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7장 3절의 본문을 가지고 '영원한 생명'이란 주제로 아주 오래전에 중고등부 학생들의 새생명 전도축제 당시에 설교했던 내용을 포스팅하고자 합니다. 기독교적인 영생의 정의와 의미는 아주 신박하면서도 특별한데요. 한번 알아볼까요?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길가메쉬와 영생초의 이야기
고대 지중해, 수메르인의 문학작품은 주로 신화를 토대로 한 것이 많다. 여러 시가들과 전설들은 각 도시의 건설자나 유명한 왕들에 관한 것이다. 그중 가장유명한것은 '우르크시의 왕이었던 길가메쉬'관한 이야기다.
대략 유프라테스강가 에 있떤 우르크시에는 '길가메쉬' 라는 용맹한 왕이 있었는데 전쟁만 잘하고 자기 백성들을 억압하고 괴롭혔다. 백성들이 참다못해 신에게 기도를 올려, 신들이 길가메쉬보다 더 강한 놈을 보냈다. 그놈이 엔키두 였는데. 길가메쉬가 미녀를 보내 엔키두를 저지하려 했으나 신의 개시로 다시 엔키두가 일어서고 제사를 위해 행차하던 길가메쉬에게 뛰어들어 대결을 선포, 둘은 진심으로 결투에 임하는데 그에 서로가 반해, 영웅으로서의 우정을 맺고 맹우가 된다.
둘은 너무 친해서 갖은 모험을 함께 하고 다녔는데 온갖 모험들은 신의 비위를 건드렸다. 특히, 여신 이슈탈의 황소를 죽인 사건때문에 신의 노여움이 극에 달해 엔키두가 죽었다. 그 후 길가메쉬는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곤 검소한 여행을 시작하는데, 그 목적은 영생에 관한 것이었다. 결국 길가메쉬는 슈롯파크에 사는 우트나피슈팀이라는 노인 을 만나 영생초를 듣게되고 많은 간청으로 그 영생초를 손에 넣게 된다. 영생초를 가지고 우르크시 근처에 도달 했을 무렵 길가메쉬는 하루 묵어가려고 샘물을 찾은후 목욕을 하였다. 그 사이 뱀 한마리가 기어왔는데 그걸 본 길가메쉬가 채 영생초를 잡기도 전에
먹어버렸다.
그때 길가메쉬는
'아! 이것이 모든 인간의 운명이란 말인가!'
라고 외치며 인간의 숙명을 한탄하였다.
그후 그는 불멸의 영생보다 인생의 즐거움을 찾으며 평생을 보냈다고 한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있을까?
특히 남녀관계의 사랑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영원’이란 단어를 사용하게 된다. Love forever...예전에는 Endless Love 라는 팝송도 있었다. 이러한 내용과 소재를 다룬 영화나 노래들, 드라마는 참으로 많다. 그 만큼 사람들은 ‘영원한 사랑’에 대해 갈급해하고 그러한 것을 동경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영원한 사랑이 있을까? 사랑하는 남녀, 이를테면 ‘로미오와 쥴리엣’에서 쥴리엣이 죽은 것을 보고 로미오도 죽고 만다. 그들은 진정으로 사랑하였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이 세상은 더 이상 존재할 필요도, 숨 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같이 죽는 것으로 자신의 사랑을 확인하였다. 솔직히 안타깝고 가슴 아프다. 로미오와 쥴리엣이 진실로 사랑했던 그 사랑의 정신은 비록 문학, 소설에서 등장한 것이지만 지금도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견우와 직녀’ 정도로 보면 될까? 오작교에서 일 년에 단 한 번 7월 7일 칠석에 회포를 푸는 가슴 아린 사랑...정도 될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전래동화로 우리 뇌리 속에 박혀 있다.
인생은 짧다
사람들은 이러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영원에 대해 굉장히 집착하고 있는 듯하다. 오래 살고 싶어하는 것은, 장수하는 것은 바로 죽기 싫어하는 인간의 본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이 있다. 그처럼 인간의 삶은 너무나 짧다. 길어야 100년이다. 제 나름대로 한 번 따져보면,
- 1-20세
- 21-30세
- 31-50세
- 51-70세
- 71-100세
- 성장과 학습
- 대학과 직업선택
- 결혼과 자녀양육
- 자녀들의 성장을 바라봄
- 자녀들을 통한 위로와 돌봄이 필요한 말 그대로의 노후
이러하다.
이렇게 짧디 짧은 인생은 영원히 살기를 원하고, 오래 살기를 원하고, 생명이 더 연장되기를 원한다. 그것은 인간의 본질인데, 성경에서는
(전 3:11)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10대인 여러분들은 얼마나 오래 살고 싶은가? 몇 살까지 살고 싶은가? 아마도 여러분들은 공부한다고 정신이 없고 나이도 어리고 해서 이러한 생각들은 해 본적이 별로 없을 것이다.
나이 든 사람만 자신이 죽지 않기를 바라고 사모하는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깊은 산속에서 등산을 하다가 길을 잃어버렸다고 치자. 길을 잃은 지 몇날 몇일이 되어가고 먹을 것은 거의 없고 구조소식은 찾아볼 수도 없고 이젠 힘도 없어서 거동하기도 움직이기도 불편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 때 우린 과연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그 때 우리는 오직 ‘내가 과연 살 수 있을까? 이렇게 해서 죽는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좀 더 극단적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자면 여러분이 벼랑 끝에 옷자락이 겨우 나뭇가지에 걸려 있거나 겨우 튀어나온 돌을 잡고서 버티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나뭇가지는 점점 내 몸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고 내가 잡고 있는 돌은 부식되어 조금씩 조금씩 돌가루가 100미터 아래의 낭떠러지 그것도 바닥에는 드릴처럼 뾰족하게 솟아난 종유석들이 있다고 가정해 보라. 죽음에 대한 깊은 두려움과 불안이 여러분을 감쌀 것이다. 이러한 극한 상황 가운데 우리는 ‘죽음’이 아닌 ‘삶’을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급한 경우가 되어서야만이 그런 생각이 가능하다. 그 때 우리는 ‘좀 더 살고 싶다, 좀 더 호흡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은 가득 찰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생이란 무엇인가?
오늘 성경 본문을 한 번 읽어보자.
이 세상에 많은 종교들이 ‘영생’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긴 하지만 기독교만큼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강조하는 종교는 없을 것이다. 다른 종교에 비해 기독교가 어떤 특별한 자신감이 있고 어떤 특징이 있길래 인간의 한계인 죽음에 대해서 도전하며 ‘영생’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일단 들어보자.
영생에 대한 정의를 밝히고 있는데 영생은 우선 ‘누구, 누구를 아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누구, 누구를 알고 있다, 친하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 사람을 나의 백그라운드로 알고 어깨에 힘을 주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의 ‘백’은 사람에게 힘을 조금 실어주긴 할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을 알고 있다. 그 분과 내가 친하다’고 하면 노대통령이 어떻든지 간에 대통령이 갖고 있는 파워와 권력의 힘으로 인해 자신이 조금이라도 유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뭐 이런 ‘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영생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굉장히 건방진 대목일 수도 있다. 이 두 문장을 한 번 살펴보자.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먼저,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아는 것과 달리 여기선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신가? 성경에서는 여러 가지로 그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유일하시고 참된’ 하나님으로 말하고 있다. 내가 해석할 때는 강조점이 ‘하나님’에 있는 듯싶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다.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인간에게 선물로 주셨던 아담과 하와의 하나님이셨다. 우리가 소위 천국을 말할 때 황금길, 보석과 진주가 박힌 집, 휘황찬란한 천국...뭐 이러한 표현을 쓰지 않더라도 아담과 하와가 거주했던 에덴동산은 천국 그 자체였다. 거기에는 눈물도, 슬픔도, 아픔과 상처도, 죽음도, 전쟁도, 비교의식도, 자존심 상함도 없는 말 그대로 천국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보호와 그늘 안에서 늘 평안하고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살던 아담과 하와에게 비극적인 일이 생기고 말았는데 그것은 바로 ‘선악과를 따먹는 사건’이었다. 하나님께서 모든 나무의 열매는 먹도록 허용하셨지만 선악과만은 따먹지 말도록 금지시키셨다.
하지만 인간은 욕심으로 말미암아 금지조항을 어겼고 그로 인해 인류에 ‘죄’라는 것이 들어오게 되었다. 이 죄라는 것이 들어오면서부터 모든 악한 것, 더러운 것, 힘든 것, 상처받는 것, 아픈 것, 괴로운 것들이 따라오게 되었다. 우리가 예를 들어 인터넷이나 상점에서 무엇을 샀는데 그걸 사니깐 부록으로 끼워 주는 게 있다고 치자. 컴퓨터를 하나 샀더니 자명종 시계도 끼워주고 월드컵 기념 축하 박지성의 친필 사인이 있는 맨유의 유니폼도 끼워주고 뭐도 끼워주고...끼워주고...(얼토당토 아니한 예화? 내 바램이라서 그런가?) 모든 인류의 조상이었던 아담과 하와는 ‘죄’를 호기심으로 샀다. 그런데 죄를 알고(사고) 나니 끼워주는 게 굉장히 많았다. 죽음도 끼워주고, 아픔도, 상처도, 괴로움도, 이별도, 가슴 무너짐도, 철저한 실패의식과 간교한 비교의식도 끼워주는데 정말 죄를 사고 나니 부록으로 끼워주는 것은 정말 상상을 초월했다. 기절초풍할 정도였다. 하나님, 너무 하신 거 아니냐고? 선악과 하나를 호기심을 따먹었는데 부록이 장난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을 머 그렇게 대단하게 여기냐고 할지 모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그것은 명백한 ‘죄’였고 순백색의 깨끗한 세상에 ‘죄’라는 아주 더러운 오염성의 자질이 들어온 것이다. 아주 맑고 깨끗한 우유 한 잔을 컵에 따라 두었다. 곧 마실려고 하는데 갑자기 천장에 억지로 매달려 있던 구더기 한 마리가 잔속으로 다이빙을 시도했다. 어쩌겠는가? 그 우유를 마시겠는가? 그것도 창자가 터진 구더기의 잔해가 우유 속으로 녹아나고 있었다. 마시겠는가? 적절한 비유가 될 지 모르겠다. 순백색의 세상이 구더기 같은 죄로 말미암아 구제불능의 상태가 되었고 사람들은 점점 더 큰 죄를 저지르게 되었다. 전쟁과 기아와 소외와 불평등과 폭력이 난무하게 되었다.
유일하시고 참되신 하나님은 이러한 죄에 대해서 그만 두고 보실 수가 없으셨다. 자기가 창조한 세상에 대해 너무나 아까워하셨고 구더기가 들어간 그 우유 한잔은 버리고 안 마시면 그만이지만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 세상에는 하나님의 정열과 에너지와 지혜와 모든 것들이 훌륭하게 결합된 초절정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요 3:16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너무나 사랑하셨다고 했다. 첩보요원들이나 007시리즈나 스파이들을 보면 여자를 사랑하거나 사랑에 빠지면 일을 그르치기 때문에 금기시한다. 우리 하나님은 죄는 굉장히 미워하셨고 분노하셨는데 죄를 지은 인간과 그만 사랑에 빠지시고 마신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죄를 지은 인간들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들의 죄를 없애주시는 방법, 죄가 들어오면서 딸려온 비극적인 부록들을 다 없애주시고 싶어 하셨다. 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나 컸다. 자기 자신을 버려야 했던 것이다.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희생시켜야만 했다. 아마존이나 아프리카인가? 그 넓은 강에는 피니라어, 즉 식인물고기가 살고 있다고 들었다. 만약 그 식인물고기가 가득한 강에 사람이 뛰어든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것은 마치 식인물고기가 가득한 강에 자신이 상처받고 찢기고 먹히고 결국은 죽을 것을 알고 뛰어든 인간과 같은 모양새이다.
영생은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국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키셨다. 왜 이렇게 황당한 소리인가 싶지만 하나님은 죄 때문에 인간들이 천국, 그 아름다운 천국에 오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싫으셨고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이 이때껏 지은 죄가 많을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말과 행동, 태도’를 말한다. 여러분은 죄가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모든 죄를 말끔히 씻길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여기서 헬라어 '보내신'은 아포스텔로인데, '지정된 장소로 가도록 명령하다'는 뜻도 있지만, '보내버리다, 퇴거를 명령하다'라는 뜻도 있다.
예수님은 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의 보내신 자’이다.
예수님은 죄문제를 위해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하셨는가? 예수님은 죄를 지은 모든 인류의 사람들을 위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죄도 없으신데 매달려 비참하게 죽으셨다. 그 당시 십자가는 가장 처참한 사형틀이었고 로마인들이 이 형틀을 다른 야만족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어 고안해 냈지만 자기나라 로마 사람들도 이 사형틀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는데-매국노나 정치 반역죄인들을 제외하곤- 그 이유는 이 사형틀 제도가 너무 잔인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십자가 사형틀에서 못 박혀 죽으셨는데 성경에서는 그의 죽음은 우리의 모든 죄악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운명을 달리하셨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모든 것이 끝이 난 것이 아니라 3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부활이 어떻게 가능한가?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 우리 인간이 생각할 때는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에겐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생명을 만드신 분은 생명을 없앨 수도, 다시 그 생명을 회복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장난감을 만든 제조자는 그 장난감을 다시 고칠 수 있고 A/S할 수 있고 재생할 수 있다. 장난감 제조자 보다 더 크고 놀라우신 하나님에겐 능치 못할 일이 없었다.
(3)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깊이 있게 아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은 이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단순한 앎이 아니라 체험적인 앎이다. 영생은 관계이다. 여러분들이 이 지식을 소유하기만 한다면, 이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모시기만 한다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된다. 그런데, '아는'의 알다라는 히브리어 동사 안에는 이러한 의미도 있다. "남녀 사이의 성교에 대한 유대적 표현법"를 이야기할 때 '기노스코우'라는 동사를 사용한다. 밀접하고 친밀하고 은밀한 관계를 이야기하는 '알다'이다.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우리와의 관계 또한 그냥 피상적인 관계가 아니라 깊이있는 관계로 알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생명의 주인되신 분이 예수님을 알기만 하면 그 생명을 영원히 주신다고 말하고 있다. 만약 이 지식을 거부한다면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에서 영원토록 뜨거움 속에서 미치면서도 죽지 못하여 안달하며 몸부림치며 고통 속에 헤매일 것이다. 결단은 여러분의 몫이다. 진정한 영생, 천국의 주인공이 되겠는가? 아니면 영원형벌인 지옥에서 불춤을 추겠는가?
우리 모두 영생의 비밀을 소유하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 되시기를 소망한다.
오늘은 신약성경 요한복음 17장 3절 본문을 토대로 '영원한 생명'에 대한 설교를 중고등학생들에게 전했던 내용을 공유합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관계적인 앎이라고 설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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