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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고린도전후서

고린도전서 12장 3절 설교, 오 놀라워라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니

by Message.K 2022.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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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팅은 제가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설교입니다. 신약성경의 고린도전서 12장 3절을 본문으로 <오 놀라워라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니!>라는 주제로 설교한 내용이 되겠습니다. 

 

 

 

 

옥중에서 손녀의 이름을 '희망'이라 지어준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아주 유명한 이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창창한 변호사의 직업, 안정된 삶을 버리고 흑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싸웠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 댓가로 감옥에서 평생을 살아야 하는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그의 나이 마흔 여섯에 그는 종신형을 받은 것이다. 1964년부터 1990년까지 루벤 섬 감옥에서 무려 27년 동안 감옥형을 지내다가 71세의 나이로 그는 출감했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짐승처럼 취급당했던 시절에 그는 흑인의 인권과 권리를 위해 감옥살이를 한 것이다. 독방에 갇힌 지 4년째 되던 해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이듬애헤는 큰 아들마저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 장례식조차 참석할 수가 없었다. 가족들과 떨어진 지 14년째 되던 해,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을 때, 아내와 딸은 영문도 모른 채 강제로 집에서 쫓겨나, 고립된 흑인 거주 지역으로 끌려갔다. 둘째 딸은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지만 그가 해줄수 있는 것은 그냥 내버려두라는 하소연뿐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14년 동안이나 보지 못한 큰딸이 자식을 낳았다고 찾아왔다. 면회가 고통스러울 법했지만, 그는 피하지 않았다.

 

 "아버지, 그 때 편지로 말씀드린 제 딸의 이름은 정하셨나요?"

 

 

손자의 이름은 할아버지가 지어주는 풍습이 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쪽지를 내밀었다.

 딸은 그 쪽지를 받고서는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참아내면서 종이에 얼굴을 묻었다. 종이에 묻은 잉크가 눈물로 얼룩지고 있었다. 거기에 적혀 있는 글자는 다음과 같았다.

 

"아즈위(Azwie, 희망)"

 

 

 이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 분리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철폐하기 위해 싸우다 투옥되어 종신형을 일방적으로 선고받고 감옥살이한 후 27년 후에 풀려난 만델라!

 

 

"나는 위대한 변화가 일어나리라는 희망을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손녀에게 '희망'이란 이름을 지어준 넬슨 만델라는 결국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었고, 모든 흑인의 바람대로 아파르트헤이트를 완전히 철폐시켰다. 그래서 남아공 월드컵때 샤키라가 월드컵 주제가를 wakawaka를 부를 때 흑인들하고 백인들이 같이 어울려 찍은 뮤직비디오를 보지 않았던가!

 

  '희망'!

 

 

 넬슨 만델라는 '희망'을 붙들고 27년을 견딘 정신력의 투사였다. 넬슨 만델라가 쓴 ‘희망’이란 손녀의 이름!

 문득 예수님께서 이 땅을 떠나시면서 한 가지의 이름을 쪽지에 적으라고 하면, 예수님께서 또 하나의 이름을 우리에게 건네신다고 하면 그 쪽지에는 오늘 우리가 같이 나눌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을까 싶다. 바로 ‘성령’이다.

 

 

 

 

 

우리에게 희망의 성령을 보내주신 하나님

오늘은 성령에 대해서 한 번 같이 말씀을 볼까 한다.

우리가 흔히 성령이라고 하면 어떤 기운이나 느낌, 뜨거움, 불 같은 것으로 흔히 이해한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임하시면 능력이 나타나'라는 CCm 곡처럼, '성령이 불타는 교회'의 제목처럼 성령은 뜨거움, It's so Hot!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나 성령은 불로써 임하는 것뿐만 아니라, 물이나 비둘기처럼 임하실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흔히 간과하고 있다.

성령님은 항상 뜨겁기만 할까? 물론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직접 피부로 느낀다면 마음이 뜨거운 것은 당연할 것이다. 사랑하는 남녀가 서로의 눈빛만 봐도 다 서로의 요구를 알고, 만나서 헤어진 지 10분도 안 됐는데, 또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어서 밤새도록 전화하고, 어느새 전화기 붙들고 검은 하늘이 밝은 하늘로 변할 때, 뜬 눈으로 날 샌 그 기분은 참 묘하지 않을까? 그처럼 서로 사랑하면 마음이 뜨거운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성령님은 불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성령님은 불이다'라는 공식은 잘못된 것이다.

 불은 물질, 화학작용 같은 것이 아닌가? 성령님은 화학작용, 물리적인 충돌 등이 아니다.

 

 

 

 

 일본여행을 갈 기회가 있었다. 고베신학교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일본은 목회자나 성직자가 굉장히 청렴결백한 것을 강조하기 때문에, 고베신학교는 신학교이지만 건물이 수도원처럼 디자인한 것도 그렇지만 마치 수도원을 방불케할 정도로 전등도 절약하기 위해서 몇 개 안 켜놓고 굉장히 어둔운! 우리 교회 지하보다 더 어두운 분위기였다. 답답해서 힘들었다. 근데 더 답답한 것은 아침에 새벽기도는 아니지만 경건회를 하는데 이 사람들은 기도를 하는데 소리도 안 내는 것이다. 우리 한국은 서로 소리내기 위해서 통성기도, 합심기도를 하는데, 이 양반들은 소리도 안 내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중얼중얼 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도 아니고. 정말 영성의 색깔이 다르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게리 토마스라는 신학자는 '영성의 5가지 색깔'을 보더라도 사람마다 영성의 색깔이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새벽기도를 통해 기도의 영성의 색깔이 있다면, 어떤 사람은 성경을 아주 많이 읽어서 성경중심의 색깔, 어떤 사람은 독서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자주 느끼는 지성주의적 색깔, 어떤 사람은 자연 속에서 생활하면서 자연이 주는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는 영성의 색깔, 어떤 사람은 금욕주의 영성, 어떤 이는 행동주의 영성 등이 있다.

 

 

 

  여러분은 어떤 영성의 색깔인가? 춤추는 영성인가? 랩퍼의 영성? 시크한 차도녀, 차도남의 영성? 여러분만의 영성을 발견할 필요가 있다. 여러 가지 영성의 스타일을 체험하게 되면 하나님에 대해서도 더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신앙의 스타일이 있을 수 있다. 때때로 내가 정말 미워하거나 정말 싫어하는 친구의 기도방식이나 신앙생활방식을 보면서 '저 친구를 하나님은 정말 사랑하실까?' 그런데, 우리는 왜 그런 생각을 가지는가? 자기가 싫어하고 미워하니깐!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십자가에 죽기까지 아들을 보내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정말 하나님께서 저 친구를 사랑하시고 용납하실까?' 질문이 생각되면 먼저 여러분 자신에게 되물어보라!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실까? 나같은 놈도 사랑하실까? 대박!" 먼저 이 질문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일본 사람들이 조용히 기도하는 방식 때문에 성령님이 거기에 계시지 않는가? 아니다. 그런 스타일에 관계없이 성령님은 동일하게 임재하신다. 비둘기처럼 조용하고 고요하게! 한국 사람들은 주여 3창하고 Shouting을 몇 번 해야 기도가 된다. 그 때 정말 답답하더라. 소리치면서 기도하고 싶을 정도로 답답함을 느꼈다. 하지만 스타일의 차이 때문에 성령님이 계시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기도소리가 크고 작고를 떠나 우리가 얼마나 간절히 성령님께 기도하는가에 달려 있다.

성령님은 에너지나 큰 기운이 아니다. 성령님은 에너지 덩어리 같은 것이 아니다. 성령은 무엇이냐?

 

 

 

 

 바로 성령님은 인격이다!

 인격이란 말은 우리와 똑같다는 말이다. 인격은 지, 정, 의를 갖춘 실체라는 말이다. 우리와 똑같이 슬퍼하시고, 서글퍼하시고, 안타까워하시고, 위로하시고, 힘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시다. 인격이라는 것은 우리 사람을 보면 어떤 것이 인격인지 알 수 있다. 여러분들도 부모님이 여러분을 인격적으로 대우하지 않고, 때론 무시하거나 꾸짖거나, 자존심 상하게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응하는가? 삐치기도 하고 속상해하기도 하고 그래서 '집을 확 뛰쳐나가버릴까?' 아니면 '아파트 옥상에 콱 뛰어내려버릴까?'라는 똘아이같은 생각, 별 희한한 상상을 하기도 하지 않는가? 그게 바로 여러분이 인격체라는 증거이다.

 

 

 

 

성령님도 인격체이다

성령님을 우리의 수호천사처럼 우리의 모든 심부름을 전담하는 퀵서비스 요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다. 성령님을 보혜사 성령 the helper라고 부른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오신 분이심은 확실하다. 하지만 성령님은 우리의 종이 아니라 살아계신 인격체임을 기억하라! 아무리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도 뭐든지 물어보고 대화하면서 일을 풀어가야 서로의 관계가 더 무르익고 친숙해지는 것이 아닌가?

 

 

 

엄마, 아빠한테 어디 동해안으로 놀러간다는 이야기도 안 하고 2박3일 잠수여행 다녀오면 부모님이 우리 아들 진짜 자랑스럽다! 어떻게 이야기도 안하고 혼자서 독립적으로 여행을 다녀올 수 있냐고 자랑스러워하면서 칭찬하실까? 아니다! 대다수의 부모님은 화를 내실 것이다. 저의 이야기이다. 20대 시절에, 자취생활을 했던 나는 부모님과 늘 떨어져 생활하는 게 익숙해서 부모님께 말씀드리지 않고 갔다 왔는데 부모님께서 굉장히 화를 내셨다. 그것도 평소에 말씀도 잘 안 하시던 아버지께서 말이다. 왜? 부모님은 인격적으로 대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알 권리가 있는데, 자녀들은 그 걸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친한 사이이기 때문에 더 서로 의사소통communicate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오늘 본문에서 무어라고 하는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성령님이 아니고서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고백할 수 있는 힘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실 수 없다는 말이다.

  수련회 때 말씀 기억나지 않는가? 제자들이 아무리 예수님에게 좋은 제자훈련을 3년씩 그것도 아주 강도 높은 수련을 했지만 그들은 복음의 탁월한 일꾼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그들이 변화되고 능력의 종들로 변신한 것은 바로 성령님께서 오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여러분, 자격도 안 되는 사람을 군인으로, 경찰로 뽑아서 사용하는 곳은 없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자격도 안 되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감당할 수 있도록 훈련을 하신 후에 성령님을 보내셔서 모든 것을 다 감당하게끔 하시면서 일을 주신다는 것이다.

 

 

 

  때때로 우리가 기도하기가 힘들때, 예배드리기가 싫을 때, 찬양하기도 귀챦고 말씀듣는 것도 도저히 감당하기가 힘들 때 그 때 이렇게 기도해보라!

 

"성령 하나님, 지금 내 상태가 완전 최악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싶지만 찾을 수도, 예배도, 기도도, 말씀도, 찬양도 다 귀찮습니다. 성령님! 내 마음 아시니 나를 만져주시고 내 마음 가운데 찾아와주세요. 위로해주세요!"

 

 

  이렇게 한번 기도해보라! 성령님이 어떻게 하실지? 기대해보라!

 

 

 

 

성령님은 인격이시며 우리의 동서남북에서 우릴 도우실 것이다. 넬슨 만델라의 ‘희망’(아즈위)처럼 예수님께서 이 땅을 떠나시면서 안심하고 하늘나라로 승천하실 수 있었던 ‘성령님’때문임을 기억하자. 그 성령님께 날마다 조르고 기도하고 간구하면서 성령충만한 우리 모두가 되길 주의 이름으로 소망한다.

 

 

 

오늘은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12장 3절 설교로 <오 놀라워라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니>라는 주제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령님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인에게 희망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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