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기독교 세계관의 종류(역사적 고찰)
기독교 세계관의 유형은 역사적으로 몇 가지의 유형을 띠었다.
● 분리(Separation)모델
세상을 너무너무 싫어하고 미워해서 오히려 세상을 등진다. 분리모델로는 세상을 견제할 수가 없다. 중세시대로부터 물려받은 수도원은 이제 세상과는 담을 쌓고 ‘수도하는 것’에만 몰두하고 있다. 세상을 견제하고 중보하는 것이 수도원의 의무이기도 한데 말이다. 한국에 캐톨릭 수도원이 110개가 있다(90년대 통계). 기독교수도원은 한 자리 숫자에 불과했다. 지금은 얼마나 생겨난 지 모르겠다.기독교 사상가이자, 철학자인 프란시스 쉐퍼가 세운 '라브리'공동체는 분리되었지만, 담을 쌓아두진 않았기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지 않았나?
...예수원/ 대천덕 신부...> 비록 분리되었지만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좋은 수도원이다. 도전과 사랑을 주고 있다. 기독교대학설립동역회CUP.
분리모델은 영적 우월감과 정신적인 우월감에 사로잡혀 자만의 발로가 될 수 있다. 지금은 좋은 형식만 남아 있을 뿐이다. 바리새인들이 그러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경건의 본질은 없는 위선자들을 pharisee라고 한다. 하지만 그들이 처음부터 그러하지 않았다.
바리새인의 기원은 B.C 2세기 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볼 수 있다. 바로 '하시딤(히브리어 : חסידות, hasidut, "경건"경건한 사람들이란 뜻)' 운동에서 시작된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의 헬레니즘에 대항한 순수 구별(구분) 운동이 바로 그 모태였다. 세속을 멀리하고 경건한 율법주의적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고자 하는 순수한, 고결한 운동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들은 껍데기만 남은, 무늬만 경건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 의(義)에 사로잡혀 ‘자기혼자만 잘 믿는다’고 생각한다. 당시 율법에 대해서 모르는 일반 백성들, 문맹인들에 대한 우월감에 사로잡힌 채 그들을 ‘암하레쯔(땅의 사람들)’이라고 비난하고 조롱했던 것이다. (*근데 장신대 동아리에 '암하레쯔'가 있는데 이 용어가 거기선 성소수자들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니...참 안타까운 일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진짜 깊은 교제가 필요하다. 모세가 항상 회막을 사람들과 멀리 떨어진, 진 밖에서 친 이유가 있다. 하나님과의 더 깊은 교제를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는 항상 진 안으로 들어와 생활한 지도자였다. 세상을 정복하기 위해선 세상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늘 충분히 묵상하고 짧지만 늘 기도하는 생활을 하면 우리 안에 이러한 건전한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들과 고민들을 나눌 수 있는 그룹, 동역자들이 있어야 한다.
한 20여년 전에, 낮은 울타리 운동이라고 해서 그리스도인들끼리 향유할 수 있는 문화모델이 등장했다. 대부분의 한국교회가 그 당시 이런 모델을 취했다. 이상한 모델이다. 세상을 배제한 채 기독교인들끼리 즐기고 난리인 모델이다. 존 스토트는 이러한 현상을 그의 설교에서 ‘둥글게 원을 그리고 둘러 앉아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는 모양새’라고 지적했다.
이 모델은 성경적인 모델이라 할 수 없다. 세상을 본받지 말라는 말씀은 맞지만 우리는 ‘교회 속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예전 뉴스이지만, 홈에버, 이랜드 회사의 문제점이 터졌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섬으로 말미암아 이랜드의 박성수 사장에 대한 좋은 이미지가 다 퇴색되었다. 박기성 집사님 왈,
'130억이나 되는 십일조(세금?)를 차라리 언제 잘릴지 모르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용 조건과 변화에 신경을 썼더라면 이런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세금 제일 많이, 정직하게 다 내는 이랜드 회사라는 명예는 추락하여 버렸다. 기독교 재단과 기독교 기업인들이 재정적인 부분에서 이 분리모델을 은연중에 잘못 취사선택함으로 말미암아 화를 불러 온 것은 아닐까? 마음이 답답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의 이랜드는 어떤지 잘 모르겠다.
분리모델의 장점은 기독교의 본질적인 영성에 더 집중할 수 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어떤 식으로 세상에 영향력을 미칠 지에 대해 고민할 필요와 지혜로운 대안이 요구된다. 자기들끼지 모여 거기에 몰입되어버리면 '분리'모델의 단점만을 추종하는 셈이다.
● 동일시(Identification)모델
세상을 알아야 한다고 외치는 자들은 대부분 타락했다.
류시화의 시 중에 '소금인형'이란 글을 안치환이 <소금인형>이란 노래로 불렀다. 그 가사에 보면 '바다의 깊이를 알기 바다로 간 소금인형'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바다 속에 자신의 정체성이 분해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물론 바닷물을 짜게 한 것은 소금이지만, 비유가 그렇다는 의미이다.
헤르만 헷세의 ‘지와 사랑’에서 ‘골드문트’처럼 말이다. 골드문트는 나르치스의 권유와 충고를 뿌리치고 세상으로 향했다. 세상을 따르고 추구하기 시작하면 세속화 될 수 밖에 없다. 세상이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을 맘껏 쫓고 타협하고 추종하는 모델. 기독교 공동체가 전체를 지배할 때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다. 독일교회 모두가 히틀러를 추앙했다. 그래서 ‘히틀러의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이라고 스스로 자위했다. 제 2차 세계대전은 황폐해진 독일,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인들의 뭉개진 자존심과 날로 늘어나는 실업률, 전쟁에 지게 됨으로써 떠맡게 된 전쟁보상금을 갚아야 했다. 독일은 진퇴양난의 상황에 있었다. 이 때 아돌프 히틀러는 교묘한 연극과 연기로 독일인들의 마음을 하루 아침에 사로잡았다. 거짓말의 천재, 괴벨스도 거들었다. 그는 자신의 비밀결사조직을 통해 정치적 권력, 수상에 지목하게 되고 훗날 최고의 독재가가 된다. 그의 잘못된 독재정치는 독일인들의 변질된 신앙심을 민족주의로 전환하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인류 최대의 진혼곡이 2차 세계대전을 통해 울려 퍼진 것이다.
오늘날도 이러한 우를 범할 수 있다. 기독교인이 하는 정치는 하나님 나라의 정치라도 동일시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뼈저리게 느꼈다. 김영삼 장로는 지금 어디에 가 있는가? 정부에게서 받은 상처, 기독정치인들의 비리와 탈선과 타락으로 인한 세인들의 비판을 철저하게 감수하지 않았던가?
지혜가 필요하다. 기독교인이라고 모두 하나님의 정치를 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 정치인을 폄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적인 세계관과 관점을 지닌 비그리스도인이 정치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정치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이 동일시모델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자신은 죄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죄인의 반열에 서서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은 것 자체에서 드러난다. 우리의 동일시현상은 광고를 통해 더욱 명백하게 드러난다. 광고를 통해 우리는 세뇌화된다. 선전에 나오는 것은 무조건 다 좋은 것이다. 연예인의 몸매는 운동을 해석 그렇지 라고 하지만, 우리는 광고를 통해 교육받은 대로 광고한 브랜드의 음료를 마시고 있다. 그 음료수를 마셔서 그런게 아닌데, 그 음료수를 마셔야 할 것만 같은 기분에 그 제품을 구입해서 사용하는 것이다. 허위광고, 과대광고이다. 광고, 마케팅에 대해서 trend, brand에 대해 기독교인은 비판적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기독교인이 바른 세계관과 비판적인 관점을 가지지 못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가?
예를 들어보자.
넷플릭스 1위를 질주하는 기염을 토했던 <오징어게임>에서 많은 고전 게기이 등장하는데, 초등학생들이 모여 한 게임이 오징어게임 참여자를 유혹하던 공유가 제안한 '딱지치기'였다. '딱지치기'가 무슨 문제가 있는가? 건전하고 저렴한 게임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오징어게임>처럼 딱지치기를 해서 따귀를 때리는 것 까지 따라했다는 것이다. 어이가 없는 일들이 세상엔 벌어지고 있다. 우리가 비판적인 사관과 관점을 가지지 않는다면, 우리도 분별없는 초딩학생들처럼 딱지치기와 따귀때리는 벌칙까지 같이 현실로 가지고 올 수 있다는 점이다.
● 적절한 모델은 ‘변혁(reformation)모델’이다.
말씀과 기도로 ‘수도’하고 다시 돌아와 세상을 개혁해야 한다. 두 마음을 품은 자는 결코 변혁시킬 수 없다. 단지 적당주의 일뿐이다. 어거스틴과 칼빈이 이러한 관점을 견지했다. 아무리 멋진 대안과 기술과 방안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과 자기만의 시간’, ‘영성의 뿌리’가 기초되지 않는 변화는 무의미하다. 큐티도 안하면서, 말씀도 안 보면서 세상을 변화시킨답시고 정치에 뛰어들어 기독교 운운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70-80년대 유행했던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은 다 세상의 현실에 너무나 집착한 나머지, 기독교의 본질은 뒤로 하고 세상을 향해 뛰어던 '동일시'의 모델들이기도 하다. 그 운동이 대단히 성경적이었다면, 지금까지 그 운동이 지속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날의 현실과 고통스러운 상황을 운운하면서 거기에 너무 과감한 포커싱을 하면 항상 사달이 난다.
가장 적절한 모델은 '변혁'의 모델이다.
신학교 화장실에 이런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북한도 복음화하라!"
그런데, 그 밑에다가 '네 자신부터 복음화하라!"란 말을 낙서질 한 것을 보았다. 북한복음화를 힘쓰는 이들을 비웃으며 조롱하는 듯한 그 말투에는 가시가 있다. 모든 것이 '자기 자신부터 복음화' 되는 것은 우선이다.
자기 자신을 말씀으로 변화시키지도 못하면서 세상과 나라와 민족을 변화시킨다고 떠벌리는 사람들은 정말 비성경적인 세태이다. 하지만, 이 말도 어패가 있는 것이 어느 정도까지가 되야 적정선이고 마지노선인가? 이 부분도 생각해봄직한 대목이기도 하다.
시대적인 장점과 단점을 잘 파악하고 역사적인 상황을 잘 읽고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러한 지혜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교제)에서 나온다.
(약 1:5)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하지만 요즘 정말 기독교적인 정신mind에 입각한 바른 정치인, 바른 리더들이 드물다. 한국교회의 영적인 현실은 고작 기독교인인 축구선수, 이영표 등이 월드컵 때 한 골 넣고 기도하는 장면에서 큰(?)위로를 얻는 미약한 수준에 그쳤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기독교는 과연 어떠한 현실인가?
기독교적인 혁명, 말씀에 의한 철저한 변혁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늘 큐티를 해야 하고 말씀을 읽어야 하며 기도하는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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