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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요한복음

요한복음 8장 1-11절,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ft.영화 프리스트)

by Message.K 2023. 5. 9.

요한복음 8장 1-11절의 본문을 가지고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 영화 '프리스트Priest'를 이야기해 보았는데요.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 죄인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이 곁들어진 영화와 오늘 이 본문을 같이 연결해서 설교해 보았습니다.

 

요한복음 8장 1-11절,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ft.영화 프리스트)
요한복음 8장 1-11절,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ft.영화 프리스트)

 

 

Prologue-영화 '프리스트'이야기

  제가 보았던 영화 중에 <프리스트Priest>라는 영화가 있다. 오늘 설교 제목도 그 영화에서 따올려고 하다가 제목을 바꾸었다. 프리스트가 영어인데 그 뜻은 무엇인지 아는가? ‘성직자’또는 목사, 신부 등을 지칭하는 말이다.

 

 

먼저 나는 그 영화에 대한 얘기를 좀 하고자 한다.

그 영화는 한 젊고도 미남인 남자 신부의 이야기이다. 그는 참 충성스럽고도 신실한 한 교구의 신부였다. 근데 나중에 보니 그 사람은 호모, 즉 게이, 동성연애자였던 것이다. 전혀 그럴 사람이 아닌데 그가 동성연애자였던 것이다. 그는 밤이 이슥해지고 마음이 답답할 때면 자신의 애인, 남자를 찾아가 관계를 가지고는 자신의 자전거를 타고서 성당의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사제의 옷으로 갈아입곤 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에 한 여고생이 고해성사를 하는 가운데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의 몸을 건드린다며 이른바 성적 학대, 근친 상간을 한다는 사실을 그 신부에게 고백했던 것이다. 신부는 여러 가지 방도를 강구하면서 그 여고생의 아버지의 불의를 막아 볼려고 했지만 실패였다. 그러던 와중에 신부와 그 애인(동성연애자)의 관계가 어쩌다 탄로 나서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신부의 동성연애 사실이 실린다. 신부는 어쩔 수 없이 신부복을 벗고 짐을 싸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런데 그와 같이 신부로 있던 친구가 그를 말린다. 같이 성당을 맡자고.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지 않느냐고. 사람은 원래부터 죄인이지 않았느냐고. 동성연애보다 더 큰 죄악을 지닌 인간이 아니냐고. 그러면서 그 친구신부는 자리에 앉아 있는 회중을 향해 이렇게 말하라고 그 젊은 신부에게 제안한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오늘 요한 복음 8장 7절에 나오는 말씀이다.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나 농담으로도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영화 이야기는 잠시 뒤로하기로 하고 본문을 살펴보기로 하자.

 

 

개떼처럼 모인 사람, 사람, 사람들

오늘 살펴볼 본문은 4복음서를 들추어보면 아주 익숙하게 나오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으로써 이야기의 시작을 열고 있다. 그렇다. 항상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는 사람들이, 그것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어마어마한 숫자가 그것도 많이, 개떼처럼 모여들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에게로 몰려 온 수많은 군중들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을 단순히 받아들여선 아니 된다. 사람들이 한 두 명 모이는 것은 쉽다. 전화나 편지나 휴대폰으로 문자나 전화를 해서, 아니면 요즘 같은 인터넷시대에는 메일이나 메신저, 카톡으로 약속을 정하고 하면 커피숍이나 약속장소에서 쉽사리 만날 수 있다. 하지만 거대한 인파가 한 장소에 몰리기 위해서는 아주 커다란 흥미로운 일이나 관심사, 재미가 있어야 몰린다. 프로야구를 보라. 롯데 자이언츠가 사직 홈구장에서 경기를 하면 사람들이 그 구장을 가득히 찬다. 그들에게는 여러분처럼 아주 재미없는, 지루하게 예배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나 표정 같은 것은 발견할 수 없다. 경기를 보면서 하품하면서 지루해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그 사람은 분명 어젯밤을 샌 사람일 것이다. 그들에게는 오직 환호의 함성과 고함과 열정만이 있다. 안타와 홈런이 나오면 기쁨의 아우성이 구장을 메우지만 스트라이크 아웃이나 더블 플레이가 나오거나 실책을 하게 되면 혀를 차거나 때로는 욕을 해댄다. 어떤 때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관중석에 있는 쓰레기통을 구장 안으로 던지는 것을 보았다.

 

 

 

사람이 모이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 광적인 무언가가 있다

하여튼 그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커다란 광적인 그 무엇이 있다. 그렇다면 사직 구장을 중심으로 모인 것이 아닌 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에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지루해하며 하품을 해대거나 졸거나 충혈 된 두 눈동자를 발견할 수 있는가? 적어도 그들에게는 프로야구장에 야구를 보러 모인 사람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 광적인 어떤 힘과 비슷한 무엇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은 조선의 4번 타자 이대호의 파워 있는 배팅이나 미국에 있는 요즘 메이저리에서 한껏 주가를 올리는 배지환이나 김하성의 플레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예수님에겐 그런 스포츠 신경이나 기량, 감각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모이고 또 모였다. 사람들은 ‘볼거리’가 있어야 모인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대단한 사람인 것이다. 오직 자신의 입술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말씀이 사람들을 불러 모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한 사람이 지루하게 무슨 말을 혼자서 해대면 ‘설교하지 말라’, ‘설교하고 있네!’라고 비아냥거린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 설교’를 가지고서 사람들을 모았던 것이다. 지금 제가 이렇게 지루하게 내뱉는 설교와는 차원이 다른 말씀이었다고 생각지 않는가? 예수님에게는 프로야구장에서 쇼를 하는 치어걸이나 홈런을 치는 타자나 삼진을 잡는 투수를 능가하는 강한 매력과 흥미와 유익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아주 많이 오병이어의 사건에서는 오천 명이나 모여들었던 것이다. 또한 어제 왔던 사람도 있을 것이고, 오늘 처음 온 사람도 있을 것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한 시간도 빠지지 않고 참석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말씀을 끊기지 않게 듣기 위해 물고기 다섯 마리와 보리떡 두 개를 도시락으로 싸서 왔던 사람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하나님이었으며 복음이었다. Good News!!! 그러했기에 그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사람들을 압도할만한 파워와 감동과 위력이 있었던 것이다.

 

 

 

한창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실 즈음이었다.

누가 찾아 왔던 것이다. 그들이 누구인가?

 

3절을 보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들이 한 사람을 데리고 왔던 것이다. 그 사람은 성적인 죄악을 저지른 사람이었던 것이다. 간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아닌 방법으로 남녀가 서로 관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간음’이라는 말은 그녀가 결혼한 여자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 여자는 간음하는 그 현장에서 붙잡혀 온 현행범이므로 어쩌면 옷매무새는 단정치 못 할 것이고 신발도 어쩌면 신지도 못 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잡은 옷소매는 구겨지거나 찢겨져 있을지도 모르고 사람들의 손길이나 발길질로 인해 옷이 더럽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입술은 찢어져 피가 흘러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그녀의 비참한 장면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율법에는, 정확히 신명기 22:22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함을 보거든 그 통간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율법은 두 사람 모두 반드시 죽이도록 되어 있다. 근데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여자만 데리고 왔지 남자는 데리고 오질 않았던 것이다. 그 이유를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그 이유를 가정해 보자면, 그것은

 

첫째로, 여성을 아주 무시하는, 남성 우월주의적인 사회의 분위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또 하나의 피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에게는 남자든 여자든 똑같이 소중하고도 고귀한 영혼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겐 남자는 예수님을 시험하는데 필요 없어서 내버려두었는지도 모른다.

셋째로, 자기들이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보내었는지도 모른다. ‘손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처럼 말이다.

 

 

 

 

 하여튼 그 종교지도자들은 간음한 여자를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왔는데 ‘왜 데리고 왔느냐?’가 중대한 문제로 남는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6절에 나와 있다.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이 간음한 여자를 데리고 온 행동 속에는 예수님을 넘어 뜨릴려는 그들의 함정이 있었다. 하나의 덫이 있었다는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현장에서 붙잡혀 온 이 간음한 여자를 무죄로 용서하여 보낸다면 이것은 율법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율법에는 반드시 어떻게 하라고 나와 있는가? 간음한 사람의 형벌은 ‘사형’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어기었다면 예수님 스스로를 이단이라 자처하는 것이며 일반 백성들도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 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 여자를 처벌, 사형시키게 되면 예수님 자신의 용서의 가르침을 완전히 부정하게 된다. 그리고 또한 유대인들은 사형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모든 사형에 대한 집행권은 로마 당국이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여자를 사형한다는 것은 로마제국에도 반기를 드는 불법적인 행동이 되고 마는 것이다. 아주 교묘하고도 교활한 3가지의, 삼중적인 ‘함정’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서기관들은 소리 없이 흐뭇해하며 웃음을 금치 못 했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나타난 이후로 빛을 잃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그들에게 가르침을 받기를 싫어했던 것이다. 말만 무성하고 외적인 정결만을 강조했던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의 출현은 또 하나의 위협적인 공격이었다. 그들의 명예는 실추되었고 권위의 힘은 서서히 무기력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바리새인들은 드디어 이 초라한 예수라는 청년을 붙잡을 기회를 얻게 된 것에 기뻐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있어 ‘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종’이기보다는 ‘적수’였고 ‘원수’였던 것이다. 그들의 주된 관심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잘 섬겨 볼까 하는 그런 영적인 관심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위신과 명예와 권력유지에 더 신경이 쓰였고 애착이 가 있었던 것이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예수님의 원자폭탄 같은 말씀이 그의 입술에서 터져 나왔다. 마치 하늘에서 벼락이 치는 것처럼.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율법에는 이런 처형을 할 때 이 죽음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증인이 먼저 돌로 치게 되어 있었다.(신17:7) 먼저 돌을 들어 친다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안에 죄를 제거하기 위하여 이 사람은 처형되어야 하고 그의 죽음에 대한 모든 책임을 자기가 진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예수님은 먼저 돌을 들고서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자를 칠려고 하는 무리들의 양심에 도전하셨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젊은 신부와 여고생의 얼싸안음

영화<프리스트>에서 성찬식을 거행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 장면 전에는 동성연애자인 이 젊은 신부가 예배를 인도한다는 이유로 많은 신도들이 예배를 불참하면서 그 젊은 신부를 저주하고 비난하며 성당 문을 나갔다. 동성연애자, 게이였던 신부와 그의 친구이자 동료인 신부가 미사에 참석한 회중들에게 성찬식을 집회하는데 두 행렬이 있었다. 동성연애자 신부에게 떡-개신교에서 말하자면-을 받을려는 무리와 그의 동료신부에게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그 떡을 받을려는 행렬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동성연애자인 신부에게 아무도 떡을 받으려고 줄을 서지 않았다. 영화는 친구신부에겐 많은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섰지만, 게이신부에겐 오직 한 사람만이 줄을 섰다는 것을 아주 대조적으로 잘 보여준다. 그 한 사람은 누구이겠는가? 바로 아버지에게 성적 학대를 당한 그 여고생이었다. 그 옆에 서 있는 행렬의 많은 사람들은 이 두 사람을 아주 이상하고도 의아한 눈초리로 쳐다본다. 젊은 신부와 그 여고생의 두 눈에 이슬방울이 송글송글 맺힌다. 그리고선 서로 부둥켜안고는 마구 운다. 흐느낀다. 영화는 이렇게 끝이 난다. 주위의 사람들은 여전히 외계인 쳐다보듯이 그 둘을 쳐다보면서 떡을 받고는 자리로 돌아간다. 아주 찡한, 감동적인 장면이다.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9절)

우리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언제나 이러하다. 돈이 많고 적고, 학교가 좋고 나쁘고, 여자(남자)친구가 예쁘고 못 생겼고 등 늘 이런 식이다. 이것은 다 자기 자신이 가진 기준에 따라서 정해지는 것이다. 시내에 있는 거렁뱅이, 거지에게는 100만원이 큰돈이겠지만세계적인 부호 일론 머스크에게는 100만원은 돈도 아닐 수 있다. 또 어떤 친구는 혼자서 책읽기를 좋아하지만 어떤 친구는 인터넷게임을 좋아하고, 어떤 친구는 친구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취향이 있고 다들 자기만의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제일 좋아 보이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가장 추하게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에겐 탤런트 누구누구가 제일 예쁘다 라고 하겠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제일 싫어하는 탤런트 일 수 도 있다. 이렇듯 저마다 자기만의 standard, 기준이 있다.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생각해서 가지고 있는 기준이 있다. 그 기준은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지만 자신에게는 의미가 되고도 남는다. 이런 우리들의 사고방식이 ‘죄’라는 것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죄에도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다고 생각한다. 큰 죄를 지으면 용서는커녕 심판만 받을 수밖에 없고 작은 죄를 지으면 쉽게 용서가 되는 그런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다 사람들, 우리들만이 가진 기준 때문에 생긴 잘못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죄’는 큰 것, 작은 것 , 중간 것이 없다. 죄는 죄 그 자체인 것이다. 사람들은 상대적인 기준을 가지지만 하나님은 절대적인 기준을 가진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분의 이 말씀은 사람들의 양심을 두들겼다.

 

 

 

-9절(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만약 이 여자를 돌을 들어서 친다면 그 다음 차례는 자기 자신인 것을 발견하는 순간 그들은 자기가 들고 있던 돌을 내려놓고서 하나씩 빠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모두 다 떠나고 예수님과 여자만 남았다. 영화에서는 여고생만이 그 젊은 신부, 게이인 신부를 향해 줄을 섰던 것이다. 오직 그 여고생만이 그 신부에게 비판과 판단의 돌을 던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 상처가 많은 그 여고생만이 정죄를 하지 않고 용납하여 주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머리를 들고 여자에게 그를 정죄하던 자들은 다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두려움에 어쩌면 입술을 바르르 떨었던 그 여자에게 생명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주시는 시간이었다. 여자는 둘러보아도 자기를 죽이려고 정죄하던 자들이 아무도 없는 것을 알았다. 누구도 예수님 앞에서 이 여자를 정죄할 수 있는 자가 없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에게 용서를 선포하시면서 돌려보내셨다. 이것은 하나의 선언인 것이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Epilogue-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주님이 여러분에게 말씀하신다.

여러분 마음 깊숙한 곳에 숨겨둔 죄악이 있는가? 남들에게 말하기엔 부끄럽고 두려운 죄가 있는가? 부모님이나 친구로부터 이해 받지 못 하거나 그들에게 잘못한 것이 있지는 않는가? 여러분의 죄가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사랑은 더 클 것이다. 여러분의 죄가 많으면 많을수록 예수님의 마음과 가슴은 더 넓을 것이며, 더 깊을 것이며, 더 길 것이며, 더 높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분은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여러분 주위에 어느 누가 여러분을 위해서 죽어 줄 수 있겠는가? 어느 누가 여러분의 그 죄짐을 위해 십자가에 피를 흘릴 수 있겠는가?

 

간음하다 잡혀온 여자를 보라!

주님이 그를 어떻게 하셨는가를.“나는 너를 정죄 하지 않는다. 이제는 새로운 삶을 살아라!”라고 말씀하신다. 그가 용서를 하실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우리의 죄를 위해 제물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와 물과 땀을 다 쏟으셨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이다. 그가 친히 침뱉음 당하시고 욕을 당하시고 모욕의 저주였던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우리가 그러한 저주아래 놓이기를 차마 보고 싶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나무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임을 당하셨던 것이다.

 

 여러분을 새로운 삶에로 초대하고 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마음을 두드리고 있다. 간음하다 잡혀 온 여자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며 그의 죄를 보시지 않고, 그의 잘못을, 그의 과거를 보시지 않고, 그를 정죄 하지 않으셨다.

여러분 한 사람,한 사람을 주님께서 지금도 부르신다는 것을 기억하길 바란다.

 

 

CCM의 노래 중에서 '주님의 아파하심으로'라는 가사내용이다.

 

 

“주님의 흘린 눈물은 십자가의 무거움이 아니라오

 우리의 무지함을 아파하시며 흘리신 눈물이었소

 골고다 그 언덕길을 우리 위해 걸어야 했던 주님

 비난과 손가락질에 물과 피를 흘려야 했건만

 험난한 주님의 십자가 몹시도 무거웠건만

 우리의 비난과 채찍에 제물돼야 했던

 주님의 아파하심으로 나 구원 받았으니

 이제는 주님을 위하여 이 한 몸 바치리다

 당신은 알고 있나요 죽음으로 사랑을 하신 것을

 우리 예수님께서 자기 몸 다하여 죄인을 사랑하신 것을“

 

 

 

오늘은 요한복음 8:1-11의 본문을 가지고 영화 '프리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서두로 해서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심층적으로 다루어 보았습니다. 기독교는 죄에 대한 진지한 고찰과 자성이 없어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제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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