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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2장1-10절 강해, 복음 만을 생각하는 사역

by Message.K 2022. 10. 20.

오늘은 신약성경 갈라디아서 2:1-10의 본문을 가지고 <복음 만을 생각하는 사역>이란 주제로 설교한 내용을 포스팅하고자 합니다. 바울이 사도가 되게 한 그 복음, 그 복음 만을 중심으로 사역하고 생각하는 바울을 볼 수 있겠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두 번째로 방문한 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예루살렘에 올라간 바울은 그가 전한 복음이 예루살렘 사도들이 전한 복음과 다르지 않음을 확증한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는 대상이 다를 뿐임을 확인하고 기쁘게 교제를 나눈다.

 

 

 

 바울의 삶과 사역이 재난을 맞은 원인은 거짓 교사들의 음험한 활동 때문이었다. 그들은 바울이 어디를 가든 그를 미행했다. 그가 어떤 지역에 복음을 심자마자, 거짓 교사들은 그 복음을 왜곡함으로써 교회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들은 또한 바울의 메시지의 신뢰성을 떨어뜨리기 위해 그 복음의 speaker인 바울의 권위에 도전했다.

 

 

 

바울을 비방하는 자들의 후손이 오늘날의 교회에도 대단히 많기 때문에, 이 문제는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하다. 복음을 말하는 화자speaker에 대해서 신뢰하지 못한다면 은혜 받기는 힘들다. 스피커에 대해 불평과 불만과 원망이 가득한 청중은 결코 은혜를 누릴 수 없고 삶의 회복도, 평강의 회복도, 영적 부흥과 성장도 기대할 수 없다. 관심과 정성이 사라진, 수분을 섭취하지 못해 메말라버린 화초처럼 우리의 영혼도 그렇게 될 것이다. 복음을 말하는 화자에 대한 권위와 믿음은 정말 중요하다.

 

 

 

하지만 그 당시 거짓 교사들은 우리가 바울의 글에 그리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가르치도록 독특하게 부르심받고, 위임받고, 권위를 부여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는 사실을 잊어버렸거나 부인한다. 그들은 자신의 복음을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았다는 바울의 주장(1:11,12)을 무시한다. 결국 복음이 2개라는 말로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바울의 복음 Vs 예루살렘의 복음(베드로의 복음, 나머지 사도들의 복음)

 

 

- 바울은 소수이고, 반면에 베드로와 나머지 사도들이 대다수인 가운데  바울의 의견에 반대한다면, 민주주의의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분명 우리는 바울을 따를 수 없다-이것은 유대주의자들의 허울 좋은 논지였다. 그들은 사도라는 영적 지도자의 집단을 깨뜨리려 했다. 그들은 사도들이 서로 모순된 발언을 하고 있다고 공공연히 단언했던 것이다. ‘베드로에게 빼앗아 바울에게 주는’것이 아니라 바울을 괴롭히기 위해 베드로를 높이는 책략을 이용한 것에 불과하다.

 

 

 

 

 

바울은 1장에서 자신의 복음이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 것임을 밝혔다. 2장 전반부에서 자신의 복음이 다른 사도들의 복음과 완전히 똑같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울은 자신의 복음이 다른 사도들과 독립된 것이었음을 입증하기 위해, 그는 자신이 14년 동안 예루살렘을 단 한 번 방문했으며, 15일만 머물렀음을 강조했다. 그렇지만 자신의 복음이 그들의 것과 같은 것임을 입증하기 위해, 이제는 자신이 예루살렘을 정식으로 방문했을 때 자신의 복음이 그들의 승인을 받았음을 강조한다. 이 방문에는 두 가지 중요한 측면이 있는데, 그것은 그의 동반자들과 그이 메시지다.

 

 

 

 

첫째, 그의 동반자들이다. 이들은 바나바와 디도였다. 주목할 만한 것은? 바나바(유대인: 그가 안디옥에서 그리고 후에는 첫 번째 선교 여행에서 바울의 이방인 선교에 함께 관여하긴 했지만), 디도(헬라인)! 즉 디도는 할례 받지 않은 헬라인으로, 그 자신이 당시 논란이 되고 유대주의자들이 이의를 제기하던 바로 그 이방인 선교의 산물이었다.

 

 

둘째, 그의 복음이다. 바울이 이방인에게 전한 복음을 이제 다른 사도들 앞에 제시한다.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그는 ‘계시를 따라 올라 갔다’(2절)고 말한다. 바울은 자신의 복음에 대해 조금이라도 의심을 했거나 염려가 되어서 다른 예루살렘 사도들이 확인을 필요로 한 것이 아니었다고 확신할 수 있다. 바울은 14년간 그것을 전해왔는데, 지금 와서 검증받고 검사받고 확증받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오히려 과거와 현재에 자신이 행하는 사역이 유대주의자들에 의해 무익하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예루살렘 사도들 앞에서 자신의 복음을 제시한 것은 자신의 확신을 강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대주의자들의 영향력을 타도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이 그의 방문이 지닌 두 가지 중대한 특징이었다. 그는 한 명의 이방인 동반자와 함께 이방인을 위한 복음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갔다. 이 때는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그 이후 기독교 교회의 역사에 큰 위험과 큰 가능성을 가져다줄 수 있는 때였다.

 

 -바울의 이방인 동반자와 이방인 선교!
       -디도를 형제로 받아들이느냐? 할례를 받게 해야 하느냐? 거부할 것이냐?
       -바울의 복음을 승인할 것이냐?

  

 

바울의 이방인 선교 정책에 대해 예루살렘 교회지도자들과 협력하는 일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문제에 얽매이지 않았다. 바울은 사람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뜻이 더 중요했다. 그는 어찌 혼자서 14년이라는 시간동안 모질게(?) 사역할 수 있었는가? 자신의 신학적인 연구와 정통성이 복음과 놀랍게 매치되는 지적 통찰 위에 하나님을 체험한 다메섹상에서의 영적 회심이 원동력이었다.

 

 

 

 

1. 바울의 동반자(3-5절)

  바울이 디도를 데리고 간 것 자체가 대담한 것! 이방인을 예루살렘 교회 본부로 데리고 와 소개하는 것은 의도적인 도발 행위로 해석될 수 있다. 분명 도발적인 행위! 바울의 동기는 어떻든지 간에 복음의 진리를 확증하기 위한 것! 이 진리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대등하게 하나님께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전혀 차별됨이 없어 교회에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1)

 

 

바울은 문제는 그저 단지 할례와 비할례, 이방인의 풍습과 유대인의 풍습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복음의 진리에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문제, 곧 그리스도인의 자유 대 속박의 문제였다. 우리의 자유는 오직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에 의지한 은혜이지, 율법의 행위와 법규에 대한 순종 여부에 따라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자유인을 다시 속박하는 일! 이 원리에 대해 디도는 시험 사례였다. 그가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이었던 것은 사실. 하지만 그는 회심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졌으며, 바울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믿었다. 그의 구원을 위해 더 이상 어떤 것도 필요 없었다. 예루살렘 공의회는 후에 그 사실을 확증해준다(행 15장을 보라).

 

 

 5절...‘단 한 순간도 나는 그들의 지시에 복종하지 않았다’(NEB)

 

 

-‘거짓 형제들, 가짜 그리스도인들(sham Christians-NEB), 모조 그리스도인들(pseudo-Christians: 필립스)’은 유대주의자들이었고, 이들은 ‘침입자, 난입자’들이었다. ‘우리 모임에 살금살금 들어온’이들! 그들의 표어는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행 15:1)

바울의 동기: “복음의 진리”를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다. 타협 No~

 

 

 

우리가 복음의 진리를 감당하는 데 있어 방해요소는 언제나 있을 것이다. 복음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서 분명히 치루어야 할 대가가 있을 것이다. 직장생활 가운데 세상문화의 싸움, 공격과 유혹이 있다. 인생에서 장애물 없는 성공은 없다. 사역현장도 마찬가지! 우리는 그 장벽을 뚫고 나가야 한다. 이 때 필요한 것은 확고한 소명의식과 목적의식이다.

 

 

 

소명? 소명이란 무엇인가?-오스 기니스의 말이다.

 

소명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의 존재 전체, 우리의 행위 전체, 우리의 소유 전체가 특별한 헌신과 역동성으로 그분의 소환에 응답하여 그분을 섬기는 데 투자된다는 진리이다. 이 진리는 세계 역사에서 위대한 ‘도약들’의 원동력이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시내 산에서의 유대 민족의 형성, 갈릴리에서의 기독교 운동의 탄생, 16세기의 종교 개혁과 그로 인한 근대 세계의 발흥 등이다. 따라서 오늘날 소명을 재발견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하며, 그것이 인생의 목적을 추구하는 수많은 현대인들의 열망을 충족시키는 데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다는 점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인물이 되어서 안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아는 첫걸음에 불과하다. 인생의 목적에 대한 잘못된 지식에서 벗어나는 것은 참된 목적으로 연결될 때 의미가 있는 법이다.

 

 

 

 

2. 바울의 복음(6-9a)

1:17 그들을 ‘자신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로 인정하였으며, 9절에서 그들이 그에게 ‘친교의 악수’를 했다고 말한다.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을 무시하고 의도적으로 예루살렘의 사도들을 추켜세우며 과장했다. 아마도 거짓 형제들은 자신들이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이 지닌 더 우월한 자격조건이라고 여겼던 것에 주의를 집중했을 것이다. 그것은 야고보가 주님의 동생이었다는 것, 베드로와 요한이 세 명의 측근 그룹에 속했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이들은 예수님을 육체로 더 많이 알았고 짠밥도 많았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못했다. 그러나 바울은 ‘본래 어떤 이들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라고 말한다. 바울의 말은 그들의 사도적 권위를 부인하는 것도, 그들을 경멸하는 표시도 아니다. 그저 사도라는 그들의 직무는 받아들이지만, 유대주의자들이 부풀린 그들의 인격에 위압당하지는 않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바울의 확신!

 

 

 

 

 

 

3. 협의의 결과(9b, 10)

바울이 그들에게 제시했던 복음에 어떤 가감이 있었나?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6절

 

 

그들의 주장: “당신의 복음은 나름대로는 괜챦소. 하지만 충분히 완전하지는 않소. 사실상 그들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다. 의미심장하게도, 바울은 자신이 사도들 앞에 지시한 복음을 ‘내가 전파하는 복음’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오늘날 전하는 복음은 내가 바꾼 것 하나 없는 복음, 그들을 만나기 전 전하던 복음이 바로 이 복음이다. 이러한 협의의 결과는 ‘친교의 악수’(9절)였다.

 

 

  사도들이 깨달은 것은 하나님이 베드로와 바울 둘 다를 통해 은혜 안에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이었다(8,9절). 그래서 그들은 바울에게 친교의 악수를 했다. ‘바나바와 바울을 동역자로 받아들이고 그에 대해 악수했다’(NEB)는 의미이다.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에게로, 자신은 할례자에게로’(9절) 가야 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함께하는 사역!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 곧 부르심을 입은 자들을 서로 연결시켜 주신다. 그래서 함께 하나님의 일을 완성하게 하신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같은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바울이 이방인을 위한 사도라는 생뚱맞은 사역을 인정했다. 하나님께 받은 사명에는 다양성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때때로 갈등도 겼는다. 중요한 것은 하나됨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듯이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혼자 힘으로 이룰 수 없는 일이 많다. 다른 점이 있을지라도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이라면 서로를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또한 같은 마음을 품은 좋은 동역자를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초기 기독교는 유대인 선교와 이방인 선교를 지혜롭게 분담했다. 바울은 이방인 선교 사명을 감당하기에 적합한 사도였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은사와 환경에 따라 사역을 맡기신다. 또 연합하여 큰 일을 성취하게 하신다. 모두가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에 쓰임 받기를 바란다.

 

 

 

 

그들은 또한 바울과 바나바가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기를 원하다고 덧붙였다. 그들은 유대의 매우 가난한 교회로, 바울은 그것이야말로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10절) 왔던 일이라고 말한다.

구제를 히브리어로는 ‘체다가’라고 한다. 이 말이 ‘구제’를 뜻하는 전문 용어로 처음 사용된 것은 랍비 문헌이나 탈무드에서이다. 이 말의 어원은 “너는 마땅히 공의만을 따르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리라”(신 16:20)라는 말씀에 나오는‘공의’라는 단어에서 비롯된다. ‘체다가’라는 말은 원래 ‘의’또는 ‘정의, 공의’를 뜻한다. 구제와는 거리가 있는 용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체다가라는 용어를 구제라는 용어로 사용하는 근본적인 이유로, 구제가 공의의 차원에서 다뤄야 할 의무라고 믿기 때문이다.

바울은 구제를 율법의 행위로 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베푸는 성령의 열매로서의 선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EX) 션과 정혜영의 결혼기념일에 하루에 만원씩 모아둔 365만원을 기부하는 구제활동!-하나님께서 그들의 선행에 기뻐하시면서 칭찬하심을 그들을 높이시는 현재의 상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바울와 바나바가 예루살렘에 있었던 목적은 주로 기근 구제를 위함이었다. 그 후에도 수년간 연보 조직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을 계속 돌봤다. 그는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부유한 이방인 교회들에게 유대의 가난한 교회들을 지원하라고 촉구했으며, 그들의 연보를 기독교 교회의 교제 내에서의 유대인과 이방인의 결속을 촉진하고 입증하는 수단으로 여겼다.

 

 

 

 

 

결론

a. 복음의 진리는 하나이며 변치 않는다.

어떤 지역에서는‘바울’ 복음,‘베드로’복음,‘요한’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유행! 마치 그 복음들이 서로 상당히 다르다는 듯이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주의’에 대해 말한다. 마치 다른 상표, 브랜드인 것처럼....바울과 야고보가 서로 모순된 것처럼 그들을 대조한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잘못!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신약에서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분명 그들의 스타일에는 차이가 있다. 그들이 영감을 받았다고 해서 개성까지 말살하진 않는다. 또한 강조점에도 차이가 있다. ex) 바울-> 율법주의자들, 야고보-->율법폐기론자들.

 

 

 바울은 이 본문에서 자신이 예루살렘 사도들의 의견에 완전히 동의하며 그들도 자신의 의견에 완전히 동의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애를 쓴다. 그는 고린도전서 15:11에서 동일한 점을 주장-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단 하나의 신약 복음, 단 하나의 기독교가 있다. 서너 개의 서로 다른 합법적 대안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그렇다. 신약에 단 하나의 복음이 있다면, 교회에도 단 하나의 복음이 있다. 복음은 세월이 달라지면서 변하지 않았다. 젊은 사람이건, 나이든 사람이건, 동서양, 유대인, 이방인, 교양, 비교양, 과학자, 비과학자, 바울과 베드로, 위임받은 것은 서로 달랐지만 공통의 메시지를 소유하고 있다.

 

 

 

 

  

b. 복음의 진리는 유지되어야 한다.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에게 저항하기로 결심한다.

부드러움과 강함의 결합은 루터가 잘 표현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것이 모든 것의 결론이 되어야 한다. 곧 우리의 재산, 우리의 명성, 우리의 생명,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빼앗기더라도, 복음, 우리의 믿음,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 빼앗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자신을 낮추고 굴복하는 겸손함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아니 오히려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으려면, 그리스도인들은 이 점에서 자부심을 갖고 인정을 베풀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를 도우신다면, 나의 이마는 모든 사람의 이마보다 더 단단할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금언에 따라 이 칭호를 받을 것이다. ‘세도 눌리’(cedo nulli), 곧 나는 아무에게도 양보하지 않는다. 그렇다. 나는 심지어 전심을 다해 이 점에서 반역적이고 완고한 것처럼 보인다 해도 기쁘다. 그리고 여기에서 나는 언제나 완강하고 단호하며, 영원히 그럴 것이며, 그 누구에게도 한 치도 양보하지 않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사랑은 양보한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음은 양보하지 않는다..”.

 

 

  “이제 믿음에 관해서는, 우리는 무적의 존재가 되어야 하며 할 수 있으면 철강석보다 더 단단해야 한다. 하지만 감동적인 사랑에 관해서는, 부드러워야 하며,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나 잎사귀보다 더 유연해야 하고, 모든 것에 굽힐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1) 디모데: 할례 받음, 이유: 모친이 유대인이었기에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 방해 요소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cf, 디도는 양친이 이방인이었다.

복음전파에 있어 융통성이 필요하다.

 

 

 

 

오늘은 신약성경 갈라디아서 2장 1-10절의 본문을 가지고 <복음만을 생각하는 사역>이란 주제로 설교한 내용을 공유해 봅니다. 바울과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같은 복음이며 그 복음만을 위해 헌신한 사도 바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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