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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갈라디아서

갈 1장 11-17절 강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by Message.K 2022. 10. 6.

신약성경 갈라디아서 1장 강해설교중에 11-17절까지의 본문강해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라는 주제로 설교한 내용인데, 갈라디아서가 쉽지 않은 본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대학교 때 처음으로 논문을 쓰는 방법을 익히게 되었다. 그 때 들은 말은 아무리 훌륭하고 탁월한 논문이라고 할지라도, 그 논문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각주, 참고문헌)가 없으면 그 논문은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 학문적인 성취는 단순히 자기가 만들어낸 독창적인 것이라고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어떤 주제에 대해 글을 적는다면, 과거에 그 주제에 어떤 글이 쓰여졌는지, 어떤 자료가 있는지 먼저 살펴보고 그 자료들을 토대로 글을 적어야 그 논문의 권위, 즉 학문적 성취가 인정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을 나요섭 박사는‘자신의 전반적인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한 바울의 주장’(1:6-2:14)이라고 나누었다. 이를테면, 바울의 자전적인 고백, 신앙간증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의 이 자전적 고백이 인정을 받고 바울의 행위와 삶이 어떤 권위를 덧입기 위해선 확증이 필요한데, 오늘 바울은 그것을 사람의 학문, 학문적인 성과와 논문이나 자료들을 수집하여 자신이 믿고 있는 11절의 복음과 자신의 사도권의 권위를 인정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 복음, 자신의 사도권, 그리고 모든 것은 그러한 인간적인 것들로 기원되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다. 11절-12절에 보면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라고 못 박고 있다. 바울이 받았던 복음, 전해 받았던, 그리고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그 기원이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제가 목사논문 주제로 18-19세기 미국 대부흥운동의 성과와 문제점에 대해 기술했다. 거기에 보면 18세기, 19세기 미국 대부흥운동은 크게 3차로 나눌 수 있는데, 그 가운데 각각 중요한 핵심인물이 크게

 

1차: 조나단 에드워즈,

2차: 찰스 피니,

3차: 드와이트 무디

 

가 있다.

 

그런데, 우리가 역사를 보면 파악할 수 있듯이 어떤 운동, 어떤 사건이 그냥 한 사람에 의해 주도된 것이 아니라 얼키고 설켜서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당연하다. 조나단 에드워즈 전부터 프렐링휴이젠 등과 같은 인물에 의해 이미 부흥의 전조, 조짐warming up은 있었다. 조나단 에드워즈 이후로 또 다른 인물들이 활동하다가 찰스 피니에 의해 한번 더 부흥운동이 확산되었다. 오늘날의 부흥회, 심령대부흥회는 찰스 피니에서 온 것이다, 피니는 음악적인 감수성도 있어서 찬양인도자를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이런 경향이, 3차에 와서는 음악인인 생키(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에도 그의 곡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를 데리고 다니면서 부흥회를 인도했던 드와이트 무디로 이어지게 되는 것을 본다. 1차, 2차, 3차 이 시기와 인물과 영향력을 칼로 자를 수 있을 만큼 분리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 영향을 받고 그러면서 미국대각성운동은 주도된 것이다. 이것은 ‘사람’에 의한 것이었다. 성령의 강력한 영향력이 전제되긴 했지만 분명 사람이 주도한 것이다. 이런 부흥회, 운동movement, 사건, 변화는 가끔 사람의 기원을 가지고 있을 수는 있다.

 

 

 

 

 

 

 그렇다면, 진정한 우리의 구원, 우리의 복음의 기원은 사람의 기원을 가지고 있는가?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복음의 기원은 인간적인 기원, 사람의 기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근원, 신적인 기원을 담고 있다. 특별히 바울이 11절에서 ‘내가 전한 복음’이라고 이야기하면서 갈라디아 교회에서 자신이 이전에 전했던 복음과 그 후에 다른 사람들이 들어와서 전한 복음과의 차별성을 두고 있다. 이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과 이후에 다른 이들이 전한 복음과 다른 게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처음에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울 때는 복음의 출처를 설명할 필요도 없었고, 복음을 듣던 그들도 출처에 대해 문의할 필요도 없었고, 바울의 사도권과 복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단적인 가르침, 6절에 나오는 다른 복음,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율법의 열심을 내어야, 할례를 받고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이단적인 가르침이 등장했다. 듣기에는 굉장히 합리적이고, 원초적인 복음보다 더 귀가 솔깃하고 과학적인 복음! 솔직히 원초적인 복음은 너무 신비적인, Mystery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사람들마다 다들 인정받기를 원하는 욕구가 있다. 우리의 친구들로부터, 가족들로부터, 그리고 누구보다도 하나님으로부터!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매력적이며, 멋있고, 부유하며, 센스 있고, 권력이 있을 때에만(F4, 날씬한 각선미, 탄탄한 복근, S라인 등) 우리를 인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들에게 더 좋은 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또 우리의 결점을 감추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이어져,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서는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느낀다. 우리가 더욱 열심히 봉사하고, 더 선하게 살며,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전도할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께 인정받게 된다고 느낀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이러한 우리의 생각에 도전을 하고 있다. 바울은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정을 얻고자 애쓰는 것이 헛된 것임을 보여준다. 바울의 메시지는 죄의식 가운데 사는 우리들을 해방시키며 자유롭게 해준다. 우리는 새롭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게 해 줄 것이며, 그 분을 섬길 수 있는 새로운 힘을 되찾게 될 것이다.

 

 

 

 

 

  갈라디아서는 주후 48-49년 사이에 바울에 의해 기록. 이것은 갈라디아 지방의 로마 속주였던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더라, 더베 교회에 보낸 편지로 추정된다. 바울과 바나바는 첫 번째 전도 여행 때 이들 도시를 방문했는데, 그들의 환영은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행 13-14장에서 그들이 안디옥에서 쫓겨나온 일, 이고니온에서 도망 나온 일,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죽게 될 뻔한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의 이런 시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였고 교회는 형성되었다.

 

  그러나 실제적인 위협은 오히려 그 후에 일어났다. 몇몇 사람들이 그들이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가지고 교회에 잠입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주장은,

 

 

“바울은 복음의 중요한 분을 빠뜨렸다.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모세의 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행 15:1)

 

(행 15:1)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그들의 주장은 강한 인상을 주었고, 그들의 종교적 열심 또한 부인할 수 없을 만큼 대단했다. 바울이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미 그들에 의해 거의 설득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곧바로 이 서신을 보내어 각 교회에서 읽도록 했다. 수세기가 지난 후에도 갈라디아서는 여전히 바울이 가졌던 노여움의 열기를 발산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설교자들은 위선자들이었으며 그들의 복음은 왜곡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갈라디아 교인들은 커다란 위험에 처해 있었다. 갈라디아서 공부는 신약 중에서 가장 열정적이고 힘 있는 편지이기도 하다.

 

 

 

  바울은 그래서 11-12절에서 자신이 전한 복음, 이 복음은 어떠한 인간적인 기원, 그 당시 순례설교자들이 전한 잘못된, 무엇인가 첨가된 다른 복음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복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이런 것에 완전히 진절머리가 난 사람이었다.

 

13절-14절: 유대교에서의 열심을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이 대목은 길성남교수의 '바울선교와 복음'의 강의안을 참조했다)

 

 

 

길성남 교수 <바울 복음과 선교> 강의

*길성남 신약학교수의 <바울 복음과 선교>강의를 필기한 내용입니다. 누락되거나 잘못된 부분이 있을 수 있음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1. 바울사도는 과연 누구인가? 1>기독교 교리 체계를 세운

kkarl21.tistory.com

 

 

 

 

 

회심전 바울(pre_Christian Paul)

1.1…길리기아 다소 사람(행 22:3)

길리기아-아주 큰 도시…문학, 철학의 도시…정치, 경제의 중심지

바울은 행 22:3에서 자신을 밝히고 있다. Identification

 

(3)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Srtabo-‘다소’는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를 능가할만한 학교들이 거기 있었다.

 

 

1.2…로마시민(행 16:37, 38; 22:25,28)

-태어나면서 시민권자, 부모가 이미 로마시민권자였다. 아마도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을 듯.

행 22:27이하...천부장이 바울에게 ‘네가 로마사람이냐 내게 말하라’고 했을 때 바울은 ‘그러하다’고 했다. 이어 천부장이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고 했을 때, 바울은 ‘나는 나면서부터로라’고 말했다. 다소의 시민들과 다른 주민들 가운데서 나면서부터 헬라인 또는 유대인이던 극소수의 로마 시민들은 그 사회에서 엘리트 계층을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63 B.c-폼페이장군이 예루살렘을 침략했다. 돌아가면서 끌고 간 유대인들이 로마인의 손에 팔렸지 않았을까? 이 때 바울의 조상이 섟여 있지 않았을까? 이방사상에 물들 수밖에 없었다.

 

행 22:3 길리기아 다소에 서 태어났다-‘이 성에서 자라’

어린시절…역이민해서 예루살렘으로 갔다(W.c.Van Unnick). 바울은 헬라어를 모국어가 아니라 제 2 모국어로 배웠다.

그러나, 필로의 문체-우아함.

바울의 필체-박력이 있고 우아하진 않지만 모국어 수준이지 제2 모국어 수준은 아닐 듯.

최소한 12살 이후로 배운 언어는 잘 잊어 먹진 않는다.

 

 

1.3…가말리엘 문하의 학생(행 22:3, cf) 행 23:16)

A.D 20-50(힐렐학파)

갈 1:14-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프로콥토우’---prokovptw…학문 등에 상당한 진보를 이루다 I was advancing in

가말리엘 문하에서 열심히 공부했다.

벨릭스 총독--‘너의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했구나!’(인정받는 수재, 천재였다).

‘얼마나 탁월한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이다.

구약에 대한 철저한 인용-"학문적인 바탕"이 되었다.

 

 

 

 

 

 

1.4…기독교 박해자---기독교 복음 이해(갈 1:13, 23; 빌 3:6; 딤전 1:13)

행 26:9-가편 투표, 강제로 고문하여 예수를 욕하게 함.

 

(9)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바울이 왜 이렇게 열심히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였는가? 바울은 율법에 정통한 자였다.

십자가에 달린 메시야Crucified Messiah

-신 21:23…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

갈라디아서 3:13-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예수를 기독교인들은 메시야라고 한다. 왕이면서 동시에 전사이다!!!

 절대로 죽을 수 없다. 유대인의 관점에선 메시야가 죽는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는 사고방식을 가졌다. 죽은 자가 메시야이고 그것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려 죽은 자가 메시야라니…사울이 볼 때 이것은 신성모독이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했다…zeal1)

  사울은 바리새파 사람이었지만 열심당원적인 경향이 있었다. ‘기독교인들의 믿음의 내용’은 율법과 상충되는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갔다. 그 거리는 230Km~!!! 기껏해야 교통수단은 도보나 말을 타고 가는 것이 전부였다. 도로망이나 교통수단이 거의 전무했던 2000년 전의 모습을 기억해 보라!

  회심 이후의 바울의 고백-‘죄인 중의 괴수’ –헬라어: 죄인 중의 첫째The First.

 

 

 

  바울은 그 때를 알고 있다. 극과 극, 극에서부터 극으로 회심한 바울! 그것은 율법의 열심이었다. 그것은 신적인 기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복음의 기원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깨어졌고. 특별히 11-12절의 내용은 바울이 사도가 된 것, 바울이 받은 복음은 솔직한 말로 ‘직통계시’였다는 것이다. 17절에 보면 바울이 자기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했다’고 했다. 만약 바울이 회심하고 난후 바로 사도들(예수님의 제자들)을 만나기 위해 갔더라면 바울이 11-12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에게서 받은 것, 배운 것이 아니다’라고 말이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부터 받은 직통계시의 복음을 받았기 때문에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바울의 사도권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사도권과는 다소 독립된 경향이 있다. 이 느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안드레센의 ‘미운 오리 새끼의 꿈’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다른 이들은 다 백조들 무리에서 백조가 되었는데 바울은 오리들 틈바구니에서 독립된 백조가 되었다?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면서 사울에게 도전하셨던 예수님이셨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부터!

 

 

 

 

 

  여러분들이 받은 복음은 누구에게서 받은, 배운 것인가? 옛날에 친구로부터, 교역자로부터, 부모님으로부터, 모태로부터 받은 복음인가? 바울이 여기서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부터!!!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복음을 받은 줄 믿는다. 다메섹 체험은 없다 할지라도 다른 그 누구가 대신하여, 그 누구의 통로(단지 도구일 뿐이고)라 하더라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 성령님과 우리 사이에 그 누구도 중간에 끼일 수 없는 것이다. 천주교의 교리 중에 가장 큰 잘못은 신부가 대리자(중보자)이기 때문이 아닌가?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K교단에서 ‘중보기도’라는 말을 사용해선 아니 된다는 말이 나온 것도 이러한 배경하에서이다). 여러분이 구원 받은 것은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구원받은 것이다. 다른 어떤 사람들이 거기에 개입될 수 있다. 누가 전도하고 누가 양육하고 물론 그런 부분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구원은 여러분과 하나님, 투명한 그 일대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난 전인격적인 사건이다. 거기에 친구가, 동료가, 선배, 후배가, 부모님이, 교역자가 개입될 수 없는 것이다. 구원은 일대일의 적나라한 사건이다.

  

 

 

  바울은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3> 회심(conversion)과 소명(calling)

3.1…회심(소명)기사-행 9:1-19; 22:3-16; 26:11-18

9:7-소리만 듣고, 아무것도 보지 못함.

22:9-빛은 보면서도 말하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함…… 누가는 최초의 역사가historian였다. 기독교 역사 중에 가장 중요한 사건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다. 그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사울의 회심 사건’이 아니었을까? 사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동안 대단한 체험을 하였다. 다메섹의 체험을 통하여서 그는 분명히 그리스도의 메시야되심을 체험하게 되었다. 체험은 정말로 중요한 것 같다. 여러분은 어떤 체험이 있는가?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아니 남들이 경험한 체험이라도 체험하면 신앙이 살아있게 된다.

  바울의 이 다메섹 체험은 유대교의 불멸의 전사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된다.

 

 

(15)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3.3…회심conversion인가? 소명calling인가?

행 9:1-19; 갈 1:15-16

바울은 자신의 다메섹 도상의 체험을 회심이란 관점 보다는 ‘Calling’의 관점에서 보았다. 회심의 체험이 아니라 소명의 부르심의 체험이었다. 렘 1:5-8, ‘열방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음…9:15

 

(15)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유대교 안에서 남은 자.

회심이란 것은 과거의 것들을 접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자신의 회심이라 하지 않고 소명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유대교를 접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Krister Stendal-바울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통찰력을 제공하였다.

문제 제기하기를 바울의 다메섹 도상의 체험은 회심이 아니라 calling이다.

유대교-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다.

이제는 하나님의 교회에 속하였다. 바울은 본문 속에서 은연중에 유대교와 하나님의 교회를 분리시키고 있다.

 

 

이전의 율법체계를 부정하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사관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더 이상 유대 민족중심주의적인 삶과 스타일은 탈피하였다. 바울의 생애를 가만히 생각해 볼 때 기독교가 참된 진리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끔 한다. 무엇이 바울을 그렇게 바꿔 놓았을까? 그는 무지하게 똑똑하고 영리한 인간이지 않았던가? 그러한 그가 후에는 예수를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살다가 순교하였단 말인가? 정말 초자연적인 무언가가 있어야 만이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자신의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변화되는 그 초월적인 경험을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F.F.Buce, 바울, p.89.---그리스도의 사건을 제외하고는 사도 바울의 회심만큼 기독교의 진리임을 증거해주는 단서로도 충분하다. –그만큼 바울의 다메섹 체험은 unique한 사건이며 이벤트이다.

 

 

 

 

 

 

3.4…부르심의 목적---“이방인의 사도”(롬 11:13; 롬 15:16-19; 갈 2:7-8; 엡 3:1-10)

행 9:15-16; 22:14-16; 26:15-18;

갈 1:1; 1:15-16

3.5…다메섹 체험의 의미

 

‣적용하라!!!!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

17절의 해석...바울 자신은 사도직의 독립성을 표현하기 위해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유대교적 과거와 결별한 바울은 유대인계 사도들을 만나러 예루살렘에 올라갈 필요도 없었고 혹 올라갈 필요를 느꼈더라도 이를 물리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것은 유대인적인 어떠한 요소로부터 자신이 받았던 계시를 구별하려는 바울의 모습(유대인적인 것에 얼마나 그가 치를 떨었겠는가!!!)

 

 

 

3. 바울의 선교사역(A.D 34/ 35-65)

3.1 다메섹과 아라비아 사역(A.D 35-37)

-행 9:19-25; 갈 1:17; 고후 11:32-33

아라비아에 가서는 과연 바울은 무엇을 하였을까?

거기서 바울은 아마도 사역을 위한 준비기간을 가졌다는 것이 전통적인 견해이다.

예/ 모세-40년 광야생활, 예수-40일 광야 금식기간. 이런 견해를 펼친 학자들이 많았다.

E. De. Burton, Galatians(1921), 55-57.-광야에서 자신의 신학을 재건축하였다.

하지만, 바울이 갔던 아라비아 사막은 과연 어디였던가?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바울이 ‘묵상을 위해서 아라비아에 간 것은 아니었다’ )

  아라비아 사막에 가서 기도와 명상과 묵상만으로 시간을 보냈다는 이야기는 사실과는 다르다.

  바울 자신이 뭐라고 이야기하지 않으니깐 뭐라고 말할 순 없다고 쓴 주석이 꽤 된다.

주후 37-65년 당시에 아레타 4세가 다스리고 있는 나바티안 왕국은 다메섹에 속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사실은 고후 11:32-33의 서술에서도 뒷받침된다. 바로 이 이방 지역으로 향해 바울이 전도여행을 떠난 것으로 여겨진다고 한다. 그러나 아라비아에 대한 언급이 아주 간결하게 나오는 이유는 그곳에서의 전도 성과가 그리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해설이 초기 교부인 크리소스톰에게서도 발견되는데, 이 서술을 통해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았던 때부터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역할했고(1:16 참조), 예루살렘의 사도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바울은 4:25에서 아라비아를 언급하면서 그곳에 시내 산이 있는 곳이라고 설명한다. 시내 산은 모세를 통해 하나님이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었던 곳으로 이러한 사실을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출 19:18-32:15; 34:2, 29 참조). 이 율법은 3:15-25에서 기능면에서 예수의 십자가 복음보다 열등한 것으로 증명될 것인데, 바울의 아라비아 행은 다른 말로 하면, 율법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위해 갔던 장소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 새로운 이해란 율법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 의해 추월당했다는 이해를 말하는데 율법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이방인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바울은 철저한 이론에 바탕을 둔 현장가였고, 선교사였다. 이런 것을 두고 볼 때 그가 과연 이론과 율법연구와 묵상만을 위한 주목적으로 시내산(아라비아)에 갔을까? 하지만 이 시내산은 참으로 유명한 장소이다. 모세와도 관계가 있고, 엘리야와도 관계가 있고, 신약시대에서는 바울과도 관계가 있고!

 

 

어떤 학자들은 바울은 우리와 같은 훈련과 연단과 예비와 준비의 기간이 없었다고 보기도 한다. 3일 동안 눈멀었던 시간들…구약과 자신이 배웠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패러다임으로 재조명하는 데는 3일이면 족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우리는 구원받았고 복음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이 복음의 진리를 온전히 잘 보존하고 있는가? 우리는 바울처럼 율법의 열심히 전혀 없던 사람이었기에 오히려 율법의 열심에 대한 유혹을 받을 수 있다. 일을 좀 더 해야만 구원받은 것 같고, 더 열심히 섬기고 봉사해야 천국의 시민권에 아깝지 않은 자라는 생각이 스며들 수 있다.

 EX) 아들을 낳고,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시선이 되다 보니 느끼는 점!

  -아들은 그냥 아들이다. 그 아들에게 성경1독이나 십계명 외우기, 화장실 청소의 숙제를 감당하면 사랑한다고 하지 않는다. 아들은 그냥 아들이고 자식이다. 옆에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만한 느낌!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의 마음이 이러한 마음이지 않을까?

 

 


1) ‡zeal [ziːl]n. U 열중, 열의, 열심; 열성; 열정(for). [SYN.] ⇨ PASSION.

┈┈•show ∼ for ┅에 열의를 나타내다.

♣with ∼열의를 갖고.

 

 

오늘은 신약성경 갈라디아서 1장 11-17절의 본문을 가지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라는 주제로 설교한 내용을 포스팅해 보았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내세웠던 인간적인 조건과 열심과 열정에 의해 그가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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