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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창세기

창세기 2장 19절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by Message.K 2022.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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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창세기의 '창조'는 불가사의하며 미스터리한 일이긴 하지만,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 대목입니다. 신신학이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창세기의 창조기사를 재해석하여 인간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엄연한 오류입니다.

 

 

 

 

오늘은 창세기 2:19에 나오는 이 대목을 같이 한번 볼까 합니다.

 

창세기 2: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능력은 지금의 인간이 가지고 있는 포텐셜을 뛰어넘는 능력치였습니다. 죄가 세상에, 인류에 들어오지 않은 시기에 아담이 가진 능력은 엄청난 능력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아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세상의 모든 존재하는 모든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들의 이름을 지어줍니다.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하나님은 아담과 노는 게 좋으신가 봅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만든 아담과 함께 하는 게 즐거우신가 봅니다. 우리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아이랑 놀 때 참 즐겁습니다. 하지만, 육아라는 짐 때문에 아이랑 제대로 놀지 못하고 오히려 짐처럼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독박 육아'라느니, '육퇴'라는 말도 있는데요. 그만큼 아이를 키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주손녀랑 놀 때는 진짜 즐겁게 놀아주십니다. 부모가 보는 차원과는 또 다른 손자손녀 사랑을 엿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부조모의 사랑도 육아의 짐이 무겁다 보면 힘듭니다. 신경통이나 근육통이니 체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골병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선 피곤치 않으십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의 형편과 상황을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요즘 제가 아이들과 <강철부대>시즌2부터 정주행하고 있는데요. 정말 인간의 육체적인 한계, 정신적인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하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는데요. 많은 미션들이 있지만, 특별히 최강대원을 뽑는 마지막 코스에서 설산의 오르막을 100kg 통나무를 끌고 가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어마무시하죠. 최강 TOP을 찍은 707대원은 아마 통나무가 눈과 날씨 때문에 얼었는지 움직이질 못하고 있었는데요. 초반에는 몇 명이 앞서가는 것을 뒤에서만 지켜보고 있던 그가 통나무가 움직이지가 무섭게 네 발 짐승처럼 통나무를 끌로 완주해 결국 1등을 해버립니다. 어마무시한 광경이었는데요. 하지만, 그 미션에 참여한 인원이 6명이었는데, 6명째 707대원이 중간에서 통나무를 움직이지도 못하고 멈춰 있습니다. 포기를 해야하느냐? 마느냐? 3위 안에 들어야 베네핏이 주어지는데요. 베네핏이 없는 4위, 5위도 이미 다 완주했습니다. 그들의 자존심때문에 그들은 경기를 포기하지 않고 다 완주했는데요. 박수 받을 만한 일입니다. 그런데, 최강대원 32명 중에 6위에 든 이 친구가 통나무를 움직이지 못하고 어떻게 할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팀장이 가서 포기해도 된다고 이야기하자, 팀원 2명이 더 합세해서 네 사람이 통나무를 같이 끌어줍니다. 정말 전우애가 느껴지는 가슴 뭉클한 장면이라 모두가 박수를 보냈는데요. 인간이 아무리 최강대원이라고 해도, 강철부대라고 해도 피곤하고 지치고 탈진할 수 있는데요.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늘 풀 에너지, 풀 지혜, 풀 파워 이십니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죠. 그래서 아담에게 포텐셜을 가득 주시고 그가 이름을 짓는 장면을 어떻게 진행하는가 지켜보시는 게 굉장히 즐거우신가 봅니다. 

 

 

 

 

 

 

하나님께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가? 어떻게 판단하는가? 어떻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지에 대해 관심이 많으십니다. 우리의 고통과 불행만 주시하고 허락하는 사디스트가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다'라는 사실을 주지해야 합니다. 그것은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팩트이기 때문이죠. 우리 하나님이 아담을 지켜보셨던 그 시선으로 지금도 우리를 지켜보신다고 느끼셨음 좋겠습니다. 우리가 느끼지 못할 뿐이지, 그 분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를 찾는 자를 찾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담이 들짐승들과 새들의 이름을 지을 때 하나님께서 한 가지 수고를 덜어주시는 대목이 있습니다.  

 

 

 

창세기 2: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바로 하나님께서 아담이 에덴 동산 전체를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세상의 널린 들짐승들과 각종 새들을 모을 수가 없으니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라고 성경은 기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친절하신 분이십니다. 아담을 향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 서 있는 아담을 향한 하나님의 친절입니다. 하나님께서 동물들과 새들을 다 집합시켜서 그 이름을 짓는 것에 동역하시는 대목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동역하시길 원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무슨 힘이 있고 능력이 있고 파워가 있을까요? 그분의 뜻과 계획이 아니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우리가 일하게끔 도우시고 동역하시고 조력하시고 돌보아주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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