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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고린도전후서

고린도전서 1장3-9절,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비전-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

by Message.K 2022.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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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장 3-9절의 본문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비전-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이란 주제로 청년들을 대상으로 설교한 내용을 포스팅하고자 합니다.

 

 

 

a.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모든 은사를 충분히 받았다(4-7절).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에 풍족하므로,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고린도의 구속받은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풍성한 인자하심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사람들, 특별히 고린도 교회의 한 개개인 신자에 대한 것이 아니라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충만한 복을 알려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것이 된,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모든 은사를 경험하려면, 공동체 내에 있어야 한다. 각각의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다’라고 주장할 수 없다. 고린도전서 12장, 14장은 이 점을 아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면 공동체에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세상의 수 많은 공동체와 단체, 무리, 동호회가 있지만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일하기를 기뻐하셨다. 다른 어떤 것을 선호하시지 않았다. 하나님의 교회이다! 마하나임은 교회이다. 마하나임은 어떤 세상의 클럽이나 동오회가 아니다.

Ex) 이전에 지인과 테니스 친 일이 있다. 테니스 동오회였다. 모여서 일정한 회비를 내고 친목을 다지면서 연락도 하고 게임도 하고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그런다. 나는 기독교동아리만 있어 본 적이 있어서 세상의 동아리는 그렇구나 생각했다. 연락하면 다 같이 모여 게임하고 즐기고 먹고 친목을 도모하는!

 

 

 

  교회는 동호회가 아니다. 은사를 자랑하고 은사를 서로 노출시키는 동오회가 아니다. 교회는 받은 하나님의 은혜와 받은 하나님의 은사를 노출시키되, ‘섬기는 훈련’의 방편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가 풍성했다. 그러나 그것을 의도적으로 노출시키면서 서로 서로 자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은사가 자신을 교만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은사가 없는 것이 낫다. 혹여나 그 은사로 인해, 그 교만으로 인해 구원의 반열에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Ex) 루시퍼를 보라! No.2의 자리에서 교만하여 한없이 추락한 그의 추태를 보라!

 

 

 

  바울은 지금 고린도교회의 영적인 배부름, 은사의 풍족이 오히려 분쟁과 갈등을 유발시키는 요인이 되긴 했지만 굉장히 부정적이지 않고 굉장히 긍정적인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의 은사가 많아서 그 은사중에 피스메이커 역할을 하는 자들이 많아서 고린도교회의 평화중재자로 각기 일할 것이기 때문에 긍정적인가? 사람으로 인해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으로 인해서 그런 것인데 그것은 바로 ‘주님을 기다리는 그 기다림’으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와 상태에 긴장을 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견고케되어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 견고케함의 주역은 바로 주님이시다!

 

 

 

 

전체 VS 개인

또한

   과학적으로 생각해보아도 아무리 은사가 많다 하더라도 한 사람이 가진 은사는 공동체(무리)가 가진 은사의 양과 비교할 수 없다. 한 사람이 가진 은사는 다양할 수도 없고,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공동체의 은사는 다르다! 그렇다면 모든 교회가 그렇지 않은가? 물론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다양한 은사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특별히 고린도 교회는 은사가 많기로 유명했던 것 같다.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것을 살펴보더라도 은사가 풍족한 교회가 바로 고린도 교회였다! 또한 우리의 은사를 제대로 활용하고 점진적인 진보를 구하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에 더 충분히 들어가야 한다. 은혜와 은사는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으로 풍족해졌다고 할 때, ‘로고스(logos)’와 ‘그노시스(gnosis)로서, 둘 다 초대교회에서는 엄청난 폭발력을 지닌 단어였다고 한다. 바울이 이 두 은사에 집중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고린도 교인들은 주로 그런 은사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의 횡행함은 이것을 더 뒷받침해준다.

 

 

 

 

 b.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해 온전히 유지될 것이다(8-9절).

  바울은 분명히 고린도 교회가 당하는 어려움을 알고 있었고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확신한다. 하나님은 그 아들과 교제하도록 하나님께서 친히 고린도 교회를 부르셨고, 성도들을 부르셨고, 그들이 끝까지 견디며 ‘견고케하실’(안전케하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것이 바로 신실이다. 신실함은 그냥 최선을 다하긴 하는데 좀 하다가 안 되면 포기해버리고 내팽개쳐버리는 그런 것이 아니다. 집어치워버리는 그런 것은 신실하심과는 거리가 멀다. 미쁘신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시게 하셨다. 교제는 지속적이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도하에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누도록 부름받았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거나 자신의 약속을 파기하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할 수 있다.1) 그 분은 ‘pistos’하시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들은 흔히 우리의 종착지를 죽음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종착지, 하나님의 종착지는 바로 ‘재림’(8절)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그 날까지 연장되며, 그 날을 넘어서 영원의 충만함으로까지 연장된다. 하나님은 그 날에, 즉 사람의 마음의 비밀이 드러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최종적으로 죄 있는 자로 드러날지 모른다는 타당한 두려움을 가질 수도 있을 때에, 자기 백성을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지키실 것이다.

 

 

 

지역교회의 영광스러운 비전, 영광스러운 소망!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품을 확신하는 것!

하나님을 인도하심을 끝까지 신뢰하는 것!

교회는 바로 그러한 기초 위에 비전의 그림을 걸려 있다는 사실!!!

 

 

 

-우리 공동체를 생각하면서 이러한 그림을 그렸음 한다. 마하나님에 대한 여러 가지 부정적인 문제들과 요소들이 있을 수 있다. 15명의 신실한 졸업생들이 올라가고, 새로운 세대의 신입생들이 올라왔지만 잘 적응치 못하고 있으며, 지난 고등부를 회상하고 있다고 한다. 새로운 임원들과 새로운 리더들! 그리고 기도회에는 작년과는 달리 참석인원이 현저하게 줄었다는 사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인 프리즘을 제거하자! 지금 우리가 하나님께 향하는 기도의 발걸음을 내디디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는 늘 하나님의 손을 놓지 않고 기도할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 좋으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우리를 고무시키지 않는가? 우리의 기도소리가 지금은 작고 얕고 미세하고 약하지만 하나님 그 기도에 응답하심을 기대하자. 엘리야는 깊은 가뭄속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큰 비가 내릴 것을 ‘한 조각의 작은 구름’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고 한다. 기도하고 나가보니 하늘에는 가뭄의 흔적만이 가득해서 다시 기도했다. 다시 나와보니 하늘에 구름 한조각 없었다. 다시 기도했다. 다시 나와보니 한 조각의 구름!

 

 

(왕상 18:44)
일곱번째 이르러서는 저가 고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가로되 올라가 아합에게 고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왕상 18:45-왕상 18:46]
(45)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하여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46)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저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1) 데이비드 프라이어, 34.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1:3-9의 본문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비전-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이란 주제로 설교했는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비전은 현실의 미미하고 보잘 것 없고 사소한 것을 통해서도 역사하신다는 사실로 결론을 맺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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