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7주년을 맞이한 한국교회가 2024년 10월 27일에 광화문에서 집회, 행진을 가집니다. 이 행사의 의미는 '악법저지를 위한 2백만 연합예배'를 타이틀로 진행하고자 합니다. '동성결혼 합법화'라는 거대한 시대 조류를 반대하고자 하는 한국기독교의 저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나선 거국적인 연합집회
한국교회는 전세계 가운데서 가장 놀라울만한 부흥과 성장을 이뤄왔던 것은 사실입니다. 초기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왔을 때 한국은 정말 미개한 나라에 불과했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라고 했던 니고데모의 말의 나올 정도로 열악하기 그지 없었던 나라입니다. 하지만, 그 대한민국에 가득했던 가난뱅이, 앉은뱅이, 거렁뱅이, 술주정뱅이 등 수많은 가난과 나쁜 습관들에 중독되었던 이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변화되고 회복되어 '예수쟁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비대한 성장으로 인해 들려오는 잡음과 추문은 기독교가 선한 영향력의 주인공이 되기 보다 오히려 돈과 권력과 성공의 괴물이 낳은 후유증으로 교회가 교회가 아니라 교회가 자본주의의 가면을 쓰고 소수의 성직자들의 욕심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듣고 있는 작금의 상황입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기독교가 자아성찰과 회개가 아니라 왜 연합집회, 2백만을 목표로 광화문 집회를 하는가? 이런 이야기가 들려오는데요. 한국교회는 다양한 교단이 존재하며 그 교단 안에도 파들이 나눠져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참으로 부끄러운 현실이지만, 어쩌겠습니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번에 보수교단을 중심으로 '연합집회'를 가진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데요. 이 연합집회는 몇년 전에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듯한 이미지로 코로나 시국에 비기독교인들에게 비호감의 전유물로 전락한 전광훈 목사의 세력들로 착각하게 하거나 그렇게 비쳐질까 노파심이 들기도 합니다. 기독교계에서는 전광훈 목사를 이단이다, 아니면 이단 논란에 놓인 목사라고 면죄부성 발언을 아무리 해도, 비신자들의 눈에는 똑같은 '기독교인'으로 보여진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몇 주전에 신천지 세력들이 전국적으로 흰 옷을 입고 행진을 했다는 것을 SNS에서 보았는데요. 신천지 세력의 그런 세레머니와 10월 27일의 연합행사가 똑같은 이미지로 비쳐질지 내심 두렵고 떨리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 집회를 하필이면 주일에 하는가?
이 집회를 주관하는 보수교단들이 10월 27일 주일에 시행하는 것은 10월 마지막주일은 종교개혁주일로 지켜지기 때문입니다. 10월 31일이 원래 종교개혁일이기에 10월의 마지막 주일은 종교개혁주일로 지킵니다. 이번 집회는 기독교계가 주창하는 창조질서와 성경적인 원리를 다시 새롭게 하자는 의미의 개혁적인 집회라는 취지로 종교개혁주일에 시행한다는 점인데요. 아무래도 주말이나 다른 요일에 집회를 하는 것 보다 주일에 하는 것이 성도들의 회집이 더 용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점도 있습니다.
이번 연합집회의 가장 큰 화두는 '동성결혼 합법화 반대'에 있다
10·27 집회를 준비하는 보수 기독교계는 이번 집회가 대한민국을 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말하면서 종교개혁과 결부시키고 있습니다. 이 연합집회가 시작되게 된 트리거는 바로 '동성 커플의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하는 대법원 판결'입니다. 동성 커플의 건강보험 혜택까지 인정한다? 그렇게 되면 점점 더 동성 커플의 결혼도 합법화 되고 모든 부분에서 유럽교회나 서양의 교회의 역사를 반복하게 될까 하는 노파심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현실에서는 건강보험에 대한 이야기만 논의되었고 동성결혼 합법화는 아직 이른 감이 있습니다. 하지만, 장로교단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번 이 집회는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우려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서구의 교회들이 이런 전철을 이미 밟아왔기 때문에 이번 보수 교단 중심으로 벌이는 이번 연합집회는 이에 대한 저항감이 단초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일례로, 미국의 캘리포니아 초등학교에서 여학생 3명이 머무는 기숙사에서 남자 선생님이 3일 동안 같이 지냈다고 하는데요. 문제는 남자 선생님이 자신의 정체성을 '여자'라고 하면 이 문제를 더 이상 문제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 법으로 보장된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의 사례입니다. 캘리포니아 주는 이미 동성 결혼을 합법화한 지 다소 시간이 지났습니다.
극단적으로 예시를 들어보자면, 여자 화장실, 아니면 샤워장에 남자가 들어갔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때 들어간 남자가 자신은 '여자'라고 말한다면 그게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말이 됩니다. 물론 한국사회는 아직 변화의 과정 중에 있긴 합니다. 어쩌면 혹자는 뜬금 없는 집회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OECD국가들 중에서 대한민국이 유일한 것은
OECD국가 중에서 동성애, 마약, 포르노, 매춘, 근친 결혼이 통과되지 않은 나라는 아직 우리나라가 유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가 제일 뒤쳐진 것이냐? 글로벌의 대세를 따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누구냐?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인가?'
우리는 성경을 내 삶의 가장 큰, 절대적인 권위로 받아들이며 그 성경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의 체계를 따르는 자들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고자 노력하고 일평생 고군분투하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많은 OECD국가들의 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았냐?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고군분투했지만,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만이 아직 동성애에 대한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요.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보수적인 입장이란 것이 과연 성경적이냐는 것인데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 성를 구별되이 지으셨고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창조의 질서입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과연 성경적인가?
창조의 질서를 역행하는 것이 바로 '동성애'입니다. 그런데, 현대의 분위기는 동성애, 성소수자, 그리고 거기에다 인권을 붙여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등장시켰습니다. 모든 인간은 다 나름대로 권리와 자유가 있기 때문에 차별하면 안 된다는 아주 포괄적이고 포용적인 슬로건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깊은 함정이 있는데요. 어떤 이들은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오히려 대다수의 국민들을 향한 역차별이라고도 주장합니다.
*.글을 쓰다가 찾아보니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국회에 법안으로 올라왔다가 상정되지 못해 폐기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포괄적 차별 금지법이 또 다시 상정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포괄적 차별 금지법이 얼마나 무서운지, 차별금지 법이 얼마나 사악한 법인지는 아래의 영상을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https://youtu.be/WzyFU_qzQKs?si=maYlfMjcGORK96wx
창조주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성별에 대해서 인간이 아무리 자유의지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 성별을 자기 마음대로 남자인데, 나는 여자야 아니면 나는 여자인데 남자야 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이게 성소수자라는 카테고리를 만들어서 사회적 약자로 분류시키면서 차별하면 안 된다, 더 나아가 동성애, 동성커플, 동성부부의 결혼, 그것의 합법화까지 이뤄진다는 것에 보수 기독교계가 분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에 대해 당연하지 않다고 해야하는 시대의 조류에 대해 이질감과 저항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요.
시대가 워낙 변화가 급박하게 이뤄지니깐 비기독교인들은 그냥 그러려니 할 수도 있지만, 기독교인들을 그래선 아니 되는 것이죠. 소위 말하는 진보적인 교육의 탓에 다음 세대들의 생각과 성향이 어떻게 구축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교회만은 성경이 말하는 명백한 메시지를 노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교회의 미래가 과연 어디에 있을까? 하는 노파심과 위기 의식 속에 이 연합집회가 태동되었습니다. 지금 중년의 나이, 그 이상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은 이런 시대의 흐름 속에서도 역류하며 분노하며 신앙을 지켜가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 다음 세대가 과연 성경에서 말하는 성별, 창조주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성별에 대해서 온전한 뜻과 이해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법이 성경에 대한 반대적인 해석과 의미를 계속 보여주고, 차별과 혐호를 반대한다느니 포괄적 차별을 금지한다는 시대의 목소리를 계속 듣다보면 다음 세대의 신앙에 큰 타격이 올 것이라고 예상해 봅니다. 그래서 김양재 목사는 우리들 교회 지난 주일 설교에서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든지 간에 '다음 세대에게 유언하는 심정으로 집회에 참석'하자는 이야기를 합니다.
연합집회의 가장 큰 트리거는 바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서 연유
(창 19:5)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글을 적어놓고 보니 저의 포스팅 제일 아래의 링크에 나오는 페이퍼에서는 '동성혼 합법화로 인해 망할 교회라면 그런 교회를 왜 다니냐?'라는 이야기도 합니다. 이 분의 논지가 연합집회를 반대하는 이들의 글 가운데 제일 설득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의 논조와는 다소 다를 수 있지만,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연합집회를 반대를 주장하는 의견들의 핵심
첫째는 '주일 공예배'(주일성수)를 져버린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가장 중요한 가치와 전통은 '주일성수'입니다. 과거에는 저명한 신학자가 주일날 택시를 타고 선교사님을 픽업하러 가는 장면에서 택시비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교단을 이적하는 전례까지 있을 정도로 주일성수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이 중요시되었습니다. 물론 지금 돌아보면 너무 율법주의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요.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주일날 스포츠활동을 하거나 가게에서 물건을 구입하는 것 조차도 금지하였던 적도 있습니다. 물론 요즈음은 그런 지나친 율법주의적 행동강령(?)은 많이 사라졌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만큼 주일은 다른 날, 평일과는 구별된 날이라는 의미가 짙었고 거기에 주일성수의 핵심인 '공예배'가 들어 있습니다. 내 몸이 부서지고 죽어도 주일예배만큼은 사수한다는 것이 한국교회의 전통입니다. 그런데, 이번 연합집회는 지방에 있는 신자들이 서울 연합집회에 참석하고자 한다면 예배시간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데서 우려가 있습니다. 물론 개교회마다 다들 융통성있게 공예배를 드리고 참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무 거리가 먼 교회에서는 차를 타고 오면서 예배를 드리면 되지라고 하는 부분도 있는데요. 이런 부분에 대한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참으로 존경하는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교의학을 가르치다 은퇴한 박영돈 목사의 발언입니다. 10월 4일 SNS에 올라온 글입니다.
"서울에서 먼 지역, 남쪽에 있는 교회들이 그 집회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지역 교회에서 드리는 주일예배를 사실상 포기해야 한다. 지금까지 교회가 생명처럼 여겨 온 주일예배를 그렇게 희생하면서까지 그 집회에 참석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고 싶다. 예배와 기도는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구태여 서울 한복판 광장에서 총집결하여 행하는 기도와 예배는 정부와 사람들이 보라고 시위하는 목적과 성격이 다분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진정한 기도의 능력을 믿기 보다는 200만이라는 거대한 수적인 세력을 결집하면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더 효력이 있을 것이라는 인간적인 생각과 무리수를 기도라는 명분으로 포장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했습니다.
이런 우려는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나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한국복음주의교회연합에서도 같은 목소리로 비판을 합니다. 공교회의 예배, 주일성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해석의 차이가 발생할 것이며 시선과 관점의 차이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는, 전국 연합집회를 통한 정치적인 세력에 대한 우려입니다.
보수 교계의 이런 연합집회에 대한 비판과 우려는 2백만명의 성도가 모여 집회를 한다는 것 자체가 종교개혁의 의미를 흐린다고 합니다. 오히려 '동성결혼 합법화 반대'라는 슬로건을 내밀어 혐호와 차별을 조장하는 것은 오히려 기독교의 명예와 종교개혁의 의미를 오염시킨다는 시선입니다. 연합집회에 대한 강한 비판과 시선의 골자는 한국교회가 이제껏 교계 지도자의 비리와 세습문제, 기타 교회의명예를 실추시키며 세상 사람들에게 덕이 되지 못한 불명예스런 죄에 대한 영적인 각성과 회개가 없이 '동성애'에 대해 과도한 발끈함과 분노로 집회를 추진한다는 것 입니다. 또한 2백만이 모여 연합집회를 하고 예배를 드리면서 거기서 나오는 2백억의 헌금으로 사회에 공헌을 하자는 입장에 대해서 비판적입니다. 세상이 자주 이야기하는 '숫자의 유혹'에 넘어갔으며 이 또한 '맘몬숭배'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또한 이만열 교수는 '십자군은 있는데, 십자가는 없다'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해석, 해석의 차이로 인해 한국교회의 분열이 되어선 아니 될 것
아리스토텔레스는 '사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실에 대한 해석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만큼 사건이나 사실, 팩트체크도 중요하지만, 거기에 수반되는 해석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해 보입니다. 한국교계가 동성결혼 합법화에 대한 반대라는 타켓팅을 가지고 광화문에서 집회를 가지는 것은 한국교회 역사상 굉장히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기존에 예배당에서 주일예배를 온전히 드렸던 예배의 현장이 거리로 옮겨졌다는 것에 불편한 시선도 분명히 존재할 것입니다. 거기에 수반되는 '주일성수'의 의미가 어떻게 해석되어지느냐에 따라 연합집회에 대한 찬반의 의견도 갈릴 듯 합니다. 다음세대에게는 이런 거국적이면서 이례적인 전국집회를 경험함으로서 한국교회의 힘과 한 믿음에 대한 공동체적인 저력을 경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집회를 참석하느냐 마느냐 라는 문제로 이견이 생길 수 있고, 그로 인해 서로를 정죄하거나 비판하거나 단죄하는 일은 삼가해야 할 것이다. 참석할 수 있는 사람은 참석을 하고 참석할 수 없는 사람 지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리면 될 것입니다. 또한 보수 교단이라고 불리는 합교개혁 507주년을 맞이한 한국교회가 2024년 10월 27일에 광화문에서 집회, 행진을 가집니다. 이 행사의 의미는 '악법저지를 위한 2백만 연합예배'를 타이틀로 진행하고자 합니다. '동성결혼 합법화'라는 거대한 시대 조류를 반대하고자 하는 한국기독교의 저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집회를 참석하느냐 마느냐 라는 문제로 이견이 생길 수 있고, 그로 인해 서로를 정죄하거나 비판하거나 단죄하는 일은 삼가해야 할 것이다. 참석할 수 있는 사람은 참석을 하고 참석할 수 없는 사람 지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리면 될 것입니다. 또한 보수 교단이라고 불리는 장로교단 중심의 이번 연합집회의 주최세력들은 선하고 참석하지 않는 타교단은 악하다는 흑백논리도 지양해야 할 것입니다. 주일성수도, 연합집회도 둘 다 선합니다. 보수교단 중심의 이번 연합집회를 선택한 교단은 이것이 더 지극히 선하다 생각하기 때문에 진행하는 것이고 긴급한 사안이기 때문에 움직인 것임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이대로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데서 시작된 연합집회
동성혼에 대해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사안의 중요성과 시급성 때문에 보수교단을 중심으로 이번 연합집회가 진행될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하는 이들의 시선에는 동성혼의 문제가 심각한 사안이기 하지만 오히려 주일성수의 순수성을 해치는 이번 연합집회에 대한 우려가 크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관점과 시각의 차이에서 발생한 부분입니다.
참석을 하든 하지 않든 간에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를 위해, 대한민국을 위해 더 절박하고 간절하게 기도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기에 감사한 일이기도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주일성수에 대한 우려는 없지 않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신앙은 언제나 개인신앙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대부흥운동을 살펴보아도 찰스 피니, D.L무디의 부흥운동도 대단하긴 했지만 개인적인 결단과 회심이 결여된 대중적인 회심(?)이 과연 얼마나 파급력이 있고 영향력이 있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가 집회를 통해 새로워질 수 있는 은혜의 기회가 있긴 합니다만, 강조하고 싶은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한 개인이 회심하고 결단하고 행동하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대중이나 군중의 힘은 분명 무시할 수 없지만, 항상 거기에는 군중이 주는 한계와 리스크가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군중심리'는 무서운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토록 추종했던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빌라도 앞에서 '바라바냐? 예수냐?'라고 했을때 한순간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했을까요? 물론 이 사안에 대해선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가 작용하긴 했지만 거기에는 분명히 '군중심리'가 개입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였기 때문에 보여주는 시청각적인 효과도 있을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기독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것을 중시하는 믿음의 세계이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치우쳐선 아니될 것 입니다.
개혁주의는 언제나 정교분리의 원칙을 지향합니다. 교회와 정치는 분리되어져야 한다는 것은 변함이 없는 원리입니다. 과거의 수많은 운동권이 횡행했을때,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이 백성과 사람을 위하는 휴머니즘의 냄새가 많이 풍겼지만 그것들이 지금 남아 있나요? 십자가가 없다면 결국 모든 것은 한때의 인기몰이를 하고 사라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의 수직적인 관계와 인간과 인간의 수평적인 관계를 상징합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십자가는 수직적인 관계가 우선입니다. 연합집회에 수평적인 힘만 드러날까봐 솔직히 걱정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부족하지만 기도함으로 10월 27일의 연합집회가 아무 사고나 탈이 없이 잘 진행되길 바랄 뿐입니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이사야33:2)
첨언...
처음에 시작할 때는 제가 소속된 보수교단중심의 연합집회는 동성혼 합법화 반대를 위해 시작된 일이라는 것에 고무되어 글을 적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포스팅을 하다 보니 여기저기 글을 읽어보면서 이게 더 미묘하고 복잡한 사안임을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 글을 발행하는 것을 멈춰야 할까도 솔직히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일개의 한 목사가 고민하면서 적었던 글이기에 겸손하게 올려봅니다. 읽으시다가 불편한 점도 있을 수 있고 성경적인 해석이나 관점과 차이가 다를 수 있음을 양해하시길 바랍니다.
- 아침에 어머니랑 통화하면서 서로 중보 기도를 했는데요.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칠순이 넘은 연배이시지만 광화문 연합예배에 참석하신다고 합니다. 저의 교회는 온라인예배로 참석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온라인, 오프라인 예배는 오후 2시입니다. 여러분, 연배가 있으신 부모님의 이런 열정과 기백 때문에 대한민국 교회가 그래도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의 신앙이 우리 세대를 넘어 다음세대에게도 이어져 경건한 전통이 지속되는 한국교회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하나님 나라의 같은 동역자이기에 함께 기도하면서 이번 주일을 보내시면 좋겠습니다.
↓10월 27일 광화문 연합예배 및 큰 기도회 홈페이지
↘곧 있으면 할로윈 데이인데, 이에 대한 기독교적인 비판의 글도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반대자의 의견에 대한 글은 아래의 글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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