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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창세기

창세기 45장 1-28절, 요셉 가족의 명절Festival

by Message.K 2023.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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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창세기 45장의 본문을 가지고 '요셉 가족의 명절'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내용을 공유하고자 하는데, 추석명절을 맞이하여 대학부를 향해 요셉가족에게 임한 영적인 명절festival이 어떤 의미로 나타났는지를 한번 살펴 본 내용이기도 합니다. 

 

창세기 45장 1-28절, 요셉 가족의 명절Festival
창세기 45장 1-28절, 요셉 가족의 명절Festival

 

 

다들 한가위. 추석 명절은 어떻게 보낼 작정인가? 나 또한 나름대로 온 식구들과 함께 정겨운 명절을 보낼 것이다. 나의 아버지가 장남이기 때문에 우리 집으로 온 식구들이 모이는데 추석 때가 되면 늘 대추수확의 시기와 맞물린다. 그래서, 온 친척들과 식구들이 함께 대추 줍기로 하루를 보내곤 하는데 올해도 여지없이 그렇게 보냈다. 하루 종일 오리걸음을 하면서 바구니를 이리저리 옮기면서 대추를 줍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온 식구들이 같이 고통분담(?)을 함으로써 나름대로 ‘하나됨’을, ‘혈육의 하나됨’을 만끽한 명절이기도 하다. 오늘 우리는 ‘요셉가족의 명절’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물론 이스라엘 나라엔 ‘추석’이란 명절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말씀을 보면서 왜 이 말씀이 요셉식구들에겐 명절인지를 한 번 주목해 보고자 한다.

 

 

요셉의 이야기Joseph's Story-꿈이 성취된 시기의 이야기

‘요셉의 이야기Joseph's Story’는 많은 사람들에게 익히 알려진 이야기이다. 나름대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그의 인생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귀감이 될만한 삶이다. 요셉의 삶을 제 나름대로 3 시기로 분류해 보자면

  • 1. 꿈꾸는 시절
  • 2. 꿈이 위기에 처한 시절
  • 3.꿈을 성취한 시절

렇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 1.야곱의 아들, 요셉
  • 2. 애굽의 종, 요셉
  • 3. 애굽의 총리, 요셉.

이러하다. 오늘 우리가 같이 나눌 요셉의 삶의 한 대목은 3번째, 그러니깐 애굽의 총리-요셉이자, 꿈을 성취한 요셉의 이야기이다. 나이 서른에(41:46) 그는 당대의 최고의 나라인 애굽의 총리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바로의 신임과 총애를 한 몸에 입고 국정을 다스리는 최고의 통치자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요셉의 상처, 恨, 아픔의 과거

하지만, 요셉의 표면적인 권력과 영광은 참으로 화려하지만 그의 마음에 맺힌 한(恨), 그러니깐 자신의 가족, 야곱의 아들들인 형제들과의 관계를 충분히 정리하고 정돈할 필요가 있었다. 요셉은 충분히 그러한 한과 마음의 응어리를 하나님 앞에서 치유 받았겠지만 자신의 형제들과 그러한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요셉이 자신의 상처와 아픈 과거를 치유 받았다는 것은 그의 고백을 통해 알 수 있다(45:7-8; 자신의 삶의 인도자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고백함). 하지만 하나님은 요셉의 하나님이셨고 요셉의 가족들과의 관계의 회복을 위해 형제들과 대면케 하시는 기회를 제공하신다. 우여곡절 끝에 요셉은 자기의 형제들과 마주 선 자리에서 자신이 요셉이라고 ‘나는 요셉이라(V.3)’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요셉은 통곡을 하며, 방성대곡을 했다. 얼마나 크게 울었는지 애굽의 궁전을 떠들썩하게 했던 것 같다(V.2). 여러분들도 요셉의 입장이 된다면 그의 눈물과 그의 통곡을 충분히 이해할 줄 믿는다.

 

 

요셉의 인생-점입가경(漸入佳境)

젊은 시절 부모의 곁을 떠났다. 떠나고 싶어 떠난 것이 아니라 형제들의 미움과 질투와 시기로 인해 죽임 당할 뻔하다가 겨우 애굽의 종으로 팔리는 노예신세로 전락하고 그러다가 겨우 자릴 잡아 시위대장 보디발의 관리인으로 세움을 받았다. 하지만 거기서도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의 덫으로 말미암아 감옥신세를 졌다. 그러다가 그의 삶이 부흥케되는 기회를 그 어두운 감옥 속에서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 모든 시련과 이 모든 환난들이 요셉의 젊음을 관통해 갔다. 그의 울음은 충분히 그의 삶의 고통과 과거의 상처를 짐작하게 한다. 하지만 요셉이 자신의 인생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믿음이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면 그는 자기를 팔았던 형제들을 향해서 보복과 분노의 눈초리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요셉의 인생-믿음의 삶

그러나, 요셉은 믿음의 사람이었고 자신의 환난을 믿음의 눈으로 다시 해석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였던 대단한 위인이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V.5)

 

요셉의 효심(孝心)-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가 형들에게 자신이 요셉임을 고백하면서 제일 먼저 묻는 안부의 인사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V.3)

 

요셉은 그 먼 나라의 타향살이를 하면서도 늘 ‘아버지의 사랑’을 잊지 않고 있었다. 부모님을 잊지 않고 있었다. 요셉이 과거에 형들과의 사이가 벌어진 원인 중에 ‘야곱의 편애’-채색옷을 지어 입힘(37:3)-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배다른 형제들의 틈바구니에서 유독 요셉을 총애했던 야곱의 편애는 오늘날의 부모님들에게 귀중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편애는 가정을 허무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뒤로하고서도 요셉은 효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 나라로 떠밀려오다 싶이 한 그러한 삶 가운데서도 ‘아버지’를 늘 기억하고 생각하고 기도했을 것이다. 한가위 연휴를 맞이하여 대학부 지체들이 이제 고향엘 다녀올 것이고 그 고향에 계신 부모님의 얼굴, 친척들의 얼굴을 대면할 것이다. 우리는 비록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삶의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우리들의 생명의 뿌리를 제공한 ‘부모님’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부모님께서 어떠한 모습으로 우리들을 키우시고 성장케 하셨던지 간에 우리의 부모님들은 부모님이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위대하신 분들이신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없다면 우리는 세상을 볼 수 없는 자들이다. 요셉은 이러한 사실을 잊지 않았고 아마도 부모님을 위해 늘 기도하는 ‘믿음의 모습’을 감추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형제들에게 이야기하기를,

 

‘....내게로 지체말고 내려오사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있어서 나와 가깝게 하소서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속과 아버지의 모든 소속이 결핍할까 하나이다’(V.9-11)

 

이제는 자신이 아버지를 섬기겠다고 이야기한다. 12명의 아들들 중에서 11번째 아들이 아버지를 봉양하겠다고 피력하고 있다. 얼마나 효성 어린 자식인가? 요즘 시대의 세태와는 참으로 판이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실컷 자식을 키워놓고 성공시켜놓으면 부모님을 양로원이나 거리에다 내팽개치는 몰상식하고 천벌을 받아 마땅할 불효막심한 자식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또한 부모님의 뜻이 자식의 마음을 거스리면 자식들은 얼마나 부모님을 성가시게 여기고 귀챦게 여기는지 모른다. 그것이 오늘날의 현실이고 가정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지 않았다. ‘내가 이제 남은 여생을 아버지를 위해 봉양하겠다. 아버지를 내가 섬기겠다’ 명절인 추석을 맞이하여서 여러분들은 얼마나 부모님의 마음을 흡족해 드렸는가? 비록 육신은 떨어져 있으나 마음은 늘 부모님의 곁에 가 있는 요셉을 보면서 우리의 마음 또한 늘 부모님의 곁에 가 있는가? 조용히 생각해 보았음 좋겠다.

 

요셉의 형제애-친동생 ‘베냐민’에 대한 마음

요셉은 또한 아버지의 안부를 묻는 것부터 시작해서 자기 아우 베냐민을 잊지 않고 있었다. 어머니 라헬이 베냐민을 낳고선 죽었기 때문에(35:18), 자기 아우 베냐민이 엄마의 얼굴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한평생을 지내는 유일한 친동생이기 때문에 더 그러했을 것이다. 요셉은 그 혈육의 정을 잊지 못한 가운데 베냐민을 보는 순간 어찌 했는가?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v.14)

 

혈육이란 것이 이렇게 무서운가 보다. 마치 이산가족 상봉장면을 연상케 하는 듯 베냐민과 요셉의 상봉은 가슴을 찡하게 한다. 아버지는 한 사람이었지만 어머니는 4명이나 되는 그 야곱의 식구들의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어머니가 없는 서러움을 당해야 했던 베냐민의 고통과 요셉의 아픔은 나름대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요셉의 가족애-배다른 형들과의 관계

요셉의 해후는 단지 친동생 베냐민에게만 이어진 것이 아니고 자기의 10명의 형들과도 이루어진다.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야 요셉과 말하니라’(V.15)

 

형들은 요셉에게 상처를 주었고 요셉은 형들로부터 상처를 받았다. 형들은 요셉이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남달리 사랑을 독차지했던 이유와 요셉이 자주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했기 때문에 시기하고 질투했던 과거가 있었다. 그 이유로 인해 형들의 요셉을 미워한 나머지 그를 죽일려고 했던 것이다. 우리의 어린 시절은 어떠한가? 형제들과 자매들 사이에 옥신각신하는 그런 사소한 부딪힘에서부터 요셉의 가족들처럼 너무나 큰 상처로 얼룩져 있지는 않은지 모를 일이다. 이처럼 가족은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두 기둥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납하는지에 대해 대단히 민감할 수밖에 없는 공동체이다. 야곱은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깨어진 믿음의 위인이었지만 그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기에 자식들을 대하는 태도가 불완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으로 인해 벌어진 가족과 가족들간의 불화의 응집체가 바로 ‘요셉’이었다. 그러나 요셉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심으로 말미암아 여기에서 완전한 화해가 이루어진다. ‘용서’가 이뤄진다.

 

용서Forgiveness

용서란 것은 한 사람과 또 다른 한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깊은 용서를 받은 사람이 깊은 용서를 해 줄 수 있는 법이다. 그렇다면 요셉은 어떻게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겠는가? 그것은 바로 요셉의 가슴속에 있는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그는 깊이 체험하였기 때문에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요셉이 만약 하나님을 몰랐다면 그는 평생 형들에 대한 미움과 상처와 응어리진 마음 때문에 한으로 인해 신음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의 인생에 깊이 개입하셨듯이 요셉의 응어리진 마음에도 개입하셨고 이로 인해 형들과 맺힌 과거를 눈물로써 풀 수 있었던 것이다. ‘맺힌 것을 풀어야 영혼이 산다’라는 김남준 목사님의 책제목처럼 지금 요셉의 가족들은 대대적인 한을 푸는 화해의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하나님께선 요셉이 죽는 날까지 형들과의 대면함도 없이 그냥 자수성가한 위대한 인물, 요셉으로 그냥 놔두시지 않고 가족들간의 맺힌 것을 풀게끔 인도하셨다.

 

 

오늘날 적지 않은 가족들이 물질(재물)문제로 틈이 벌어진 경우를 종종 목격할 수 있다. 혈육의 그 엄청난 축복을 거스르고 죽으면 없어질, 죽으면 가지고 가지도 못할 그 돈 문제로 인해 서로가 얼굴을 붉히며 왕래를 꺼리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물질 문제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가족이기를 서로 거부하는 경우가 있다면 우리는 요셉의 삶을 기억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요셉이 그렇게 힘들게 살았던 그 삶을, 형들에게 복수하지 않고 그들을 사랑으로 다시 품을 수 있었던 것은 요셉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다. 골이 깊게 패인 우리들의 가족 간의 불화가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꼭 풀고 이 생을 마감해야 할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서로가 서로를 용서하고 하는 마음을 하나님께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혈육인, 같은 핏줄의 형제들을 용서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성도들을 사랑할 수 있고 믿지 않는 영혼들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교회가 하나되기 이전에, 우리의 가족들이 하나되는 것을 위해 기도해야할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의 숙제인지도 모른다. 요셉의 이러한 놀라운 상봉은 바로의 귀에도 들어갔고 바로는 이를 크게 기뻐하고 요셉의 가족들을 환대해 주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놀라운 영향력을 미친 요셉의 삶이 바로에게까지 나타나고 있다. 바로는 요셉의 식구들에 대해 애굽 땅의 아름다운 것과 기름진 것들을 선물해 주기를 원했고 심지어 ‘온 애굽 땅의 좋은 것이 너희 것임이니라’(v.20)까지 하였다.

 

 

 

 

요셉 가족의 명절Festival

이 날이 요셉 가족의 명절이라 어찌 칭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거기에는 오랫동안 보지 못했고 만나지 못했던 형제들 간의 깊은 해후가 있었고, 깊은 용서가 있었고, 깊은 사랑이 있었고, 깊은 환대가 있었다. 요셉은 자신의 아버지 야곱을 같이 데리고 오라는 전갈을 형들에게 하면서 참으로 기이한 말을 남겼다.

 

V.24...이에 형들을 돌려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당신들은 노중에서 다투지 말라 하였더라

 

왜 이러한 말을 남겼을까? 아마도 인간은 심히 연약한지라 아무리 같은 혈육이라도 서로가 서로를 적대시할 수 있는 여지를 충분히 가진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1명이나 되는 형제들끼리 돌아가는 와중에 요셉과 바알에게서 받은 재물로 인해 다툴 여지가 있을 법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런 말을 한 이유는 10명의 형들이 서로 요셉에게 대하였던 과거의 잘못에 대한 책임전가 문제 때문이었을 것이다. 42:22-Seek! 에서도 요셉의 제일 큰 형, 야곱의 장남인 르우벤이 요셉을 팔았던 죄와 그 책임에 대해서 형제들에게 ‘요셉의 피 값’이 어떻고 ‘죄 값’이 어떻고 라는 말을 한 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지나간 과거’에 대해 서로 다툴까 생각한 나머지 이야기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요셉은 당사자인 자신이 용서를 하였고 이해하고 풀었기 때문에 그 문제를 더 이상 확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더 이상 언급하지 말라는 것이다.

 

요셉을 대면한 형제들은 아버지 야곱, 즉 이스라엘에게 와서는 요셉이 장성하여 애굽 땅의 총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전한다. 이를 믿지 못하는 이스라엘은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마침내 그 사실을 믿게 되고 ‘기운이 소생케 되었다’(V.27) 이스라엘은 말한다.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았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V.28)...

 

죽었던 아들로 믿고 있었던 요셉이 지금까지 생존하였다는 소식과 그가 애굽 땅의 통치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야곱(이스라엘)의 기쁨은 정말 형언할 수 없을 것이다. 잃어버린, 죽어버린 자식을 다시 찾은 아비의 마음이 여기에 잘 드러나 있다. “죽기 전에 가서 꼭 보리라” 여러분들도 이러한 상황에 부딪힌다면 야곱과 똑같은 말을 남길 것이다. 우리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죽기 전에 보지 못하더라도 천국에서 상봉할 수 있는 기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가 나그네인생을 산다하지만 죽기 전에 꼭 보고 싶은, 죽기 전에 꼭 이루고 싶은 소원들이 나름대로 있을 것이다. 그게 인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라는 예일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기독교 철학자가 있다. 그는 자신의 25살 난 아들 에릭이 등반사고로 죽었을 때 그는 ‘아버지의 통곡’이라는 책에서 그 슬픔을 표현했다. 잠시 이야기하자면

 

“나를 위로해 주리라고 늘 생각해 왔던 복음의 요소들도 내게 위로가 되지 않았다. 복음이 내게 다른 중요한 어떤 것을 해 주기 해 왔으나 위로는 아니었다. 부활의 소망을 생각해 보아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내가 만약 그 소망을 잊고 있었더라면 그것을 다시 생각해 냈을 때 정말 내 삶에 빛이 비쳤을 것이다. 그러나 난 죽음을 바닥없는 나락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소망이 없는 사람처럼 슬퍼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에릭은 가고 없다. 여기 그리고 지금 그는 가고 없다. 지금 나는 에릭과 얘기할 수 없고 지금 그를 볼 수 없고 지금 그를 껴안을 수 없으며 지금 그의 장래 계획을 들을 수 없다. 바로 그것이 내 슬픔이다." 한 친구가 말했다.
"잊지 말게, 에릭은 주님의 품안에 있네."
"난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그 사실이 에릭을 지금 내 품에 다시 돌려주지는 않는다. 그것이 내 슬픔이다. 내 슬픔이 그것일진대, 그를 되돌려 받는 것 외에 다른 무슨 위로가 내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 아마도 야곱의 슬픔은 ‘지금 이순간, 여기 이 장소에서 요셉을 만져 볼 수 없고, 느껴 볼 수 없고, 볼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슬픔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슬픔의 과거가 사라지고 다시금 요셉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축복일까? 얼마나 놀라운 기쁨일까? 요셉 가족의 명절에 마지막으로 아버지인 이스라엘이 동참하려는 장면으로 45장은 막을 내리고 있다. 서로 흩어져, 헤어져 있던-육신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모든 온 식구들이 상봉하는 명절Festival이 여기에 나타나 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우리는 요셉이 가족들과 상봉하는 장면을 잠시 살펴보았다. 거기엔 요셉이 아버지 야곱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고, 형제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고,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엔 ‘요셉가족의 진정한 하나됨, 오랫동안 맺힌 것이 풀어지는 영혼의 자유함’을 엿볼 수 있었다. 한가위를 맞이하여 여러분들에게도 이러한 ‘한 가족, 온 식구들의 하나됨’을 생각해 보았음 좋겠다. 여러분들에게도 요셉가족의 하나됨처럼 하나되는 가정공동체의 회복을 기도하면서 말씀을 마친다.

 

 

구약성경 창세기 45장의 토대로 명절, 추석을 맞이하여 대학부를 향해 설교한 '요셉 가족의 명절'이란 주제의 설교인에, 배다른 가족들이 가득했던, 상처로 얼룩진 요셉 가족의 진정한 용서와 화해가 우리 가족에게 있기를, 그런 영적 명절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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