서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곧 이어지는 논의의 중요한 전제가 된다.
3-10절: 바울에게는 지지자도 많았지만 반대자도 많았다.
그들은 바울이 사역자로서 마땅히 사례를 받아야 하는데 사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권위가 의심된다고 주장했다. 당대 철학자들의 생계 수단은 대략 4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학생들에게 수업료를 받는 것이다. 둘째, 재력 있는 사람의 후원을 받는 경우이다. 이 경우 후원자들의 자녀들을 가르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셋째, 구걸을 한다. 넷째, 자력충당을 위해 다른 직업을 가진다. 단점은 사회적 신분이 격하되고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다 빼앗겨 본래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4번째 부류에 속하는 자비량선교사(tentmaker)였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권위 없는 철학자쯤으로 보였을 것이다. 손수 천막을 제조하여 생활비를 충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바울이 의도성을 갖고 택한 방식이었다.
바울은 반어법을 써서 사도로서 누릴 권리가 자신에게도 있음을 밝힌다. 굳이 생계를 위해서 다른 노동을 하지 않아도 복음 전도자는 생활을 위한 보상이 주어질 것을 기대한다(4, 6절).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은 것이 마땅하니라’(눅 10:7). 다른 사도들은 바울처럼 별도의 노동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베드로를 위시해 다른 사도들은 아내와 함께 다니며 동역을 했다. 바울에게도 이런 권리가 있었다. 생계를 위한 노동, 결혼하여 아내와의 동역함, 몰라서가 아니라 무능력해서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희생한 것인데, 거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바울은 7절에서 병역, 농업, 목축의 예를 들면서 이 모든 경우에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생계의 수단이 제공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신명기 25:4에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는 명령은 ‘일하는 소를 굶기지 말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짐승을 이렇게 배려하시는데 일하는 사람에 대해선 더 말할 것도 없다.
11-12절: 바울은 12절에서 생명을 다루는 영적인 사역의 대가로 물질적 보상을 받는 것은 세상이치로 보나 율법의 규정으로 보나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 권리를 쓰지 않고 ‘참는다’고 했다.
여기서 사용된 단어 ‘스테고’는 원래 ‘지붕을 덮다’라는 뜻이다. 모든 것을 감수하고 묵묵히 견딘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희생에 대해 고통과 아쉬움 그리고 섭섭함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다 덮어두고 감내한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가? 자신의 존재의 목적인 복음 사역에 혹시라도,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일체 누가 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자유인이지만 실제로 살아가는 모습은 무보수로 주인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노예의 모습이다. 권리있는 자유인이지만 권리 없는 노예의 생활방식을 택한 것이다. 왕이요 메시아로 오신 분이시지만 섬기기로 작정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연상케한다(막 10:45).1)
바울은 또 고백한다. 18절에서 자신의 장이 무언지를 분명히 파악하고 있다.
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십자가 없이는 영광도 없다. 바울은 자신의 특권과 권리를 맘껏 포기하면서까지 복음을 위해, 복음전파를 위해 노력하였던 인물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가지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위해 참는다, 스테고(지붕을 덮다)하는 것이 있는가? 주님을 위해 우리의 특권을, 우리의 권리를 잠시 내려놓고 있는가? 그렇면 바울처럼 하늘의 상급이 클 줄 믿는다. 우리들도 우리 생활 가운데서 작은 것들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복음을 위해, 그리스도를 위해 포기할 때 더욱 풍성하고 넘치는 은혜의 복을 받을 줄 믿는다.
오, 하나님! 우리에게 ‘권리도 포기할 줄 아는 자유’를 허락해 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하는 모든 교회의 주의 백성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한다.
1) 2008년 11월 생명의 삶 플러스(서울: 두란노, 2008), 82-83.
오늘은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9장 1-12절의 본문을 토대로 '권리도 포기할 줄 아는 자유', '권리도 포기할 줄 아는 신앙'의 사도 바울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는 자유인의 신분이었고, 사도였지만, 오히려 자비량선교사로 자원했고 자신의 권리를 참았다는 점이 놀라운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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