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세상을 보는 ‘하나의 관점’(perspective)이다.
이 관점으로 우리는 영화를 보고, 멀티미디어 세상에 대하여 올바른 판단과 기준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 우리는 너무나 세상의 모든 문화에 노출되어 있다. 위험수위가 크다. 그러기에, 올바른 세계관은 일관성 있는 삶을 유지할 수 있고, 나름대로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
프란시스 쉐퍼...철학의 이중적 의미
①대학강의에서 볼 수 있는 인텔리적인, 전문적인, 학문적인 철학의 의미.
②모든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철학’을 가지고 산다. 개똥철학도 철학이다.
대학교수나 인텔리한 사람들만 철학을 가진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철학을 가지고 산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자기만이 하나의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세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땅의 사람들 중에 똑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똑같은 사람이 없듯이, 똑같은 세계관도 없다. 그래서 기독교 철학자 제임스 사이어(James Sire)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마다 누구나 나름대로의 전제(premise)를 가지고 산다’
우리가 세계관을 이야기할 때 제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정치성향'인데, 좌파/중도파/우파 라고 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세계관인 것이다. 하나의 이데올로기ideology를 중심으로 그룹이 만들어진 셈이다. 그들만의 전제, 그들만의 세계관point of view이 형성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특히 이런 정치적인 성향에 대해서 굉장히 경계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신앙, 믿음을 이야기해도 정치적인 색채 앞에선 얼굴이 굳어질 때가 있다.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그만큼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난 경상도 출신인데, 전라도에서 3년 정도 부목사 사역을 할때였다. 전라도는 홍어 삼합이 진짜 유명하지 않은가? 진짜 사역하면서 홍어 삼합을 원없이 먹었는데, 그 좋은 음식을 먹다가도 목사님이나 장로님들이 진짜 정치 이야기하면 가만히 있어야만 했었다. 경상도 VS 전라도의 이런 심리적인, 정치적인 갈등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전두환 대통령 죽음을 국장으로 할 것이냐에 대한 문제만 봐도 그렇다. 한번은 광주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삼성라이온즈 VS 기아 타이거즈가 경기를 할때 삼성이 역전을 했던가 그래서 너무 좋아서 환호성을 지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뒷통수가 쐐해진 기분이 들었다. 거긴 전라도였기 때문이다. 이런 사소한 지방색에서도 우리의 관점이 드러난다. 모든 갈등은 해결되어져야 할 대목이다.
과거 한참 유행했던 X세대(너무 오래전의 이야기인가?)는 ‘본질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이미지가 더 중요하다’는 특징(현대의 특징이 아닐까?) 이젠 Y, Z세대...이것조차도 하나의 철학이요 전제이다. 바로 세계관의 문제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의 베스트셀러 <상실의 시대>에서 '섹스는 스포츠다'라는 의미를 이야기했는데, 진짜 그 책이 나올 때만 해도 우리 사회가 보수적이어서 '너무 성적이고 음란하다'고 했지만, 요즈음은 그런게 어디 있는가? 시대의 트렌드가 변해가고, 동성애조차도 취향과 기호로 전락해버렸다. 프리섹스는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이다.
모든게 세계관의 변화에 따라 변화되어져가는 것이다. 어떤 이들에겐 타락해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또 한편 어떤 이들에겐, 진보적이고 개방적이고 자연스럽다 라고 할 수 있겠다. 그 모든 것이 바로 다 다른 각자만의 가진, 자기만의 기준점standard를 가진채 보고, 듣고, 읽고, 느끼고, 사유하고, 행동하는 '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이며, 그 뷰view의 차이에서 라이프스타일과 라이프의 컨텐츠가 출발한다는 것이다.
문득 글을 적다가 보니, <다른 의견을 말할 권리>를 유명한 작가, 스테판 츠바이크가 생각이 난다. 스테판 츠바이크는 작가로서 명성을 많이 쌓았다. 좋아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가 이 책에서 종교개혁자 칼뱅을 '마녀사냥의 주범'을 몰아간다. 종교에 대해서, 신앙에 대해서 무언가 다른 의견을 말할 권리를 칼뱅이 무시하고 마녀사냥을 했다는 것인데, 과연 그런 살인적이고 폭력적이고 무대포의 인물을 개신교에서 종교개혁가로 추대한다면 기독교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 책을 읽으면 칼뱅은 그런 인물로 오도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이전에 내가 쓴 <칼뱅은 정말 제네바의 학살자인가?>에 대한 북리뷰를 참고해주시길 바란다.
핵심은 두 가지이다.
첫째, 사료 참고의 우선순위 문제이다. 스테판 츠바이크는 일차사료가 아닌 이차, 삼차 자료의 핵심인물인 제롬 볼섹의 이야기로 자신의 책의 근거를 삼았던 것이다. 제롬 볼섹은 어떤 인물인가? 칼뱅의 예정설을 거부하고, 종교개혁을 부인한 인물이고, 후에는 카톨릭으로 개종한 인물이다. 그런 인물에게서 무슨 칼뱅에 대한 팩트체크가 되겠는가?
둘째, 칼뱅이 과연 제네바의 마녀사냥을 할 독재자라면, 그만한 권력이 있어야 했다. 과연 칼뱅에겐 그런 엄청난 공권력이 존재했었는가? 이다. 하지만 칼뱅은 1559년에야 제네바 시민권을 얻었고 공직에 나설 수도 없고 피선거권도 없는 이등 시민권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불과 5년 후인 1564년에 죽었다. 그런 그가 '제네바의 학살자'라는 엄청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피선거권도 없는 힘 없는 사람이 어떻게 학살의 주동자가 된단 말인가? 칼빈을 흔히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라고 했다. 그런 유약한 사람을 시민들은 자신의 개로 협박하기도 했고 자신의 개 이름을 칼뱅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왜냐하면 칼빈은 제네바 시를 도덕적인 질서로 잡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런 치욕과 모욕을 다 겪은 그가 과연 제네바의 공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단 말인가? 칼빈은 대부분 난민신세로 살았고, 당시 사회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사회였고 당시 제네바교회의 최고의 기관은 치리회였다. 그 치리회가 학살을 주동했으면 했지, 종교개혁자 칼빈과는 무관한 일이다. 그런 유약하고 고통스런 삶을 살면서도 <기독교강요>를 집대성한 탁월한 인물이 칼빈이다.
하지만, 스테판 츠바이크의 세계관은 판이하게 벗어난다. 포커스가 처음부터 잘 못 되었으니 결과는 말 할 것도 없는 것이다. 세계관의 다름은 이토록 큰 격차를 벌이게 된다. 그런데 더 치명적인 범죄는 이런 팩트체크가 잘못된 글이 이미지를 재생산해내서 거짓이 참인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데 있다. 유시민 작가도 칼뱅의 학살설을 사실로 받아들여 칼뱅을 전체주의자, 종교적 광인으로 둔갑시켜버린 것이다. 세계관은 이처럼 무서운 것이고 심각한 것이다.
세계는 인간, 신, 역사, 도덕...이러한 것들, 총체적인 것들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view)이 바로 ‘세계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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