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고린도전서 1:1-3의 본문과 마가복음 1:1-8의 본문을 가지고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으로 젊은 시절에 설교한 내용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정체성identity를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Prologue...
윌리암 세익스피어는 ‘리어왕’ 1막 4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아 나는 잠들었는가, 깨어 있는가
누구,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가 없느냐‘
소설가이자 평론가였던 한때 이화여대 교수로 있었던 이인화(‘영원한 제국’의 저자)는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소설에서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인간은 ‘욕망하는 자아’라고 말하였다.
고인이 된 멀티아티스트 백남준은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사기다!!’라고 말했다. 삶이 너무나 지루하기에, 너무나 따분하기에 멀티미디어를 통해서 자신을 표현한다고 말하였다. 그에게 있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없으며 단지 나는 인생을 즐기겠다는 철학 밖엔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쾌락주의와 허무주의가 뒤범벅된 인생관을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가장 발전하지 않는 나라, 인도에서의 사람들의 인생관은 ‘가난도 전생의 결과이며 운명’이기 때문에 그 가난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관건이 아니라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면서 체념하는 양상을 보인다. 그러면서도 영화를 제일 많이 찍는 나라하면 우린 얼핏 미국을 생각하게 되지만 미국이 아니라 인도라는 것도 과히 우릴 놀라게 한다. 근데 인도에서 만들어진 영화의 99.9%가 다 그렇고 그런 음란하고도 추잡한 내용이다. 한 때 전세계적으로 흥행을 기록한 ‘원초적 본능’이 인도에서는 흥행이 안 되었다고 하는 것과 그 인도에서 사역자가 만약 인도 영화를 보았다고 하면 그 사역자는 그 복음사역을 포기하라고 할 정도라고 하니 그 인도 영화의 음란함이 얼마인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인도의 거리에는 소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인도엔 소를 많이 키우기 때문에 그런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인도에서 소는 그들의 신(神)이기 때문에 아무리 사람이 배가 고파서 죽어간다 하더라도 소를 잡아서 먹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소는 그들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가장 가난한 나라, 인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자신의 인생관-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하여-은 틀림없이
‘소를 신으로 모시면서 그 밑에서 기생하며 살아가는 열악한 인생’
정도로 자신들의 존재의 문제를 답하고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질문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주로 던졌던 질문이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철학을 좀 한다고 하는 지성인들은 언제나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질문, 이를테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대답하곤 했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고도 아무런 근심거리나 걱정이 없이, ‘등 따뜻하고 배 부르기에’ 그들은 철학이라는 고상한 문제를 가지고 소일거리를 삼으며 살았던 것이다. 그 아득한 그 고대에서 우리는 지금은 21세기를 향해 가는 길목에 와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왔으며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가?’
여러분과 함께 잠시나마 년말 년시의 분주한 세상의 모든 짐과 굴레를 뒤로 하고 본문을 살피면서 짤막한 시간이지만 우리를 돌아보고자 한다.
본론...
오늘 우리에게 펼쳐진 고린도전서 1장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 본문은 고린도전서의 서두이다. 우리가 만약 누구에겐가 편지를 쓰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하는 말이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문안 인사이다. 이를테면 ‘친애하는 누구에게’라든가 아니면 ‘아버님 전상서’,뭐 그런 종류의 인사말이 가장 먼저 나타날 것이다. 바울서신, 바울의 편지들도 동일한 형식을 띠고 있다. 교인들의 상황과 그들에게 하고자 하는 말 대신에 먼저 그들의 안부를 묻는 인사를 먼저 하고 있다. 바울서신의 다른 모든 본문들의 서두에도 동일한 형태의 문안인사를 드러나 있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 것이다. 오늘 바울은 그 당시 그 신약시대의 고린도 하면 대중들의 마음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교양과 고급 창녀’가 떠오른 일명 타락의 대명사였고 구 고린도는 속담에 ‘방탕의 상징’이었다는 그 고린도의 지역에 세워진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서신의 내용을 우리는 지금 대하고 있다. 바울은 1절에서는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설명하고, 2절에서는 너희가, 우리가 누구인지를 설명하면서, 3절에서는 자신이 그들에게 보내는 문안인사를 아주 짤막하게 적고 있다. 내용상으로 볼 때 그리 특출한 것도, 의미상 어려운 것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부터 이 3절의 짧디 짧은 구절들을 해부하는 수술대의 의사처럼 비장한 마음으로 말씀을 대해 보기로 하자.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바울
바울은 자신을 먼저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와 함께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소스데네라는 형제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소스데네는 아마도 바울의 서기관 노릇을 한 것 같다. 바울이 구술하는 동안, 그는 이 편지를 받아 적었다. 그는 고린도에 있던 유대인 회당의 지도자였던 것 같다(행 18:17). 그는 바울의 전도로 인해 매를 맞게 되었는데, 그 이후에 신자가 된 것으로 보여진다. 소스데네는 고린도 교회에 잘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같이 나열하고 있다. 바울은 여기 1절에서 자기를 소개하면서 소스데네와는 차별을 두는 인상을 풍긴다. 그 차별은 바울은 사도이며, 소스데네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형제라는 말로서 표현된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
뭐라고 바울은 말하는가? ‘사도’라고 한다. 그만큼 바울은 자신의 사도된 것에 대해 자신 있어 한다. 왜 그러한가? 그것은 바울이 사도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핍박하는 사울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로 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위대한 집사 스데반을 돌로 아주 잔인하게 쳐 죽인 자가 이 사울이었지만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거듭 태어나 회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구원의 길은 다른 영혼을 구하는 사도라는 신분을 가지게 됨과 함께 열려지게 된 것이다. 바울은 사도가 되지 못했다면 그는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서 고통과 신음으로 영원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요즈음 사람들이라면 자신을 소개할 때 ‘명함’을 주거나 자신의 ‘직업’을 먼저 꺼내어 놓는다. ‘어디에서 근무하는 누구라고 합니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가령 자기가 좀 ‘명문대’에 다니고 있다면, 그 대학이름을 들먹이면서 자신을 소개할 것이고, 자신의 ‘직업’이 돈을 많이 벌거나 인기 있는 직업이라면, 그 직업과 자신을 연관시켜 소개하는 습성이 있을 것이다. 사람은 공통적으로 자신이 그래도 남들보다 좀 더 잘 나고 우월적인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이 정도는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겠느냐라는 <자기 자신만의 기준>을 가지고서 자신을 소개하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누구에게든지 구차하게 보이거나, 없어 보이거나, 별 볼일 없어 보이기 싫어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물질이 지배하는 고도의 <자본주의>라는 경쟁사회에 살고 있다. 그러기에 자본을 많이 가진 사람이 최고로 보일 수밖에 없다.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이 최고라는 것이다. 돈, 명예, 권력, 인기, 외모, 제2의 자본, 제3의 자본이 현대를 지배하고 있다.
하여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공통적인 것은 자신을 소개할 때, <다 자기가 그래도 남들 앞에 자신있어 하는 부분을 내어 놓는다는 것이다>. 바울처럼 편지를 쓸 때도 그렇게 자신을 소개할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자기를 소개하기를
V.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
이렇게 적고 있다. 앞에서 한 번 언급한 것처럼 ‘사도’라는 말이다. 바울은 우리들과 달리 자기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볼품없고 없어 보이는 -인간적으로- 순간이 그가 사도가 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의 화려한 프로필과 경력을 자랑했던 사람이었다. 자신이 순수한 혈통의 자손이라는 것과 당대 최고의 학벌로 인정받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는 것으로 자신의 이름을 떠벌리기를 좋아했으며, 율법의 의로는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를테면 인간적인 자신감과 자랑과 자신만만함으로 똘똘 뭉쳐진 사람이었다. 그의 신념과 행동에 얼마나 자신이 있었으면 그런 믿음이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겠는가? 죄 없는 스데반을 죽이기까지 하였겠는가? 그는 그만큼 자기 확신과 자기주장과 자기생각이 또렷한 사람이었다. 그의 눈동자는 종교적인 열성의 불꽃이 이글이글거렸다. 그런 그가 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서 형벌을 주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것이다.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악, 그 시대의 모든 사람들의 죄악, 그리고 자신을 믿는 무리들을 잡아 죽이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바울의 죄악을 위해 고통의 몸부림을 치시며 죽음의 깊은 골짜기를 지나서 부활의 영광을 쟁취하셨던 예수님을 바울이, 아니 사울이 만나게 된 것이다.
사도행전 22장을 보라. 다 같이 한 번 찾아보기를 권한다.
6절이다.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그러면서 사울이 예수님에게 물 은 <두 가지 질문사항>이 있다.무엇인가?
V.8 주여 누구시니이까
V.9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첫 번째 질문은 “당신이 누구냐?”라는 질문이고,
두 번째 질문은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이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 신령한 체험을 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하며 남은 인생을 살아야 할지 알게 되었던 것이다. 다메섹에서 보았던 그 빛의 광채로 인해서 그는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사도행전 9장8절과 9절의 내용이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그가 예수님을 만난 순간이다. 그는 생애 최초로, 최고로 “자신의 무능함”을 깊게 체험한 순간이며 사건인 것이다. 그는 사흘이라는 72시간을 그 어두움, 앞을 보지 못하는 그 답답함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삶을 살았으며, 과거에 자신이 자랑했으며, 자신했던 그 삶이 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생애 최고로 없어 보이는 삶에 허우적되고 있음을 절감했을 것이다. 예전의 핍박자요, 살인자요, 포행자인 그에게 이제는 주님자신에게서 그리고 ‘아나니아’라는 경건한 제자로부터 자신의 사명을 듣게 된다.
9장 15-16절: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22장 14-16절: 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본문에 나오는 1절의 그 “하나님의 뜻”이다. 바울은 그러한 하나님의 뜻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반열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오직 하나님이 원하였다는 그것뿐이다>. 바울에게는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그런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의 구원에 바울의 그 화려한 학력이 영향력을 행사하였는가? 그가 가진 종교적인 열성이 그를 구원받게 하였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여러분 중에 혹시라도 자신이 구원 받았는지에 대한 의심이나 의문이 드는 사람이 있는가? 그런 사람은 주님을 영접하라. 또한 자신이 신앙생활하면서 ‘내같은 인간이 구원 받았겠는가?’라고 의심하는 사람은 없는가? <구원은 그 사람의 행실과 행위에 관계없다> 하나님이 그 사람, 여러분들을 원하셨기 때문에 여러분은 그 사실을 믿음으로써 구원받은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뜻, 그것뿐이라는 것이다>Because that is what God wanted. 누가 나와서 하나님은 왜 그렇게 원하셨습니까? 라고 항의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바울의 자기소개를 보라!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
그는 자신이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닌 사람인지를 자신에게 기초를 두고 삶을 영위하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은 무능하고도 가치 없는 사람인 것을 다메섹에서 뼈저리게 느낀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모든 인간적인 것들을 뒤로 하고서 고린도교인들에게 아주 강력한 목소리로 말한다.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살아가는 한 사도>라고 말이다. 바울은 그렇게 자신을 소개한다. 좀 어려운 말로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존재의 목적을 <하나님과의 관계>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오늘의 질문,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과감하게 대답할 것이다. 그 분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인생과 자신의 소명, 이 두 가지의 문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말미암아 모두 해결되어졌다.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혀 죄 없고 순진한 사람을 잡아 죽이기에 여념이 없었던 그 죄 많은 인생이 하나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그의 삶이 180도 바뀐 것을 보라! 그는 인생의 목적에 대해 그렇게 고민하지 않았다. 자신의 신념과 종교적인 열정이 모든 것을 말해 주었기에 그는 과감한 행동을 서슴치 않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는 모든 것들, 세상이 주지 못 했던 모든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바울이기 이전에 사울은 하나님에게 자신의 인생을 보살펴 달라는 간구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오로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그를 불렀던 것이다. 하나님이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그렇다. 바울이 하나님을 부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불렀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던 것이다. 모든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동일하다. 그 분이 인류를 향해 먼저 손을 내미신 것을 기억하라. 우리가 손을 먼저 하나님께로 내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이 우리 인류를 향해 내미셨다는 것을...이것이 바로 우리가 자주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세례 요한
우리는 이 위대한 신약 사도 바울이 있기 전에 척박하고도 건조한 그 땅, 모래바람이 불고 먼지가 날리는 그 광야에서 예수님의 오심, 메시야의 오심을 고대하며 설교하던 ‘광야에 외치는 자’ 세례요한을 기억할 것이다. 구약의 예언자, 선지자들은 이 세례요한의 등장을 예언하면서 그의 소명을 천명했다...
<막1:2...네 길을 예비하라 1:3...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세례 요한이 사역지는 사막 즉 광야였다. 이 광야라는 말 자체는 요한의 사역지가 그 지역이었다는 일차적이고도 단순한 의미가 있지만 더 깊게는 당시 사람들의 메마르고 무미건조한 영적 상태를 반영할 것일 수 도 있다. 그 신구약 중간기 400년 동안의 그 말씀부재와 선지자의 부재는 곧 영적 고갈 상태에 이른 이스라엘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이 세례 요한 한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치밀하신 계획, 프로젝트는 마치 미세한 핵폭탄을 조작하는 것처럼 그만큼 철저했을 것이다. 그를 위한 프로젝트는 창세전에 예정되어 있었을 것이다.
많은 세상 사람들이, 비그리스도인들이 어쩌다 얘기하는 ‘인간은 우연의 산물이며 결과’이다. 아니면 ‘우연하게 태어나 이 모양 이 꼴로 살고 있다.’라는 이런 말은 정말 비성경적인 이야기인 것이다. 요한처럼 우리들의 삶도 하나님께서 치밀한 계획 하에 미리 우리들이 태어나기 이전에 아주 독특한 존재로 계획하고 계셨던 것이다. 이 말이 여러분에게 좀 강하게 다가왔음 한다.
여러분은 세례 요한이 기이한 출생을 알고 있을 것이다.
누가복음 1장에 보면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와 어머니인 엘리사벳은 나이가 들고 늙어서 자식에 대한 소망이 없었다.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눅1:7)
그 가운데 천사가 요한의 탄생을 예언하였다. 그러나 사가가가 믿지 않고 의심하자 그가 어떻게 되었는가? 요한의 출생 때까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그런 독특하고도 기이한 출생의 비밀이 요한에게 있었지 않았는가?
여러분에게도 출생의 비밀이 있을 것이다. 우리 한국 교인들은 간증을 해도 아주 갑자기 드라마틱하게 변해서 간증하는 것을 대단히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우린 이러한 전통의 위험성을 자각해야 한다. 바울처럼 갑작스런 체험과 사건으로 말미암아 변화 받는 경우도 없진 않지만 하나님은 아주 조금씩, 조금씩, 한걸음, 한걸음씩 자기의 백성을 다듬어 가신다는 것은 성경전반의 주된 핵심이며 테마이다. 여하튼 여러분의 출생이 드라마틱하지 않을지라도, 세례 요한같지 않을지라도 그 속엔 비밀이 있고 요한이 나이 많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것은 불가능한 사실이었지만 그가 태어났다. 그것은 말 그대로 ‘은혜’였다. 세례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내가 누구인지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V.4에서 그는 역사적인 전승에 따라 광야에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을 때 V.5에선 그가 사역하고 있던 지역 즉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백성들 모두가 그 앞에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부흥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세례를 준 요단강에서 예루살렘은 적어도 약 30Km나 떨어진 곳이었으며 요단강에 비하여 지대도 약 1.2Km나 높은 곳이었다. 따라서 예루살렘과 요단 강 사이의 그 거친 길을 오르내리는 일은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수의 백성이 요한에게로 계속해서 나아오고 있는 것이었다. 우린 사람들이 우리 또는 나의 믿음이 좋고 단단한 식물을 섭취할만한 신앙을 가진 인물이라고, 장성한 분량의 믿음을 소유한 위인이라고 칭찬하며 따를 때 우린 은연중에 우쭐해지며 교만해진다. 그러는 교만과 자만의 시간이 계속되면 어느 덧 예수 그리스도는 온데 간데 없고 내가 모든 영광과 찬사의 주인공이 될 때가 많다. 이것을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내가 주님을 섬기는데 이런 칭찬과 보상은 당연한 것이 아니냐 이런 것조차 없다면 무슨 재미로 주님을 섬기느냐는 식의 자기 합리화는 정말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자, 우린 다시 세례 요한의 이야기로 다시 되돌아가자.
그는 어떠했는가? 수많은 군중들이 자기를 따르고 자기의 말이 잘 먹혀 들어갈 때 자기가 메시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메시야로 대우받고 싶고 주인으로 대우받고 싶은 충동이 없었겠는가? 세례요한은 포횡자인 헤롯조차도 그의 삶을 인정하고 그를 두려워하기까지 했던 경건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삶과 사역을 보면 그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남루한 옷차림과 고독한 삶의 방식, 스타일로 사역하면서 그가 외친 메시지를 보라!
V.7,8에 그는 그리스도를 어떤 분으로 소개하고 있는가?
‘나보다 능력 많으신 분’↔‘그의 신발끈도 풀기에 감당치 못 할 존재’
그리스도에 비해 ‘세례요한’이라는 그 자신은 택도 아닌 가당치 않은, 무기력하고도 가장 비천한 노예로 기술하고 있다. 신들메를 푸는 자는 누구를 가르키는지 다 알지 않는가? 그리고 V.8에서는 자기는 구약시대 홍해를 건너는 그 행위(Exodus) 즉 물세례를 줄 수밖에 없는 인간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고 소개하고 있다. 물이라는 단순한 액체와 ‘성령’이라는 그 인격적인 삼위의 하나님의 도우심, 능력, 그 파워는 감히 비교할 수 없다.
그의 사역은 이러했다. 그의 삶은 이러했다.
그렇다면 그의 죽음은 어떠했는가? 일평생 잘 먹지도 못 하고 메뚜기와 석청(벌꿀)을 먹으면서 광야에서 고독하게 삶을 지냈던 세례요한, 죽음조차도 한 계집애, 헤롯의 아내의 시기와 미움으로 어처구니없이 고독하게 죽어간 세례요한의 삶, 결코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며 자신의 ‘소명’이라는 종착지에 도달하기 위해 믿음의 경주를 힘쓰다가 젊은 나이에 죽어간, 순교한 그가 바로 ‘세례 요한’이다. 그가 그렇게 일관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누구인지에 대한 또렷한 확신과 정체성이었다. 자신의 존재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늘 되새김질하며 살았기에 그러한 삶이 가능했던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가지고 있는 자만심이 어느 정도 있다.
헌금함에 있어 타의추종을 불허하거나 주일 성수를 철저히 잘 하거나 성경을 아주 많이 읽고 성경지식이 탁월하다거나 교회일이나 봉사를 할 때는 발 벗고 나서는데 있어 어떤 자만심이나 자랑할 꺼리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린 자랑할 자격과 조건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어떤 한 부분에선 최고일지 몰라도 다른 부분에선 별로이지 않는가? 우리는 요한처럼 완전하고도 온전한 100%의 헌신을 하지도 않았지 않는가?
그러기에 자기가 한 가지 일로 교회에 열심히 봉사한다고 해서 다른 이들이 열심을 내지 않을 때 그 사람들을 멸시하고 정죄해서는 아니 된다. 그러한 마음이 있거든 교회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더 낫지 않는가? 하나님의 형상인 옆의 지체를 정죄할 바에야 봉사를 하지 않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교만과 자만심과 우월의 짐, 멍에를 내려 놓자. 그걸 계속 갖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주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그렇다. 우리는 죄인이다. ‘그러기에 나의 나된 것은 오로지 주의 은혜뿐이다. 나는 공로가 전혀 없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고 누군가 물을 때 주께서 대답하실 것이다. 세례 요한을 보라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혜를 깊이 알고 깨달은 존재”
또한 우리가 많은 일을 하는 이유가 상을 받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은혜를 안 자’가 모든 봉사, 섬김의 일을 한 후에 주 앞에 섰을 때 동일하게 고백해야 할 말이 있다.
눅17:10...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개역개정)
'We are unworthy servants; we have only done our duty.'(NIV)
'우리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단지 주어진 일을 해야만 하는 무익한 종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교만이 우리 삶 속에서 들이밀고 들어올 때 그 때 마다 고백해야 할 것이다.
‘주님,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정말 무익한 종입니다.’
Epilogue....
우리는 신약의 두 위인을 살펴보았다. 그 거장은 바울과 세례 요한이었다. 그 두 사람은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그 질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인생과 삶의 모든 여정이 연관되어 있음을 고백하며 신실하게 살았던 자들이었다. 이 혼탁하고도 어지러운 세태 가운데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의 끈끈한 관계 하에서 뿌리를 내리고서 삶과 사역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이 배금주의와 향락주의의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가 참으로 위로를 얻을 수 있고 평안을 갈구하는 공간은 바로 하나님임을 깨닫기를 소망한다.
우리 다같이 “하나님의 은혜” 이 찬양함으로 우리의 고백을 주님께 드리자!
오늘은 고린도전서 1:1-3과 마가복음 1:1-8의 본문을 가지고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란 화두를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정말 무익하기 짝이 없는 존재라는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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