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관과 영성에 대한 특강이다. 게 중에 오늘은 두 가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첫째,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정의와, 둘째는 기독교 세계관을 왜 정립해야 하는가? 그 필요성에 대해서 오늘은 포스팅하고자 한다.
3. 기독교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성경-‘세상을 본받지 말라’-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다 나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원래는 모든 것이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었음을 기억하라. 인간의 타락과 죄로 인해 오염되었기에 세상이 이 모양이 된 것이 아닌가?
-정의: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에 입각해 이 세계와 인생과 문화 전체를 인식하고, 이해하고, 그에 따라 삶의 자세를 확립하는 기독교적인 안목이다.
4. 기독교적인 세계관 정립의 필요성
①이원론(dualism)적인 사고방식의 팽배: 미워하는 세상 VS 사랑하는 세상
요 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문맥에 따라 조화롭게 보는 관점이 요구), 하나님께서 너무나 사랑하신 세상이다. 창조 시의 세상은 너무나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타락 이후로 세상에 죄와 악이 들어섬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혼돈으로 점철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세상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이 말이 구약시대에 한 것이 아니고 신약시대에 하셨다. 죄로 얼룩진 이스라엘과 세상의 역사 가운데서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껴안으시는 세상임을 기억하라. 그러기에 플라톤이 이야기했던 극단적인 이원론은 피해야 한다.
예) 영적인 것과 육적인의 가르기(division)...교회생활 vs 세상의 생활(말씀과 기도와 찬양 VS 노래방, 오락, 게임, 스포츠, 영화 등), 이분법적인 구분은 무의미하다.
②안목의 부재(不在)
아주 예전에 ‘람보’라는 영화가 소련에 유행하였다. 미국인 람보가 소련인을 도와준 베트남 사람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내용이었다. 람보가 소련에서, 러시아에서 엄청나게 흥행했다는 것은 우스운 처사이다. 자기 나랄 죽이는 내용의 영화에 박수를 치는 꼴이다. '벌거벗은 임금님' 꼴인 것이다.
넷플릭스의 <프리즌 브레이크>가 season 얼마까지 나왔던가? 5인가? 6인가? 주인공, 마이클 스코필드(한국식 이름: 석호필/워낙 한국에서 드라마가 인기가 있어서 방한한 후에 이름을 지어 줬다고 한다. 그게 바로 '석호필'이었다)는 한방에 뜨게 했던 미국 드라마이다. 그 영화의 내용은 ‘탈옥한 죄수들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마이클 스코필드와 링컨 버로우즈만 제외하고는, 모든 이들이 유죄자들이고 범죄자들이다. 그런 범죄자들이 쫓기는 가운데 저지르는 살인, 강도 등의 범죄에 대한 판단은 뒤로 하고, 그들이 무조건 경찰과 형사에게 자유롭게 되는 것을 관객들은 은연중에 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선/악에 대한 적절한 안목이 요구되는 시대이다.
세속화되어가고 있는 안목...사단의 3가지 S정책을 아는가? Sex, Sports, Screen
현대의 모든 매스컴이 더욱 세속화를 부채질하고 있다.
예전에는 부산(항구도시)에서, 부산대학에서부터 향락문화(ex> 락카페, 노래방 등)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옛날이야기이다. 요즈음은 스마폰이 모든 것을 장악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대학이 문화를 좌우했다. 하지만 지금 볼 때는 우리의 문화는 총제적으로 향락화되어가고 있다. 항구도시가 아니더라도 인터넷이, 스마트폰이, 포노 사피엔스(스마트폰의 인간 by 최주붕교수)가 모든 것, 모든 정보, 모든 관점을 지배하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대학교 시절은 굉장히 중요한 시기이다. 어떠한 세계관을 가지느냐에 따라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는가? 좌지우지된다. 20대의 젊은 피가 흐르는 시기에 어떠한 관점을 가지느냐 하는 것은 그의 인생 전체를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한국교회 지도자의 세계관의 중요성...지도자, 리더는 리더의 세계관이 배어 나오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은 하나의 요소가 아니라 전체이다.
전부(全部)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종교적인, 교회적인 영역에서만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전 영역에서 나타나야 하지 않는가? 우리의 교회생활, 학교생활, 동아리, 전공 공부, 성적, 아르바이트, 직장생활, 가정생활 등 이 모든 영역에서 기독교적인 마인드가 드러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이요, 온전한 기독교인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기독교 세계관은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기독교인의 ‘정체성identity'를 보여줄 수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자신의 능력화시켜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가 기독교적인 온전한 마인드를 가지려고 하면 노력하고 공부하고 기도해야 한다. 교회 주보에 뉴에이지 운동가의 글이나 무신론자의 글을 아무런 의식도 없이 게재하는 오류를 얼마나 많이 범하는가? 오늘날은 인터넷, 개인 홈피나 블로그, 카페에서 여과 없이 유통되는 정보와 글들이 기독교인의 색깔을 회색지대로, 모호하게 만들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③ 그리스도인의 성숙의 지표
또한 성숙의 척도는 ‘혼자 있어도 외로움을 잘 이길 수 있는 것이다’. 말 그대로 ‘하나님 앞에서 홀로서기’이다. 혼자 있는 삶은 타인과의 생활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다윗과 솔로몬
다윗은 이러한 ‘홀로서기’의 대가였다. 그는 음악과 찬양과 문학과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그는 자신을 관리해 나갔다. 청년시절에 그는 긴 피난 생활 가운데서 자신을 훈련시켰고 자기를 관리해나갔다. 그의 청소년 시절과 청년시절, 20대의 철저한 자기 반추 self reflection을 하지 못했더라면 그는 솔로몬과 다를 바 없는 시작은 좋았지만 끝이 허무한 인생이 되지 않았을까? 홀로 서는 지혜가 필요하다. 솔로몬이 그렇게 일천번제를 정성껏 드림으로 말미암아 지혜를 선물로 받았고 덤으로 부귀와 명예와 권력도 쟁취하였다. 하지만 솔로몬에겐 깊은 터널과 같은 다윗의 훈련기가 없었다.
그렇게 순수했던 젊은 솔로몬도 나이가 들면서 정욕의 대가가 되어 1천명의 부인을 거닐었고 자신의 왕궁과 건축물에 신경을 쓰게 되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수많은 백성들의 세금이 과도하게 지출되었다. 계속적인 자기 관리가 없으면 아무리 탁월한 영적 대가, 정신적 대가라 하더라도 결국 망가지고 붕괴되고 마는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가 인도의 영웅으로 군림하였을 때 그는 ‘비폭력의 영웅’으로 추앙하고 추종하는 무리들이 많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러한 때 날마다 밤마다 물레질을 했다고 한다. 권력의 정상에 올라갔을 때 교만은 언제나 인간을 향해 유혹한다. 간디는 이러한 오만과 교만을 다스리기 위해 물레질을 했던 것이다.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자신의 아픔과 상처를 잊기 위한 몸부림으로 자신과의 정직한 만남을 피하고 다른 곳으로 돌파구를 찾는다. 그것이 게임이나 채팅이나 동호회 활동이나 이성관계 등으로 회피하는 경우가 있다. 오늘은 너무나 개방적인 문화가 널려 있어서 이러한 부분에 자신을 잘 관리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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