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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고린도전후서

고린도전서 12장 12-27절, 그리스도인이 교회에 모여야 하는 이유

by Message.K 2022. 10. 27.

오늘은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12장 12-27절의 본문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이 교회에 모여야 하는 이유>, '그리스도인이 교회에 가야 하는 이유'란 주제로 설교한 내용을 포스팅해 보고자 합니다.

 

 

 

 

마이클 그리피스가 쓴 '기억상실증에 걸린 교회'란 책이 있다. 이 책에는 교회는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기다리고 사모해야 하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신분을 망각하고, 왕자님이 자기를 찾는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원래의 그 자리에서 심각한 노가다(?)를 하면서 비참한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파선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어느 해안에 정말 작고 볼품없는 인명 구조대가 있었다. 건물이라곤 오두막 한 채와 작은 보트가 전부였다. 그러나 헌신적인 몇 명의 회원들은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밤낮으로 바다를 지키며 유실된 자들을 찾아다녔다. 많은 생명들이 이 작고 볼품없는 초라한 구조대를 통해 목숨을 구했고 그로 인해 이 구조대는 유명해졌다.

구조된 몇 사람과 인근 지역의 사람들은 구조대의 사업을 뒷받침하기 위해 자신들의 시간과 돈을 제공했다. 그래서 새로운 보트도 구입하고 새로운 승무원들을 훈련시켰다. 그리하여 작은 구조대가 점점 몸집이 커지기 시작했다. 인명 구조대에 새롭게 가입한 새 회원들중 어떤 이들은 건물이 너무 볼품없고 시설이 빈약하다고 투덜거리며 불만을 터뜨렸다. 그들은 바다에서 구조된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기 위해서는 좀 더 편안한 장소가 마련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비상용 간이 침대를 훌륭한 침대로 바꾸고 확장된 건물 안에 좀 더 훌륭힌 가구들을 갖다 놓았다. 이제 구조대 건물은 대중적인 회합 장소로 변해버렸고 일종의 클럽처럼 건물이 럭셔리하게 변해버렸다. 회원들은 바다에 나가 인명을 구조하는 일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고, 결국 인명구조원들을 새로 채용했다. 그러나, 여전히 인명 구조라는 주제는 클럽장식들을 가운데서 가장 돋보이는 타이틀이었다.

 

 

 

 

 그러나 다음 모임때 클럽 회원 사이에서 갈등이 생겼다. 대부분 회원들은 클럽의 구조활동이 별로 즐거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클럽의 정상적인 활동에 방해가 된다면서 구조 활동을 그만두기를 원했다. 그리고 일부의 회원들만이 인명 구조야 말로 그들이 가장 중요한 목저이라고 하면서 계속 인명 구조대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투표 결과 일부 회원들은 패배하였고, 만일 그들이 조난당한 사람들을 구조하길 원한다면 아래편 해안에서 그들 나름의 인명 구조대를 새롭게 세워야 할 것이라고 통보받았다. 결국 그들은 새로운 인명 구조대를 만들고야 말았다.

 

 

 

 

  하지만 여러 해가 지나면서, 새로 생긴 이 인명 구조대는 옛날 구조대가 겪었던 변화를 똑같이 경험하게 되었다. 그 바다에서 여전히 파선 사고가 자주 일어나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대로 죽어가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시어도어 위델(Theodore Wedel)이 현대 교회의 실상을 비유로 설명한 것이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교회가 바로 이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교회가 영혼을 구원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망각하고 딴 일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교회가 뭐하는 데인지 정체성에 심각한 혼란을 겪고 있음과 동시에 오늘 특별히 말씀주제처럼 '교회에 왜 가야 하는지, 주일마다 교회에 왜 가야하는지,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새벽기도회, 기타 행사들에 왜 참석해야하는지?' 그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교회에 가야 하는 이유가 뭔가? 오늘은 그것에 대해 한 번 살펴보고자 한다.

 

 

 

 

교회는 일단 '인명 구조대'처럼 '영혼을 구원하는 방주'라는 사실을 일단 섭렵하였다. 그렇다면 영혼을 구원했음 됐지, 또 그 교회를 가야하는가? Why?

 

이 질문에는 다양한 대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 중요한 포인트만 짚자면, 우리가 포도나무가 있고 가지가 있다. 포도나무의 줄기에서 가지들이 나오는데, 만약 가지가 줄기에서 떨어진다면 만수무강, 백년회로 할 수 있을까?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끊어지면 그 생명은 얼마 가지 못한다. 이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포도나무이고, 우리 각 개인은 가지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서 떨어지면 외롭고 허전하고 허무하고 결국 좌절하고 실패하고 방황하게 된다. 여기서 교회는 무엇인가? 단순히 건물? 교회 건물, 예배당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모인 무리를 의미한다. 주님이 우리를 불러주셨는데, 이 무리를 지칭한다. 우리 교회에서 중고등부는 또 하나의 교회이다. 중고등부교회인 셈이다. 건물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이 모인 이 무리가 교회란 말이다. 이 무리는 포도나무 줄기이고 우리 각 개인은 가지이다. 여러 가지 하나 하나가 줄기에서 떨어지고 싶어 안달을 하다가 결국 떨어지면 그 사람이 아무리 탁월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 사람의 영적 생명력은 시들해지고 만다. 우리는 포도나무의 가지이다. 한 줄기에서 여러 가지로 뻗어나가고 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지체, 한 몸이라고 이야기한다. 오늘 뉴스에 보니 얼굴이 두 개인 애가 태어나서 관심집중이라고 하던데, 만약 머리가 두 개인 애가 몸은 하나인데, 이 애가 머리가 두 개라고 해서 몸이 두 개라고 할 수 있는가? 간단하게 테스트로 알 수 있는데, 한 쪽 머리를 때려보는 것이다. 때려서 다른 머리가 아파하면 한 몸이고, 반대면 한 몸이 아닌 것이다. 한 몸,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데, 우리 그리스도인은 다 한 몸인 것이다. 특별히 우리가 사도신경에 보면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

 

 

이라는 말이 나온다.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믿었던 신앙의 내용이다. 그 내용을 우리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거룩한 공회...바로 교회를 의미한다. 교회를 믿는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을 바로 교회! 히브리어로는 카알, 에다, 헬라어로는 에클레시아! 란 말을 쓰는데. 하나님은 이 세상의 수 많은 공동체들 중에서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해 세상의 영향력을 미치길 원하신다. 이 교회는 지난주에 J를 비롯한 고1애들로 탄탄하게 구성된 축구클럽이 축구하는 걸 보면서 굉장히 감탄했었다. 그런데 그 축구동아리는 축구는 잘하지만, 교회는 아닌 것이다. 하나님은 축구는 잘 못하지만 이렇게 다양하게 모인 우리를 가리켜 교회라고 명명하신다. 교회는 거룩한 공회, 거룩한 모임인데, 왜 교회만 거룩한가? J 친구들이 술. 담배 안 하고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바르게 살면 거룩할 수 있는 것 아니냐? 세상의 클럽이나 동아리가 다 그렇게 될 수 있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다.

 

 

 

 

 

 

 왜 교회만이 '거룩한 공회, 거룩한 공동체, 무리'인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바로 거룩에는 본질적인 요소인 바로 '예배'가 있기 때문이다. 로흐만 교수는 예배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봉사, 하나님과 세계를 위한 기독교의 봉사이다 라고 했다. 칼 바르트는

 

 

'교회의 예배는 지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 가장 절실한 것,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다. 이 예배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인간의 업적이 아닌 성령의 일이고 신앙의 행위이다."

 

 

 

  교회가 거룩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예배'에 있다. '공예배'에 있다. 우리가 교회에 와야 하는 이유는 바로 예배에 있기도 하다. 물론 집에서 예배할 수 있다. 자유롭게,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성경 보고 읽고 싶으면 성경 더 읽고, 기도하고 싶으면 기도 더 하고! 근데 교회에 오면 형식에 짜맞춰 예배드리는 것이 너무 딱딱할 때가 있다. 그런데 사도신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거룩한 공회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예배와 동시에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 것, 교류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거룩한 예배, 교회가 존재함과 동시에 교회에는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 것을 믿는다고 했다. 오늘 중요한 것은 두 가지, 거룩한 교회(공회)와 성도의 교제이다.

 

  • 교회의 3가지 중요한 기능,
  • 1말씀선포,
  • 2교제,
  • 3봉사

 

이다.

 

 

 

 

 

  특별히 칼빈은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인물인데, 그는

 

"하나님은 아버지라 부른다면 교회는 어머니라고 불러야 한다"

 

 

고 했다. 교회는 성도들의 어머니라고 한다. 왜 그런가? 교회는 성도들의 교제를 통해 끊임없이 우리를 가르치고 공급하고 채워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 더불어 함께 살아간다는 것도 가르쳐주고 있다. 우리가 어머니 없이 살 수 없듯이(아버지는 늘 2인자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2인자로 오해하진 말기를!) 우리는 교회를 떠나서는 살아 갈 수 없는 것이다.

 

 

 

사도신경에 나타난 성도의 교제는 이 세상을 떠난 성도들과의 교제이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과의 교제,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다윗, 베드로....등! 더 나아가 기독교 역사의 성 어거스틴, 토마스 아 켐피스, 성 프란체스코, 마틴 루터, 칼빈, 요한 웨슬리 등과 같은 사람들과 우리는 믿음 안에서 교제를 나눌 수 있다.

 또한 두 번째로 성도의 교제는 현재 살아 있는 모든 성도들과 초월적으로 교제를 나눌 수 있다. 종족, 문화, 혈연, 학연, 지연을 뛰어넘어서 말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는 백인만 예배드리는 교회가 있었다. 어느 주일날 한 흑인이 교회에 들어갔다. 그러나 흑인이란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리고 쫓김을 당했다. 얼마 있지 않아 어떤 사람이 교회 마당에서 서성대고 있었다. 흑인이 그 사람을 보니 어디서 많이 본 인물이었다. 바로 예수님이었다.

 

자기는 흑인이지만 예수님은 왜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방황하고 있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예수님 왈,

 

'나도 백인이 아니어서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했다고 한다. 교회의 성도의 교제는 클럽이나 동아리, 써클의 멤버들끼리 나눠는 특수 계층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어울려 교제를 나눌 수 있다. 예수님의 이름을 모든 사람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제를 나누고 교류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인 것이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중고등부예배에 누구나 참석할 수 있다. 물론 중고등학생이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왜 우리는 매주 교회에 모여야 하는가? 왜 우리는 매주  교회에 나와야 하는가?

 바로 이 두 가지, '거룩한 공회'-예배가 존재하기 때문이며, 둘째, 성도들간의 교제가 우리를 살리기 때문에 우리는 매주, 때론 격일, 매일 하나님의 예배의 장소로 나아와 하는 것이다. 가지는 끊임없이 줄기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성도들의 어머니란 사실! 잊지 말자! 예배와 성도들의 교제가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는 것임을 잊지 말라! 여러분 혼자서 홀로서기한다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신 것이다. 아담은 홀로서기를 잘 했을 것이다. 그는 창세기의 죄가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아 보인다'고 했다는 것을 기억하라!

 

 

 

매주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 교회에서 예배하며 믿는 친구들과의 교제를 통해 어머니와 같은 따뜻한 교제로 서로 힘을 공급받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교회에 늘 나와야 하는 것임을 잊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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