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이 일방적으로 약속을 받은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아브라함 편에서의 반응이 있어야 했다. 약속이 주어진 상황이 어땠는지 기억을 더듬기 위해 1일에 공부한 것을 다시 한 번 보라.
⑴15-17장을 읽으면서 15장의 약속이 17장에서 얼마나 깊어졌는지 주목해보라.
15:4-5, 17:4-7,9-11,15-16,19을 비교하라. 이런 약속에 아브라함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당신의 결론을 적으라.
15:4-5
- 4.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 5.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17:4-7,9-11
- 4.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 5.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 6.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 7.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 9.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 10.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1.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 15.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 16.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 19.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사라를 통하여 직접 후손이 나오고 그 후손이 바로 아브라함의 기업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영원한 언약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계시는 하나님!
아브라함의 반응: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약속을 보여주시면서 5절에 ‘직접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서 시청각적인 비전을 보여주셨다. 엘리에셀이 자신의 후견인으로 쓰임을 받을 것이라는 인간적인 생각을 하나님은 내려놓길 원하셨다. 아브라함이 인간적인 생각들을 벗고 15:6 여호와를 믿었다고 했고, 하나님은 그것을 의로 여기셨다. 이 언약이 아브람이 잘못 드린 제사로 인해 이스라엘 민족의 비극을 예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약은 지속되었다.
⑵성경전체에서 아브라함은 믿음 때문에 부각되는 인물이었다(예를 들어, 롬4장). 오늘 말씀에서 아브라함이 이런 평가를 받을만하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는가? 당신이 발견한 바를 찾아 적어보라!
아브라함은 믿긴 하였지만, 실질적으로 믿음의 행위가 따라오진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브라함을 의롭다-거룩하신 하나님이 보시기에 순결하고 마음에 든다-고 선언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었음을 주목하라. 하나님은 그분의 능력을 믿는 사람들에게 늘 동일하게 역사하셨고, 누구든지 기꺼이 의롭다 하셨다.
⑶ 하나님이 인류를 ‘의롭다 하심’이 오늘날에도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지 당신의 말로 설명해보라. 우리가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나님 마음에 드는 존재가 될 수 없은 이유가 무엇인가? 당신은 하나님이 의롭다 하신 사람답게 생활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당신을 의롭게 만드셨다는 사실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겠는가?
⑷ 말씀을 읽으면서 알 수 있듯이, 믿음과 의를 자랑했던 아브라함 역시 죄에 빠지고 말았다. 12:1-10과 16장의 경우가 그렇다. 아브라함의 약점은 무엇인가?
아브라함은 믿음의 모험을 감행했다. 외롭고 아픔과 슬픔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계셨기에 감사했다. 하란(형제)이 죽었고, 데라(아버지)가 여행 중에 죽었다. 그리고 형제 나홀과 헤어진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는 2,400KM의 대장정이었다. 장대한 믿음의 여행을 감행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무자했고, 아들 하란이 아버지보다 먼저 죽는 비극이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믿음의 대장정의 걸음 가운데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함께 하셨다. 끊임없이 약속을 상기시키시고 리마인드하셨지만,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다. 오히려 16장에서 사라의 씨가 아닌, 하갈의 씨를 통해 무언가를 해보려고 했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계획이 아니었다.
⑸ 그런 결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지키신다. 물론 아브라함은 그런 실수의 결과로 고통을 겪어야 했다(이스마엘의 후손들은 그후 계속해서 이스마엘의 ‘옆구리의 가시’였다, 창 25:18 25:17-18 17.이스마엘은 향년이 백삼십칠 세에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갔고 18.그 자손들은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로 통하는 애굽 앞 술까지 이르러 그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거주하였더라 ). 아브라함은 죄를 범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었겠는가?
이스마엘이 아무리 총애를 받아도, 이스마엘은 사라의 씨가 아니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이다. 인간적으로 아들을 보았기 때문에 아브람은 입에 걸리겠지만, 하나님의 뜻은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이스마엘은 누구인가?
아브라함의 총애를 받은 아들 유대인들이 정신적·신체적 조상으로 간주하는 아브라함은 신에게서 장차 위대한 나라의 아버지가 되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도 아브라함과 그의 사랑하는 아내 사라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아브라함은 아내의 하녀인 하갈에게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이스마엘이다. 그 이름은 "신이 말을 들어준다"는 뜻이다. 이스마엘이 태어난 뒤 하갈은 콧대가 높아져 주인을 오만하게 대했으므로 사라는 그 사실을 남편 아브라함에게 고하면서 시비를 가려줄 것을 청했다. 아브라함이 사라의 뜻대로 하라고 하자, 사라는 하갈을 박대했고 하갈은 이를 피해 황야로 도망쳤다. 그러나 신의 천사가 그들이 죽지 않도록 도와주었다(창세기 16). 이스라엘 민족은 처 사라가 노년에 낳은 이삭의 후손이고, 종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은 다른 큰 민족의 시조가 될 것을 야훼가 약속했다고 창세기는 전하고 있다.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은 사회에서 추방된 자를 가리키는 뜻이 되었다. 창세기 16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아랍인들은 자신들이 이스마엘(코란에는 이스마일로 나온다)의 자손이라고 믿는다. 무슬림 전설에는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이 신성한 도시 메카에 카바 신전을 세웠다고 되어 있다. 성서와 달리 코란은 이삭이 아니라 이스마일이 아브라함의 총애를 받은 아들이며, 제물로 바쳐질 뻔한 아들이라고 말한다. (유대인과 그리스도교도가 의도적으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곡해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황야로 내쫓긴 딱한 하갈과 이스마엘은 여러 회화 작품의 주제가 되었다. 프랑스 화가 코로는 「사막의 하갈」(1835)이라는 감동적인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문화적인 관점에서 가장 유명한 이스마엘은 허먼 멜빌의 걸작 『모비딕』에 나온다. 이 소설은 "나는 이슈마엘이라고 한다"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1800년대에 이 작품을 쓴 멜빌은 독자들이 성서에 익숙하므로 이슈마엘이라는 이름이 성서의 이스마엘처럼 뿌리 없는 유목민을 상징한다는 것을 즉각 알아채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스마엘 [Ishmael] (『바이블 키워드』, 2007.12.24, 도서출판 들녘)
한 사람의 불순종, 아브람의 잘못된 제사로 인해 4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살이를 하게 되었다. 제물 중 새를 쪼개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예배를 그릇되게 드린 것이다. 한 사람의 불순종, 아브람이 사라의 씨가 아닌 하갈의 씨로 말미암아 이스마엘을 낳게 되는데, 이 이스마엘은 이스라엘에게 엄청난 고통과 아픔을 주는 역사적인 존재로 등장한다. 지금도 유대인들과 아랍인의 관계는 좋지 않다.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어야 하는데, 무슬림의 성전과 사원이 있다는 것 자체가 바로 아브람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해 벌어진 사건인 것이다. 십자군 전쟁도 이 모든 것이 바로 한 남자가 하나님의 약속을 덜 믿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자신의 씨를 뿌리지 말아야 할 곳에 뿌림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과 이스마엘은 원수처럼 지내는 것이다. 서로 아브람의 후예라고 하면서 말이다. 역사적인 비극이다.
우리는 어떤가? 죄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는가? 신앙의 선배들과 이 문제를 놓고 이야기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창세기 15장-17장에 대한 본문을 5가지의 질문을 토대로 살펴보면서 영적인 유익을 발견하고자 했던 내용이다. 아브람에게 필요했던 '믿음의 부재'는 결국 이스마엘이라는 비극을 낳고야 말았다. 이 믿음의 문제는 그때의 문제 뿐만 아니라 지금과 현재의 문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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