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갈라디아서 1장 1-10절의 본문을 가지고 <다른 복음은 없나니>라는 주제로 설교한 포스팅입니다. 세상의 모든 분야에서 다른, 또 다른 1인자, 또 또 다른 1인자가 존재할 수 있겠지만, 복음은 다른 복음이 없다는 주제로 설교한 내용입니다.
변형은 무언가?transform 형태가 변하는 것을 말한다.
변질은 무언가? 속성이 변하는 것이 아닌가? 음식을 먹고 남기면 그 음식이 썩고 곰팡이가 피고 악취가 난다.
우리나라에서 종종 ‘다르다’는 말은 ‘틀린 것’이라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것이 정확한 의미는 아니다. ‘다른 것’은 ‘다른 것일 뿐’!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다른‘e{tero"’는 우리나라의 ‘다르다’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른 복음’은 ‘틀린 복음’이다. 다른 복음은 약간의 오류가 있지만 그런대로 쓸모 있는, 이를테면 새 차가 있고, 중고차가 있는데, 중고차는 자주 고장도 나고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런대로 쓸만한, 유용하다라고 했을 때는 적용된다. 그러나, 복음에 있어서는 ‘다른’은 ‘틀린’것이고, 그 끝이 굉장히 심각하다. 그것은 좀 있다 살펴보자.
자, 그렇다면 복음은 무엇인가? 다른 복음 보다 먼저 ‘복음’을 알아야 ‘다른 복음’이 무엇인지 알 것이 아닌가?
우리가 어떤 맛집을 이야기할 때 ‘원조’라는 말이 붙은 수 많은 음식점들이 있다. 그 맛집의 원조original를 맛보면 그 외의 짝퉁은 판결이 난다.
복음도 마찬가지이다.
복음의 핵심? 복음의 원조original는 무언가? 마틴 로이드 존스의 <복음의 핵심>이었던가? 복음의 핵심은 명확하고 분명하고 간결하고 확실하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3일만의 부활’이라는 이 역사적인 사실이다. 이 사실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바로 ‘Good News’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복음은 단순하고 명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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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오늘 8절에서 그 다른 복음의 끝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8절을 읽어보자.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 끝은 바로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말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에서 말하는 '다른 복음'은 '틀린 복음, 잘못된 복음'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그렇다면,
그 저주는 무엇인가?
지상 최대의 저주는 무엇인가?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인들을 위해 대신 받으신 십자가의 저주이다.
오래 전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기념한다고 하면서 한 청년이 주님의 십자가를 따라한다고 십자가를 진 사건인 뉴스에 보도된 적이 있다. 그 청년이 십자가를 졌다는 것과 예수님의 십자가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그 청년의 십자가는 그냥 무거운 십자가일 뿐이다. 그리고 그 청년이 설사 그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치더라도 그냥 무의미한 죽음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인류의 대표자로서, 신적 대표와 인간의 대표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자격의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죽음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인류의 죄,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인류의 죄로 인한 심판의 저주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희석시키거나 평가절하시키거나 무의미하게 하는 모든 것은 다른 복음인 것이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낮추신 사건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세계로 성육신하신 것도 겸손의 표현이지만, 더 나아가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의 죽음을 허락하신 것 자체가 최고의 겸손인 것이다. 십자가는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공간이다. 하나님의 이름만을 높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땅의 모든 영광을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오염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기독교 공동체에서 자주 '영광'이란 말을 사용한다. 그런데, 그 영광이 인간의 명예와 권력과 인기에 의해 오용될 소지가 많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천상의 세계에서 하나님 다음으로 N0.2의 권세를 누렸던 루시퍼 천사장이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에 의해 그는 사탄 마귀가 되었다. 천사의 master(?)였던 루시퍼조차도 그 유혹을 못 넘어섰다. 그런데, 인간은 더할 나위 없는 존재이다. 추락하는 것은 한 순간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되어야만 온전한 복음이 되는 것이지, 그 외 인간의 그 어떤 공로나 업적이나 행적이 추가되면 그건 다른 복음, 아니 복음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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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복음은 무엇인가?
사람을 좋게 하는 다른 복음!
미국의 대각성운동을 예전에 보았는데, 2차 대각성의 중심에는 찰스 피니가 있었다. 그가 이룬 업적과 성과는 놀라운 것이지만, 그의 생각에 대해서 비판의 여지가 분명히 존재한다.
피니는 부흥에 있어서 당시 칼빈주의자들이 하나님의 작용만을 주장하는 데 반해서 하나님과 진리를 전달하는 사람과 죄인 역시 작용자로 움직여야 함을 주장했다. 피니는 이제까지 교회가 부흥의 여부를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으로 생각해 왔기 때문에 부흥이 지속적으로 나타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부흥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전적으로 교회가 할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 바로 그가 믿는 진리였다. 그는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결정에 100% 달려 있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찰스 피니는 회심의 결정을 유도하기 위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하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다. 프래그머티즘이 오늘날 교회 속에 깊게 뿌리내리도록 한 사람 중의 일등 공신을 꼽는다면 그 자리는 단연 19세기 미국의 부흥사 찰스 피니이다. 2등과의 격차는 너무 커서 2등이 잘 보이지도 않는다.
모든 주의ism에는 장단점이 있고 오류가 있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찰스 피니가 이야기했던 이 모든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이었는가? 구원의 과정 속에 과연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과연 어떻게 배치되어야 하는가? 뭐 이런 문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오랫동안 이슈화된 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 바울이 갈라디아서 1장에서 말하는 '다른 복음'을 설명하면서 이런 대목도 한번 생각해본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공로로 이뤄진 부흥이나 역사가 아니면 당시에는 어떤 폭발적인 효과나 성과가 있다손 치더라도 반드시 후유증이 몰아칠 것이다. 19세기 부흥사 찰스 피니로 인한 후유증은 실용주의pragmatism이었다. 교회 안에 실용주의가 자리잡게 된 것이었다.
기독교세계 안에 다양한 분파와 교파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지만, 그래도 복음에 대한 정통성, 복음의 핵심이 공통분모이기 때문에 합일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단이 말하는 그들의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들의 복음은 '틀린 복음'이며,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 갈라디아서 1장 1-10절의 본문을 바탕으로 <다른 복음은 없나니>란 주제로 미완성된 내용을 포스팅해 봅니다. "복음은 복음일 뿐입니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이것은 확실한 진리이며 명제이며 thesis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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