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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및 문서/문서

한국부흥운동의 불씨가 된 로버트 하디

by Message.K 2022.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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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교의 밀알인 된 사람 중에 로버트 하디가 있습니다. 한국 부흥의 불씨를 되어 준 '로버트 하디'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원산 대부흥, 평양대부흥운동의 시발점이 되어 준 것은 한 평신도 선교사의 회개에서부터 출발되었습니다.

 

 

 

 

로버트 하디 Robert A. Hardie, 하리 영 1865-1949, 캐나다, YMCA, 미국 북감리회

원산 대부흥, 평양대부흥의 시발점이 된 선교사가 있습니다. 바로 로버트 하디입니다. 1865년 6월 캐나다 온타리오 주 할미맨에서 출생한 로버트 하디는, 대학 2학년 때 무디 선생의 '학생선교자원운동'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선교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됩니다. 1903년 8월 원산에서 중국 감리교 소속 화이트 선교사를 강사로 초빙하여 7명의 선교사와 사경회를 개최하고 성령체험 후 회개운동을 시작하여 원산대부흥, 평양대부흥운동의 시발점이 됩니다. 1949년 6월 미시간주 랜싱에서 소천합니다. 양화진 자녀들 묘 옆에 가묘가 있습니다.

 

 

원산대부흥, 평양대부흥의 시발점이 된 선교사, 로버트 하디
원산대부흥, 평양대부흥의 시발점이 된 선교사, 로버트 하디

 

 

 

 

 

한국 부흥운동의 불씨가 되다

 

"나는 한국 사람들을 무시하고 깔보았습니다. 의사라는 자부심과 백인우월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내가 여기까지 와서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는데 왜 열매가 없는지 원망스러웠습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내가 교만했습니다."

 

 

한국 선교 13년째, 원산 부임 수년째였지만 이렇다 할 결실이 없었다. 선교사들은 기대만큼 따라오지 못하는 조선인들에 대한 실망과 정죄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자신의 죄를 깨닫고 성도들 앞에서 자신의 오만과 불신을 공개적으로 자복했을 때, 교회는 발칵 뒤집어졌다. 그곳에 있던 선교사들은 함께 가슴을 치며 자신도 그와 같이 교만한 모습으로 선교했던 것을 회개하고, 성도들 또한 통곡하며 자신의 죄를 자복하기 시작했다. 죄목을 써 가지고 와 죄를 고백하고, 이는 또 다른 이의 자복으로 이어지며 원산에서 모이는 집회마다 공개적인 회개운동이 일어났다. 회개한 교인들은 과거 횡령하거나 훔친 돈을 돌려주었고, 돌려받을 대상이 없어 돌려줄 수 없는 경우에는 교회에 헌금을 했다. 신분과 나이와 환경이 달랐지만 성령을 체험한 그들은 변화된 삶을 보여주었다.

 

평신도 선교사 하디가 시작한 이 같은 원산의 회개운동은 이내 서울과 개성, 평양으로 확산되어 4년 후 평양대부흥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오늘은 평신도 선교사로 한국에서 사역하면서도 열매 없음으로 인해 실망하고 좌절하다가 그 모든 것이 사역자 자신의 교만에서 출발한 것임을 공개 회개한 로버트 하디의 회개가 원산 대부흥, 평양대부흥운동의 단초가 되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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