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인간의 역사의 의미는 무엇인가?(역사관) |
역사를 모르면 미래를 알 수 없다. 역사는 참으로 중요하다. 디트리히 슈바니처는 ‘교양’이란 책에서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교양인의 기본이라고 했다. 역사적 감각이 있어야 한다. 어제는 오늘의 결과이고 오늘은 내일의 결과이다.
어리석은 자는 경험(시행착오)을 통해 배우지만 지혜로운 자는 간접경험을 통해 배운다. 역사를 탐독하고 거기서 지혜를 건지라! 역사, 너무 재미있지 않은가?
역사는 진보한다?
진보주의...행복이 올 것이다! 하지만 막연한 이러한 이상은 오류이다. 허황된 꿈은 오히려 치명적인 독에 불과하다.
테크노피아, 유토피아 건설...마르크스주의자들이 꿈꿨던 그 유토피아는 정말 성취되었는가? 빈부의 격차과 공평하게 분배되는 정말 공정한, 평등한 사회가 되었는가? 그렇지 못했다. 공산주의, 사회주의, Marxism의 오류이기도 하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시스템도 완벽하지 않다. 사람들은 그 시스템이 이데올로기가 되어, 그 이데올로기에 신봉하고 올인한다. 변화의 주체가 인간인 이상 절대 시스템으로 온전한 유토피아는 올 수 없다. 칼 마르크스가 20세기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평가하긴 하지만, 그가 간과했던 것은 그 시스템의 주체에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욕망을 가진 존재이다. 욕망이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그의 막시즘이 올바르고 정의롭고 과학적이고 합리적이긴 했지만, 인간이 그렇게 안 움직인다는 것이다. 자주 이야기하지만, 인간 안에는 티라노사우르스적인 욕망, 욕망의 괴물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세계는 지금 막시즘의 주창하는 사회주의 보다 자본주의가 더 많다는 것이다.
그 자본주의도 옳으냐? 그렇지 않다. 자유시장경제는 옳으냐? 그렇지 않다. 인간의 욕망이 맘껏 돌아다닐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이 시스템도 역시 빈익빈부익부를 초래할 뿐이다. 그렇다고 사회주의를 추종한다고? 수많은 commuinist들이 주창했던 자신들의 이론을 왜 그들이 권력을 잡으면 내팽개쳐버리는가? 정말 공평한 사회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그들의 이상과 이론은 온데간데 없고 왜 뒤에서는 비자금을 챙기고, 권력의 부스러기에 집착하는가? 왜 부동산 비리가 발생하고 로비자금이 드러나는가? 인간의 욕망이 그렇게 비루한 것이다. 인간의 비릿한 욕망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시스템 운운하는 자들은 믿어선 아니 된다.
예수님도 시스템에 목매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셔서 '한 사람'에게 집중했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이 시스템의 반전과 권력의 전복을 꾀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십자가의 계획에는 그러한 운동Movement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세상을 한꺼번에 초토화시키고 새롭게 ' 새 하늘과 새 땅'을 재창조하실 수 있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으신다.
예수님의 계획에는 '한 사람' One Man Vision뿐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이신데도 수천명, 수만명을 제자로 삼으시지 않고, 12명의 제자에게만, 소그룹에게만 집중하셨다. 그 한 사람, 그 한 영혼이 변화되는 것에 관심을 가지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의 비밀을 아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원대하고 거대하고 그로테스크하고 화려하고 명성과 인기와 권력과 돈이 팽창하는 운동과 기관과 기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안에서 태동하는 것을 원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운동movement를 주도하시지 않으셨다. 사람들을 모아서 뭔가 대단한 혁명을 일으킬 것을 사람들은 기대한다. 그게 인간이다. 그 사람이 '구세주'인 것처럼, 그래서 사람들은 그 한 사람에게, 그 지도자에게 올인한다. 당대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따랐고 예수님이 SNS를 했다면 수 많은 팔로워가 발생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람들을 가지고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 않으셨다. 사랑하는 제자들 옆에서 그들의 시행착오와 희비를 같이 나누시면서 그들의 영혼이 온전하게 성숙하기를 기다리셨고 그 제자훈련을 통해, 성령의 임재하심을 통해 그들이 전세계로 복음이 퍼지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수많은 운동과 수많은 시스템이 왜 오래토록 롱런하지 못하는가? 인간이 주도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사람에겐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을 예수님은 스스로 아셨다. 대통령선거가 다가오면 사람들이 좌, 우 진영논리에 의해서든 아니든 간에 자신이 선택한 사람이 아니면 죽을 것처럼 목매달한다. 사람에겐 소망이 없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계획을 믿고 우리는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할 뿐이다. 앞으로 우리가 대할 사회의 시스템이 자본주의가 옳을지, 사회주의가 옳을지 우린 알 수 없다. 어떠한 시스템으로 가든지 간에 그 안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다. 우리가 흔히 역사란 영어단어 History를 His + Story라고 해석하면서 역사는 '그의 이야기'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것이 옳으냐 그러냐를 떠나서 원칙적인 해석을 하자면, 역사는 하나님, 그리스도의 스토리이다. 역사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렇다면, 인간의 정치 역사도 때로는 좌충우돌이 있지만, 그 가운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어야 한다.
인간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인간을 너무 신봉하면 안 된다. 인간은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다. 북한의 교회가 왜 김일성에게 넘어갔는가? 김일성도 교회도 다녔다. 그리고 공산주의가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공평과 정의의 사회에 유사한 점이 있다는 생각에 넘어가지 않았는가?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가? 북한이 공산주의화 되면서 교회의 자유도, 교회의 존재도 이젠 꺼지는 호롱불이 되었다. 북한의 국민들이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가? 물론 북한의 공산화에는 여러가지 영적인, 정치적인 원인과 이유가 있다.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본질을 오해하지 마시길 바란다.
인간의 욕망이 정치가 되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과거의 한 때 '평양'을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렀다. '평양대부흥 운동'이 그냥 일어났겠는가? 그런데, 북한 교회의 지도자들이 김일성을 믿었기 때문이고, 이데올로기에 넘어간 것이다. 권력은 항상 욕망을 동원한다. 욕망이 자리잡으면 죄가 번성하게 된다. 김일성이 이야기한 그 공산주의가 진짜 민중, 국민을 위한 시스템이고, 정치였는가? 오히려 김일성 주체사상을 만들어서 세습정치를 하고 있다. 지구상에 이런 흉측한 시스템이 어디 있는가? 왕정정치도 아닌데, 한 인간을 신격화하여 세뇌교육을 시키는 나라가 바로 북한이다. 피눈물 흘리는 북한 동포들의 눈물이 쌓이고 쌓여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들의 죄를 회개하게 하시고 언젠가는 회복시키실 것이지만, 그 시간동안 얼마나 많은 고통과 아픔 속에서 그들이 지내야만 하는가? 김일성이 처음에 토지개혁한다면서 지주들의 토지를 나눠주자 얼마나 사람들이 환호했는가? 그런데, 결과는?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개인을 우상화하여 DNA체제로 나라를 정치한단 말인가? 그런데 그게 북한이 되어버렸다. 그게 세상이다. 고로 교회는, 교회의 지도자들은 특히 항상 정치적인 입장에서 지혜로워야 한다. 중립적일 수는 없겠지만, 지혜로워야 한다.
정치는 언제나 비루한 냄새가 난다. 정치 자체가 그럴 수 밖에 없고 거짓말을 반복할 수 밖에 없다. 겉 다르고 속 다른 게 정치인들이다. 한 입에서 두 말할 수 밖에 없는 게 정치판이다. 정치판 자체가 인간을 그렇게 만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왜 우리가 <골때리는 그녀들>의 편집주작 논란에 분노하는가? 스포츠예능에서 거짓이 튀어져나왔기 때문이다. 정치판에서 늘 거짓이 밥 먹듯 하는데, 그게 방송국 여자축구프로그램에서 나왔다는 게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조금만 더 자극적이고 드라마틱하게 편집하면 시청자들의 감정을 더 끌어당길 수 있겠다는 제작진의 욕망에서 시작된 것이다. 수많은 상을 타고 흥행몰이를 하고 수많은 선수들이 거기에 올인하면서 정말 스포츠의 진정성을 느꼈는데, 굳이 거기에다 또 욕망이 비집고 들어가야 하는가? 그게 인간사이다.
욕망 없는 인간이 어디에 있는가? 이번 대선에서는 대통령 후보들을 대하면서 정말 누굴 뽑아야 할지 다들 혼란스러운 느낌이 있을 수 있겠다. 선거때마다 다들 느끼는 감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선거를 포기할 순 없는 것이다. 누구를 지도자를 세울 것이냐? 지혜롭게 선택하되, 가벼운 말과 언어에 현혹되어 넘어가선 아니 된다.
진보주의의 역사관은 낙관적인 역사관이기 때문에 인간을 믿을 수 밖에 없다.
인간은 믿을 대상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대상이다.
인간의 본성, 본질 자체가 믿을 만한 그릇이 못 된다.
다윗이 사울에게서 쫓기는 와중에 겨우 몸을 사릴 수 있는 곳이 '시글락'이었다. 한 날은 자신의 부하들과 시글락으로 돌아왔을때 아말렉 군대가 아녀자들을 다 끌고 가버렸고 자신들의 보금자리가 초토화되어버렸다. 현왕인 사울에게 희망이 없음을 알고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이 다윗임을 믿고 따라준 수많은 팔로워들이다. 그런데, 그 팔로워들의 가족, 아내와 자녀가 다 포로로 끌려가버렸다. 그때 다윗의 부하들이 어떻게 행동했는가?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았는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다윗을 돌로 치고자 했다. 사람이 그렇다. 그 누구도 '자신의 가족의 안위, 자신의 자녀들' 문제에 반응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런 사람들을 탓할 수 없다. 그게 인간이다. 하지만, 다윗은 어떻게 했는가?
사무엘상 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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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이 위대한 것은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하는 훈련을 광야에서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성군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내 마음에 합한 자"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받지 않았던가!
역사의 주관자 하나님, 역사의 심판자 하나님
우리가 믿어야 할 분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시다. 그 분외에는 믿을 만한 존재가 없다. 위정자들에게 일시적으로 위임한 권력, 정치인에게 부여된 권력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다. 그들이 정치를 잘 못해서 백성들의 분노와 불평을 가져왔다면, 분명 그들은 역사의 심판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도 심판을 받을 것이다. 모든 선택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기독교의 구원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물으실 것이다. 그래서 '자유의지'가 중요한 것이다. 정치인들도 마찬가지이다. 막강한 권력과 더 무게감있는 자리에 앉았다면 거기에 걸맞는 섭정과 정치행위가 요구된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국민들의 심판은 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공의와 정의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의 시선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고', '인간의 폐부, 앉고 일어섬, 내 혀가 미리 떨리기 전에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우리의 의도와 우리의 생각과 본질과 중심을 판단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치의 권좌에 오르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보다 자신의 정치생명과 욕망에 더 충실하고자 한다. 그게 인간인가 보다.
성경적인 역사관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역사적인 안목이 요구된다. 불교는 '순환적인 역사관'이라고 해서 전생이 있고, 내세가 있다고 믿는다. 인간이 전생에는 동물이기도 했다가 식물이기도 했다가 그렇다고 한다. 그들이 그렇게 믿는 것은 자유지만, 그 믿음에는 하나님의 판단, 심판이 대기중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역사관은 정확한다. '직선적인 역사관'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출생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알파가 있으면 오메가가 있다. 그 시작과 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한다. 인간은 흙에서 와서 흙으로 가는 시작과 끝이 분명한 존재이고, 그 일시적이고 유한한 존재에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신 중보자가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 예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세상 만사가 내 뜻대로 되지 않고, 참담한 전쟁이나 기근이나 경제고나 대공황이나 재난이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그 가운데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것은 변함이 없다.
성경에서 '십일조'는 자신의 번 돈의 1/10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하지만, 로날드 사이더는 ‘십일조’에 대해서 "자기가 버는 양만큼 더 내야 한다"는 '누진적 십일조'를 주창하기도 했다. 단순히 십의 일조만 아니라 십이조, 십삼조 등등을 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게중에는 구약의 '십일조'는 율법적이며, 문자적으로 폐기되었다고 주창하면서 '문자적 십일조'를 행하는 것을 거부하기도 한다. 오히려 1/10만이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10/10 전체가 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면서 '문자적 십일조'의 실행이 아니라 자발적 십일조를 강조하기도 한다. 하지만 십일조는 굉장히 중요한 신앙생활의 원리원칙이다. 우리의 경제생활 가운데 십일조를 통해서 특별한 경험과 체험을 한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저는 근본적인 십일조의 원칙을 준수하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십일조는 나의 소득이 전부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고백하고 그것을 다 드려야 하지만 그 중에 상징적으로 1/10을 드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1/10은 하나님께서 드렸으니 나머지는 내 욕망대로 다 사용해도 된다는 주의는 잘못된 것이다.
믿음은 라이프스타일 자체이다. 자신의 믿음대로 행해서 결과를 시험해 보라! 하나님의 말씀을 경직되게 받아들이지 말고 sensitive하게 받아들이면서 그 말씀logos를 체험하는 게 신앙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끊임없이 광야에서 불평하면서 원망했다. 고라자손들과 250명의 지도자들이 그 결과로 땅이 갈라져, 지진이 일어나 그 일당들을 삼켜버리는 저주를 받았다. 그런 사건이 있고 나서도 백성들의 원망은 멈추질 않았다. 하나님은 웬 걸? 12명 중에 10명의 정탐꾼들의 불신의 행위와 그에 따른 대다수의 백성들의 불신으로 인해 다시 광야로 들어가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40일 동안 정탐했으니, 1일을 1년으로 간주해서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니 백성들의 불평이 터져나왔다. 그게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에게 번져갔다. 그리고 지파들과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모세와 아론만이 지도자냐?'라고 하면서 complain이 하늘을 찌른다. 그때 하나님께서 지도자들의 지팡이를 가지고 오라고 하신다. 그 12개의 죽은 지팡이 가운데 오직 하나의 지팡이 바로, 아론의 지팡이에서만 싹이 나오게 하셨다.
인간적으로 어떻게 보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론을 세우셨다는 것이 중요한 현실이다. 하나님의 권위이다. 우리 모두가 제사장이나 레위지파는 아니지만, 신약시대로 넘어와 베드로는 '너희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라고, '만인제사장설'을 이야기했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예배자, 제사장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죽고 말라비틀어진 지팡이에서 싹이 날 수 있다. 우리의 빠듯한 경제생활과 궁핍한 재정상황이지만 불평과 원망을 털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자 영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한다면 하나님께서 싹을 틔워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권위이다.
이번 대통령선거에서도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을 지켜주실 것을 믿고 투표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내 맘대로 움직이시는 노예(종)이나 비서나 알라딘 램프의 지니가 아니다. 하나님은 도깨비방망이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하나님 그대로 지존하신 분이시다. 그 분의 주권과 섭리를 인정하는 것이다. 대통령 후보로 나온 분들이 맘에 들지 않는다. 그런 후보가 나올 수 밖에 없는 게 우리 나라 정치의 현주소라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정치인들과 국민들의 정치적 수준과 안목이 그것 밖에 안 되는 거다. 물질적으로 아무리 풍요롭게 진화하고 발전했다고 해도 사람들의 의식 수준과 생각과 사고방식의 진화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의 정치가 더 업그레이드 되어질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의 국민의 수준이 업그레이드되어져야 한다. '눈 감고 아웅'하는 식의 정치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정치판이라는 것을 지도자들이 깨달아야 한다. 이 모든 것도 주의 긍휼이 필요하다.
기독교의 역사관은 끝이 있는 역사관이며 직선적인 역사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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