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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창세기

창세기 35장 1-15절 대학청년설교,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by Message.K 2023.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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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5장 1-15절의 본문을 가지고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란 주제로 대학청년들을 향해 설교한 포스팅입니다. 설교의 목표는 인간, 야곱을 통하여 불순종의 원인을 찾아보고 그가 다시 영적 갱신을 하는 과정을 살펴보고 도전을 받고자 합니다.

 

창세기 35장 1-15절 대학청년설교,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창세기 35장 1-15절 대학청년설교,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야곱, '빼앗은 자'의 귀향길

저희 삼촌은 원래 만화가이셨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시고는 농사짓는 할아버지를 뒤로 하고 홀홀단신으로 서울로 상경하여 만화계에 입문하게 된다. 그 당시는 70년대 정도였을 것이다. 그때 만화를 알아봐 주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삼촌은 그림을 그리고 싶은 열망 하나로 서울로 가셨다. 삼촌이 서울 가신 이후로 뜻하지 아니한 소포들이 계속 왔다. 예쁜 엽서전시회에서 당선되었다면서 오디오, 권투장갑, 장난감, 생필품 등이 많이 왔고, 경품으로 왔는 것인지. 세계문학대전집 120권이 왔었다. 그 책들이 시골구석에서 생활한 저의 독서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학창 시절에 그림 그리고, 만화 그리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신 할아버지는 ‘그림 그리면 떡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 하시면서 농사일을 돕지 않는다고 늘 비난하기 일쑤여서 삼촌은 다락에 올라가셔서 그림을 그리곤 했다고 한다. 집안의 후원을 전혀 받지 못한 채 펜 하나만 들고 올라갔던 저희 집 삼촌처럼, 야곱은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32:10;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아버지의 품과 고향을 떠나는 모습을 우린 28장에서 볼 수 있다.

 

아버지 이삭은 그에게 어머니인 리브가가 고향에 거주하는 가나안 사람, 헷사람들을 아주 싫어했기 때문에 자식의 평생반려자를 리브가의 고향인 밧단아람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취할 것을 야곱에게 제언한다.

 

리브가는 이삭에게 이런 말을 한다.

 

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내가 헷 사람의 딸들로 말미암아 내 삶이 싫어졌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면 내 삶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 (27:46)

 

물론 자식의 정혼기가 되어서 부모들이 아들의 배필을 짝 지워주기 위한 장면이다. 하지만 야곱이 이 고향 땅을 서둘러 떠나야 하는 데는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형 에서와의 뒤틀려진 관계 때문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다투었던 형과의 관계는 시간이 지나서 더 불거지게 되었던 것이다. 야곱은 형 이삭이 가진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빼앗았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삭의 임종 시 형의 받아 누릴 장자권의 축복을 자신이 형 인체 가장하고서 그 축복을 빼돌렸던 것이다. 그것은 명백한 사기행위였다! 이 임종 시의 축복은 한 가족의 대표자로서 사회적, 종교적 위치를 확정시키는 상징적 의미를 지녔던 것 같다. 야곱의 이름의 뜻이 바로 '빼앗은 자'라는 뜻이다. 이러한 사건이 발발이 되어 야곱은 형 에서의 눈을 피해 도피처로, 외삼촌 라반의 집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그가 많은 고생 끝에 이제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서 다시 귀향길에 오른다. 자수성가한 사업가, 비즈니스 맨처럼 그의 어깨에 힘이 많이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형 에서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되자 고향을 떠날 때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께 했던 서원(약속)은 잊은 채 이방 땅 세겜에 머무르고 만다. 야곱은 아마도 자신을 지금까지 오게 한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자신의 노동과 재치와 의지력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는 솔직히 뼈 빠지게 일했던 것은 사실이다.

 

야곱의 서원

그는 낙타를 타고 하루 동안 여행하기에 알맞은 거리100Km에서 피곤에 절어 잠이 든다. 바로 그때 그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며 이삭의 하나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하나님을 꿈을 통해서 만나게 된다. 체험하게 된다. 그 크고도 경이로운 하나님과의 체험은 야곱에게 새로운 힘과 재충전의 기회를 갖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께 서원한다. 야곱의 심적인 상황은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부모님이 계신 고향 땅을 떠난다는 데서 오는 두려움 그리고 에서와의 틀어진 관계, 미안한 마음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육체적인 피로와 맞물려 허덕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힘든 와중에 찾아오신 그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는 이렇게 서원한다.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 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야곱은 하나님과 처음으로 만난 그 체험의 현장을 “벧엘”이라고 불렀다. 그가 하나님을 만난 장소였다. 야곱은 그 길로 라반의 집에서 힘들게 재산을 모은다. 비록 인간적인 간교함과 꾀로 자신의 정열을 쏟아 재산을 불린 것도 있지만 그의 외삼촌인 라반의 지독한 성격도 있었으므로 그에게 그 타향살이가 얼마나 큰 고생이었겠는가?

 

 

야곱의 딜레마-에서

더 이상 외삼촌 댁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힘들겠다는 판단을 하자 그는 자신의 아내와 육축과 재산을 가지고 다시 귀향길에 오른다. 그에겐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데서 오는 기쁨과 이만큼 성공했다는 것을 고향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부자의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야곱의 전신을 사로잡는 치가 떨리는 두려움과 오싹함이 있었다. 그 생각만 하면 덜컥 겁이 나는 야곱이었다.

 

 

그가 왜 고향땅을 떠나야 했던가?

자신의 여자, 배필을 구하려고 떠났다는 명분의 이면에는 형 에서를 속여서 형의 축복을 가로채었다는 데서 오는 엄청난 죄책감과 힘듬, 그리고 또한 이런 야곱의 행동에 분개한 나머지 형 에서가 자신을 어떻게 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로부터 탈출 아니면 도피한 것이다. 몇 십 년 동안 묻어 두었던 마음 깊숙한 곳의 응어리, 뒤틀린 관계, 쓴 뿌리가 다시 싹이 돋듯이 움트고 있는 것이다.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이다. 형제간에 패인 골이 세월의 무게와 함께 더 깊게 자신의 가슴을 아리게 했을 것이다. 형의 얼굴을 어떻게 볼까? 혹시나 형을 대면하면 어쩌지?라는 의문에서부터 시작해서 ‘형이 나를 죽이지는 아니할까?’ 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까지도 느꼈을 것이다. 그런 심적인 갈등 가운데 있지만, 그가 가진 수많은 재산과 아름다운 아내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여러분들도 이런 경우가 없는가? 정말 내가 원하고 만족하는 모든 것을 이루고 거두고 성취했는데, 정작 자그마한 문제, 사람과의 틀어진 문제, 정말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문제가 산더미처럼 자신을 향해 덮쳐 올 때 느끼는 중압감과 부담감! 이 문제만 해결하면 정말 행복할 텐데라고 말할 때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답답함! 세상 사람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방법이자 도구였다. 그것은 무엇이었나?

 

 

 

바로 약속,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우리 둘째 아이의 태명이 ‘약속이’!-딸이닷!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했던 것이다.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떠난 그 청년시절과 대조적으로 지금은 하나의 거대한 기업가로서 변모한 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면서 그는 ‘벧엘’에서 만났던 그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였던 것이다. 그는 하늘이 온통 못으로 박혀 자신을 짓누르는 것 같은 그 엄청난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했던 것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32:12)

 

비록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보인 간사한 면도 있고 지독스럽게 상황에 잘 적응하는 카멜레온과 같은 능동적인 적응력이 있는 인물이지만 그의 행사를 불문에 부치고라도 그의 마음에 박혀 있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아직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는 곧 에서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잔꾀를 부린다. 형에게 줄 예물을 준비케한 것이다. 성경은 야곱의 심리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32:7)

야곱은 홀로 남아 이 고통에 직면하면서 말씀의 약속을 기억하면서 붙잡고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것이다. 그곳이 바로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얍복 나루’였다. 야곱은 환도뼈가 위골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과 겨루어 씨름을 한다. 그러자 마침내 그는 그 하나님의 사자에게서 이런 말을 듣는다.

 

32: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빼앗은 자라는 이름을 가진 야곱이 어떻게 변하였는가? 그를 감싸고 있던 에서와의 문제가 이 사건 이후에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주목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는 에서와 기쁘게 만나 화해를 하게 된다. 하나님이 에서의 마음 문을 열어 제쳤던 것이다. 오랜 세월에 치여 있었던 그 형제간의 한을 하나님이 제거해 주신 것이다. 그것은 야곱이 하나님을 다시 만나는 경이로운 체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제까지 여러분은 이제껏 귀가 닿도록 들었던 구약의 한 인물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 장황한 이야기들은 이제부터 하려고 하는 이야기의 서곡일 뿐이다. 자, 야곱은 하나님을 만났고 그리하여 형과의 얽힌 문제가 풀어졌다. 이젠 더 이상 그것으로 인해 머리를 쥐어 짜내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하나님께 약속하였던 것들, 서원하였던 것들은 믿음으로 다 지켜야 우리 영혼에, 우리 인생에 유익하다. 그렇다면 이젠 야곱은 예전에 벧엘에서 서원하였던 그 내용을 지켜야 하는데, 야곱이 무얼 하고 있는지를 보라!

 

 

 

딜레마 해결 이후의 야곱

창33:17이다.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야곱이 지금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가? 창 28:20에서 하나님을 위해 단을 쌓고 전을 세우겠다던 그의 서원은 온 데 간데없고 자기 자신과 짐승을 위한 집을 지으며 장기적인 체류를 하려고 하고 있다. 모든 힘든 상황이 지나가 버리자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자기 재산>이었던 것이다. 당시의 재산은 가축의 규모로 따질 수밖에 없었다! 에서로 인해 그렇게 고통스럽게 지낼 때는 그의 눈에는 오직 ‘하나님’뿐이었다. 왜냐하면 그 분만이 도움과 힘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의 처자식과 재산은 정작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힘듬의 짐을 벗었을 때,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자기 자신의 안녕과 평안과 자기 자신이 가진 재물과 재산에 얼마나 집착하는지를 보라. 심지어 짐승을 위한 우릿간은 만들 눈, 안목을 있었지만 그와 함께 모든 상황과 삶에서 동행하시면서 아파하시고 동참하셨던 하나님을 볼 줄 아는 안목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가 무엇을 하는지를 보라!

33:20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강하신 하나님)

 

자신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종교적인 의무는 덜고자 벧엘이 아닌 이방의 땅에 단을 쌓았던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서원하였던 것을 위반하는 야곱의 위선이다. 여러분에게 이러한 것은 없는가? 여러분이 하나님께 서원하고 결단하였던 것들을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그 결심들을 묻어 두고 있지는 않는가? 여러분이 하나님께 바치기로 한 것을 여러분은 지금 가로채고 있지는 않는가? 집회나 수련회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하고 약속하였던 것들은 어떻게라도 지켜야 할 것이다. 지키지 않는다면 오히려 우리에게 해가 될 것이다. 아니면 여러분은 일평생 인생을 살아오면서 하나님 앞에 결단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께 헌신하고자 다짐한 적이 한 번도 없는가?

 

이동원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다.

“서원도 한 번 하지 못 한다면 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결심도 한 번 못 한 사람을 진정한 신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

야곱은 그와 늘 함께 동행하셨던 그 하나님, 지팡이 하나만으로 떠났던 그를 후에는 엄청난 부자로 성장케 하셨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는 자신의 안일한 안전과 유익을 위해 집을 짓고 있다. 우리들도 이런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질병으로 인해 목숨을 잃어버릴 상황, 벼랑 끝까지 갔다가 다시 살아나서 ‘덤으로 사는 인생’을 살게 된 사람들이 종종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위해 다시 인생을 낭비하다가 하나님께서 데려가시는 장면도 목격했을 것이다. 중고등부 시절에 종종 학부모님들이 고3 수험생들을 교회에 안 보내고 대예배만, 말 그대로 종교적인 책무만 달랑 이행하고 각종 모든 행사에 불참시키는 경우를 종종 본다. 대학 가서 더 열심히 충성하면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수능시험을 비롯한 기타 취직, 취업 시험에 당당히 합격하고 나면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충성하겠다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버린 것인가? 어려울 때 그래도 시간을 내고 짬을 내서 하나님을 섬기고 공동체를 섬기고 말씀 한 자라도 더 보고, 기도 몇 분이라도 더 해야 신앙이 크지. 자기가 여유가 있을 때 신앙 생활한다는 것은 다 '거~짓~말~'이다. 인간은 시간 나고 여유로우면 골프 치고, 도박하고, 자기 욕심대로 하지 절대 말씀 보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그렇게 잘 되지 않는다. 여러분 학교 다닐 때 더 말씀기도생활이 더 잘 되는가? 방학되면 말씀기도생활이 더 잘 되는가? 결과는 뻔하지 않은가? 인생에 있어 사람이 시험을 받는 타이밍, 때가 있다고 한다. 남자는 군대 갔을 때이고, 여자는 시집갈 때라고 한다. 그때 그 사람에게 과연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를 체크해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여러분 중에 혹시 시집은 아니지만 형제들 중에 군대에서 믿음이 떨어진 지체들이 있다면 너무 낙심하지 말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실 것이다. 자책은 금물! 기독교는 과거를 묻지 않는다는 놀라운 은혜가 있다! 우리 인간은 이처럼 간사하고 치졸하다. 자기 힘들 때는 하나님을 찾다가도 조금 형편이 나아지면 금세 하나님 몰라라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것은 인간의 죄성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인간의 마음의 죄성’ 때문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는

  • 제 1문: 사나 죽으나 당신의 유일한 위안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
  • 답: 사나 죽으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고 몸과 영혼이 모두 미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주께서 보배로운 피로 나의 모든 죗값을 치러주셨고 마귀의 권세로부터 나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는 나의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듯이 주는 나를 지켜주십니다. 실로,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룹니다. 내가 주의 것이기에 주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보증하시고 나의 온 마음을 다하여 기꺼이 주를 위하여 살게 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유일한 위안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

  • "사람의 제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히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1) 이러한 교리문답의 내용과는 달리 우리들의 본성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즐거워하고 세상의 것들을 우리의 위안으로 삼고자 하는 습성이 존재한다.

 

이러한 죄성에 대한 적절한 비유가 하나 있다. 에스키모들이 이리를 사냥하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그들은 칼 한 자루와 짐승의 피만으로 이리를 잡는다. 먼저 예리한 칼날에 짐승의 피를 발라 그것이 얼 때까지 놓아둔다. 그러고 나서 그 위에 다시 피를 발라 얼리고, 또 피를 발라 얼리는 과정을 피가 칼날을 완전히 덮을 때까지 계속한다. 그런 다음 칼날을 위로 보이게 해서 칼자루를 땅에 단단히 묻는다. 밤중에 이리는 피 냄새를 맡고 접근해 칼날을 핥기 시작한다. 얼어붙은 짐승의 피와 싸늘한 금속이 이리의 혀를 마비시킨다. 결국 이리는 칼날에 제 혀를 베어 제 더운 피를 맛보게 된다. 이리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 채 허겁 지고 핥게 되고 혀는 갈가리 베이게 된다. 이리는 피를 흘리면서 서서히 죽어 간다.

 

우리 인류는 이렇게 이리처럼 피를 흘리면서 서서히 죽어가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이리처럼 자기가 죽어 가는지도 모르고 피를 탐하다가 결국 죽어가는 몰골! 우리는 죄가 영적인 죽음으로 인도하는, 지옥으로 인도하는 짐승의 피로 얼긴 칼인지도 모르고 이리처럼 피냄새에 혹하여 죄의 종이 되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죄를 지을 때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의지로 인해 오히려 더 자유로워하지만 막상 죄를 짓고 나면 오히려 우리는 죄의 종이 되어버린다. 죄의 노예가 되어 버린다. 편안하고 여유가 생기면 하나님을 멀리하려는 속성 때문인지 야곱도 그가 서원한 내용을 지키지 않고 벧엘로 내려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분, 집을 지을 때야 좋다.

"하루가 즐거우려면 돼지고기를 먹고, 일주일이 즐거우려면 신혼여행을 가고, 한 달이 즐거우려면 말을 사고, 일 년이 즐거우려면 집을 사라" 는 격언이 있는 것처럼 집을 지으면 일 년 정도는 즐겁지 않을까? 야곱은 자기를 즐겁게 하기 위해 집을 지고 외양간을 짓고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서원을 이행치 아니한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야곱의 안일한 선택,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

야곱은 그 이방 땅에 거하면서 이방민족들인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족속에게 공격이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종교 혼합주의와 이방인과의 결혼 등의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창 34장은 바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나타나는 장이다. 무슨 내용이 실려 있는가? 야곱이 서원한 것을 묻어 두고 자신의 안일한 삶에 집착한 결과로 빚어진 엄청난 파문이 기록되고 있다. 바로 자신의 딸 디나가 히위족속중의 하몰의 아들에게 강간당하는 사건이다.

 

여러분 한 번 상상해 보라!

하나님과의 약속을 이행치 아니한 결과 발발한 이 엄청난 사실에 대해서 말이다. 이 사건은 그 자체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사기극과 엄청난 살육을 몰고 온다. 그것은 다름아닌 디나가 겁탈당한 것에 대한 오빠들의 분노가 넘쳐 버렸다. 시므온과 레위는 교묘한 속임수를 쓴다. 그리하여 세겜족에게 할례를 행하면, 디나와 결혼시켜주겠다고 속여 그 족속의 남자들이 할례식을 거행해서 고통당하고 있을 즈음에 시므온과 레위가 그 족속의 모든 남자를 죽이고 야곱의 여러 아들이 약탈과 노략을 자행했다. 살인과 강도짓을 서슴지 않았던 자식들의 감정에 북받친 행동들을 야곱이 책망하면서 그는 자신의 가족의 위기상황임을 이제야 간파한다. 자신의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 자기 식구의 불행을 초래했던 것이다.

 

야곱일가의 일대 위기이다. 이런 오만방자한 행동이 야곱일가의 생명을 위협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 사람의 리더, 지도자의 불순종은 자기 개인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가족에게, 공동체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결정과 행동은 단순히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공동체에 끊임없는 영향을 미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럴 때 리더가, 지도자가 바로 서 있어야 한다.

 

34:30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일차적인 책임은 여동생이 모욕당한 것에 대한 분노의 오빠들, 레위와 시므온에게 있지만, 궁극적인 책임은 바로 아버지, 야곱에게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상황을 극단적인 경우로 몰고 가서라도 서원을 이행케하신다는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이방의 땅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이방 민족보다 수적으로 불리한 한 일개 가족의 몰살을 생각했을 것이고 그리하여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직감했을 것이다. 당시에는 인터폴이 없었다. 족속과 족속끼리의 분쟁을 조정할 만한 조정위원회나 경찰, 인터폴이 존재치 않았다. 한 족속이 몰살당하면 역사에서 그냥 흔적 없이 사라질 뿐이었다. 야곱이 바로 그런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위기는 ‘위험한 기회’라는 것!!!

 

말씀하시는 하나님

바로 그때였다. 그 순간.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1절: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아직도 거기서 서성이고 있을거냐?”, “죄악의 자리에서 어서 일어나라”“과거에 역사했던 하나님을 기억하라”1절에 나타난 동사를 주목해 보라! -일어나-올라가서-거하며-쌓으라 인간은 언제나 하나님 품으로부터 도망가고 있다. 지금도 많은 인간들이 그분으로부터 도피하고 있다. 요나가 하나님으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도망치고 있는 인간을 하나님은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 그분은 끊임없이 추격하신다. 끊임없이 추적하신다. 멸망의 길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지금도 달려오고 계시는 것이다. 언젠가 이런 신앙서적의 제목을 본 적이 있다. “도피하는 현대인”이라는 제목이었다. 현대인들은 끊임없이 도피하고 있다. 텔레비전으로 자신을 피신시키고, 영화의 거대한 스크린으로 자신의 생계를 위한 악착스러운 돈벌이로 수많은 일들로 도피하고 있다. 야구장에 가 보았는가? 스포츠를 통해서 자신들을 도피시키는 현대인들의 어두운 고독을 아는가? 사탄은 현대인들에게 3가지의 S정책으로 공격하고 있다. Sex, Sports, Screen이다. 요즘 얼마나 현란하게 성적인 음란함을 매개로 하여 광고를 하고 있는가? 스포츠는 말할 것도 없다. 영화도 물론이다. 현대인은 이러한 거대한 괴물들이 자신의 안식처인줄로 착각을 하고 거기에 몰입하며 도피하고 있다. 마치 야곱이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께 이행해야 할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책임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것처럼.

  • 우리가 일어나 텔레비전으로 들어가자!
  • 우리가 일어나 야구장으로 올라가자!
  • 우리가 일어나 극장으로 올라가자! 가 아니라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위기는 '위험한 기회',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그런 우리들에게, 그런 야곱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벧엘로 올라가라. 벧엘은 하나님을 처음 만났던 그 은혜의 장소이며, 그 시간이다. 첫사랑이다. 여러분의 벧엘은 어디인가? 믿음과는 한없이 멀어져버린 나의 현실을 돌아보며 다시금 하나님의 집으로 올라가지 않겠는가! 여러분이 처음 어디서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는가? 맨 처음 그분의 사랑을 만끽했는가? 그분의 첫사랑을 어디서 느꼈는가? 야곱이 체험한 하나님과의 감격적인 만남은 벧엘에서 이뤄졌다. 하나님은 자신을 1절에서 뭐라고 소개하는가?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

 

야곱은 에서에게서 도망 다니며 살다가 이젠 그것이 해소되니깐 하나님으로부터 피하여 도망하고 있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 분이 야곱과 함께 우리를 부르고 있다. 삶의 밑바닥의 절망적인 경험에 놓인 야곱은 이제야 하나님에 대한 눈이 열리게 된다. 바울이 그 다메섹도상에서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난 체험처럼. 그러자 그는 반응한다. 이젠 야곱이 하나님께 순종한다. 아니 순종할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코너로 몰아붙이신다.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다. 이젠 야곱이 어떻게 하는가 보라!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야곱은 자기 가족이라는 작은 공동체가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임을 알았다. 예전 라헬이 아버지 라반의 우상인 드라빔을 훔친 도벽, 도둑질과 그 이면의 종교혼합주의와 디나의 사건으로 인한 자식들의 강탈과 노략질과 피를 들끓게 만들었던 살인에 대한 대대적인 일가의 회개운동이 벌어진 것이다. 야곱이 이렇게 자신의 가족들에게 말을 하자 그 식구들의 반응이 어떠했는가?

 

4절: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모든 식구가 자신들이 가진 우상들을 내어 던지기 시작했다. 야곱 일가의 일대 위기에서도 아무런 영향력이 없던 그 패물더미와 쇠붙이들을 버렸던 것이다. 그들의 죄악을 청산하는 장면이다.

 

 

교회라는 공동체도 동일하다. 교회 내에 죄악이 있으면 교회가 침체의 늪에 빠진다. 교회가 서로의 죄악을 고백할 때 교회가 교회다워진다. 교회 내에 벌어지는 죄악들을 묵인하며 그것들에 대해 방관할 때 교회는 어설픈 종교집단에 머물고 마는 것이다. 사람들은 교회의 부정부패와 죄악을 까발려서 불신자들에게 알려지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기 때문에 쉬쉬하면서 덮고자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되면 세상의 뱃머리가 되기보다는 타락의 지름길을 터주는 것이 교회가 되고 마는 것이다. 솔직히 그런 처사는 정치인들이 잘 하는 것 아닌가! 교회는 정직해야 하고 투명해야 한다. 교회가 교회다워 질려면 서로의 죄악에 대해 참회하는 마음으로 고백하고 기도하며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부흥은 무작정 부흥회 한다고 해서 부흥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죄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투명해질 때 교회의 교회 됨이 드러나는 것이다. 부흥은 ‘쇠퇴하였던 것이 다시 일어나는, 또는 그렇게 되게 하는’ 그 무엇을 의미한다. ‘부흥(復興)은 말 그대로 약하게 되었던 것이 전처럼 다시 힘이 생기거나 생기게 하는 것’이다.

 

 

야곱의 일가를 보라! 그들이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킬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5절이다.

 

5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앞에서는 야곱이 어떠했는가? 디나의 사건과 그로 인한 살륙으로 이방민족들이 야곱일가를 공격해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으나 도리어 그들이 야곱의 무리들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누가 그렇게 하였는가? 야곱의 식구들은 우상을 제하고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렸을 뿐이다. 바로 하나님이 그렇게 하였던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께 자신의 죄악과 공동체의 죄악에 통감하며 회개 자복할 때 세상 사람들은 “교회가 왜 저 모양 저 꼴이냐?”라고 조롱하기보다는 오히려 두려워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교회의 권위이며 교회의 능력인 것이다. 신자들의 능력과 힘은 다름 아닌 죄에 대해 투명해질 때 발산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오늘날에 벌어지는 정치판의 판도나 교회들의 현실들을 보며 희망이 사라졌다고 한다. 절망스럽다고 한다. 우리가 기대어야 할 곳은 어디인가? 우리의 열악한 상황을 변화시키는 분은 누구인가? 우리의 잠든 영혼을 진정으로 깨어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취업대란과 생존경쟁 사회에서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이러한 것뿐만 아니라 세상과도, 문화와도 싸워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고군분투해서 싸워도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이다. 온 밤을 싸웠어도 야곱은 아직도 마음으로나 영으로나 야곱 (빼앗은 자) 그대로였다.

 

하지만 오히려 비극이, 위기의 고통이 야곱을 새롭게 했다

그가 과거에 하나님께 했던 약속을 기억하고 마땅히 버려야 할 것을 버린 후에야 진정 야곱이 아닌 <이스라엘>로 태어날 수 있었다. 우리가 우리의 우상들을 버리고 하나님의 능력의 손 아래서 우리 스스로를 성결케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바꿔 주시고 인격과 성격과 본성과 기질을 변화시켜 주신다. 우리의 상황까지도 그 분이 감당하실 것이다.

 

우리 공동체, 청년 대학부 공동체! 저는 여러분에게 감히 말씀드리고 싶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야곱은 이렇게 고백했다.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 이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며 여러분의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창세기 35장 1-15절의 본문에 나타난 야곱일가의 위기가 오히려 영적 부흥과 갱신이 되는 과정과 배경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첫사랑을 회복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라는 주제의 설교를 포스팅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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