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갈라디아서 1장 중에 18-24절의 본문을 가지고 <영광 받으신 하나님>이란 주제로 설교한 내용을 포스팅해 봅니다. 바울의 복음의 기원이 독창적이며 신적 기원을 가졌다는 것, 그 이유는 14년동안 예루살렘 사도와 접촉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한 사람의 변화
영화 ‘블랙’을 보면 한 사람이 어떻게 변해가는 지를 보여준다.
소리는 침묵이 되고, 빛은 어둠이 되던 시절,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한 소녀의 희망의 메시지! 세상이 "블랙" 자체인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8살 소녀 미셸에게 끊임없는 사랑과 노력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그녀의 꿈을 펼칠 수 있게해 준 사하이 선생님.. 그러나 알츠하이머로 기억상실증에 걸려 그녀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된 사하이 선생에게 이제 미셸 자신이 기적을 보여주려하는데..1)
이 내용은 영화 <블랙> 줄거리를 가져온 것이다.
영화제목이 왜 블랙인가 했는데
여자주인공. 미셸이라는 여덟살 소녀가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처지라..온세상이 까맣게 보여서 블랙이다. 이 영화는 미셸의 일상을 쫓아가며 시작된다. 소재는 헬렌켈러가 생각나서 뻔한 내용과 결말에 이르게 되겠지만 결과를 알더라도 감동적이건 감동적인 거니까..소녀를 치료하는 사하이 선생님을 만나면서 손으로 마구 집어먹던, 사람의 말은 듣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하던 미셸이 변하게 된다. 그러나, 사하이 선생님이 후에 알츠하이머 병에 걸리게된다. 기적을 이룬 미셸은 사하이 나이가 든 사하이 선생님을 만나러 간다.
미셸의 나이 마흔살...
미셸의 어릴적 듣지도, 보지도, 말도 하지 못하던 미셸이..기적을 일으켜 사하이 선생님을 만나러 갔는데 예전과는 반대로 사하이 선생님이 모든 기억을 잃고 재회한다. 이 장면, 말하지않아도 감동이 물씬!!
여름이라고 해서 공포영화, 물이 나오는 영화만 대박이 나는것이 아니다. 영화 블랙의 감동을 기대할만 할 것 같다. 미셸과 사하이가 주는 감동...
한 사람, 사하이 선생의 어릴 적 경험에 의해 미셀을 변화시키고자 했던 그 열정이 결국은 한 여자의 인생을 변화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조금 다르지만, 바울은 변화시킨 것은 무엇이었는가?
바로 복음이었다. 복음으로 인해, 그리스도와의 다메섹에서의 만남으로 인해 바울은 변화되었다. 그 변화는 심각한 것이었다. 바울의 회심은 기독교의 판을 완전히 뒤집어놓는, 새롭게 획을 그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 이후에 바울이 없었다면 기독교의 틀을 짜는 것에 여러 가지로 애로사항이 있지 않았을까?-개인적인 생각!
바울은 다메섹 사건 후, 3년 만에 베드로를 만나고자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이 일은 아마도 사도행전 9:26에 나오는 때일 것이다. 그가 광주리에 담겨 성벽을 타고 내려와 다메섹에서 몰래 빠져나간 후의 일이다. 바울은 이 예루살렘 방문에 대해 상당히 공개적으로 말한다. 하지만 그 일을 가볍게 여긴다. 그 일은 거짓 교사들이 명백히 주장하던 것처럼 그렇게 중요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 방문의 몇 가지 특징이 언급되어 있다.
한 가지는 그 일이 ‘삼년 만에’(18절)에 이뤄졌다는 것이다. 그는 베드로와 야고보만을 만났다. 바울은 베드로와 15일 동안 있었지만 야고보 사도 외에 다른 사도는 만나지 못했다고 밝힌다. 여기에 사용된 동사 ‘보려고’(AV) 혹은 ‘방문하려고’(RSV)의 “심방(히스토레오: 영어의 history(역사)의 어원이 되는 말): 상대방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얻기 위해 방문하여 교제를 나누는 것을 말한다. 관광의 의미도 있긴 하지만, ‘어떤 사람을 알기 위한 목적으로 방문하다’의 의미다. 그렇다고 해서 이 방문이 바울의 사도권이나 복음에 대한 새로운 어떤 통찰이나 관점을 구한 것은 아니었다고 본다.
루터는 바울이 이 사도들에게 간 것은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진하여 간 것이었다’라고 말한다. 바울은 또한 야고보도 만났다. 그는 여기에서 다른 사도들은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들은 그 곳에 없었거나, 너무 바빴거나, 아니면 심지어 그를 두려워했을 지도 모른다(참고, 행 9:262))3)
이방인에 대한 사도 바울, 유대인에 대한 사도 베드로, 대표적인 두 사도가 서로 알게 되었고 앞으로 할 일에 대해서 격려했다.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이 방문이 사적인 방문이며 어떤 인간적인 권위의 지지를 얻기 위한 방문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는 일은 중요하다.4) 그가 만약 어떤 인간적인 권위, 복음의 권위, 메시지의 권위를 덧입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석사학위를 받은 학생이 박사학위를 아주 유명한 프린스턴, 예일이나 옥스퍼드나 캠브리지에 가서 따는 것도 귀중한 학문적인 권위를 입는 것일 수 있다. 바울이 자신의 메시지, 복음, 사도권의 권위에 대한 qualify를 얻기 위해서 베드로학교, 야고보학교, 예수님의 제자학교를 간 것이 아니었다. 그 학교를 다니기엔 15일은 너무 짧았다. 단지 15일이란 시간동안 하나님의 모든 뜻을 다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방문목적이 그런 목적이었다면 어쩌면 15일이란 시간은 너무 짧을 수도 있다?
바울이 이렇게 자세히 밝히는 이유는 자신의 사역이 하나님 앞에 거짓이 없는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기 위함이다(20절)5) 당시 거짓 선지자들이 이야기한 바울의 복음이 예루살렘 사도들로부터 복음을 받았다는 주장은 어의가 없는 대목이다.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의 사도성에 대해 많은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도 자신을 인정하였음을 분명하게 알려 줌으로써, 복음이 변질되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유대에 있는 교회들이 바울을 잘 알지 못하였지만 그의 사역을 통해 영광을 돌렸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서, 자신의 사역이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역임을 보여 준다.
갈라디아서 1: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바울이 사도로 임명된 처음 14년 동안6) 예루살렘 사도들과 접촉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그의 메시지가 신적 기원을 지녔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많은 사람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대단한 지성에 감탄하지만, 그의 가르침이 가혹하고, 메마르고, 복잡하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것을 거부한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순전한 기독교를 훼손한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약 1세기 전에는 예수님과 바울 사이를 이간하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이렇게 할 수 없다고 인식된다. 바울 신학의 모든 근거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간 신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있다.
갈라디아서의 기술 목적은 첫째, 의롭게 되기 위해서 유대인의 율법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거짓 교사들을 대적하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변증하기 위해서이다. 둘째, 바울 자신의 사도권의 정당성을 밝히고 자신이 전한 복음을 확증하기 위해서다.
바울이 13절에서 24절까지에서 말하는 것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회심하기 전에 대단히 열심이었다는 것, 그의 회심에서 하나님이 주도권을 쥐셨다는 것, 그 후에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거의 완전히 고립되었다는 것 등을 다 합하면 그의 메시지가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이러한 역사적, 환경적 증거는 반박할 수가 없었다. 사도는 엄숙한 단언으로 그것을 확증하고 보증할 수 있다.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20절)
우리에게 이러한 확신이 있는지를 묻고 싶다. 바울은 너무나도 명료한 체험을 하였다. 그 체험은 그의 신학을 뒤집어엎었고 다시금 그의 앎과 삶의 균형을 잡아주었던 것이다. 솔직히 보통 사람 같으면 자신이 예전에 저지른 잘못과 일들 때문에 얼굴을 들지 못하고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왜곡되고 굴절된 신학과 삶과 죄악된 행보를 초월하는 복음의 능력을 말미암아 도저히 조용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죄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 컸다. 자신의 앎보다 하나님의 자비가 더 원대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우리가 바울보다 더 심각한 죄를 저지른 적이 있는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적어도 사람을 죽인 적이 없기 때문에 없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죄보다 더 크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죄악과 허물과 연약함 보다 그것을 덮고도 남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롬 8:38-39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바울의 확신이 우리의 확신이기를 소망한다. 바울의 복음의 확신을 소유하기를 원한다.
아울러 갈라디아서의 신학은 사람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의롭게 된다고 말한다. 또한 사람은 율법적인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은혜와 능력으로 성화된다고 말한다.
바울의 거룩한 사역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게 했다. 미셀의 변화, 그리고 8년 만에 딴 졸업장은 사하이 선생이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장면이었고, 제자의 변화는 스승의 기쁨이었고 영광이었다. 스승 ‘티’는 미셀의 변화를 통해 영광을 받았다. 바울의 변화를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셨다. 오늘날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은 세상으로 하여금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 받도록 하는 것이다. 이 일이 속히 이루어져야 하겠다.
오늘날 청년들의 직장 속에서의 그리스도인들과 대학 캠퍼스 속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이 회복해야 할 것은 우리의 삶과 변화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진정한 문제는 바로 ‘삶의 변화’의 문제이다. ‘회심’의 문제이다. 여기서 말하는 회심은 단순하고 일시적인 회심, 더 나아가서 점진적인 회심을 말한다. 칼빈이 말하였던 것처럼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져야 한다’는 말처럼 그리스도인의 회심은 날마다 계속되어져야 할, 매일의 개혁의 문제인 것이다.
회심!!!
주
1) 네이버영화
2)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3) 존 스토트, BST 에베소서강해, 40-41.
4) 프랭크 게벨라인 편, 엑스포지터스성경연구주해, 597.
5) 프리셉트성경연구원 편, 갈라디아서, 26.
본 갈라디아서에서는 역사적 사건 하나하나가 바울의 적대자들이 제기한 특정한 주장에 대해 대답하기 위해 언급된 것으로 보이지, 그 이전의 시기에 있었던 사건들에 대한 완전한 연대를 제공해 주기 위한 것 같지는 않다고 하였다.
6) 2:1의 14년은 아마도 그가 회심한 후 14년을 의미할 것이다. 바울은 예루살렘을 재방문하여 다른 사도들과 더욱 장시간에 걸쳐 협의를 했다. 그 무렵에는 그의 복음이 완전히 발전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회심나고 나서 이같이 협의하기까지 14년이라는 기간 동안 예루살렘을 단 한 번 잠깐 방문했을 뿐이다. 나머지 시간은 멀리 아라비아와 수리아와 길리기아에서 보냈다. 그의 알리바이들은 그의 복음이 독자적인 것임을 입증해준다.
신약성경 갈라디아서1장 중에 18-24절의 본문을 가지고 <영광을 받으신 하나님>이란 주제로 설교한 내용을 공유했습니다. 바울의 회심, 바울의 복음, 바울 복음의 기원, 그리고 바울의 변화의 배후에는 오직 영광받으신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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