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12-23의 본문을 가지고 예수님의 청결운동, 성전정화운동을 다루고자 하는데요. '뒤돌아보기'라는 주제로 설교한 내용을 공유해 봅니다. 교회가 날마다 개혁되어야 한다는 종교개혁자 칼빈의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유월절이 가까웠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12절에 가버나움으로 사역지를 옮기셨습니다(TEE대학에선 '전성기 시작'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사역을 할 때 그의 고향 나사렛이 적합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나사렛이라는 동네가 대단히 불편한 산속에 위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인정하기는커녕 깔보고 배척하기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내려오셔서 갈릴리 바다 서북쪽 해변에 있는 좀 더 큰 동리, 가버나움으로 오셨습니다. 거기에 오늘날로 치면 선교센타, 전도센타를 두고 활동하고자 하신 것 같습니다. 사역의 새로운 활로가 펼치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본문의 시간적 배경은 유월절이 가까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는 표현이 13절에 나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3대 명절입니다.
‘1년에 3차례로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뵈어라’
1년에 3차, 즉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에 하나님께 나아가라고 하셨습니다. 그중 가장 큰 절기인 유월절에 사람들이 대체로 많이 올라갔고, 해외에 퍼져 있던 유대 사람들도 많이 왔을 것입니다. 니산월(3~4월) 14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매년 많은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에 올라갑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이란 한 곳에 모임을 통해서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공동체, 하나님의 한 덩어리란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큰 정치적인 효과를 거두었습니다. 산골에서 외지게 살던 사람도, 바닷가에서 거칠게 사는 사람도, 타지에서도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도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오면 큰 정신적인 환기를 경험하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그 백성들에겐 그런 정치적 사회적인 의미보다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일이 더 중요하였습니다. 전 국민이 하나의 동일한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아가는 그것이 제일 중요한 의미였습니다. 예수님께선 하나님과 늘 교통하셨던 분이시기에 매년 매번 절기때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까 하는 의문을 던질 수도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이제 예수님께서는 공인으로 사회에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을 베푸시기 위한 활동을 하고 계신 까닭에, 유월절을 맞아 성전에 올라가신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 예배가 예수님에겐 가장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에겐 하나님과의 교통이 최우선이었습니다. 정치적 의미나 어떤 사역적인 효과, 왕성한 활동과 수많은 기적과 변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였고, 바로 예배가 가장 큰 우선순위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신 분들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올라오신 분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하는 예배자입니까? 하나님의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가 있었습니까? 예배자에겐 예배자의 눈, 예배의 눈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13절에 예루살렘에 올라오시고, 14절에 예수님의 눈에 들어온 영상을 ‘보’셨습니다. 그 영상은 예배자의 눈에 거슬리는 영상이었습니다.
예배자에겐 예배의 눈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에겐 예배의, 예배자의 눈이 있었고, 그 예배의 눈은 곧 개혁의 눈으로 바뀌었습니다. 예배자이신 예수님의 눈은 언제나 각성된 눈이었고 신박한 눈이었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하루가 어제의 오늘, 오늘의 내일로 악순환되는 일상이 아니라 그 반복된 일상을 통해 매일이 새로운 날New day라는 것을 발견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분의 눈은 '매의 눈'이셨습니다.
성전이 시장통으로 변해버린 현실과 배경
예배자, 예수님 눈에 들어온 을씨년스러운 영상이 있었습니다.
성전 안에는 각종 가축을 파는 매매상들과 환전상들이 있었습니다.
예배에 쓰일 가축, 제물을 파는 상인들과 헌금으로 드릴 환전상이 거기에 아주 편리하게 있었습니다. 멀리서 오는 수많은 순례자들, 유대인들에게 제사장들의 합격KS마크를 받은 흠 없는 희생제물용 가축들이 있었다는 사실! 어떤 한 문헌 자료에 따르면 부따의 아들 라삐 바바는 몸집이 작은 삼천 마리의 가축들을 가져오게 했고 그것들을 번제물과 친교제물로 바치기 위해 성전 언덕에 진열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외국에서 오는 사람들의 돈을 바꿀 수 있게끔 잘 준비된 ‘환전상’(외환은행) ,‘입출금 CD기’가 편리하게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화폐가 원으로 단일한 구조로 통용되어 환전상이 필요 없습니다. 외국여행을 갈 경우에만 환전을 하면 됩니다. 하지만 이 당시 유대땅에선 로마의 압제와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화폐 또한 세 가지 다른 출처의 돈이 통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참고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 1) 공인된 로마화폐
- 2) 주로 고대 헬라표준에 기초한 안디옥과 두로에서 주조된 지방화폐
- 3) 가이사랴에서 주조된 듯한 유대지방의 화폐
그런데, 이스라엘은 종교적으로 독특한 나라일 뿐 아니라 당시 바리새인들, 열혈당원들은 로마의 폭정과 식민지 통치를 반대하였습니다. 그러하기에 가이사를 왕으로 인정하는 것은 십계명의 제1계명을 위반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도 결사반대하였던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바리새인들과 열심당원들은 가시아의 화상(얼굴)이 그려진 로마의 은전이란 화폐를 꺼려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만지는 것조차 꺼리기도 하였다. 이렇게 로마하면 강한 적대감을 품는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신이신 하나님에게 성전세를 내는데 있어, 헌금을 내는 데 있어 통용되고 있는 3가지 화폐 중에서 아무것이나 취해서 내겠는가? 즉, 성전에 내는 세금은 2)안디옥. 두로 지방의 지방화폐의 돈으로 지불되어야 한다는 어떤 규칙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전의 뜰 한 구석 이방인의 뜰에는 이런 돈을 바꾸는 환전상이 반드시 있었던 것입니다.
백성들의 편의를 제공한답시고 시작한 그 매매상과 환전상은 성전 밖에서 설치되어 있다가 점점 성전마당 안으로 들어온 것으로 보입니다. 처음에는 그게 굉장히 크게 보였지만, 점점 더 익숙해진 모양새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편의적인 셋팅은 누구의 발상인가?
로마 사람들이 팔레스틴을 점령한 후 그들은, 주전 약 40년부터 주후 약 90년 내지 100년까지 그렇게 긴 세월 동안을 헤롯 안디바스로부터 시작해서 그 일가가 유대를 부분적으로나 또는 전체적으로 다스리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심지어 나중에는 헤롯의 왕가 중 칼키스라는 곳의 분봉왕을 맡았던 어떤 자는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임명권까지 받았던 때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주후 약 40년 이후의 이야기고, 그 이전에는 대개 로마의 관원, 로마의 권력자가 대제사장을 임명했습니다. 그런고로 그 동안 연면히 흘러 내려오던 아론 자손이 대제사장이 된다는 율법상의 규례는 하스모니아안 왕가의 종말과 더불어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주전 166년 마카비 전쟁이 일어나 마카비가 수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를 나중에 쳐 물리치고, 더럽혀 있던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이 한 일이 있습니다. 이것이 주전 165년경, 그때 이래로 마카비의 후계자들이 계속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다스리고, 하스모니안 왕조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스모니안 왕조가 주욱 내려오다가 제4대째 이르러서는 이두메까지 다 정복하고 관할하고, 안티파테르라는 사람을 그 이두메 총독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런데 이 안티파테르는 에돔 사람(이방인)이었습니다. 바로 그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헤롯의 할아버지였습니다. 그가 이두메 총독으로 있다가, 다시 그의 아들 안디바스(안티파테르 2세)라는 사람이 이두메와 유대 총독까지 겸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교묘하고 교활해서, 로마 세력이 융융하게 앞으로 자꾸 뻗어 들어올 것을 알고 미리부터 거기 가 있었습니다. 가만히 관찰할 때 이 하스모니안 왕조는 점점 쇠퇴해져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헤롯의 아버지 안디바스는 로마의 허락으로 유대의 총독이 되고, 그 후 정치적 욕심에 의해 결국 주전 37년 그때까지 버티고 있던 하스모니안 왕조는 힘을 잃게 되는데, 당시의 유다 마카비 가계의 안티고누스를 죽이게 됩니다. 그 이후 이래로 대제사장을 내는 것은 로마 권력자 마음대로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이용해 가지고 유대 사람 중 너절하고 매국적인 인간들, 곧 돈 있고 교섭이 능한 자들은 세력 있는 자를 좇아가서는 돈을 주고 대제사장권을 샀습니다. 이 때에는 대제사장권이 이렇게 내려오던 판입니다.
실제로 안나스는 사위를 대제사장에 세우고, 후에는 다섯 아들들도 나눠먹기식으로 주후 60년대까지 나이 순서대로 대제사장 노릇을 했습니다.
제수 전매권을 움켜 쥔 안나스 집안이었습니다. 안나스 가족은 예루살렘 감람산에다 ‘안나스 가족의 점포’를 냈던 것입니다.
“이 제물들은 흠이 없는 것으로 미리 다 판정해 놓았으니깐 이것을 구입해서 예배에 사용하라! 너희들이 시장에서 마음대로 사오는 것은 용인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대제사장의 검사를 반드시 한번 받아야 한다.”
고 했습니다. 그것을 팔되 값을 저희들 마음대로 정해서 폭리를 취했던 것입니다.
환전상들도 마찬가지로 많은 이익을 취했습니다.
이 모든 죄악들은 이스라엘의 지배 계층인 사두개인들의 죄악이고, 안나스 일족의 판박이 죄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을 다시 생각해보면, 이스라엘의 역사의 하나의 숙명적인 현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운동이 마카비 운동을 통해 일어나 하스모니안 왕조를 세웠지만, 이 왕조는 자기네들이 제사장인 동시에 통치자의 권세를 가졌습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오히려 자기네 일족간의 계속된 권력다툼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그 계속된 갈등의 틈바구니 가운데 이방인 에돔 사람 안티파테르나 그의 자식 헤롯이 어부지리로 교묘하게 권력을 취해왔던 것입니다.
교회는 날마다 개혁되어야 한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아무리 개혁하고 개혁해도 칼빈의 말처럼 '교회는 날마다(항상) 개혁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늘 각성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병들고 타락할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그것을 인정하십니까? 제 아무리 청렴결백하고 도덕적인 인물이라 할지라도, 조그마한 틈만 보이면 사탄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옵니다. 에돔사람 안티파테르가 개혁가의 가문에 들어온 것처럼, 포도원을 허무는 작은 여우를 경계해야 합니다.
아가 2:15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
또한 개혁에는 성역은 없습니다. 아무리 거룩한 종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거룩한 장소라 할지라도 그 안에 개혁의 열외지역은 없습니다. 인간이 있는 한 모든 영역에선 타락의 여지가 있고 악화가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개혁은 언제나 ‘슬로건(slogan)’을 내걸기에 참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참다운 개혁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민족과 나라를 개혁하고자 했던 사무엘은 정작 자신의 가정의 자녀들은 제대로 개혁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황금왕조를 일구어냈던 다윗왕의 아들, 솔로몬조차도 자신의 이방인의 아내, 여인들을 제대로 개혁하지 못해 우상숭배의 타락의 퇴행길을 걸었습니다.
신학교시절에 북한복음화선교회에서 붙인 스티커가 화장실에 붙여져 있었습니다.
‘북한을 복음화하라!’는 문구가 아주 의미심장하게 붙여져 있는데, 누군가 그 밑에 볼펜으로 낙서를 해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낙서는 낙서인데, 의미심장한 낙서였습니다.
‘북한을 복음화하라!’-니부터 복음화하라!
'니부터 복음화하라'라고 낙서를 해 놓았더군요. 많이 웃었습니다.
권세를 잡은 지도자들이 자신은 바꾸지 않으면서 정치와 제도와 시스템을 바꾸려고 합니다. 윗물은 안 바뀌는데, 아랫물의 색깔을 운운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바뀌지 않으면서 아이들의 성격과 고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제 이야기입니다!). 기성세대가 바뀌지 않으면서 다음세대의 변화를 왈가왈부할 수 없습니다. 리더가 바뀌지 않으면서 셀원들이 모이지 않는다느니, 그들의 신앙수준이 어떻다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자신을 개혁하고, 내면을 개혁해야합니다. 개혁하지 않으면 그것은 흔히 ‘습관’이 되기 쉽습니다. 습관이 된다는 것은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습니다. 한동안 베스트셀러가 됐던 ‘습관의 힘’이란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한 여인이 등장하는데, 그 여인은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호텔에서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술도 덜 깬 채, 담배를 찾아 손을 더듬습니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던지 담배가 아닌 볼펜에다 불을 붙였습니다. 플라스틱 타는 냄새가 코를 찌를 때까지 그런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매일 행하는 행동의 40%가 의사 결정의 결과가 아니라 습관 때문이었다’.
어쩌면 유대인들, 특별히 종교지도자들은 습관에 의해 예배하고, 매너리즘에 빠진 채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위해서 마련한 예루살렘이 보이는 인간들을 위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안달인 모습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종교지도자들은 단순한 예배의 편의를 위해서 환전상과 매매상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정치적인 권세와 결부된 종교지도자들의 사리사욕의 죄가 있었던 것이다.
친애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자에겐 예배의 눈이 필요하다. 예수님에겐 예배의, 예배자의 눈이 있었다! 그 예배의 눈은 곧 개혁의 눈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의 눈에는 자신의 이익만이 넘쳐났다. 사리사욕에 익숙한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습관적으로’다가왔을 수도 있습니다. 좋은 습관은 참으로 좋지만, 그 습관은 화인 맞아 면역성이 생겨버린 후 나타나는 고질적인 것도 악습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유대인들은 성전을 ‘하나님의 집’으로 이미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46년 동안 지은 성전에 대한 자부심이 뛰어난 그들! 하지만, 어느 순간에 그들은 하나님의 집이 “장사하는 집”으로 변해버린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마치 삶은 개구리처럼! 자신이 몸담고 있는 물이 서서히 데워진다는 것, 자신의 몸이 서서히 굳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도 못한 채 변해가는 것입니다. 본질을 잃어버리고, 형식만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이 뭐하는 곳인가? 성전이 뭣 하는 곳이냐?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한,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의 장소’이지 않는가? 그런데, 그런 본질은 다 어디가고, 성전에 장사치들이 난무하며, 예배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겉모습만 번지르한 외형만이 우뚝 솟아 있는 꼴이다. 상업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물질주의가 온 땅에 충만합니다.
예수님께서 사흘 동안에 성전을 일으키리라
오늘 예수님은 성전 청결운동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소개하는 장면이다. “나는 누구인가”를 선언하시는 장면이다.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소개하시는 방식이 바로 이 성전을 깨끗이 하는 것이다.
19절-“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구약시대의 건물, 빌딩의 예배당, 유대인들이 그토록 자랑하고 중시했던 건물이 아닌 이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바로 성전이 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물리적인 건물, 예배당에서 하나님을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 모든 그리스도인이 바로 주님을 모신 성전임을 몸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비록 너희 유대인들이 악을 행하여 내 몸의 성전을 허물려고 함이 분명하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너희가 너희 자신의 돌 성전과 그와 관계된 종교의식의 전체조직을 허물려고 하고 있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나는 삼일만에 그 성전을 일으키겠다. 결과적으로 나는 새로운 종파와 함께 새 성전을 세우겠다. 즉 신령과 진정으로 아버지를 예배하는 것과 함께 교회를 세우겠다.” 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물리적, 유형적 성전(장막)은 하나님의 거하시는 장소였습니다. 그곳은 그리스도의 몸의 모형이였으며, 동시에 그보다 훨씬 뛰어난 의미의 하나님의 거쳐였습니다. 그렀기에 두 번째 성전이신 그리스도의 몸을 헌다는 것은 첫 번째 성전인 물리적인 성전도 허는 것입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물리적 예배당과 모든 종파는 아무 의미도 없게 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성전 휘장이 찢어지셨습니다.
둘째,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무서운 죄는 유형적 성전과 함께 예루살렘의 파괴를 초래했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몸을 다시 일으키는 것은 이로써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의 성령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의 교회인 새 성전의 설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성전의 새로운 개혁을 의미합니다. 더 이상 물리적인 환경과 공간인 예배당을 찾지 않고 오직 예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성령의 전을 통해서 하나님을 마음껏 예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물리적인 공간을 가지고 자신의 탐욕을 끊임없이 펼쳐댔던 당대의 사람들의 죄를 폭로하는 동시에,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는 마음의 거룩함과 깨끗함에서 출발해야지, 보이는 건물 가운데 더 이상 찾아선 아니 된다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마음의 예배가 우선! 우리만의, 자기만의 성전을 허물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한 새 성전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소명과 사명의 교만!
소명 있다면, 소명의 개혁도 필요하다!
요한복음 2장 12-23절을 기초한 '뒤돌아보기Reflection'이라는 주제의 설교인데요. 당시 성전이 왜 그렇게 장사의 소굴로 변했는지 역사적인 배경도 살펴보았고 '교회는, 성도는 날마다 개혁되어져야' 함을 예수님의 액션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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