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고난의 의미
여인이 아이를 잉태하는 고난은 최고의 고난이다. ‘무통분만’이 좋은 대안이란 이야기가 있지만 아기가 불량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고통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거의 없다.
일(노동)의 고난-죄의 결과, 무지(어리석음)의 결과(약 1:13)
(13)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중요한 것은 욥처럼 잘못하지 않았는데 고난을 주신다는 것이 우리의 딜레마이다. 우리는 시험을 흔히 두 가지로 분류한다. 하나는 test이고, 두나는 temptation이다. 전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허물과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연단시키기 위해 사용하시는 도구이고, 후자는 우리가 흔히 '시험에 빠진다'라고 할 때 그 시험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둘다 동일한 성질을 가지는데, 시험temptation에 빠졌지만, 거기서 헤어나오지 못하면 말 그대로 temptation이고, 그걸 극복하고 일어서고 승리하면 test가 되는 셈이다.
기독교 사상가이자 영문학자인 C. S. 루이스는 이런 유명한 명언을 남겼다.
“고난을 통해 확성기로 우릴 부르신다”
예수님은 이 땅의 고난을 제거하기 위해 오셨다. 그 고난은 인류의 죄로 인해 시작된,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시작된 원죄와 자범죄를 총망라해서 그 모든 것을 해결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 예수님께서 오셔서 일이 무엇인가? 요즘같은 팬데믹 시대에 코로나예방을 위한 치료제나 백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백신의 유효성이 영원하지 않다. 한시적인 기간에 유효하다. 하지만, 우리 주 예수님께서 제공하신 죄에 대한 백신은 영원하고 효과가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 예수 그리스도의 백신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결과물이다. 인생에 있어 고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통해 알려주셨다.
No Cross, No Crown!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고난과 죽음을 어떻게 보시는지를 알 수 있다. 고난은 그냥 생고생하고 허무하게 고통당하는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희망과 소망이 움트는 키워드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로마서 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환난는 인내를 만들어내고 인내는 연단을 만들어내고 연단은 소망을 만들어낸다고 기록했다.
시편 119편에선 이렇게 말하고 있다.
71절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
성경에선 끊임없이 그리스도인의 고난에 대해서 거절하거나 부정하거나 혐호하지 않는다. 성경은 오로지 죄, 욕망으로 인한 시험에 빠지는 고난에 대해선 경계한다. 하지만, 이런 인간의 죄악과 오류로 인한 고난 조차도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라고 밝히고 있다(롬 8:28). 그러기에 우리가 당하는 만사가 하나님 안에서 콜라보레이션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고난은 인간은 더 겸손하게 만들고, 더 비천하고 연약하게 만드는 가운데 낮아짐을 배우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가 얼마나 약하고, 비천하고, 내세울 것이 없는 존재인지를 보게 만든다. 그것이 광야의 길이기도 하다. 불신자들이 생각하는 고난관과 신자가 생각하는 가치는 분명히 다르다.
우리가 자주 '만사형통'을 기원하면서 기복신앙의 기도를 드린다. 물론 기도 드리지 않는 것보단 낫다. 하지만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게 하고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하는 것에 가장 최적의 장소는 '광야''이고, '고난'이다. 존 비비어는 <광야에서>에서 광야를 '준비의 장소'라고 했다. 광야에 무슨 낙과 희망과 소망이 있어서 준비의 장소라고 하는가?
존 비비어는 또 이렇게 말한다.
‘광야의 가장 멋진 점은 하나님이 자신을 새롭게 나타내시는 곳이라는 점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자신의 모습을 우리가 생각하는 결에 다라 보여주시지 않고 기상천외하게 보여주시는 곳이 바로 광야이고, 고난의 광야이기도 하다. 고난은 일평생 우리 곁에 자주 등장할 것이다. 고난은 너무 싫다. 하지만,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기 위해 '형통한 날 뿐만 아니라 곤고한 날도 주시는 것'이라고 전도서기자는 말한다.
전도서 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
그래서, 우리는 기도는 만사형통을 바라면 안 된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할 뿐'. 기도제목 없이 기도하라는 말이 아니다. 인간의 욕망에는 언제나 기복신앙이 존재한다. 한국교회가 그렇게 오랫동안 새벽기도와 철야기도, 수많은 기도의 시간이 있어왔다. 그로 인해 엄청난 부흥과 발전을 이뤄왔다. 하지만, 교회의 기도가 뜨겁기만 하고 정의와 공의를 배제한 채 자신의 가족과 교회와 관계들의 축복을 위해 너무 기도하지 않았는가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의 기도가 살아 있는데 왜 교회나 교인들이나 중직자, 성직자들의 문제가 자주 터지는가? 과거 한국교회 선배들이 기도했던 분량과 영적인 밀도는 우리가 충분히 본받아야 하겠지만, 기도 안에 내재된 자신의 욕망, 가족, 자녀들에 대한 이기적인 욕망을 거세되어야 한다. 자녀가 형통하길 바라지, 어느 부모가 자녀가 꼴아박기를 원하는가?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가 꼴아박는 고난의 현장으로 내모실 때는 분명한 이유와 계획이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 고난 없이 제대로 성숙한 영적 거인이 어디 있는가? 만사형통은 불교나 미신이나 조상신을 섬기는 이방집단이 바라는 기도제목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만사형통하게 하려고 창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 땅에 보내어졌다. 그런데, 자꾸 딴 짓하면 또 다른 시험꺼리들이 우리를 붙잡을지도 모른다.
고난은 거부하고 싶지만, 준비되어지는 과정이다.
이 땅의 삶이 광야의 삶이라고 한다. 그것은 천국을 소망으로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정말 하나님 나라의 시민답게 자질을 갖추고 변화되고 성화되어져 가는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이 땅의 삶은 '광야의 삶', 즉 준비된 장소라는 의미이기도 하겠다. 고난은 그리스도인에겐 때론 거쳐가야 할 훈련의 과정이기도 하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죄인의 마음을 가진 인간이 변화되는 것은 요가나 심리프로그램이나 트레이닝을 통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인간의 죄인된 거친 형상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져 가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이사야 48:10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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