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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기독교세계관과 영성

기독교세계관과 영성-기독교세계관의 내용 1.4 도덕관(도덕의 기초)

by Message.K 2021. 12. 16.



1.4 도덕의 기초는 무엇인가?(도덕관)




종교는 대체적으로 윤리와 도덕의 힘을 입고 있다. 종교가 위대해 보이는 것은 도덕의 힘, 윤리의 힘이 강력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세상과 똑같은 타락의 옷을 입은 종교를 향해 사람들은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할 것이다.  

요즘 동성연애, 성소주자의 젠더gender 이슈가 살짝 꺽힌 분위기이지만, 여전히 한국 사회는 과거와는 달리 동성연애에 대해 굉장히 관대해진 분위기이다. 이정훈 교수의 저서를 보면, 젠더가 ideology가 된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정치적 우파, 좌파를 따지지 않았음 좋겠다. 그것은 자신의 정치적 성향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좌익 이데올로기가 슬로건으로 내거는 주된 이슈가 '젠더'와 '환경'이다. 물론 이 대목에 대해선 더 공부해 볼 여지가 있겠지만, 대충 내가 받은 인상은 그렇다.

나는 보수교단의 목사로서 성경의 입장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혹여나 동성애에 대한 반대의견이나 다른 의견이 있다고 해서 나의 글이 불편하게 읽힐 순 있겠지만, 내가 표현조차 거부당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교회의 지도자요, 목사는 기독교의 텍스트인 성경에 근거에 설교하고 가르치는 업을 가진 직종이다. 세상이 뭐라고 하더라도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바를 가르치기 위해 세상의 직업이 아닌 성직자의 길을 선택한 사람이니 이 글을 읽는 이들 중에 오해는 없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기독교 세계관' 강의인데 혹여나 비그리스도인이나 불신자, 이념이나 사고가 다른 이가 특별히 오늘 기독교 세계관 - <도덕관>-이란, 이 글을 읽을 때 받을 언쨚음에 대해 내가 미리 언질을 할 뿐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절대 권유하거나 제안하지 않는다.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권위로 우리에게 명령한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숨막히게 만들고 질식하게 만들어 인간을 고통의 낭떠리지로 떠미는 종교도 아니다. 진작 기독교가 그러했다면 난 신앙을 포기했고, 신학도, 목사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명령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윽박지르지 않으신다. 신실하신, 친절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신다. 자신의 바라는 계획과 길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만약 성경의 하나님이 공포와 분노의 신이었다면, 죄를 지은 세상과 인간계를 향해 단박에 심판하시지 뭐 할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겠는가? 당신 자신의 고통스런 가슴을 부여잡고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만들었겠는가? 그건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배려이고, 하나님의 친절이고, 하나님의 긍휼이다. 당신의 아들, 예수를, 당신 자신을 십자가의 심판을 받게 하심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심판이 아닌 용서를, 회복을, 사랑을 보여주시고자 하신 것이 바로 기독교의 핵심essence임을 기억하라!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대한민국도 이제는 성소수자들의 결혼과 가정을 꾸리고 애기를 입양하는 이슈가 튀어져나오고 있다. 트렌스젠더인 하리수의 신혼생활과 결혼이야기가 연예계의 뉴스거리가 되고 사람들은 그것을 쳐다보고 있었던 시간이 좀 되었다. 미국이나 유럽의 정치지도자들은 동성애자들을 위한 배려를 하지 않고서는 선거에서 이길 수가 없을 정도이다. 동성연애 결혼을 주례하는 목사들도 이젠 많다. 이 '동성연애자, 성소수자의 결혼식 주례'문제 때문에 교파가 나뉘어진다. 주례를 할 수 있다는 쪽과 주례를 할 수 없다는 쪽으로 말이다.



나의 입장은? 당연히 '성소수자의 결혼식 주례는 안 된다'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남성과 여성을 통한 인격적, 생물학적인 결합이 결혼이다. 그리고 그 가정이란 생태계를 통해 인류가 번성하고 뻗어 온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조합이 아닌, 동성끼리의 결합에서 아이가 생물학적으로 태어나게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창조의 질서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세계가 자신의 원리와 형식에 의해 굴러가길 원하신다. 물론 아무리 인간이 선하다고 해도 인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을 완벽하게 구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인이고 욕망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걸 아담(제1 아담)이 실패한 것을 보여줬다. 아담, 한 개인이 실패한 것이 아니고 인류 전체의 대표선수, 대표주자인 아담이 실패한 것이다. 인간은 다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욕심과 죄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실패를 만회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 바로 제2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의 타락하고 찢어지고 깨어진 세상을 다시 품으시기 위해, 인간들을 다시 끌어안으시기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하신 '원형'을 하나님께서 보존하고 계발하고자 하셨다. 물론 하나님께서 세상을 타락시키지 않고 오염되지 않게 하시기 위해선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음 죄가 세상에 유입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진공 상태의 세상을 원하신 것이 아니라 자율의지,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을 통한 교감과 교제와 그들의 자발적인 경배를 받으시기 위해 우리를 이 땅으로 보내신 것이다.


그런데, 가장 심각하게 대립되는 윤리가 바로 '성sex윤리'이다.


그리고, 그 성윤리 중에서도 더 심각한 것은 남자가 남자끼리, 여자가 여자끼리 부끄러운 짓(성관계)를 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의 질서를 역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때때로 종과 종을 섟는 것도 싫어하셨다. 모세오경에 보면 인간과 짐승(동물)과의 '수간'(
獸姦, sodomy)도 혐호하셨다. 지금으로부터 몇 년천 전의 기록인데, 그 당시에도 동성애가 있었고, 짐승과 성교하는 이들이 있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정결하고 거룩하고 깨끗하고 정갈한 것을 원하신다. 레위기에선 요즘 즐겨먹는 돼지고기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어선 아니되는 종이었다. 그만큼 '되고, 안 되고'를  정확히 구분하기를 원하셨던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셨다. 현대의 기독교는 돼지고기, 우리가 좋아하는 삼겹살을 즐겨 먹는다. 구약시대의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지는 않는다. 이 대목은 해석의 여지가 있긴 하다. 





중요한 것, 하나만 기억하자.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성윤리는 당시 대가족 제도를 지닌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동체의 근간을 이루는 토대이기도 하다. 성경에 보면 근친상간의 문제도 다룬다. 장모, 사위, 딸, 이모, 고모, 숙모...그런 친인척간의 섹스문제도 허다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당시 초기 이스라엘은 유목민nomad적 라이프스타일이었기 때문에 천막을 치고 살았을 것이다. 그러니깐 오늘날처럼 정착된 주거지가 없다. 그러니 식구가 대식구이다 보니 성적인 노출은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천막안에서 어쩌다가 근친상간이 이뤄지기도 했을 것이다. 야곱의 장남, 르우벤이 아버지의 첩, 빌하(엄마4 쯤 되는)를 범한 것이다.


이스라엘 계보에서 장남은 굉장히 큰 축복이요 특권을 가진 포지션이다. 다른 아들들 보다 2배나 더 많은 아버지의 기업, 유산을 받을 수 있는 특권이 있는 자리이다. 하지만, 르우벤은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이기지 못해 가정의 질서를 해치고야 만다. 이로 인해 그는 물리적인 장남이지만, 모든 특권과 축복을 박탈당한다. 단기적으로 요셉에게 장자의 특권이 갔고, 장기적으로 유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란 엄청난 영적인 축복을 가져가게 된다. 르우벤도 안 그래도 배다른 형제들도 많고 새엄마도 많은 상황 가운데서 아버지의 젊은 첩에 욕망의 눈이 멀어 선을 넘은 것이다. 아버지의 권위에 대적한 죄에 해당된다. 성경이 성윤리에 대해 엄격한 것은 질서의 하나님을 대변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다시 돌아와서,
동성애는 상황윤리이고 상대주의이다. 이것은 죄악이다. 인간의 본성이 타고난 것을 정죄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역행하고 순리대로 쓰기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분명한 심판이 있을 것이다. 



 또한, 오늘날은 비정상적인 사랑을 미화시킨다. 한때 유행했던 <부부의 세계>는  불륜막장드라마이지만, 결론은 보편적으로 마무리했다. 불륜을 저지른 남편(박해수 분)이 잘 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요즘 시대는 사랑하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법’, 사랑의 법이 모든 것을 용납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요즘 정치판에서도 자주 회자되는 '내로남불'...

  사랑이란 이름으로, 로맨스란 이름으로 rename하지만, 간통은 엄연한 죄이다. 그런데 요즘 드라마 보면 전부 불륜이다. 바람피우는 것은 필요악이고...배우자가 있어도 정부나 애인이 있고 그것을 사람들을 즐겨보니깐 PD들이 그렇게 만들지 않겠는가? 가정을 지킬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보다 그 가정에 대한 생각보다 자신의 감각적 쾌락과 감정에 더 몰입하는 현시대이다. '오피스 와이프', '세컨드 와이프'라는 말이 돌아다니기도 한다.

오늘날 포스트모던한 시대가 되어 포스트모던한 사고방식이 팽배하고 있다. 모더니즘은 고리타분하고 진부하다고 던져버리고 모든 것을 해체시키는 시대가 포스트모던 시대이다. 이젠 도덕조차도 해체시키고자 한다. 성윤리도 해체시키고자 한다. 그것이 사탄의 전략이다. 

 ‘내가 불행한데 내가 가정을 돌볼 수 있느냐?’(개인적인 이기주의의 발로).

인제 사람들은 ‘의식주’ 때문에 고민하지 않는다.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되었다. 그러니 이제 사람들은 ‘쾌락’을 위해,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머든지 하는 시대가 되었다. 남자친구 없는, 애인 없는 주부가 희귀할 정도의 세상이 되었다.

오늘날의 CF 신시대는 어떠한 헌신도, 종속도 꺼리고, 감성대로 움직이는 무책임한 시대, 세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가족의 개념도 상실해버렸다.
어느 잡지에서 본 문구이다. ‘사랑은 감정대로, 결혼은 개성대로!’



‘도덕적인 감각’이 있어야 한다.
미국은 책 한권을 카피하는데도 허락이 필요하다. 모든 찬양대원이 다 악보(책)을 구입한다. 우리나라는 불법복제왕국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다. 그런 불법복제 때문이라도 '클라우드' 시대가 도래한 지도 모를 일이다. 이젠 '구입'이 아니라 '구독'을 해야 한다. 소프트웨어도, 문서도, 자료도, 데이터도 '매월 구독'하는 개념으로 간다. 예전에 구입시대에는 복사가 가능했는데 말이다.


도덕적 감각이 없으면 시대가 망한다.
그 화려했던 로마제국이 망한 것은 ‘도덕이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성적 타락이 문제였다. 소돔과 고모라가 왜 멸망했는가? 성적 타락이었다. 하나님의 사자를 남자들이 끌어내어 관계를 가질려고 롯을 보채지 않았는가? 정상적인 관계가 아닌 동성애sodomy였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의 원인은 '동성애'였다. 



구약성경에 보면,
사사기 시대에 한 노인의 이야기도 기억하지 않는가? 레위인을 집으로 들였는데 그 레위인에겐 첩이 있었다. 자기 나름대로 그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한 노인은 레위인을 보호하기 위해 그 첩을 그 동네 불량배들에게 내어준다. 밤새도록 윤간을 당하고 첩은 죽는다. 레위인은 아침에 이 광경을 보고는 충격을 받는 것 같지만, 오히려 레위인이 성경을 읽는 독자들에게 더 큰 충격을 선물한다. 오히려 레위인은 살인영화나 소설을 많이 봤는지...그 여인의 신체를 조각조각 잘라서 12지파에게 보낸다. 이게 ‘아나토미anatomy’, ‘해부학교실’ 이런 괴기, 살인, 첩보영화에서나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의 이야기이다. 시대가 악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원래 악하기 때문에 인간 안에서 이러한 것이 튀어 나오니깐 구약성경에 그런 스토리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말은 인간 안에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 안에는 '죄'라는 쓰레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죄 때문에, 인간이 가진 욕망으로 부터 출발한 '죄' 때문에 세상이 꼴아박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미국의 극작가 테네시 윌리암스가 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종착지destination는 '묘지'일 수밖에 없다. 

야고보서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결국 인간의 모든 딜레마는 '욕심'이다. 정치인들이 왜 권력의 자리에 가면 타락하고 문제를 일으키는가? 결국 욕심의 문제 때문이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는' 인간 세계임을 하나님은 아셨기 때문에 '새 것'을 보내시기로 작정하셨다. 그 '새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요한계시록 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예수님께서 골고다 십자가로 가시면서 채찍에 맞으시고 온갖 저주와 욕설을 받으신다. 영육간의 총체적인 고통의 지경에서 십자가의 길을 가실 때 이런 대사를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내뱉으신 대목이 있다.

"어머니, 제가 세상을 새롭게 할 것입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다. 어떤 정치인이나 유명인사, 인플루언서가 외치는 슬로건이나 선전문구에 혹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냥 인간일 뿐이다. 내년이면 대통령 선거가 치뤄질 것이다. 누굴 뽑을까? 인간에겐 기대할 것이 없다. 그냥 기도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최적인 인물을 사용하시길 기도할 뿐이다. 그 누구를 데려와 세워놓아도 내 구미에 맞게 정치할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내가 아닌 이상 그 누구도 내 마음을, 내 욕망에 딱 부합한 인물은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 새로운 것, 선한 것이 없으니 '선 그 자체'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명심하라!



 초등학교 시절, 흑백TV가 대세였던 시절에 AFKN을 한번씩 보았다. 영어 때문이 아니고 호기심 때문이었는데, 특이한 프로그램이 있었다.
 미국에는 '일부다처제'를 옹호하는 무리들이 있는 것을, 그들이 방송하는 것을 보았다. Polygamy-일부다처제의 프로그램(몰몬교). 희한했다. 

  성경속의 일부다처주의자들이 좀 있다. 그런데, 정부인과 첩이 있는 집안에는 항상 질투와 갈등이 존재한다. 아브라함의 가족사, 야곱의 가족사-요셉은 배다른 형제들로 말미암아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었다. 배다른 형제가 무려 10명이었다. 부모간의 갈등은 아이들의 갈등으로 전이된다. 야곱의 가족들도 장난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윗왕의 압살롬 쿠데타는 왜 일어났는가? 배다른 아들이 배다른 여동생을 흠모했다. 배다른 아들이 상사병이 걸렸다. 암논이 다말을 너무 사랑해서 화병이 났다. 그래서 그 욕망을 못 이겨 그녀를 범한 이후에 오히려 미움으로 변해버렸다. 희한한 일이다. 왜 암논은 여동생 다말을 성적으로 정복한 후에 사랑이 더 커지지 않았을까? 사랑한다매? 그런데, 사랑한다고 해놓고 섹스해서 범해놓고는 버려버린다. 자신이 아버지 다윗 보기에, 가족들 보기에 실수 아닌 실수를 했다고 생각한 걸까? 정말 사랑했다면 책임져야하지 않는가?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 그건 욕망libido에 불과했다. 풀어헤치고 나니 허탈하니깐, 오히려 더 무관심하고 방치해버린 것이다. 이런 남자들 많을 것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밀당을 잘 해야 한다. 너무 많은 패를 보여주면 남자는 시시해하는 이상한 성질이 있는 듯 하다. 안 그런 사람도 많은데, 그런 사람도 많다는 것을 염두해 두시길! 남자는 더 이상 정복할 게 없는 여자에 대해 안도감을 느낀다. 그래서 결혼하면 남자들이 아내에게 전에 보여준 첫 사랑이 식어버린 것이지도 모를 일이다. 근데 인간이 매너리즘의 존재이지 않은가! 익숙함과 타성에 잘 젖는게 인간이다. 어쩔 수 없다. 


친여동생 다말의 이런 충격적인 사건에 충격을 받은 오빠, 압살롬이다. 상처받은 압살롬은 암논을 복수할 기회를 참고 기다렸다가 암논을 해치운다. 그러다가 다윗은 도망간 압살롬을 다시 궁으로 불러들이지만 용서를 할 수가 없었다. 아들은 모두 아들이고 자기 자식이었다. 하지만 죽은 아들에 대한 마음 보다 살아있는 아들 압살롬에 대한 용서가 필요했지만 다윗은 이를 방관했다. 그로 인해 완소남 압살롬은 쿠데타의 장본인이 된다. 결국 압살롬은 완소남의 매력포인트였던 긴 헤어스타일로 인해 나무에 걸려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이 모든 것이 다윗왕의 수많은 아내와의 결혼 때문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이스라엘의 역사 뿐 아니라 우리나라 왕조의 이야기도 이런 것은 허다하다.

  의자왕과 3천 궁녀, 솔로몬의 1천명의 부인...와우!!!
성경의 역사도, 인류의 역사도 우리에게 인간의 질서에 대해 명확하게 가르친다.

 

(잠 31:3)네 힘을 여자들에게 쓰지 말며 왕들을 멸망시키는 일을 행치 말지어다

 

   현재의 타락은 과거의 성경 속에서도 있어왔다. 인간은 다 죄인이기에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도덕적 감각과 도덕적 근육을 키우지 못한다면 직장생활하면서 여러분은 수많은 유혹에 노출될텐데 과연 어떻게 그 모든 시험test, temptation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그런데, 분명히 기억할 것은 우리는 성경의 모든 말씀과 원칙을 다 지킬 수 없다. 우리는 지킬 능력이 없다. '내 속에 내가 너무나 많아'라고 했던 하덕규 시인의 고백처럼, '나'라는 자아가 '하나님의 법, 말씀'과 부딪히면서 갈등에 갈등을 낳는다. 도덕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죄를 지을 수 있다.


하지만, 마르틴 루터의 말이 아주 좋은  모토motto가 될 수 있겠다.

'새가 우리 머리 위로 지나갈 수는 있지만, 우리 머리 위에 둥지를 틀게 해선 안 된다'

 
우리는 수많은 윤리적, 도덕적, 성적인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인간적으로 볼 때 크든지 작든지 간에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나아와 회개하고 자비를 구하면 인간사에선 어쩔 수 없는 심판은 받을 수 있을진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선 온전한 용서가 가능하다. 성경은 그 용서의 하나님을 그려준다. 남편이 다섯 명이나 있었는데도, 또 다른 남자와 살고 있는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가신 분이 바로 '새 것', 이신, '새 사람',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지만, 원칙적으로 기억하자.

기독교세계관의 모든 도덕의 근원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그 원리를 '성경'을 통해서 보여주셨다. 그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원리들을 잘 해석하여 우리의 삶에 제대로 적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도덕은 분명 힘이 있다.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이들은 성경의 권위에 의거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다. 물론 도덕'적', 윤리'적'-tic이란 말이 다소 걸리긴 하지만 말이다. 

 





*. 제가 하고자 한 이야기에 대해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본질과 핵심을 제대로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읽어주셨다면 너무나 감사합니다. 너무 길어졌습니다. 그대로 도움 되셨다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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