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갈라디아서 4장 1-7절을 가지고 <아들의 명분과 성령의 능력>이란 주제로 한 설교를 포스팅해 보고자 합니다.
바울은 우리의 양자됨을 예증하기 위해서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은 한 소년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이 소년은 어릴 때는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4:2) 있기 때문에 4:1의 종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때가 되면 유산을 상속받고 종이 생각지도 못하는 신분과 특권을 누립니다. 상속자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어린 상속자는 14세까지는 보호자 아래에 있었고, 25세까지도 어느 정도의 후견인의 관리 아래 있게 됩니다. 청년기의 훈련을 다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독자적인 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4:3에 바울은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 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의 신자 대부분이 유대인으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는 모든 사람이 ‘율법 아래’ 있다는 뜻임에 틀림없습니다. 성경이나 모세를 들어보지 못했을지라도, 우리는 모두 ‘율법 아래’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을 듣거나 모세에 대해서 들었던 못 들었건 상관없이, 인류는 모두가 일정한 자기만의 기준을 맞추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율법을 지키려고 안달하기 때문입니다. 지키지 못하면 초조함과 부담과 불안이 사람의 마음을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신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 구도자의 열정이 있을 수 있지만 거기엔 자유가 없습니다. 석가모니가 해탈의 경지를 향해 나아갔지만, 그 또한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이기에 인생의 참 자유를 자력으로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단지 인간의 욕심으로 점철되어 결코 율법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노예근성, 종된 모습만이 엿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릴 찾아오시기 전에는 우리는 1-3절에서처럼 종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고,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서 종 노릇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의 절박한 곤경함을 해결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4-5절의 역사를 보여주셨습니다.
4-5절을 다같이 한 번 읽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때가 차매...이제 하나님께서 역사 안으로 개입하신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이 땅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에게 나게 하셨습니다. 여자에게 난 것은 죄많은 세상아래에서 태어난 것을 의미하며, 죄가 있다는 것은 그 죄를 분별할 기준인 율법아래 난 것을 또한 의미합니다. 마치 모든 인간이 그렇듯, 예수께서도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도록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유일하게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실 수 있습니다. 세상의 율법보다 더 크신 분이 율법 아래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율법 아래 들어갔다고 해서 율법아래에 완전히 거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율법 위에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율법을 다 성취하시고 그 율법을 능가하시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5절의 ‘속량하시고’는 3:13에 나오는 ‘속량’이라는 단어와 똑같습니다. 몸값을 다 치르고 그 주인에게서 노예를 풀어준다는 뜻입니다. 이 문맥에서 노예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바로 율법입니다. 예수께서는 율법에게 우리 몸값을 다 치르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다 충족시킬래야 시킬 수가 없어서 오히려 율법의 지배를 받거나 율법의 노예로 전락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을 완벽하게 다 채우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우리를 위해 ‘아들의 명분’을 얻어주십니다(4:5). 우리는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를 통해 ‘아들 자격’을 받습니다. 이것은 법적 용어입니다.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아들이 없는 부유한 사람이 종들 가운데 좀 괜찮은 애들을 골라 입양할 수 있었습니다. 선택받기만 하면, 그 종은 노예 신분을 벗어나서 아들이자 상속인으로서 모든 재정적인, 법률적인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출생상, 혈통상으로는 양아버지와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이제 아들이라는 법적 지위를 확보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삶의 특권입니다.
카이사르의 후견인이었던 옥타비누스 즉 아우구스투스 또한 양자였습니다. 로마는 양자제도가 굉장히 잘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무엇인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그 아들의 영”에 대해 말하는 6절은 ‘하나님이 보내신 그 아들’(4절)과 병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오신 아들은 우리가 법적으로 자녀의 자격을 확보하도록 하십니다. 그에 반해서 성령은 그것을 실제로 경험하게 하십니다.
성령의 일은 아들의 일과 같지 않습니다. 아들의 일은 우리가 느끼건 못 느끼건 상관없이 객관적인 법적인 상태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일은 이와 전혀 다릅니다. 성령은 파격적으로 주관적인 경험을 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표지와 특징들은 무엇일까요?
첫째, 성령은 우리가 ‘압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십니다. 헬라어 ‘크라존’은 ‘비명에 가까운 큰 울부짖음’이라는 뜻의 아주 강한 어휘입니다. 깊고 심오한 열정과 감정을 드러내줍니다. 성령이 그렇게 외치게, 부르짖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은 인생이지만,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는 양자의 신분으로 담대히, 아주 강력하게 ‘압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는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단순히 한번 부르짖는 일회성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생활을 가리킵니다. ‘부르게 하셨느니라’ 아이가 문제가 생기면 저도 모르는 새 아빠를 힘차게 부릅니다. Ex) 저희집 애들이 어릴 적에 대변 보고 나서는 화장실에서 제일 크게 ‘아빠’를 외칩니다. 부르면 반응이 오는 것이 부자관계가 아니던가요!
성령의 일을 경험한 그리스도인 역시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는 이 놀라운 현실을 감지합니다. 아빠, 즉 압빠는 ‘아빠’라는 뜻의 유아어인데, 사랑과 용납을 확인하는 용도로 쓰였습니다. 압빠는 아람어인데, 왜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친숙한 헬라어가 아닌 아람어 압빠를 사용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표현으로 아버지와 대화하셨기 때문입니다.
EX) 한국의 ‘주여 삼창’이 너무나 외국인들에겐 신령해서 자기 나라 영어로 ‘LORD’라고 외치면 그 맛이 떨어지는 것을 느끼곤, 다시 한국의 '주여' 삼창을 외치자 그 원래 맛이 났다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압빠! 이 단어는 전능하신 여호와를 부르는 말로는 도를 넘는 친숙한 표현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바울이 이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지신 권한을 우리가 법적으로 물려받았다고 거침없이 주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예수님처럼, 아름답고 담대하며 충실한 자처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분의 것이 곧 우리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이라면 7절에 당연히 유업을 받는 자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서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를 주님께서 가져가셨습니다. 우린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근데 그게 끝이 아니라 ‘양자의 명분’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속죄는 받았지만, 하나님의 호의와 보상을 받고 이제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선한 삶을 사는 것은 아들의 특권이기도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양자라는 신분과 특혜를 받았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여 맘껏 ‘압빠’를 부르짖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아무리 ‘압빠’를 외친다고 해도 아빠는 기뻐할 것입니다. 아빠는 아이의 필요를 위해 존재하는 존재이니깐요.
성도 여러분, 아들이 하신 일을 알아가는 시간이 우리에게 더 필요합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알아가는, 기도의 시간, 성경을 보고 묵상하는 시간을 더 가지시길 바랍니다. 아들이 아들이 된 것조차 모르고 망각하고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또한 아버지께 더욱 자발적으로 온종일 ‘부르짖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매순간 하나님께 아뢰어야 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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