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2장 3절의 본문은 아브람이 자신의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지는 장면입니다. 그때 '복의 근원이 되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전도축제설교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신 언약을 연관지었는데요.
‘눈을 꾹 감고 떠나라....너의 나라를 완전히 버리고 너 자신을 온전히 나에게 줄 수 있도록 떠나라’라는 강력한 결단을 요구하는 표현이다(칼빈). 떠나는 순서: 너의 땅- 너의 친척들-너의 아버지의 집(떠나기 쉬운 순서부터)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것은?
- 1)큰 민족: 당장 받게 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미래를 바라보며 믿음의 투자를 요구하고 있다.
- 2)내가 네게 복을 주겠다-창세기가 말하는 복은 ‘자식과 재물’ 등 크게 두 가지이다. 큰 민족에 대한 약속은 이미 보장되었기 때문에 이 복은 재물이다.
- 3)큰 이름/명예,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은 자기들 스스로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해 안달했다. 그들이 하나님을 거역하면서까지 추구했던 그 명예가 아브람에게 주어진 것이다. 아브람이 명예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키워주신 것이다. 지속되는 명예란 인간이 채울 수 없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높여 주실때만 가능하다.
- 4)복의 근원이다. ‘너는 복이 될지라!’는 문법적으로 명령문이다. 즉, 너는 복의 근원이 되라!
언약이란 무엇인가?
언약으로 번역된 단어 구약성경의 히브리어는 ‘베리트’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구약성경의 헬라어 역본인 70인역은 알렉산더 대제의 헬라화 과정 중에 포로지의 유대인들에 의해 번역되었다. 헬라 제국에 병합된 속국들은 헬라어를 사용했는데, 헬라어 사용을 강요받았던 유대인들에게 성경이 잊히지 않도록, 70인의 유대인 학자가 모여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했다. 그것은 유대교-기독교 역사의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헬라어는 옛 언약의 사람들에게 모국어가 아니었다.
히브리어 ‘베리트’를 헬라어로 번역할 때 마땅한 단어가 없었다. 디아데케-이 단어가 옛 언약, 구약 그리고 새 언약, 신약 간의 혼란을 초래한 원인들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디아데케가 언약으로도, 유언으로도 번역될 수 있기 때문이다. 1) 헬라 문화권에서 유언은 유언자가 살아 있는 한 그 사람에 의해 언제든 변경될 수 있었다. 히브리인에게 있어 언약은 단순한 협약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약속의 결합으로 인식했다. 2)유언자가 죽기 전까지는 유언이 효력이 없기 때문이다. 순카타데시스: 동등한 파트너들 사이의 협약, 그러나 히브리인들의 베리트를 그런 뜻으로 사용하길 원치 않았다. 디아데케: 자신의 재산을 누구에게 줄지를 결정하는 주권적 권한, 이것이 베리트 개념과 조화. 베리트는 사람과 맺으시는 하나님의 언약을 묘사, 하나님의 주권과 재가를 의존하는 협약. 하나님이 약속의 대상을 스스로 선택하시기 때문이다. 그는 언약의 대상으로 함부라비가 아니라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다.
"언약"에 대한 설명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셨다. 이 관계는 하나님이 그들과 맺은 언약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였다. 이 언약 관계는 언제나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주도권을 잡으셨다는 점에서 동업자들 사이에 맺는 일반 계약과는 완연히 다르다. 언약의 두 가지 목적은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교제를 유지하는 것과, 그들이 거룩하기 때문에 다른 민족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함을 분명히 하는 것이었다.
구약 성경에는 네 가지 두드러진 언약-창세기 9장의 노아언약, 창세기 15장의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출애굽기 19-24장에 모세와 맺은 언약, 사무엘하 7장에서 다윗과 맺은 언약-이 기록되어 있다. 예레미야 31:31-34에는 새 언약의 약속도 등장한다. 31.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2.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3.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4.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언약의 주인공, 아브라함
-그는 약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불완전한 사람이었다.
창 12:1-13:18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5.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6.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7.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8.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9.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10.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당시에 가나안 사람들이 식량이 없으면 이집트로 내려갔다 왜냐하면 이집트는 나일강이 있고 이 물을 이용해 농사 짓기가 용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브람의 경우는 다르다. 아브람은 너무 쉽게 약속의 땅을 떠나고 있다. 게다가 아브람은 하나님의 허락도 없이 상황에서 약속의 땅을 떠났던 것이다. 물론 곧 돌아올 것을 생각하고 떠났다. 저자는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그가 ‘얼마동안 몸붙여서 살려고’(새번역)갔다고 한다. 가나안을 약속으로 받은 사람이 잠시 순례자/방랑자의 길을 떠난 것이다. 그러나 일단 약속의 땅을 떠난 것은 좋은 징조가 아니다. 이 사건은 아브람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여 살지 않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살려고 노력하다 빚어진 일이었다(Calvin).
11.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당시 사래의 나이가 65세였을 것이다. 지적, 우아함, 피부미인, 교양녀, 그 당시와 지금 나이와 다르다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긴 하지만, 65세의 여인에게 이런 칭찬은 창세기의 미스테리이기도 하다.
12.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13.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졸장부같은 아브람이다. 이런 남편을 만나면 안된다. 자기 살겠다고 아내를 더 큰 위험에 노출시키다니!하나님은 사래의 씨를 통해 열방과 민족의 머리를 세워주시겠다고 했다면 사래는 자기 아내이기도 하고 반드시 지켜야 하는데, 아브람의 이런 처사가 약속을 위협하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14.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15.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16.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아브라함의 마음이 과연 편했을까? 아내를 빼앗긴 지아비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이때 한번 자해를 하던지, 뭔가 액션을 취해야 하지 않는가? 아내를 잃었는데, 아브람은 극소심하게 이렇게 죽어있기만 한다. 아, 사래가 아깝도다! 미인이 아깝도다!
17.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ㅡ하나님의 사람, 아브람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계심을 볼 수 있다.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을 하나님께서 뒷감당을 해주고 계신다.
18.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19.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당황한 바로는 얼마나 아브람을 나무랐을까? 아브람은 이처럼 연약하고 유약한 인생이었다. 자기 아내를 자기 목숨이 중하다고 생각하여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꼴불견의 행동을 한다. 네가 어찌하여를 3번이나 반복한다. 정말 이 본문에 의하면 아내를 삼았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20.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창세기의 이집트는 아브람으로 대변되는 이스라엘을 자발적으로 보내준다. 바로가 사래 때문에 큰 곤혹을 치루고 난 후 많은 재물을 주고 이집트를 떠나는 것이 출애굽사건을 내다보게 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아브라함의 실수를 통해 약속이 이뤄질 수 없었던 것이다. 아브람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람 한 사람만의 인생을 생각하신 것이 아니라 아브람을 통해 이뤄질 원대한 계획을 생각하셨기에 더 아브람, 언약을 받은 자를 중히 여기신 것이다.
오히려, 뒷수습하시는 하나님이셨다
창세기에선
아브람의 이집트 여정12:10-20,
아브람의 그랄여정20:1-18,
이삭의 그랄여정26:1,7-17에서의 사건은 아브람과 사래, 이삭과 리브가의 부부에 대한 이야기이다. 근데 만약 여기서 아브람이 바로에게, 아비멜렉에게, 이삭이 아비밀렉에게 아내 사래와 리브가를 빼앗겼다면, 하나님의 약속, ‘씨앗’의 약속은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약점과 약함 가운데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이 위협받는 대목이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전적이 개입이 없었다면 거룩한 씨앗의 보존이 매우 어렸웠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보호를 역설하고 있다. 인간의 실패는 결코 하나님의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할 수 없음을 역설한다. When I am weak, Then I am strong!
고린도후서 13:9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연약했지만, 하나님이 사용하셨다
- 아브라함은 노인이었고(100살) 생산할 수 없는 나이를 하나님은 기다린 후에 생산할 수 있게 하셨고, 불가능을 가능을 바꾸신 것이다.
- 야곱은 불안한 상황에 있었다. 에서 형님과의 깨어진 관계로 인해 목숨의 위협이 있던 상황에 놓여져 있었다.
- 레아는 적어도 라헬보다 이쁘지 않았다. 라헬에게 항상 밀리는 이인자였다. 그러니 애를 낳는 것으로 야곱의 마음을 돌이켜 보려고 했지만, 남자는 머니머니해도 외모라, S라인, 외모에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기에 레아는 언제나 야곱의 애정전선에 배제되었던 여자였다.
- 요셉은 매도되었다. 자기 혼자만의 꿈을 간직하면서 기도하였음 될텐데, 그걸 다 까발려서 오히려 왕따를 당하고 비난과 질투의 대상이길 스스로 자처했던 고자질쟁이였다.
- 모세는 말더덤이였다. 얼마나 말을 못했으면 나는 입술이 둔하다고 고백했는가? 40년의 왕궁생활에서 충분히 훈련받았을텐데, 살인자로 쫓기면서 광야에서 40년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나? 처가살이가 너무나 힘들었단 말인가?
- 기드온은 가난했으며 겁과 두려움이 많았고 미디안 족속의 침략을 피해 굴과 동굴에서 추수를 했던 시대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 삼손은 이성의존적이었다. 여자를 너무 좋아했다! 중1 도덕시간에 선생님께서 삼손을 이야기하면서 SEx란 단어를 칠판에다 커다랗게 썼는데, 그때 당시에는 그런 행위 자체가 섬뜩 놀랄 정도였다. 삼손은 성적 욕망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힘도 좋으니 더 그러했을 것이다.
- 라합은 부도덕한 직업의 기생이었고 더 나아가 매춘부였을수도 있겠다.
- 다윗은 간음을 범했다. 싱글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유부녀를 건드렸단 말인가! 그로 인해 다윗의 가문은 가정 문제도 시도 때도 없이 터져나왔다. 와이프가 많으니 배다른 애들끼리 왕권다툼도 심했고, 남매끼리 애정싸움이 결국 살인사건으로 번지게 되고, 아들 압살롬은 아버지에게 쿠테타를 일으켰다.
- 엘리야는 자살을 생각한 우울질의 선지자였다. 갈멜산에서 850:1(정확히 말하자면 450:1)의 우상숭배자들과의 전쟁에서 강력한 승리를 맛보았지만, 로뎀나무아래에서 자살충동을 느낀 어처구니 없는 인물이었다. 이렇게 감정의 롤러코스트를 타는 인물도 드물다.
- 요나는 마지못해 하는 사람이었다. 억지스레 순종했던, 니느웨선교가 싫어서 다시스로 도망친 저질의 선교사(선지자)가 바로 요나였다.
- 나오미는 과부였다. 하나님의 약속을 어긴 나머지 결국은 남편과 아들 둘을 이방땅에서 다 잃고 더 이상 잃은 것도 없었던 과부 신세였다.
- 세례요한은 괴팍한 행동의 소유자였지만, 청빈과 금욕의 삶을 살면서 얼마나 대단한 회개의 메시지를 요단강에서 전했던가, 우직한 인물이다.
- 베드로는 성격이 급한 불같았다. 얼마나 불같았으면 예수님을 잡으러 온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칼로 잘라버렸겠는가! 대단하다.
- 마르다는 늘 걱정이 많았으며 일중독자였고 접대의 여왕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불평의 여왕이기도 했다.
- 사마리아여인은 여러 차례 결혼생활에 실패했다. 서류에 잉크도 마르기 전에 또 다른 남자를 만났는지도 모를 일이다.
- 삭개오는 사회에서 따둘림당하는 사람이었다. 조국 사회에서 그만한 죄를 지었던 친일파와 같은 인물, 배신자에 불과했다.
- 도마는 의심이 많았다. 눈에 보이는 것이 최고라고 믿는 오늘날의 우리들과 같은 인물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 바울은 건강의 문제가 있었다. 삼층천의 영적 세계를 경험했던 바울이지만, 그가 교만할까봐 육체의 가시를 주셨는데, 바울은 그것을 위해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지만,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셨다.
- 디모데는 마음이 연약했다. A형의 소심한 목회자인 듯, 그러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신경을 많이 써서 위장병까지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약할 때 강함되신다는 것을 기억하라!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일하시기를 기뻐하신다. 땅의 모든 족속이...복을 얻을 것이니라 맨 처음부터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12:3).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하나님의 축복은 개인의 소유만이 아니라, 성령의 은사처럼 하나님의 축복은 다른 사람을 세우고 격려하는데 사용되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우리 모두는 아브람처럼 되기 위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한다. 축복이 있기 전에 순종이 있어야 한다. 순종이 축복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복을 달라고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순종이 있어야 한다. 승리의 삶을 바라기 전에 순종을 연습해야 한다. 계시록의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2:10)는 말씀도 상급보다 순종이 우선임을 역설한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은 자주 이 사실을 망각했다. 오늘날 우리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4,00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 약속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여러분이 다니는 대학이나 살고 있는 도시 혹은 직장에,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할 학생이나 친구들, 새친구들이 있지는 않는가? 그들과 관계를 맺기 위해 어떻게 하고 있는가? 그리고 당신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고국을 떠난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기도하고 있는가? 땅의 모든 족속이 우리의 순종을 통해 축복을 함께 나누길 하나님은 원하신다. 우리가 제2의, 제3의 아브라함이 되길 원하신다. 그것을 기억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이고, 언약의 백성이고, 언약의 파이프이다. 파이프가 막히면 물이든 기름이든, 그 파이프 안에서 흐르는 그 모든 것이 흘러갈 수가 없고, 유통될 수가 없다. 아브라함은 그 파이프를 막히게 할만큼 위기가 있었지만, 하나님은 자기의 사람을 책임지셨다. 우리 또한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것이다. 순종하기만 하면 우리를 통해 복음의 역사를,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이뤄가실 것이다. 아브라함이 자신만을 위한 축복의 조상이 아니라 열방과 민족으로 흘러가게끔 하는 복의 근원이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복의 근원이 되길 소망한다. 하나님의 언약의 주인공이 되었다면, 이제 우리 주위에 사람들에게 복을 유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12:3의 말씀처럼 축복이 복이 되게 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아브라함의 복은 그냥 자기 혼자서만 잘 되는 복이 아니라 당대의 자손들과 후대의 후손들과 그리고 민족과 열방으로까지 나아가는 축복의 통로이다.
전교인 입양의 날, 우리가 다시 힘의 중지를 모아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작위적이고 인위적인 느낌은 있다. 하지만, 우리가 평소 전도 잘 하지 않으니 이런 기회를 통해서 한번 포커스를 모으자! 무엇보다 먼저 여러분이 마음의 결정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위해서, 축복의 언어를 날리기 위해 VIP를 작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입양아 즉 새친구를 우리에게 주소서! 우리가 3주 동안 다가가겠습니다. 안되더라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런 몸짓이 있었음 한다. 3주간의 일정과 특별기도회 일정이 나와 있다. 함께 하자! 새친구 전도작정서를 작정하여 함께 3주간 힘써 보자! 내 친구가 바로 언약의 동지임을, 축복의 근원이 될 수 있게, 그러기 위해서 내가 먼저 복의 근원이 되자!
오늘의 포스팅은 창세기 12:3의 본문에서 드러난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의미와 연약한 아브람조차도 사용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은 결국 '복의 근원'으로 이어지는 장면을 해석해보고 이것을 교회의 전도축제와 연관지어 설교한 포스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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