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1장 4절과 창세기 4장 1-16절의 본문을 가지고 '아벨의 예배 VS 가인의 예배'라는 주제로 과거에 해석하고 설교한 내용을 포스팅하고자 합니다. 가인의 예배와 아벨의 예배의 차이, 그리고 하나님께서 왜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는지에 대한 고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Prologue...
오늘날의 시대는 다원화시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절대주의가 사라지고, 상대주의가 들어섰습니다. 역사를 공부해서 아시겠지만, 중세시대의 교회를 중심으로 한, 절대권력, 절대권세, 절대파워 같은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는 그런 분위기는 이제 우리 시대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군부독재시절에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이 지금은 각종 인터넷 매체와 방송매체에서 대통령을 욕하고 비방하고, 정치인, 권력을 잡은 이들을 비판하는 것에 너무나 자유롭습니다. 예전에는 잘못하면 삼층교육대에 끌려갈 일들이 이제는 비일비재하게 우리의 일상 가운데 드러납니다. 시대가 옛날 시대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것은 미인의 기준도 달라졌습니다. 외모에 대한 기준도 달라졌습니다. 객관적으로 용모가 준수하고 잘 생기고, 핸섬하고, 미인 만이 예전에는 선남선녀라고 했지만, 이제는 외모에 대한 평가가 더 세분화되어졌습니다. 훈남훈녀, 꽃미남, 베이글, 엄친아/엄친딸, 엘프녀(요정같이 생긴 여자), 요즈음은 싸이가 특이한 노래를 불러서 인터넷에 화제를 불러오고 있습니다. ‘강남스타일’이란 노래가 CNN뉴스에 회자되더니만, 홍대스타일, 대구스타일, 충남스타일...이렇게 나오고 있습니다. 이제는 객관적인 것보다 주관적인 매력이 있으면 그만인 시대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시대는 현재에 만들어진 것들이 아닌 과거의 수많은 역사의 산물이요 결과입니다. 서양사를 들추어보면, 중세교회의 퇴락과 르네상스, 인문주의 부흥과 과학과 문명의 진보와 발달로 인해, 절대 신이신 하나님이 주인공이 아니라 이제는 인간이 주인공, 인간이 모든 것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교회와 교황이 절대적인 권세와 힘을 가졌던 중세의 모든 것들은 이제 별 볼일 없는, 재미없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주제가 되었습니다. 이제 모든 사람들마다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고 자기방식, 자기생각이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누군가의 절대적인 힘과 목소리를 강요하면 자기의 권리와 이익을 침해한다고 생각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모든 멀티미디어-영화, TV, 모든 매체들은 이러한 인간 개인의 중심성, 개인주의를 광고하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21세기에 잠시 깜짝하고, 한순간에 등장한 것이 아니라 긴 세계사의 흐름 가운데 결과로 나타난 현상들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제가 왜 이렇게 거창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바로 ‘역사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배우고,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그 역사위에서 살아가고 있고, 우리가 후에는 우리의 역사, 여러분의 역사를 남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역사의 잔재물로 남아 있는 예배방식에 대하여 잠시 나누고자 합니다. 구약시대의 두 인물, 가인과 아벨을 통해 그들의 예배방식와 우리의 예배방식에 대한 조심스러운 돌아봄이 있었음 좋겠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성서상에 나타난 첫 예배)
최초의 인간이었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금이 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벗어나고파 하는, 인간의 과감한 교만과 자기중심성이 패인과 타락의 요인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모든 것을 함께 했던 그곳에 죄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아담과 하와의 맑디 맑은 투명한 하나님과의 관계에 빈 틈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의 개척자, 정복자의 위치-거기에는 그들은 충분히 신적인 위치에 있었습니다!-그러나, 그 보다 더 위대한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서고자하는 욕망이 있었다. 자신이 모든 인생의 주인공이고, 모든 것의 주도권을 쥐고자하는 야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야망은 곧 벽에 부딪히게 되었는데, 그것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 건널 수 없는 강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아담와 하와의 불순종으로 인한 반역을 불쾌하게 여기셨지만, 다시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신실함으로 가죽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아담 부부가 벌거벗은 몸을 가리기 위해 걸쳤던 무화과 나뭇잎 속옷underwear는 일회용보다 더 빨리 말라버렸습니다. 그것이 안쓰러워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이 가죽은 짐승의 가죽이었습니다. 짐승을 죽여서 그 가죽skin을 벗겨 만든 것이 바로 가죽옷입니다. 그래서 이 가죽은 짐승의 피를 함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짐승의 피를 흘리게 하심은 아담과 하와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모면하게 하셨습니다. 이 ‘피’가 바로 구약성경의 첫 예배의 흔적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으시고 그 짐승의 피를 매개체로 하여 인간을 다시 불쌍히 여기심으로 가죽옷을 주신 사건 말입니다.
아담 자신은 부부가 입은 가죽옷을 볼 때마다 예배의 중요성에 대해 상기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피가 없이도 가능하였던 에덴동산 시절의 자유스러움은 이제 죄가 세상에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피’를 동반한 제사를 드려야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피흘림이 없은 즉 죄 사함도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이 가죽옷을 증거로 삼아 유추해 보면 아담 부부가 자기 자식들에게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예배의 중요성을 가르쳤을 것으로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근거:
첫째, 가인과 아벨이 각자의 제물을 가져왔다
brought-한: 드렸다, NASB: brought an offering to the Lord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d Abel, on his part also brought of the firsthings of his flock...그 때 당시에 제물을 드릴 제단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제물이 있었다면 제단이 분명히 있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제물을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팽개쳐놓고 제사를 드리진 않았을 것입니다. 아담 부부는 자신의 불완전함과 연약함과 죄악성을 제단 앞에서 제물을 제사드림으로 깨달아야 했다. 그들은 천국의 모형이었던 에덴 동산의 아름다운 추억을 곱씹으며 자신들의 과거의 잘못과 죄악을 후회했을 것입니다.
둘째, 가인이 쫓겨나는 장면이다.
(창 4:16)‘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Cain went out from the presence of the Lord)에덴 동편에 거하였더니’라고 기록한 것을 볼 때 그 당시 하나님께서 임재하셨던 제단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 부부의 타락으로 인해 분명히 마음이 상하셨으나, 아담 부부를 나 몰라라 무관심하게 방치하지 않고, 그들의 예배를 받으시고 최초의 인간과의 관계를 예배를 통해서 지속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자비와 긍휼이 무한하신 분이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인과 아벨의 제사방식, 예배방식의 차이에서 온 하나님의 반응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그들은 단순히 가인은 자기 직업의 열매를, 아벨은 자기 직업의 열매를 드린 것인데 하나님은 너무나 고지식한 분이 아니십니까? 하는 의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은 그렇다면 농부, 농사꾼 보다는 목축업, 목동을 선호하신다는 말씀입니까? 직업의 빈부격차가 없다는 세상의 소리를 뒤엎고 가장 성경적인 직업은 유목민들, 목동, 목자, 양치기를 더 좋아하신다는 말씀입니까?
가장 중요한 포인트를 짚어봅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기로는 가인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고, 아벨은 믿음이 있었다는 측면에서 접근합니다. 물론 그것은 정확한 접근입니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그 믿음이 어떠한 믿음인지 자세하게 한 번 살펴봅시다.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신 이유
[창 4:3-창 4:5]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5)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아벨의 제사: 히브리서 11장 4절의 말씀처럼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다.
(4)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그런데, 이 믿음은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일이지만
(창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가죽옷->피->피의 제사->예배의 방식
하나님께서 짐승을 잡아 예배를 드려야 됨을 가르치신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산 믿음이었습니다.
(롬 10: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가인과 아벨은 부모님으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동일하게 들었다. 예배의 방식과 예배의 통로에 대해서도 들었습니다. 죄의 타락으로 인한 인생은 ‘피의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만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들었고, 아벨은 그 들음으로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듣는 것은 이처럼 중요합니다!!!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즉 아벨의 제사는 믿음으로 가르침에 순종한(잘 들어서 성공한) 제사였다.
가인의 제사: 아벨의 제사와는 달리 그 제물의 설정에 있어서 하나님 가르침에 따르지 않은 불순종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하나님의 방법<자신의 방법과 생각에 근거한 제물, 인본적의적이며 반항적인 자세의 제사였습니다.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여기서 우리는 가인과 아벨의 예배의 차이는 믿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예배방식에 대한 믿음, 듣고 순종하는 믿음의 소유 여부에서 나타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오늘날은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다원주의, 상대주의의 시대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저마다의 예배관, 예배에 대한 생각과 가치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의 예배는 어떠합니까?
단도직입적으로 여러분의 예배는 어떠합니까?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 이후의 모든 죄인들에게 우리를 만나시고,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말씀하시는 이 만남의 통로인 ‘예배’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더 나은 방편이 있다면 그것을 선택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하나님만의 방편이 있는 것입니다. 부산에서 서울을 가야 한다면, 그 길을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길, 고속도로, 국도를, 항공로, 배편을 구해야 한다. 그런데 자꾸 제주도 밑으로 가는 배편, 항공편, 길을 찾는다면 찾을 수가 없고, 서울에 갈 수가 없습니다. 제 이야기의 핵심, 골자가 뭔지 알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가인의 예배입니까? 아니면 아벨의 예배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순종하고 듣기 위한 예배입니까?
가인처럼 듣는 거 따로, 예배드리는 태도 따로인 예배인가요? 따로 국밥식의 '의무방어전'의 예배입니까?
아니면, 아벨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듣기 위한, 삶을 고치기 위한 예배입니까?
자기스타일의 예배입니까? 하나님 중심의 예배입니까?
가인의 예배가 만연한 우리들의 예배의 현장
오래전에 김남준 목사님의 ‘예배에 감격에 빠져라’는 저서에서는 한국교회의 예배의 현실을 ‘예비군 훈련, 민방위 훈련’에 비교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지루하고 따분하기 빨리 마치고 집에 가기를 바라는 그런 예배시간을 이야기하면서, 예배를 드리는 형태가 아닌 예배를 견디는 유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주보를 만지며 낙서하는 형, 메모지를 돌리면서 메모를 주고받는 메모형, 계속 시계를 쳐다보며 시간을 죽이는 시간죽이기 형, 목사님 설교를 들으며 비평하는 비평형...여러분들도 이럴 때가 있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것은 ‘가인의 예배’입니다. 가인의 예배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5)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러분만의 방식으로 드리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드리는 가인적인 예배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듣고 순종하고 그렇게 사는 아벨적인 예배를 드립시다!!! 아벨은 부모님으로부터 예배를 배웠습니다. 들었습니다. 그는 경청한 그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은 인정해주셨습니다.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하나님은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이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죄 때문에 심판받고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피할 길이 없는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십자가 앞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감히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겠습니까?
최고의 하나님께 최선의 것으로 예배할 때,
하나님은 최상의 것으로 응답해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바로 그 예배이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설교 > 창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세기 35장 1절~15절 설교,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2) | 2023.08.09 |
---|---|
창세기 45장 5-8절 설교, 하나님이 요셉을 먼저 애굽으로 보내셨습니다 (0) | 2023.08.04 |
창세기 37:1-5 묵상, 요셉의 두 가지 위대한 점 (0) | 2023.06.21 |
창세기 25장 21절, 에서와 야곱을 낳은 이삭 (0) | 2023.06.18 |
창세기 1장 1절,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0) | 2023.05.2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