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창세기 27장의 리브가를 보면서 우리가 하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말의 권세와 힘과 파급효과에 대해서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과 솔직하지 않고 숨기는 거짓말의 위력, 저주에 대해서 한번 알아볼까요?
창세기 27:13
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를 내게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고 가서 가져오라
어긋난 자식사랑으로 시작되는 이삭 가문의 비극
27장에서 시작되는 문장은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어 잘 보지 못하더니'라는 1절로 시작됩니다. 이 말은 가장인 이삭에게 약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부부는 그 약점을 보완하고 도우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삭과 리브가가 부부였지만, 자식에 대한 편파적인 사랑으로 인해 이삭은 에서를, 리브가를 야곱에 더 애착을 느끼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부모도 나름대로 자기가 아끼는 자녀가 있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인데요. 특별히 이 쌍둥이 형제, 에서와 야곱이 태어날때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예언이죠.
창세기 25:22-23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이 말은 에서가 야곱을 섬기게 될 것이다, 에서보다 야곱이 더 크게 될 것이다, 아우가 형 보다 더 위대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런 예언을 이삭과 리브가 부부가 귓등으로 들었을 리가 없습니다. 20년 동안 기도해서 얻은 아들들이기 때문에 더 절실했고 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주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부가 한 마음이 아니고 두 마음이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빠 이삭은 에서를 좋아하고, 엄마 리브가는 야곱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이제 노쇠했으니 장자축복권을 들먹이면서 에서에게 보편적인 룰에 따라 축복하기로 작정합니다. 그런데 이걸 리브가가 듣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예언이 이러하니 이삭과 리브가도 서로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서로 소통을 하면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어야 합니다. 비록 지금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그들이 20년 동안 기도하면서 얻은 쌍둥이가 태어났을때 하나님께서 주셨던 메시지를 잊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부는 서로 이런 영적인 소통이 없었습니다. 그냥 자신이 육신적으로 아끼는 아들에게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이게 바로 어긋난 자식사랑이었습니다. 질서를 제대로 잡지 못하는 가정의 구도입니다. 이삭은 노쇠하였으니 그 약점을 이용해 남편의 권위를 무시하고 자신의 야곱을 향한 욕심을 발휘합니다. 이삭은 리브가에게 소통하지 않고 냅따 이삭에게 장자축복을 할 것이라고 합니다. 서로의 불통의 원인 어긋난 자식사랑이었고, 이게 가정의 무질서를 초래합니다.
말의 권세, 말의 영향력을 무시한 큰 아들, 에서
이 때 상황은 이미 야곱에게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버린 에서였던 것입니다. 에서는 자신에 누릴 장자권의 특권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았다면 말이라도 야곱의 농간에 넘어가지 말아야 했는데요. 그런데 에서는 배가 고파 죽겠는데 그 장자권이 뭔 소용이 있냐면서 경시하는 발언을 합니다.
창세기 25:32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의 말이라는 것이 얼마나 권세가 있는지, 말을 지혜롭게 잘 해야 하나님께서 축복하십니다. 말을 잘못하거나 거짓말을 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입술에서 나온 말의 권세에 의해 그 사람의 인생이 비극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에서는 말 따로, 마음 따로였습니다. 이렇게 야곱 앞에서 팥죽 한 그릇으로 자신의 특권을 낼름 팔아버려놓고는 지금에 와서 이삭의 축복을 받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리가 없습니다.
사무엘상 2:30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야곱은 간교하리만치 이 장자의 축복권에 간절함이 있었는데 에서는 그 장자권은 자신에게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기에 간절함이 없었습니다. 혹여나 자신이 말로 야곱에게 팥죽 한 그릇, 음식 한 사발에 팔아버린다고 해도 그 축복권이 자신에게 당연히 오는 것이지 빼앗기지 않을거라는 안일한 착각 속에 있었죠. 사무엘상 2:30의 말씀처럼 영적인 것에 대한 존중, 하나님께 대한 존중이 없으니 결국 자신의 육신적인 니즈에 그냥 쉽게 장자권을 멸시하는 에서입니다. 이런 걸 보면 에서는 축복을 받을 깜냥이 안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의 위력을 무시한 어머니, 리브가
리브가가 에서와 야곱 사이에 일어났던 이 팥죽 에피소드를 분명히 야곱에게서 들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야곱은 마마보이였으니깐요. MBTI로 치면 I였겠죠. 집돌이로 엄마처럼 여성스러운 면이 많은 야곱이 엄마에게 시시콜콜 다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리브가가 안심이 안 되었나 봅니다. 자신이 편파적으로 사랑하는 아들, 야곱에게 축복권이 넘어가야 하는데,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마스터플랜을 다 짜고 계셨는데도, 리브가는 조바심이 났나 봅니다. 만약 이삭이 에서에게 축복을 다 해 버리면 자신의 애지중지하는 야곱이 받을 축복이 없다는 것이 너무 큰 무게로 다가왔기 때문에 급히 서두릅니다. 그리고서 이런 말까지 해 버립니다.
창세기 27:13
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를 내게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고 가서 가져오라
이 대목에서 리브가가 야곱을 향한 절대적인 애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들만 잘 되면 되니깐 자신이 어떻게 되어도 상관이 없다. '너의 저주를 내게 돌리리니'라고 합니다. 빨리 에서가 사냥해 와서 아버지께 별미를 올리기 전에 네가 가서 염소 새끼 두 마리를 가져오라고 재촉합니다. 어린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는 것이 아니냐면서 양심이 자책을 하고 있는데, 엄마는 강철심장입니다. '저주는 내가 다 받을께, 너는 축복만 받으면 된다' 이런 식의 발언을 합니다. 이 리브가의 행동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리브가는 이 말과 이 후의 일련의 행동으로 인해 결국 야곱을 떠나 보냅니다. 남편 이삭에게 야곱을 떠나 보낼 때도 결혼, 배우자 문제를 운운하면서 거짓말로 둘러댑니다. 그리고 그게 끝입니다.
어긋난 자식사랑, 거짓말이 불러운 가족의 비극: 생이별
부모와 자식간에는 뜨거운 사랑이 있습니다. 인생에 뭐 특별한게 있습니까? 명절에 왜 그렇게 사람들이 민족대이동을 합니까? 부모와 자식간의 만남이 있기 때문입니다. 흩어져 있는 자녀들이 부모를 만나는, 자신의 고향과 보금자리, 정서적 근원지인 부모님에게 잠시 머물기 위한 축제의 시간, 파티타임이 일어나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삭의 가족에는 그게 힘들어지게 됩니다. 리브가가 그렇게 아끼던 야곱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됩니다. 생이별을 한 야곱, 마마보이였던, 집돌이였던 야곱이 얼마나 어머니가 보고 싶었겠습니까? 리브가는 또 얼마나 야곱이 보고싶었을까요? 에서와는 결이 안 맞으니 야곱을 더 애지중지했겠죠? 이삭은 점점 나이가 들고, 이제 이 여인의 소망은 야곱인데, 야곱을 옆에서 한번이라도 볼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박탈당하게 했나요? 바로 리브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야곱의 엄마, 자기 자신이 결국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너의 저주를 내게 돌리리니"
물론 이런 말은 대다수의 부모가 자녀들이 잘 되라고 이런 말을 하기도 합니다. 부모가 자녀 잘 되는 거 안 좋아하는 부모가 어디 있나요? 그런데, 이 말은 리브가가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남편 이삭을 속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이런 일련의 행동으로 인해 에서와의 관계는 또 어떠했나요? 그리고 야곱과 생이별하고 언젠가는 만나게 될 희망 없는 희망(hopeless hope)만 가지고 평생을 살다가 죽었습니다. 리브가의 세상 낙이 완전 뿌리채 뽑히게 된 것이 리브가의 비극이고 이삭 가족의 비극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리브가, 하나님 앞에서 정치질하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어기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자신이 말한 것은 다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간들은 그런 하나님에 대해 신뢰가 부족한지, 믿음이 부족한지 자꾸 인간적인 열심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자기에게로 맞추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타이밍을 당기려고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타이밍을 당기는 가장 좋은 도구는 기도입니다. 하지만 기도 외에 다른 인간적인 계획과 열심과 플랜은 때론 하나님의 마음이 불편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너희는 가만히 있어 주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자신의 주권적인 역사를 통해 세상을 지배하시길 기뻐하시지, 인간의 공로나 노력이 1%라도 들어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인간은 '전적 부패'한 존재이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그게 전적인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은혜는 말 그대로 공짜입니다. 인간의 시도나 노력이 들어가면 안 됩니다. 그런데, 이삭도, 리브가도 하나님의 계획에 자신의 젖가락을 넣어버린 것이죠. 이삭은 에서에게 축복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했고, 리브가는 이삭을 속이고 야곱의 축복하는 이 프로젝트를 거행하기 전에 먼저 기다려야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에서가 축복을 받았어도 그럴 그릇이 안 된다면 또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은 역사하셨겠죠? 그런데, 인간은 자꾸 정치를 할려고 합니다. 정치질을 하려고 합니다.
제가 나이가 들면서 인간의 모든 것이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정치는 없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부부사이도 정치가 필요하고, 자녀를 양육하는 부분에서도 지혜로운 정치가 필요합니다. 한나 아렌트가 이야기 했듯이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다'라는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치는 필요하지만 정치질은 삼가해야 합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도 정치가 필요합니다. 심지어 목회자로 성공(?)하는 것도 정치가 필요합니다. 그냥 되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지 않습니다. 정치란 것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나타나는 화학적 작용입니다. 정치는 필요하되, 정치질은 필요하지 않다. 물론 정치질도 필요하겠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정치질'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삭 가족의 비극은 바로 여기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계시를 져버리는 장자축복권을 에서에게 베풀고자 했고, 리브가는 그걸 막기 위해 남편은 속이는 정치질을 했습니다. 이삭은 단순한 자식욕심에서 시작되었지만, 리브가는 하나님의 약속을 앞당기기 위한 인간적인 정치질을 했던 것이고, 그게 거짓말로 드러났고, 그로 인해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과 분리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인생은 언제나 지독한 괴로움 VS 지독한 외로움 사이에 존재한다
리브가의 남은 인생이 어떠했는지 성경을 기록하지 않습니다만, 그녀가 사랑하는 애착관계에 있던 야곱을 보지 못했던 남은 인생은 얼마나 슬펐을까 추측해 봅니다. 그 슬픔의 무게 때문에 그녀가 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을까요? 그건 상상력의 여지가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조상들은 다 남들이 알 수 없는 뼈 아픈 고통과 불행의 과정이 있었고 그로 인해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되기도 했습니다. 남녀가 결혼을 하면 행복한 생활이 보장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남녀가 결혼한 것이 오히려 힘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면 '지독한 괴로움'의 열매를 낳을 수 있으며, 이혼을 하면 '지독한 외로움'의 열매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
인간은 이 지독한 괴로움과 지독한 외로움의 상황에서 하나님은 만나면 말 그대로 은혜입니다. 어떤 상황에 봉착하던지 간에 하나님이 구원자가 되기만 하면 소망이 있습니다. 그 구약시대의 이삭 가문에 리브가와 야곱은 인제 '처절한 외로움'의 상황으로 하나님께서 몰아가십니다. 리브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야곱은 처절한 외로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물론 처절한 외로움만 있었을까요? 지독한 괴로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만났다는 것에 그의 인생이 빛이 있는 것이고 약속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이겠죠. 하나님께서는 항상 자신의 얼굴을 구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게 하나님의 사람들의 특징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사람은 그게 중심이거든요. 그게 안 되면 계속 몰아세우십니다. '처절한 괴로움이나 아니면 철저한 외로움 속'에 우리를 놔두십니다. 그리고서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소망의 빛을 만나야 하는 것이죠.
오늘의 Message
오늘 이삭의 가족들의 이야기를 해 보았는데요. 이삭의 이런 스토리들을 대하면서 우리가 뼈저리게 느끼고 되새겨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의 말의 권세가 있기에 말, 언어생활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짓말은 반드시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짓말은 항상 또 다른 거짓말을 만듭니다. 스노우볼(Snowball) 효과라는 말을 경제적인 개념을 자주 사용하는데, 눈덩이가 처음에는 작지만 점점 굴러가게 되면 엄청나게 큰 눈덩어리가 된다는 것, 작은 푼돈이 너무 작다고 무시하지 않고 모으다 보면 쌈지돈이 되고, 결국 점점 불어나 목돈이 되고 부자가 된다는 말인데요. 거짓말도 처음에는 너무나 무시할만큼 사소한 거짓말이지만 그게 점점 불어나면 나중에는 엄청난 데미지를 주는, 인생의 판도를 뒤흔드는 거짓성, 모래성이 될 수 있습니다. 모래성은 성이긴 하지만 모래성이기 때문에 쉽게 무너집니다. 쿠팡플레이에서 상영되는 배수지가 주연한 <안나>를 보면 처음 했던 거짓말의 스노우볼효과를 제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이런 거짓말의 위력을 간과할 때가 있습니다. 거짓말은 무서운 것입니다. 리브가의 거짓말, 그리고 허투루 한 말이 결국 가정의 생이별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보다 앞서려고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자신의 페이스에 맞추고자 하니 사달이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게 하시기 위해 인간은 기도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인간이 뭔가 제스처를 취하면 조금 앞서는 것 같지만 결국 문제가 생기고 맙니다. 그건 인생을 길게 보고 평가해봐야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알 수 있는 노릇입니다. 하나님이 평가하실 때 굿이라고, 배리 굿!이라고 이야기할 정도가 되는 게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약점이 많습니다. 이삭은 약속을 기억하지 못하고 에서를 편애했고 나이들어 눈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시력이 약한 것은 아마 아브라함이 100세, 사라가 90세에 노산을 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네요. 약점이 많은 이삭, 리브가는 야곱을 편애했고 남편에게 거짓말을 했고, 결국 남편과 에서와 불편한 관계를 가져가야만 했으며 야곱과는 생이별을 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축복권에 대한 강한 집착은 있었지만 어머니의 말에 순종(?)한 나머지 아버지와 형을 속이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형과 뒤틀린 관계를 회복하고 고향을 떠났어야 했는데, 그러기엔 너무 어려고 어리석었기 때문에 한평생 '에서 트라우마'로 고생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다 인간의 약점이고 유약함 때문입니다.
"약할때 강함 되시네"When I am weak, Then I am strong!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약점 많은 인생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생을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그 분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할 때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이삭 가문의 이런 복잡다단한 문제들이 가득했지만 하나님은 그런 가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이어가게 하셨고 믿음의 스토리를 풀어가게 하신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오늘은 창세기 27장을 중심으로 이삭 가문(집안)에서 벌어진 일들을 통해 인간의 약점과 말의 중요성, 거짓말이 낳는 참담한 결과,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서도 여전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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