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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고린도전후서

고린도전서 13장 1-7절, 완전한 사랑

by Message.K 2022. 11. 17.

아주 오래전에 탈고한 설교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7절의 본문을 가지고 그냥 날 것으로 묵상하면서 원고를 만들고 설교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때로는 너무나 불완전하고 불충분한 원고도 다시 보면 더 없이 새로울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설교목표: 우리시대의 이그러진 사랑에 대한 재고와 함께 하나님의 사랑의 정의를 알아본다.

 

 

사랑은 없고 욕망만이 존재하는 시대

한 택시 운전사의 고백이다. 한 중년부인이 택시를 탔다. 그리고서 왈,

 

“부탁을 할테니 들어주면 30만원을 주겠다.”

 

그녀의 남편은 외국에 돈을 벌러 떠난 지 오래된 나머지 너무나 외로워 중년부인이 택시운전사에게 그런 부탁을 했다고 한다. 외도를 위한 '기사'노릇을 한 댓가로 몇 십만원을 받아 챙긴다. 물론 이 이야기는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이다. 한때 우리나라 많은 노동자들이 외국으로 나갔던 시절이 있었다. 

 

 

이 거대한 사회는 “사랑은 없고 욕망만 가득 찬 도시”이다. 거리를 보라! 욕망의 기운만이 감도는 이 도시, 옛날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못하진 않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 가운데서도 여전히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의 정의definition를 대하다

우리는 오늘 여러분의 귀에 아주 익숙한 본문, 사랑장인 고린도전서 13장을 대하게 되었다. 여러분이 가스펠 송으로도 잘 알려진 본문이기도 해서 조금은 말씀을 준비하는데 주저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가 다 잘 안다고 해서 완전히 그 의미를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에 본문을 펼치기로 한다. 이 본문 1-7절을 나누자면 1-3절까지 한 단락으로 나눌 수 있고 4-7절까지 또 하나의 단락으로 구분 지울 수 있겠다. 첫번째 단락은 이를테면 ‘사랑의 가치’라고 할 수 있고 두 번째 단락은 ‘사랑의 정의. 성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먼저 우리는 첫 번째 단락 ‘사랑의 가치’(V.1-3)를 다같이 살펴보자.

☞V.1-3사랑의 가치

 그 당시 고린도 교회 안에는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대단히 많았지만 사랑이 없었다. 사랑이 없는데 은사가 많다면 당연히 잡음이 많았을 것이고 분열의 조짐이 보였을 것이다. 그런 교회의 분위기 속에서 바울은 13장 1절을 열고 있다.

 

  • V.1방언(고린도교인들이 가장 높이 평가했던 은사. 외국어들을 말하는 은사)→소리나는 구리/그 소름끼치는 소리.
  •   천사의 말(천사들이 말하는 신비스러운 언어들)→울리는 꽹과리/시끄러운 잡음, 소음, 짜증나는 굉음.

 

-사랑이 없으면 사람이 아무리 아름다운 소리와 환상적인 말들을 내뱉아도 그 가치는 무의미함을 보여준다.

 

  •  V.2예언하는 능, 모든 비밀, 모든 지식,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아무것도 아니요(Nothing)

 

지식에 있어 최고의 수준, 성경 말씀의 흐름에 따르자면 능력과 관계하여 최고의 믿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아무리 하나님께 대한 탁월한 은사라 할지라도, 성경을 꿰뚫어보는 영적인 안목과 지혜가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 V.3구제와 봉사, 헌신→아무 유익이 없다.

 

아무리 많은 재물과 돈과 자신의 수고와 노력과 땀방울을 쏟았다고 할지라도, 그가 자신을 불태우기까지 다른 이를 위해 살신성인하였을지라도 그 안에 사랑이 없다면 아무 유익이 없다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자세히 생각해 보라! 지금 바울이 말하고 있는 일은 사랑이 꼭 있어야만 행할 수 있는 행동들조차도 그 안에 사랑이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여러분이 아무리 거금의 십일조를 드리고 누구를 돕고 기아를 돕고 한다는 그런 선한 일을 한다 할지라도 그 안에 사랑이 없으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바울이 1-3절까지 줄기차게 말하고 있는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일이고 선한 일이라 할지라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다른 사람이 부러워할 만한 은사도 사랑이 없다면, 다른 이를 생각치 않고 마구 남용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은사가 아니라 잔재주에 불과할 것이다. 여러분이 하는 모든 행동들조차도 다른 사람들의 이목과 판단에 두려워한 나머지 그 일들을, 교회일들을, 가정의 일들을, 직장에서의 일들을 행하였다면 이것 역시 문제라는 것이다.

 

 

 

 

 

☞V.4-7사랑의 정의(定義).성품

오늘 우리가 집중적으로 볼 본문이다. 바울은 사랑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 사랑의 성품이 어떠한지에 대해 무려 15가지의 정의를 내려주고 있다. 이것은 단지 바울이 생각나는대로, 떠오르는대로, 대충 좋은 말만 골라서 적어 놓은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를 바울이 기록해놓은 것이다. 그걸 영감이라 한다. 그렇다면 그 사랑의 첫 번째 정의를 살펴보자. 뭐라고 적혀 있는가?

 

 

 

1.오래 참고

사랑은 바로 오래 참는 것이라고 했다. 여러분들도 그 반열에는 넉넉히 들어갈 것이다. 결혼하신 분들은 아마도 그러한 오래 참음의 세월을 견뎌 오신 분들이실 것이다. 아무리 미모의 사람이라도 한 이불 속에서 한 달만 지나게 되면 살과 살이 닿는 것이 아니라 인격과 인격이 닿게 되는 것이라고 양승훈 교수님의 책에서 본 적이 있다. 이처럼 한 인격이 한 인격을 오래 참고 견디게 하는데는 결혼이라는 아주 좋은 하나님의 선물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로 오래 참아야 할 일이 있다. 자식들의 불순종에도 우리는 참아야 한다. 그들이 정말 하나님의 바른 길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참아야 한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래 참는 법을 가르치시기 위해 의도적으로 말씀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성경의 무수한 인물들을 보라! 참지 못하고 조급했던 인물들은 한 명도 없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그 언약, 이삭을 통해 후손을 이루실 것을 기다리게 했다. 오래 참게 했다. 호세야를 아는가? 창녀인 부인과 혼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호세야이지만 여전히 부인은 다른 남자와 허랑방탕하게 외도를 즐긴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호세야에게 오래 참을 것을 기다린다. 그러면서 호세야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실감한다. 우리가 왜 오래 참아야 하는가? 왜 사랑의 정의 중에 오래 참음이 들어가 있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오래 참으셨다는 것이다.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삶은 불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불로써 심판하시기보다는 지금껏 참아오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다.

 

 

 

 

 

2.온유하며

영/Kind...여러분들은 얼마나 온유한가? 얼마나 친절한가? 사람마다 기질과 성격이 다 다르기 때문에 그 친절함이나 온유함이 나타나는 경우가 다르긴 하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들은 무례하며 불친절하다. 교회 내에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미소를 짓지만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불친절하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나이가 적은 사람에게, 남자는 여자에게, 남편은 아내에게, 부모는 자식에게 온유함으로 대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여전히 미소를 짓기보다는 인상만 구기는 사람은 뭔가 문제가 있다. 그리스도께서 만약 인상을 구기면서 사람들을 대했더라면 사람들은 그를 무서워하여 쫒아다니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의외로 그리스도인들의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간다. 우리는 그 어깨에 힘을 빼고서 주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긴 것처럼 등을 굽히고 무릎을 꿇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온유해야 한다. 주님처럼 말이다. 온유한 것이 사랑이라고 한다.

 

 

 

 

3.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질투하지 않는다. 시기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교회내에도 이러한 것은 많다. 누구를 지지한다고 하면서 하나의 파를 만들고 누구를 지지한다고 해서 하나의 당을 만드는 것은 오늘날 국회에서만 있는 일이 아니다. 바울이 사역했던 고린도 교회에서 그런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고전 1:12/‘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

 

라고 하면서 당파를 지어 서로를 적대시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아무리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이 선교하였던 교회였지만 거기에는 여전히 연약한 인간들이 모여 있음으로 해서 각기 자기들의 자칭 ‘지도자’를 세우고는 자기들만의 무리를 만들면서 자신들의 견해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투기하며 시기하며 질투하였던 것이다. 바울은 그러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한다. 한국사람의 전형적인 속담중의 하나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사람의 질투심과 투기성이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사랑은 투기하지 아니한다고 했다.

 

 

 

 

 

4.자랑하지 아니하며

사람이 자랑한다는 것은 어떠한 자기만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내 아들이 서울대를 가면 내가 부모로서 얼마나 뿌듯할까? 에서처럼 아들이 서울대를 가야지만 그 성이 차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아들이 연세대나 고려대를 가면 성이 차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부모에겐 ‘서울대’라는 자기만의 기준이 있다. 여러분에게도 이러한 기준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자기 자신만의 기준을 자신이나 자신이 믿었던 사람들이 그 기준을 넘어설 때 사람은 자랑하고픈 마음이 인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자랑할만한 게 있는가? 그것을 버리라고 권하고 싶다. 사도바울은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그랬다. 물론 사도 바울은 사도바울이고, 나는 나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쫒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인간의 그 얄팍한 자존심을 내세울려는 그러한 상대적인 자랑감은 버려야한다.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자.

 

 

(갈6:1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우리가 자랑하는 것들이 정말 세상의 것들인지 아니면 정말 주안에서 자랑하는 것인지 돌아보아야 한다.

 

 

 

 

 

5.교만하지 아니하며

여러분은 이 <교만>이란 단어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나 상상이 되는가? 동화책속에 나오는 마귀나 마녀가 생각나는가? 이 교만하다는 것은 동화 속에나 나오는 그렇게 먼 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어 볼까하는 그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할 때부터 인간의 교만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나타나는 뜻에 순종하기 보다 먼저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에 더 의존하게 될 때 ‘교만’은 또아리를 틀고 일어서게 되는 것이다. 순간이다. 여러분의 자랑할만한 꺼리가 나중에는 교만의 탑을 쌓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하늘 끝까지 탑을 쌓아 하나님보다 더 위대하여지고 싶은 구약의 선조들은 바벨탑을 쌓았다. 여러분들에게는 이러한 ‘교만함’이 있지는 않는가?

 

 

 

 

 

 

6.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우릴 피조물이라고 해서, 인간이라고 해서 결코 무례히 행치 아니하셨다. 하나님은 우릴 경멸하시면서 가볍게 보시지 않으시고 우릴 한 인격체로 늘 존중히 여기시며 이해해 주실려고 하신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떠한가?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무례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없는가? 이 무례한 것은 상대방이 분명히 자신의 감정을 건드렸기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에도 무례히 행하여선 아니 된다. 우리가 우리의 죄 때문에 상처입고 힘들다고 해서 하나님께 무례히 행하고 하나님을 욕하지만 그 때에도 여전히 우리를 보시며 무례히 행하시기보다는 우리의 상처를 싸매어 주시며 위로하시는 그 분의 마음을 볼 때 우리는 이웃이나 다른 이에게 무례히 행하여선 아니된다. 우리는 하나님께 빚을 진자들이기 때문에 다른 이에게 그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하는 것이다.

 

 

 

 

 

7.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와 죄악의 무거운 짐을 그대로 방치하시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우리인간들의 절박한 현실을 내팽개치시고 자기 혼자만의 안식을 누리시기 위해 사셨다면, 자기만의 유익을 구하였다면, 이 지구는 죄악으로 멸망의 지름길을 들어서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의 유익만을 구치 않고 세상의 필요를 위해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위에 버리신 그 사랑을 우리에게 보이셨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셨다면 지금 배고픔과 기아로 죽어 가는 수많은 걸식아동들과 이웃들에게 무언가 도움을 주시기 위해 안달하셨을 것이고, 이태원 사태로 인해 아쉽게 목숨을 잃은 피해자들과 유가족에 대해 애통해 하셨을 것이다)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에게 갇혀 있는 시선을 돌려 다른 이에게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다. 여러분 안에만 여러분의 시선이 갇혀 있다면 여러분은 단지 여러분의 결핍과 부족과 원망과 불만만이 가득할 것이다. 돈이 너무 없다는 불만, 자식의 성적이 너무 하위권에 머문다는 불평, 교회가 너무 불만스럽다는 둥 이러한 여러 가지 고민들과 답답함들로 가득 찰 것이다.

 

 

 

 

여러분의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세상이 어지럽다.

성경은 무수히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잠을 자고 있을 때,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만의 유익에 눈이 어두워져 있을 때 비그리스도인들이 우릴 책망한다. 비그리스도인들은 우릴 깨운다. 왜 잠만 자고 있는냐?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서 다시스로 가는 도중에 배 밑창에서 잠을 자는 요나에게 선장은 묻는다.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욘1:6)

 

 

어떤 이가 거리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러자 한 사람이 다가와 그를 깨우며 하는 말이

 

“당신, 왜 여기서 자는가? 여기가 교회인줄 아느냐?”

 

라고 했다. 제임스 케네디는 이런 말을 했다.

 

“이 시대의 95%의 그리스도인들은 Bench Warmer이다.”

 

 

라고 했다. 교회가 더 이상 세상에 대해서 내 놓을만 한게 없는가? 그것은 교회가 ‘우물 안의 개구리’비슷하게 되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찬송가 가사처럼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그리스도께서 눈을 들어 이 죄악이 관영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고 관심을 가지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배 할 수 있게 되었고 구원의 감격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8.성내지 아니하며

영/not get upset with others여러분, 얼마나 화를 내시며 얼마나 성을 자주 내는가?

 

(약1:20)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했다.

 

 

유난히 더운 여름이다. 불쾌지수가 높아만 가는 날이다. 이런 날 우린 더 짜증이 나고 스트레스를 더 받는 날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화를 내선 아니 된다. 성을 내는 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9.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오늘날 매스 미디어는 엄청난 정보의 홍수와 함께 온갖 악한 것들을 무수히 흘러 보내고 있다. 돈에 대한 탐욕과 집착을 할 수 밖에 없게끔 만드는 텔레비젼 광고와 성적인 음란함. 드라마에서 내비추는 것은 이제는 ‘삼각관계’아니면 ‘불륜’같은 것이다. 오늘날 시대는 다원화되어가고 점차 다양화되어지고 있다. 동성애, 트랜스젠더, 퀴어축제...이 모든 것들에 대한 기독교적인 가치와 대안이 필요하다. 우리가 성경말씀의 권위와 그 진리로 무장해 있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의 꽁무니만을 쫒아 가는 비참한 교회의 꼴이 될 것이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치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악한 것을 자꾸 보고 자꾸 듣고 자꾸 만지니깐 어쩔 수 없이 중독되는 것이다. 악은 중독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먼저 생각부터 잘라 내야하는 것이다. 악이 뿌리를 내리기 전에 미리 생각을 잘라 내야하는 것이다.

 

 

 

 

 

10.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서론에서 말한 '택시운전기사의 고백' 에피소드는 실화이다. 벌써 수십년 전의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불신자들은 어쩔 수 없는 세상이라고 혀를 차며 허탈해하는 것이나 아니면 이런 이야기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 볼 것이다. 우리들도 동일하다. 텔레비젼이나 영화를 보면서 은연중에 이러한 것을 즐긴다. 드라마와 영화는 불륜을 로맨스화하고 유부녀와 유부남의 사랑이야기를 과감하게 다룬다. 그런 이야기 구조를 가진 드라마를 보면서 즐거워하고 마음 졸이는 것이 우리이다. 아주 오래 전에 구청의 담당 주사로 있던 한 남자는 자신도 애가 딸린 가장이면서도 연상의 유부녀를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하면서 하도 답답해서 제게 얘기를 털어놓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요즘 방송프로그램을 보면 정말 생각치도 못한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정말 세상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은 어쩔 수 없는 이야기와 답답한 인생으로 가득차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죄와 악에 대해선 거품을 물고서라도 대항하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도이다. 예수님께서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한 장면은 요한복음2:12-25에 잘 나타나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시장바닥으로 만들어 놓았다.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가 세상에 물들어, 찌그러져 가는 모양새를 보면서 예수님은 진노하셨다. 얼마나 화가 나셨으면 채찍을 만드셔서 그 세상에 눈 먼, 돈에 눈 먼 사람들을 치셨겠는가? 주님은 그들이 세운 테이블을 뒤집어엎으시고 노발대발하셨던 것이다. 주님은 불의를 보면 그냥 참지 아니하시고 분노하셨고 그들을 내쫒으셨던 것이다. 사랑은 불의에 대해 묵인하거나 침묵하는 것이 아니다.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이며 그것을 행동으로 내어놓는 것이다. 주님처럼 말이다.

 

 

 

 

 

11.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요즘 그리스도인들을 색으로 표현하자면 ‘회색’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검은색도 아닌 흰색도 아닌 회색말이다. 세상에 발붙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것도 아니고 어정쩡하게 세상과 교회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이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우리의 모습에 대해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3:15-16)

 

 

오늘날의 교회의 현주소는 바로 <미지근함>그 자체이다. 이런 현상은 바로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삶’이 없기 때문이다. 말씀과 동행하는 삶의 기쁨이 없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일주일의 삶 속에 얼마나 성경말씀과 밀착되어 살아가는가? 얼마나 말씀을 보고 있는가? 말씀을 보고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기뻐한 적은 언제가 마지막인가? 그런 감동과 기쁨이 없다면 어찌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는가? 그러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말 그대로 ‘교인’일 뿐이다. 교회의 문턱을 넘나드는 사람은 많지만 성경 속으로 들락거리는 사람은 적다는 것에서 오늘날의 교회의 위기와 사회의 위기와 시대의 위기를 읽을 수 있다.

 

 

 

여러분, 가슴을 열라! 성경에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라. 그리스도인들이여! 성경 속으로 들어가 보라. 그 안에 여러분의 삶을 감당할 분이 기다리고 계신다. 목사님이나 전도사님이 한 주에 한 두번 아니면 더 나아가 수요 예배, 더 나아가선 새벽예배까지 여러분의 삶을 건드리는 설교를 한다 하더라도 여러분의 삶의 구석구석을 헤집을 수는 없다. 여러분의 삶은 여러분의 것이다. 목사님의 것도 아니요, 저의 것도 아니다. 여러분의 것이다. 여러분, 말씀을 열라! 말씀을 펼쳐 보라! 말씀만이 여러분의 희망이요 생명이다. 진리를 붙잡으라! 거기에 기쁨이 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12.모든 것을 참으며...Patiently accepts all things.

사랑에 대한 첫 번째 정의에는 ‘오래 참으며’라고 나와 있다. 여기서도 비슷하게 참으라고 한다. 우리의 머리를 죄어오는 모든 문제만을 빼 놓고서 참으라는 것이 아니라 바울은 모든 것을 참으라고 한다.

 

 

 

 

 

13.모든 것을 믿으며...always trusts

그리고서 신뢰하라고 한다. 하나님께 의뢰하라고 한다. 어떻게 문제가 풀릴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을 믿으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좋은 길을 예비해 두셨을거라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라는 것이다.

 

 

 

 

 

14.모든 것을 바라며...always hopes

바라는 것이다. 믿음 다음에 오는 것은 소망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소원한 바를 소망하는 것이다. 내 삶을 지금껏 붙잡아 주셨고 나의 자식과 친족과 가족들을 이렇게 축복하셨고 구원을 주신 그 하나님이 나의 이런 문제도 해결해주시리라고 바라는 것이다. 바라는 것이 없는데 어찌 나올게 있겠는가? 하나님께 바라자. 하나님께 기대하자.

 

 

 

 

 

15.모든 것을 견디느니라...always remains strong.

마지막으로 사랑은 강하게 견디는 것이라고 말한다. 강해져야 하는 것이다. 여러분의 배후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여러분의 배후에 든든한 백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 뒤에 버티고 계신 그 분, 그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강하라는 것이다. 그럴 때만이 강해질 수 있는 것이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딤전 6:11)

 

 

 

 

결론

V.1-3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소용이 없다는 메세지이다.

 

V.4-7사랑이 무엇이냐? 정의에 대해 살펴보았다. 하나님의 사랑이다. 여러분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자그마한, 잘디 잘은 그런 사랑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하나님이 어떻게 이 죄 많은 인간들을 사랑하셨는지 보여주는 본문이다. 그러므로 4절에서 7절은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대변해주는 구절이기도 하다.

 

-오래 참고,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치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우리도 일평생 그 하나님의 성품을 쫓아살아가도록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오늘은 고린도전서 13장 1-7절을 가지고 <완전한 사랑>이란 제목으로 사랑의 정의를 살펴보았는데, 그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새삼 발견한 대목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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