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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창세기

창세기 35장 1절~15절 설교,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by Message.K 2023. 8. 9.

창세기 35장의 본문은 야곱이 하나님께 불순종한 원인을 찾아보고 그가 다시 어떻게 영적 갱신을 하는 과정이 드러납니다. 이 본문을 가지고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란 주제로 설교의 포스팅입니다. 

 

창세기 35장 1절~15절 설교,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창세기 35장 1절~15절 설교,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야곱, 빼앗은 자

오늘 우리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쌍둥이로 태어난 것뿐만이 아니라 어머니의 태중에서도 두 쌍둥이는 싸웠고 태어날 때부터 형의 발꿈치를 잡고서 나온 기이한 한 사람을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의 뜻, 의미가 무엇인가?

 

“발꿈치를 잡은 자”, “빼앗은 자”이다.

 

출생시부터 형을 경쟁자로 생각하면서 태어난 그가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그 생존 경쟁의식을 갖고서 살아가는 면모를 볼 수 있다. 한 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해 볼 수 있다. 오늘 만나고자 하는 이 인물이 만약 현대라는 시간, 이를 테면 1997년에 그가 살아있다면 아마도 그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아주 뛰어나고도 약싹 빠른 전략들을 펼치며 승진을 노리는 한 비즈니스 맨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요즘 신한국당 경선 때문에 시끌 벌적한 정치판에 서 있는 이 사람을 생각해 보아도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여러분도 이 사람의 삶의 방식과 인생항로를 조금이나마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 한국 사람들끼리 만나서 이야기를 주고 받을 때 “당신 이름이 무엇입니까?”라고 묻고는 “그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대부분 한문의 그 의미를 취하기에 이를테면 제 이름이 OO이라면 ‘무슨 무슨 뜻의 OO입니다.’라고 소개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사람들은 이름을 지을 때마다 좋은 의미를 많이 붙이는 것이 기정사실이다. 하지만 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 살았던 이 한 사람의 이름은 다소 거부감이 이는 이름의 뜻인 것이다.‘빼앗은 자’라는 것이다. 그 이름은 바로 <야곱>이다.

 

우리는 오늘 이 본문의 내용을 보기에 앞서 야곱이 어떻게 이러한 상황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해 알고 있어야 이 본문을 좀 더 이해할 수가 있다.

 

야곱의 귀향길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32:10) 아버지의 품과 고향을 떠나는 야곱의 모습을 우린 28장에서 볼 수 있다. 아버지 이삭은 그에게 어머니인 리브가가 고향에 거주하는 가나안 사람, 헷사람들을 아주 싫어했기 때문에 자식의 평생반려자를 리브가의 고향인 밧단아람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취할 것을 야곱에게 제언한다. 리브가는 이삭에게 이런 말을 한다.

 

‘내가 헷 사람의 딸들을 인하여 나의 생명을 싫어하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면 나의 생명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27:46)

 

물론 자식의 정혼기가 되어서 부모들이 아들의 배필을 짝 지워주기 위한 장면이다. 하지만 야곱이 이 고향 땅을 서둘러 떠나야 하는 데는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형 에서와의 뒤틀려진 관계 때문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다투었던 형과의 관계는 시간이 지나서 더 불거지게 되었던 것이다. 야곱은 형 이삭이 가진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빼앗았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삭의 임종 시 형의 받아 누릴 장자권의 축복을 자신이 형 인체 가장하고서 그 축복을 빼돌렸던 것이다. 이 임종 시의 축복은 한 가족의 대표자로서 사회적, 종교적 위치를 확정시키는 상징적 의미를 지녔던 것 같다. 이러한 사건이 발발이 되어 야곱은 형 에서의 눈을 피해 도피처로 외삼촌 라반의 집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그가 많은 고생 끝에 이제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서 다시 귀향 길에 오른다. 하지만 형 에서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되자 고향을 떠날 때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께 했던 서원은 잊은 채 이방 땅 세겜에 머무르고 만다. 야곱은 아마도 자신을 지금까지 오게 한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자신의 노동과 재치와 의지력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이 살고 있지 않은가?

 

야곱의 서원

그는 낙타를 타고 하루 동안 여행하기에 알맞은 거리 100Km에서 피곤에 절어 잠이 든다. 바로 그때 그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며 이삭의 하나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하나님을 꿈을 통해서 만나게 된다. 체험하게 된다. 그 크고도 경이로운 하나님과의 체험은 야곱에게 새로운 힘과 재충전의 기회를 갖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께 서원한다. 야곱의 심적인 상황은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부모님이 계신 고향 땅을 떠난다는 데서 오는 두려움 그리고 에서와의 틀어진 관계, 미안한 마음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육체적인 피로와 맞물려 허덕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힘든 와중에 찾아오신 그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는 이렇게 서원한다.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 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하였더라(창 28:20~22)

 

야곱은 하나님과 처음으로 만난 그 체험의 현장을 “벧엘”이라고 불렀다. 그가 하나님을 만난 장소였다. 야곱은 그 길로 라반의 집에서 힘들게 재산을 모은다. 비록 인간적인 간교함과 꾀로 자신의 정열을 쏟아 재산을 불린 것도 있지만 그의 외삼촌인 라반의 지독한 성격도 있었으므로 그에게 그 타향살이가 얼마나 큰 고생이었겠는가?

 

 

야곱의 딜레마-에서

더 이상 외삼촌 댁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힘들겠다는 판단을 하자 그는 자신의 아내와 육 축과 재산을 가지고 다시 귀향길에 오른다. 그에겐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데서 오는 기쁨과 이만큼 성공했다는 것을 고향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부자의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야곱의 전신을 사로잡는 치가 떨리는 두려움과 오싹함이 있었다. 그 생각만 하면 덜컥 겁이 나는 야곱이었다. 그가 왜 고향땅을 떠나야 했던가? 자신의 여자, 배필을 구하려고 떠났다는 명분의 이면에는 형 에서를 속여서 형의 축복을 가로채었다는 데서 오는 엄청난 죄책감과 힘듦, 그리고 또한 이런 야곱의 행동에 분개한 나머지 형 에서가 자신을 어떻게 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로부터 탈출 아니면 도피한 것이다. 몇 십 년 동안 묻어 두었던 마음 깊숙한 곳의 응어리가 다시 싹이 돋듯이 움트 오고 있는 것이다.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이다. 형제간에 패인 골이 세월의 무게와 함께 더 깊게 자신의 가슴을 아리게 했을 것이다. 형의 얼굴을 어떻게 볼까? 혹시나 형을 대면하면 어쩌지?라는 의문에서부터 시작해서 ‘형이 나를 죽이지는 아니할까?’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까지도 느꼈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 있어 그가 가진 수많은 재산과 아름다운 아내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했던 것이다.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떠난 그 청년시절과 대조적으로 지금은 하나의 거대한 기업가로서 변모한 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면서 그는 ‘벧엘’에서 만났던 그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였던 것이다. 그는 하늘이 온통 못으로 박혀 자신을 짓누르는 것 같은 그 엄청난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했던 것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32:12)

 

비록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보인 간사한 면도 있고 지독스럽게 상황에 잘 적응하는 카멜레온과 같은 능동적인 적응력이 있는 인물이지만 그의 행사를 불문에 부치고라도 그의 마음에 박혀 있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아직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는 곧 에서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잔꾀를 부린다. 형에게 줄 예물을 준비케 한 것이다. 성경의 야곱의 심리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32:7)

 

야곱은 홀로 남아 이 고통에 직면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것이다. 그곳이 바로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얍복 나루’였다. 야곱은 환도뼈가 위골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과 겨루어 씨름을 한다. 그러자 마침내 그는 그 하나님의 사자에게서 이런 말을 듣는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빼앗은 자라는 이름을 가진 야곱이 어떻게 변하였는가? 그를 감싸고 있던 에서와의 문제가 이 사건 이후에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주목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는 에서와 기쁘게 만나 화해를 하게 된다. 하나님이 에서의 마음문을 열어젖혔던 것이다. 오랜 세월에 치여 있었던 그 형제간의 한을 하나님이 제거해 주신 것이다. 그것은 야곱이 하나님을 다시 만나는 경이로운 체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제까지 여러분은 이제껏 귀가 닿도록 들었던 구약의 한 인물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 장황한 이야기들은 이제부터 하려고 하는 이야기의 서곡일 뿐이다. 자, 야곱은 하나님을 만났고 그리하여 형과의 얽힌 문제가 풀어졌다. 이젠 더 이상 그것으로 인해 머리를 쥐어 짜내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면 이젠 예전에 벧엘에서 서원하였던 그 내용을 지켜야 하는데 야곱이 무얼 하고 있는지를 보라!

 

딜레마 해결 이후의 야곱

창 33:17이다.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은 고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야곱이 지금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가? 창 28:20 하나님을 위해 단을 쌓고 전을 세우겠다던 그의 서원은 온데간데없고 자기 자신과 짐승을 위한 집을 지으며 장기적인 체류를 하려고 하고 있다. 모든 힘든 상황이 지나가 버리자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자기 재산>이었던 것이다. 에서로 인해 그렇게 고통스럽게 지낼 때는 그의 눈에는 오직 ‘하나님’뿐이었다. 왜냐하면 그 분만이 도움과 힘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의 처자식과 재산은 정작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힘듬의 짐을 벗었을 때는 자기 자신의 안녕과 평안과 자기 자신이 가진 재물과 재산에 얼마나 집착하는지를 보라. 심지어 짐승을 위한 우릿간은 만들 눈, 안목을 있었지만 그와 함께 모든 상황과 삶에서 동행하시면서 아파하시고 동참하셨던 하나님을 볼 줄 아는 안목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가 무엇을 하는지를 보라!

33:20 거기에다 하나님을 위한 단을 쌓는답시고 제단을 쌓고는 엘엘로 이스라엘이라 하였던 것이다. 자신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종교적인 의무는 덜고자 벧엘이 아닌 이방의 땅에 단을 쌓았던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서원하였던 것을 위반하는 야곱의 위선이다. 여러분에게 이러한 것은 없는가? 여러분이 하나님께 서원하고 결단하였던 것들을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그 결심들을 묻어 두고 있지는 않는가? 여러분이 하나님께 바치기로 한 것을 여러분은 지금 가로채고 있지는 않는가? 아니면 여러분은 일평생 인생을 살아오면서 하나님 앞에 결단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은 아닌가? 이동원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다.

 

“서원도 한 번 하지 못 한다면 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결심도 한 번 못 한 사람을 진정한 신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했다. 야곱은 그와 늘 함께 동행하셨던 그 하나님, 지팡이 하나만으로 떠났던 그를 후에는 엄청난 부자로 성장케 하셨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는 자신의 안일한 안전과 유익을 위해 집을 짓고 있다. 그가 서원한 내용을 지키지 않고 벧엘로 내려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분, 집을 지을 때야 좋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서원을 이행치 아니한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Result From

야곱은 그 이방 땅에 거하면서 이방민족들인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족속에게 공격이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종교 혼합주의와 이방인과의 결혼 등의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창 34장은 바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나타나는 장이다. 무슨 내용이 실려 있는가? 야곱이 서원한 것을 묻어 두고 자신의 안일한 삶에 집착한 결과로 빚어진 엄청난 파문이 기록되고 있다. 바로 자신의 딸 지나가 히위족속중의 하몰의 아들에게 강간당하는 사건이다.

 

 

여러분 한 번 상상해 보라! 하나님과의 약속을 이행치 아니한 결과 발발한 이 엄청난 사실에 대해서 말이다. 이 사건은 그 자체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사기극과 엄청난 살육을 몰고 온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지나가 겁탈당한 것에 대한 오빠들의 분노가 넘쳐 세겜족에게 할례를 행하면 디나와 결혼시켜주겠다고 속여 그 족속의 남자들이 할례식을 거행해서 고통당하고 있을 즈음에 시므온과 레위가 그 족 속의 모든 남자를 죽이고 야곱의 여러 아들이 약탈과 노략을 자행했다. 살인과 강도짓을 서슴지 않았던 자식들의 감정에 북받친 행동들을 야곱이 책망하면서 그는 자신의 가족의 위기상황임을 이제야 간파한다. 자신의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 자기 식구의 불행을 초래했던 것이다. 야곱일가의 일대 위기이다. 이런 오만방자한 행동이 야곱일가의 생명을 위협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34:30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이 땅 사람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냄새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리하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하나님은 이렇게 상황을 극단적인 경우로 몰고 가서라도 서원을 이행케 하신다는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이방의 땅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이방 민족보다 수적으로 불리한 한 일개 가족의 몰살을 생각했을 것이고 그리하여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직감했을 것이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바로 그때였다. 그 순간,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V.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아직도 거기서 서성이고 있을 거냐?”,

“죄악의 자리에서 어서 일어나라”,

과거에 역사했던 하나님을 기억하라”

 

1절에 나타난 동사를 주목해 보라!-일어나-올라가서-거하며-쌓으라 인간은 언제나 하나님 품으로부터 도망가고 있다. 지금도 많은 인간들이 그분으로부터 도피하고 있다. 요나가 하나님으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도망치고 있는 인간을 하나님은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 그분은 끊임없이 추격하신다. 끊임없이 추적하신다. 멸망의 길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지금도 달려오고 계시는 것이다.

 

 

언젠가 이런 신앙서적의 제목을 본 적이 있다. “도피하는 현대인”이라는 제목이었다. 현대인들은 끊임없이 도피하고 있다. 텔레비전으로 자신을 피신시키고 영화의 거대한 스크린으로 자신의 생계를 위한 악착스러운 돈벌이로 수많은 일들로 도피하고 있다. 야구장에 가 보았는가? 스포츠를 통해서 자신들을 도피시키는 현대인들의 어두운 고독을 아는가? 사탄은 현대인들에게 3가지의 S정책으로 공격하고 있다. Sex, Sports, Screen이다. 요즘 얼마나 현란하게 성적인 음란함을 매개로 하여 광고를 하고 있는가? 스포츠는 말할 것도 없다. 영화도 물론이다. 현대인은 이러한 거대한 괴물들이 자신의 안식처인줄로 착각을 하고 거기에 몰입하며 도피하고 있다. 마치 야곱이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께 이행해야 할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책임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그런 우리들에게, 그런 야곱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벧엘로 올라가라. 여러분이 처음 어디서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는가? 맨 처음 그분의 사랑을 만끽했는가? 그분의 첫사랑을 어디서 느꼈는가? 야곱이 체험한 하나님과의 감격적인 만남은 벧엘에서 이뤄졌다. 하나님은 자신을 1절에서 뭐라고 소개하는가?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야곱은 에서에게서 도망 다니며 살다가 이젠 그것이 해소되니깐 하나님으로부터 피하여 도망하고 있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분이 야곱과 함께 우리를 부르고 있다. 삶의 밑바닥의 절망적인 경험에 놓인 야곱은 이제야 하나님에 대한 눈이 열리게 된다. 바울이 그 다메섹도상에서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난 체험처럼. 그러자 그는 반응한다. 이젠 야곱이 하나님께 순종한다. 아니 순종할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다. 이젠 야곱이 어떻게 하는가 보라!

 

V.2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들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V.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야곱은 자기 가족이라는 작은 공동체가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임을 알았다. 예전 라헬이 아버지 라반의 우상인 드라빔을 훔친 도벽, 도둑질과 그 이면의 종교혼합주의와 디나의 사건으로 인한 자식들의 강탈과 노략질과 피를 들끓게 만들었던 살인에 대한 대대적인 일가의 회개운동이 벌어진 것이다. 야곱이 이렇게 자신의 가족들에게 말을 하자 그 식구들의 반응이 어떠했는가? V.4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모든 식구가 자신들이 가진 우상들을 내어 던지기 시작했다. 야곱 일가의 일대 위기에서도 아무런 영향력이 없던 그 패물더미와 쇠붙이들을 버렸던 것이다. 그들의 죄악을 청산하는 장면이다.

 

교회라는 공동체도 동일하다. 교회 내에 죄악이 있으면 교회가 침체의 늪에 빠진다. 교회가 서로의 죄악을 고백할 때 교회가 교회다워진다. 교회내에 벌어지는 죄악들을 묵인하며 그것들에 대해 방관할 때 교회는 어설픈 종교집단에 머물고 마는 것이다. 사람들은 교회의 부정부패와 죄악을 까발려서 불신자들에게 알려지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기 때문에 쉬쉬하면서 덮어두려고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되면 세상의 뱃머리가 되기보다는 타락의 지름길을 터 주는 것이 교회가 되고 마는 것이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려면 서로의 죄악에 대해 참회하는 마음으로 고백하고 기도하며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부흥은 무작정 부흥회 한다고 해서 부흥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죄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투명해질 때 교회의 교회 됨이 드러나는 것이다.

 

 

야곱의 일가를 보라! 그들이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킬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5절이다.

 

“그들이 발행하였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 하신 고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고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앞에서는 야곱이 어떠했는가? 디나의 사건과 그로 인한 살육으로 이방민족들이 야곱일가를 공격해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으나 도리어 그들이 야곱의 무리들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누가 그렇게 하였는가? 야곱의 식구들은 우상을 제하고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렸을 뿐이다. 바로 하나님이 그렇게 하였던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께 자신의 죄악과 공동체의 죄악에 통감하며 회개자복할 때 세상사람들은 “교회가 왜 저 모양 저 꼴이냐?”라고 조롱하기보다는 오히려 두려워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교회의 권위이며 교회의 능력인 것이다.

 

 

신자들, 교회의 능력과 힘은 다름 아닌 죄에 대해 투명해질 때 발산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오늘날에 벌어지는 정치판의 판도나 교회들의 현실들을 보며 희망이 사라졌다고 한다. 절망스럽다고 한다. OO면에 들어서는 쓰레기매립장문제가 매스컴에 보도되고 있다. OO리에 확정되었다고들 한다. 김천에 세워둔 쓰레기 매립장에는 폭우가 쏟아지면 오염수가 몇 톤씩 강물에 흘러내린다고 한다. 그 강물을 식수로 마시는 근처의 국민학교 학생들은 비염에 걸려 고생이고 근변의 농장에서 낳은 가축들은 다리가 하나 없는 기형가축들이 나타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공기가 말도 아니라고 한다. 물론 이것은 극단적인 경우이다. 하지만 그것은 남의 일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데모를 하고 해 보았지만 면장도 사표를 내고, 동장도 사표를 내는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절망의 탄식과 한숨만을 연거푸 쉬고만 있을 수 있는가? 땅도 매매가 되질 않고 어쩌면 우리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이 토지와 환경이 열악한 환경으로 바뀔지도 모르는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과연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기대어야 할 곳은 어디인가? 우리의 열악한 상황을 변화시키는 분은 누구인가? 우리의 잠든 영혼을 진정으로 깨어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온 밤을 싸웠어도 야곱은 아직도 마음으로나 영으로나 야곱 (빼앗은 자)그래로였다. 오히려 비극이 야곱을 새롭게 했다. 그가 과거에 하나님께 했던 약속을 기억하고 마땅히 버려야 할 것을 버린 후에야 진정 야곱이 아닌 <이스라엘>로 태어날 수 있었다. 우리가 우리의 우상들을 버리고 하나님의 능력의 손 아래서 우리 스스로를 성결케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바꿔 주시고 인격과 성격과 본성과 기질을 변화시켜 주신다. 우리의 상황까지도 그분이 감당하실 것이다.

 

저는 여러분에게 감히 말씀드리고 싶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야곱은 이렇게 고백했다.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 이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며 여러분의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창세기 35장 1-15절의 본문을 토대로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라는 설교를 살펴보았는데, 야곱이 과거에 서원했던 것을 다시 위기를 통해 새롭게 재확인하면서 벧엘로 올라가는 과정을 통해 영적인 소생, 야곱 가족의 부흥을 가져왔다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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