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근본적인 질문
1.2. 인간이란 무엇인가?(인간관)
과거에 군대엘 가면 인간은 10종이라고 했다고 한다. 진짜 '라떼는 말이야...' 같은 소리이다. 하지만, 과거에는 진짜 더 심각했다. 쌀 1종, 개 5종...인간은 종의 분류에 따라 10종이라고. 전두환 정권 시절의 삼청교육대의 아찔함은 정말 역사의 비극중의 비극이다. 요즘 같이 인권을 강조하고 갑질에 대해 법적인 제재가 가하는 문화와 시스템, 조치는 굉장히 고무적인 것 같다.
기독교는 창조론을 주장하고 믿는다. 창조론이 무너지면 성경의 권위가 무너진다. 창조론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다고 할 수 있을까? 이해할 수 없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왜 신학을 했을까? 그냥 철학이나 인문학 놀이를 하지 왜 신학공부를 하는 것일까? 과거에 그런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인간의 스타일이 다르듯이 신앙의 양태도 다를 수 있고, 신학도 다를 수 있는 것이다. 교리가 완전히 어긋난 이단은 또 다른 문제이고, 배제되어야 할 대상들이지만, 예전에 강의를 들었는데, 대천덕 신부님께서 그런 이야기를 하셨다. 신학 스타일로, 근본주의자이든, 보수주의자이든, 자유주의자이든...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나는 그 맥락을 높이 평가하긴 했지만, 과연 내가 가능할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창조'(말 그대로, 창조-타락-구속)라는 복음의 핵심을 비켜가는 사람을 과연 그리스도인이라고 지칭할 수 있을까? 내 생각은 그렇다.
조금 더 나아가면,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도 여러가지 스타일의 군이 있었다. 시몬 베드로 말고 또 다른 시몬(셀롯)이 바로 행동주의자, 열심당원이었다. 마태(레위)는 세리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혈세를 받아서 로마에 갖다 바치는 매국노였다. 우리나라로 치면 당장 독립군에 의해 쳐 죽임을 당해야 할 친일파같은 부류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부르셨다. 일반 대중들은 의아했을 것이다. 제자들 안에서도 굉장한 갈등과 이념 논쟁이 있을 수 있었다. 정치판에서 좌파니 우파니 중도파니 하면 아무리 신앙이 좋아도 정치 이야기하면 신앙이 쑥 들어가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정치가 무서운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무서운 것이다. 인간이 이데올로기에 갇히면 두 눈이 멀어지게 된다. 아무것도 뵈는 게 없게 된다.
넷플릭스에 최근에 개봉한 웹드라마 <지옥>을 보면, 새진리회도 그러하지만, 화살촉 이 친구들은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다. 정의를 외치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신의 정의, 신의 심판을 운운하면서 인간들의 죄를 자신들이 나중에는 앞서서 제스쳐를 취한다. 심판자 역할을 대행하는 에이전시가 되어버렸다.
인간의 어떤 죄는 심판할 수 있고, 인간의 어떤 죄는 심판할 수 없단 말인가? 자가모순을 가진 인간 존재 자체가 누굴 심판한단 말인가? 이데올로기에 갇히면, 소위 말하는 도그마dogma에 갇히면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게 무서운 것이다. 중세 시대의 마녀사냥도 마찬가지이다. 기득권, 헤게모니, 권력, 재물, 돈, 욕망, 이데올로기에 중독되거나 갇히면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차를 타고 가면서 문득 눈에 들어온 현수막의 문구가 있었다.
"속도를 늦추면 사람이 보입니다."
인간의 자기 안에 있는 어떤 것의 속도가 너무 빠르면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넷플릭스의 <지옥>의 화살촉은 자신들의 요구와 욕망에 갇혀서 모든 사람들을 심판의 대상으로 여긴다. 어처구니가 없지 않는가? 새진리회는 자신들의 기득권과 해석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대중들을 선동하고 쇼를 벌인다. 거기에 사람은 없다. 단지 자신들의 게토ghetto만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기독교에서 인간은 ‘고귀한 인격체’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이다.
이세상의 모든 삼라만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자연 환경과 동식물들도 그러하다. 하지만, 사람만은 하나님이 친히 지으셨다. 특별한 하나님의 터치가 묻어 난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인류의 대표자, 최초의 인간, 아담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청지기로 세우셨다. C.S. 루이스였던가? 독서에 대한 이야길 하면서 인간만이 책을 읽을 수 있고 배울 수 있고 사유할 수 있다고 했다. 동물들에겐 책이란 것이 주어지지 않았다. 쥐가, 원숭이가, 코끼리가 무수한 많은 동물이 책을 읽고 배우고 학습하고 그러면 그들도 인간의 지혜를 추구할 수 있을텐데.....C.S.루이스의 탁월한 문학적 상상력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간과 동물은 현격한 차이가 존재한다.
"한 사람의 생명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
라는 이 말은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이 그 어떤 것도 대별되어짐을 이야기한다. 다른 동물들과는 다른 대별점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 마리의 강아지가 온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시지 않았다. 사람이 제일 소중하다.
인간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고, 그 사랑을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해야 할 소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영화 <싱크홀> 이야기를 잠깐 해 보자.
영화에서 5층짜리 빌라가 부실공사로 인해 싱크홀에 빠져버렸다. 옆 집 장수빌라인가 그 건물도 기울어져 있어 잘못하면 또 다른 재앙을 가져올 수 있다고 진단한다. 주거인들이 모여 회의를 벌인다. 싱크홀에 빠져 있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일단 장수빌라의 건물을 인위적으로 내려앉혀야 한다고 안전대책 119본부에서인가 이야기한다. 그러자, 주민 중에 한 사람은 안 된다고 한다. 어떻게 집을 구했는데, 우리는 어디가서 살라고 하면서 하소연한다. 그러자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싱크홀에 빠진 사람들의 안전과 목숨보다 자신들의 안위와 생계가 더 걱정이었던 것이다. 그때 차승원이 5층 옥상에 있다가 싱크홀로 빠진 것을 두 눈으로 선명하게 목격한 노인은 대충 이렇게 말한다.
"나는 5층 옥상에 싱크홀에 빠져가는 그 친구(차승원)의 두 눈동자와 마주쳤어. 그 친구가 떨어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하게 보았다고. 나는 이 집을 사기 위해 20년이란 세월을 일했어. 하지만, 내가 만약 그 친구를 구하지 않는다면 천벌을 받을 것 같아!"
이 노인의 진정성있는 고백과 호소로 인해 장수빌라 건물도 밑으로 내려앉히게 된다.
아무리 우리가 경기가 어렵고, 부동산 대란이고, 대한민국이 헬지옥이라고는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분명히 기억해야 할 사실은 '사람의 생명이 가장 귀하다'는 것이다. 그 인간의 생명, 영원한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지 않았는가? 인간의 눈에는 이 사람은 되고, 저 사람은 안 되고 그럴 수 있다. 화살촉처럼 죄인을 단죄하는 그런 비판과 정죄가 있을 수 있지만, 그 판단과 그 비난은 궁극적으로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내 자신이 가장 먼저 받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걸 아는 것이 복음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다.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의 죄를 들추고 단죄하고 욕하고 비방하는 일에 선두에 서는 사람은 정말 그 사람이 복음을 제대로 경험했는지 묻고 싶다.
이 땅 위에 죄인 아닌 사람은 없다. 상대적인 판단으로 사람을 단죄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인 심판을 받을 것이다. 사람은 그냥 사람일 뿐이다. 사람은 신이 아니다. 심판자judge가 될 수 없다.
자주 예로 드는 비유가 있다.
63빌딩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라. 거기에 보이는 사람들의 모양과 스타일과 형태는 점에 불과하지 않을까?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땅에 거하는 우리를 보실 때 그러하지 않겠는가? 네 죄가 많고 내 죄가 적고...아니다. 죄는 죄일 뿐이다. 죄의 경중은 중요하지 않다. 모든 심판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신다. 우리는 사랑만 하면 된다.
결론으로 말하자면, 인간론이 변하면 삶이 달라진다. 하나님께서 나를 목적 있게 지명하여 부르셨다는 계획을 안다면 우리의 삶이 분명이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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