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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요한복음

요한복음 14-16장, 사도행전 3-4장, 예수님의 이름

by Message.K 2023. 10. 28.

요한복음 14-16장과 사도행전 3-4장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이름'이란 주제로 성경을 연구하고 해석한 내용을 가지고 설교한 내용을 포스팅해 보고자 합니다. 오스카 쉰들러의 이야기를 하면서 한 사람의 영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보다 더 위대한 예수의 이름을 한번 볼까요?

 

요한복음 14-16장, 사도행전 3-4장, 예수님의 이름
요한복음 14-16장, 사도행전 3-4장, 예수님의 이름

 

 

 

한 사람의 영향력 있는 리더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 나오는 쉰들러Emilie Pelzl Schindler! 세계 2차세계대전 당시에 독일군 점령지인 폴란드의 크라코우에선, 기회주의자인 오스카 쉰들러(Oskar Schindler)는 나찌 당원이 되어 SS요원들에게 여자, 술, 담배 등을 뇌물로 바치며 갖은 수단을 동원하게 된다. 인건비 한푼 안들이고 유태인을 이용하면서 한편으로는 유태인 회계사인 스턴(Itzhak Stern: 벤 킹슬리 분)과 가까워지게 된다. 스턴은 쉰들러의 이기주의와 양심을 흔들어 놓게 된다. 그것은 나찌의 살인 행위로 쉰들러는 자신의 눈을 통해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그러한 쉰들러의 현실 직시는 마침내 그의 양심을 움직이고 유태인을 강제 노동 수용소로부터 구해내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일명 ‘쉰들러리스트’(쉰들러의 유대인들)이 나오게 됩니다. 1945년 전쟁이 종식되고 러시아 군대가 동유럽을 자유화시켰을때 연합군으로부터 잡히지 않기 위하여 공장 주변의 나찌 당원들을 집으로 돌아가도록 종용하면서 자신도 연합군으로부터 멀어진다. 마지막으로 쉰들러가 연합군으로부터 도망을 가기 전, 자신이 살아있다는 안도감보다는 죄책감과 후회에 시달리게 된다.

 

"왜 나는 더 많은 유태인들을 구해내지 못하였는가?"

 

당시 유태인들 중에 쉰들러의 이름은 구원의 이름이었고, 기회주의자였지만 양심이 늦게서야 깨져 마음의 큰 변화가 있었던 쉰들러의 돈과 재산이 생명을 살렸던 것이다.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쉰들러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유태인들은 자신들의 금니를 뽑아 반지로 만들어 건네는데, 그 반지에는 탈무드의 글귀가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누구든지 한 생명을 구하는 자는 세상을 구하는 자이다.”

 

쉰들러가 영화 말미에서 보여준 울부짖음이 떠오른다.

 

“더 많이 구할 수도 있었는데”

 

라며 울먹이는 대목을 여러분은 기억할 것이다.

영화가 끝날 무렵, 우리는 빠르게 현재로 되돌아온다. 쉰들러 공장의 실제 생존자들과 영화에서 이들의 역할을 했던 배우들이 50년 후 쉰들러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있는 그의 무덤에 모였다. 생존자들이 그의 묘비를 지날 때, 화면에는 두 줄의 자막이 뜬다.

 

“현재 폴란드에 남아 있는 유대인은 4,000명이 안 된다.”

“쉰들러 유대인들의 후손은 6,000명이 넘는다.”

 

그의 유대인 십장이 말했듯이, 오스카 쉰들러가 한 일 때문에 후손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만 실제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스위스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1996년 10월 크리스토프 마일러(Christoph Meili)는 방금 영화관에서 <쉰들러 리스트>를 보았다. 그는 영화를 보고나서 자신이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유대인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현재 스위스에 살고 있는 유대인은 극소수이다. 석달 후, 마일리는 자신이 경비원으로 일하는 취리히의 한 은행에서 의례적인 순찰을 돌고 있다. 그는 종이뭉치가 쌓여 있는 방을 지나다가 낡은 책이 가득 찬 두 개의 큰 상자를 발견하게 된다. 그 전에는 이런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상자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다가 그 책이 제2차 세계대전 때 기록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는 책 한 권을 옷 속에 숨긴 채 순찰을 마친다. 그는 책을 집으로 가져와 좀더 자세히 보다가 이것이 베를린에서 몰수되어 나치로 넘어간 유대인의 재산목록을 정리한 서류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마일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는 <쉰들러 리스트>에서 나치가 유대인의 귀중품을 강탈하는 장면과 쉰들러가 한 일을 기억했다. 그는 후에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뭔가를 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라고 했다. 그는 정말 뭔가를 했다. 다음날 그는 쓰레기더미 속에서 너무 커서 문서 세단기에 들어 갈 수 없었던 두 개의 원부(原簿)를 발견했다. 그는 취리히의 한 신문사와 접촉을 시도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는 한 유대인 문화 단체에 연락을 취했지만 그들은 이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건 다이너마이트예요. 손 대기에는 너무 위험합니다.”

 

마침내 마일리는 작은 유대인 신문사를 찾아갔고, 그 다음날 기자회견에서 이야기는 온 세상에 알려졌다. 곧 스위스 시민들은 마일리를 이스라엘의 스파이 혐의로 고소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생명을 위협했다. 스위스 은행은 국가 기관이며 신성 불가침한 곳으로 여겨진다. 그가 은행의 비밀을 ‘훔쳤다’는 혐의로 경찰의 수사가 시작되었다. 마일리의 아버지까지도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 미쳤니? 왜 유대인을 돕는거냐?”

 

아이러니하게도 마일리는 미국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하여 받아들여진 최초의 스위스인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의 행동으로 인해 스위스 은행들은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들과 그들의 가족 및 유대인 단체들과 협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금액은 12억 5천만 달러(우리나라돈으로 1조가 넘는)에 달했다! 비록 영화였지만, 쉰들러가 보여준 영향력은 영화를 타고 한 스위스인의 용기있는 행동을 자극했다. 자신의 아버지조차도 꺼릴만큼, 자신의 조국을 떠나 미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해야할 만큼 위험부담이 컸지만, 크리스토퍼 마일러는 2차세계대전 당시에 무자비하게 죽어간 수많은 유대인들의 손해배상을 위해 그렇게 행동했던 것이다. 쉰들러라는 이름이 무엇이기에 그랬단 말인가?

 

심방을 하는데, 교역자들이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엘리베이터 이름이 ‘쉰들러엘리베이터’였다. 쉰들러의 이름은 엘리베이터의 브랜드로도 이용되고 있다. 쉰들러는 사람들의 마음의 긍휼과 자비의 마음에 불을 지핀 것이다.

 

 

 

쉰들러의 이름, 그 이름보다 더 위대한 이름이 있다

‘모든 이름보다 뛰어난 이름’이 있다. 바로 ‘예수’의 이름이다.

쉰들러의 이름보다 더한, 이름 바로 예수의 이름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예수의 이름이 특권이라고 한다. 왜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특권이라고 할 수 있는가?

 

오늘은 몇 가지 경우를 살펴보면서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찬양을 풍요롭게 하고자 한다. 요한복음 14-16장은 제자들에게 주신 고별 설교이다. 예수님은 자기 이름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제자들에게 미래의 도움을 약속하신다.

 

1)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간구하는 목적과 결과가 무엇인지 찾아보라(요 14:13-14;15:6;16:24,26).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결과)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목적과 결과)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결과) -‘이름으로 구하면 행한다’. 두 번 반복은 강조이다.

 

오늘 새벽에 본 갈 4:6-7 말씀에도 분명히 우리가 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아들과 딸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기도하신 것처럼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선 ‘내가 행하신다’고 하셨다. 예수님의 이름에 능력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이름,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건성으로 듣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그 결과,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고 하신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간구하면 하나님께 다 들어주신다.

 

 

예수의 이름이 무엇인가?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면서 ‘예수’라는 이름을 주셨다. 예수는 ‘구원’이란 이름을 갖고 있다. 예수? 헬라어이고, 히브리어로는 여호수아이다. 구약의 여호수아는 곧 신약의 예수님에 대한 모형이다. →여호수아: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데리고 감, →예수님: 하나님의 백성을 천국으로 데리고 감 예수님은 이름 그대로, 이 땅의 죄문제 뿐만 아니라 모든 문제들, 하나님께서 치유하시고 손보셔야 할 총체적인 모든 문제들의 해결자로 오신 것이다. 천국에 들어가는 그 날까지, 주님께서 재림하시기 전까지, 예수님께서는 인생의 모든 문제를 A/S하신다. 그 이름이 그것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얼마나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가? 날마다 ‘주여!’를 외치시길 바란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시길 바란다. 세상사람들은 헛된 우상의 이름으로라도 구하는데, 우리는 주의 이름을 마음껏 불러야 할 것이다. 이 말씀을 기억하길 바란다.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결과)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목적과 결과)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할 때 전제되는 조건이 있다. 이 조건이 무엇인가?

 

15: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을 구한다는 것은 구하는 자가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한다. 나무에 가지가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 수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선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하는 것이다.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는 원리처럼 우리가 예수님 안에 붙어 있으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해야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이야기이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얼마나 가지에 붙어 있는가? 예수님 안에 붙어 있으려고 노력하는가?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를 늘 뜨겁게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가? 관계는 그냥 저절로 되는 것이 없다. 부모와 자녀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요즘 모 연예인이 자기 엄마와 관계가 좋지 않아 완전히 법정 싸움까지 가는가 하면, 그 집안 싸움이 대한민국의 뉴스꺼리가 되는 것을 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잘못될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영국 국왕 죠지 5세가 의회의 개회에 맞춰 라디오 방송을 할 때의 에피소드

그 연설을 신대륙에서 중계되도록 준비된 것이었다. 딱 연설이 시작되는데 갑자기 뉴욕 지국에 설치되어 있던 케이블이 딱 끊어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직원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기 시작했다. 미국에 있는 백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주파수를 맞추고 왕의 음성만을 듣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방송이 끊어져 버린 것이다. 불통된 케이블을 원상 복구하는데는 최소 20분 이상은 소요되는데 그러면 국왕의 연설은 다 허공으로 날아갈 판이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고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해롤드 비비안이라는 젊은 기술자가 있었다. 그는 그 황망한 순간에 다른 선택이 없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자신의 손을 뻗쳐 끊어진 케이블의 양끝을 움켜쥐었다. 250볼트가 넘는 전류가 그의 몸뚱이를 꿰뚫었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격렬한 고통이 엄습했다. 그래도 그는 손을 놓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왕의 음성을 듣게 하기 위해 그는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케이블을 붙들었던 것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예수님 안에 거하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하고 있는가?

왕의 목소리를 방송으로 내보내기 위해서 해롤드 비비안이 케이블을 연결시킨 것처럼,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견고하게 연결되어 우리가 주님 안에 있을 때 우리의 간절한 소원과 기도도 성취되는 것이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 안에 거하라! 그리할 때 주님께 구하면 거기에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열심히 구했는데, 왜 열매가 없는가? 우리의 구함이나 기도나 부르짖음이 문제가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에 케이블이 끊어지지는 않았는지, 죄가 끼여 영적 케이블이 끊어지지는 않았는지 점검하길 바란다. 이런 원리들이 있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영적 현실을 이렇게 반영해주고 있다. 무어라고 하는지 보자.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제자들이 그러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하겠는가? 그러나 만약 구한다면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16:26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2)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것을 통해 우리는 기도에 대해 어떤 점을 깨달을 수 있는가?

-세상의 다른 어떤 이름보다 예수의 이름은 ‘구원’의 의미를 가진 것 뿐만 아니라 인류의 구원을 위해 오신 메시야의 직분을 충실히 하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 그 자체에 많은 것을 함의하고 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구하고, 찬양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 메시야의 직분에 걸맞는 ‘구원자’의 역할이 더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더 흡족해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응답하심으로 인해 더 감사할 조건이 많아지는 것이다.

 

요즘 드라마 중에 ‘응답하라 1994’가 인기를 끌고 있다. 1994년, 무려 20년 전의 생활을 담은 내용이다. 그 드라마 제목을 패러디해서, 우리는 주님께서 기도하고 외칠 수 있다.

 

 

 

“응답하라 예수 그리스도!”,“응답하십시오 예수님!”

우리가 나눈 이런 원리들이 사도행전의 앉은뱅이의 치유사건을 통해 어떻게 적용되는지 다시금 한번 확인했음 좋겠다.

 

사도행전 3장은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고친 후에 감옥에 갇히게 된다(행 3장). 여기서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어떤 경우에 ‘이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지 눈여겨보라. (행 3:16;4:7,10,12,17)

 

3: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예수이름의 능력이 있기에, 그 이름을 믿는 믿음이 치유의 원인이 되었다.

 

4: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예수님의 이름이 사람들을 건강하게 하였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죽였지만 하나님은 그분을 친히 살리셨고 그 능력의 이름이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는 것이다.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오직 예수님의 이름만이 구원의 이름이다.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하나님의 능력, 예수님의 구원의 능력을 사람들은 목격하고도 부인하고 싶어한다. 왜? 자신들의 기득권이 침해를 받기에 그런 것이다. 하나님의 신적 능력에 대해서 사람들은 부인하고 싶어한다! 분명히 인정해야 할 대목임에도 불구하고!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이름에 능력이 있는 줄 믿는가? 그 이름을 온 인류를 구원하는 유일한 이름이시다. 근데 여기서 주목할만한 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어떻게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할 기회를 갖게 되었는지 그 원인과 과정을 한번 보자.

 

행 3:1 제 구시 기도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이들은 기도하러가는 길이었다. 베드로와 요한은 날마다 하나님과의 영적 케이블에 전류가 흐르도록 기도하는 사람들이었다. 영적인 성령충만을 위해 날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교통하는 자에게는 개혁의 눈썰미가 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가 있는 자에겐 부흥의 시선이 있다.

 

 

 

행 3: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무언가를 간절히 찾는 포즈였다. 부족함을 채우고자 간절히 갈구하는 포즈, 포스였다. 경건생활, 기도생활을 지속적으로 하는 가운데 그들의 눈에 들어온 이들이 바로 이 앉은뱅이였다. 선천적인 앉은뱅이에게 그들은 무엇을 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했던 것이다. 그 결과, 치유와 회복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설교도 하게 된다. 예수님의 이름이 앉은뱅이, 불치병환자를 고쳤다. 예수의 이름만이 능력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여러분은 매일 예수님의 이름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기회를 갖고 있는가?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성도 여러분, 이번 기회를 통해 깨달은 바를 기도로 아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날마다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

 

■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을 보내주심도 감사합니다. 구원의 이름이 우리 삶 가운데 잊혀진 이름이 아니라 살아 역사하는 믿음이 되게 나의 삶도, 나의 하루도 그 예수의 이름을 선포하고 증거하고 말하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베드로와 요한이 날마다 경건의 시간을 지속하였기에, 늘 예수님 안에 거하였기에 그러한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내게 주신 성령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날마다 기도하며 말씀의 시간을 가지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14-16장과 사도행전 3-4장의 구절을 가지고 해석과 분석을 통해 '예수님의 이름'에 포커스를 맞춰 설교를 해보았는데요. 오스카 쉰들러 보다 더 위대한 이름, 능력의 이름이 바로 예수님이시고 그 예수님 안에 그하며 그 이름을 날마다 구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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