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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여호수아

여호수아 22장 21-29절 강해, 거룩한 변명이 필요합니다

by Message.K 2023.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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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20장은 요단 동편쪽의 2지파 반 지파, 르우벤, 므낫세 반, 갓 지파들가 뜬금없이 세운 기념비 때문에 오해와 헤프닝이 발생하는데, 이에 대한 거룩한 변명이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생긴 오해를 풀어 공동체가 하나 되게 했다는 내용을 살펴보며 강해설교한 포스팅입니다.

 

여호수아 22장 21-29절 강해, 거룩한 변명이 필요합니다
여호수아 22장 21-29절 강해, 거룩한 변명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변호나 변명을 해 본적이 있을 것이다.

-15년전에 교통사고로 뭍혔던 여대생 사고사가 알고보니 강간사고로 알려져 언론에 보도된 뉴스를 본적이 있을 것이다. 스리랑카인이 범인으로 DNA감식결과 확인되었다. 근데 정작 범인인 스리랑카인은 나는 무죄다!”라고 변명을 하고 있다!

 

개요

  • 동쪽 지파들의 귀향 22:1-8
  • 정체성 위기 22:9-20
  • 정체성 확인 22:21-34

 

1:12이하에 보면 오늘 22장 1절에 나오는 르우벤 사람, 갓 사람, 므낫세 반 지파 사람이 나온다. 이들과 여호수아가 한 약속이 있다.

 

  • 1)처와 자식들은 요단 동편에 들어가도록 한다.
  • 2)장정들은 무장하고 가나안 정벌 최전방에 선다.
  • 3)가나안 정벌이 완성되면 그때 너희는 요단 동편에 서서 너희 처자와 함께 살 수 있을 것!

 

이제 전쟁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21:44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들의 주위에 안식을 주셨으되’라고 나온다. 최선을 다해 싸운 여호수아는 이 지파들을 향하여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2-3절에 보면,

-너희가 다 지키며, -너희가 내 말을 순종하여, -너희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그 책임을 지키도다

 

 

 

너희 장막으로 돌아가라(4)

가나안 정복전쟁에 힘썼던 이 지파들-요단 동편쪽의 2지파 반 지파, 르우벤, 므낫세 반, 갓 지파들은 강 동쪽에 정착하게 된 가족들도 침략자들로부터 군사적인 보호가 필요했다. 특별히 농사철 때 남자들의 도움이 많이 필요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아마도 순차적으로 징병되어 강을 건너와서 일정기간 동안 봉사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형식으로 전쟁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선을 다한 이 2지파 반은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남다른 감동과 감회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10절에 요단강을 건너기 전 그릴롯에 이르른다. 그들은 여기서 색다른 시도를 하게 되는데, 다름아닌 기념비를 세우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영적 스토리, 가나안 정복 전쟁의 승리에 대한 감격과 감사, 그리고 이를 후손들에게 들려주고픈 영적 스토리의 전수를 위해 하나의 감사패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크게! 이게 갈등의 씨앗이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그릴롯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부 번역본들은 이 단어를 고유명사로 취급하여 지역 이름인 그릴롯으로 번역한다(새번역, NIV, LXX). 그러나 대부분 번역본들과 주석가들은 이 단어를 ‘인접한 지역/경계선’을 뜻하는 요단 강 근처/인접지역으로 번역한다(NAS, NRS, TNK). 이들이 정확히 어느 곳에 제단을 쌓은 것일까? 대부분 주석가들은 이스라엘이 요단 강을 건넌 다음 처음으로 머물렀던 길갈에 세웠던 것으로 추정한다. 이들은 누가 보아도 매우 큰 제단을 길갈에 쌓았다(10).

 

 

 

왜 요단강 동쪽 사람들이 서쪽에 이처럼 큰 제단을 쌓은 것일까?

서쪽에 정착한 지파들은 왜 이 일 때문에 동족들 간의 전쟁도 감수하겠다는 자세로 나온 것일까? 먼저 강 서쪽에 정착한 지파들은 동쪽 지파들의 이런 행위를 율법을 범하는 것으로 풀이했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제나 제물을 드리는 것을 장막에서만 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레 17:1-9). 그런데 이들은 이때 장막이 있던 실로가 아니라 길갈에 제단을 세웠다.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정체성에 혼란을 줄 뿐만 아니라 여호와께 예물이 드려지는 장소를 또 하나 세움으로 인해 종교마저도 나누겠다는, 분열의 의지로 풀이된 것이다. 제단은 또한 제물을 드린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므로 풀이할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의 행위가 전면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부인하는 행위로 간주된다. 만약에 이들이 이런 의도에 길갈에 제단을 세우지 않았다면, 남은 유일한 해석은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기 위해 이런 짓을 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느 쪽으로 해석하든 간에 요단 강 서쪽에 정착한 지파들에게는 매우 심각한 종교적 도발 행위로 보였던 것이다. .

 

서쪽 9 1/2지파들이 집한 것을 저자가 모든 이스라엘의 아들들

-12,16,18,20 이스라엘의 온 회중

이미 형제들 간의 구분이 시작된 듯한 느낌.

이스라엘은 이미 핏줄보다 종교들의 중심으로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12절...동쪽 지파들의 행위에 위기를 느낀 서쪽 지파들이 전쟁을 하려고 모두 실로에 모였다. 실로는 저들이 문제가 있을 때마다 온 백성의 지도자들이 모여 여호와의 제단 앞에서 회의하고 엎드려 밤을 새워 기도했던 하나님의 도성이었다. 전쟁에 앞서 먼저 사절단을 보내 위험한 분위기를 전달한다.

서쪽 지파들은 자신들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심각한 범죄로 두 가지,

하나님에 대한 배신, 반역‘-동쪽 지파들을 비난한 것이다.

 

 

19절: 너희들의 소유지 VS 여호와의 소유지 (비느하스의 발언)

사절단은 이미 서쪽만이 거룩한 땅이며, 동쪽을 부정한 땅을 보았던 것이다. 자부심의 한계를 넘어 일종의 교만이 싹트고 있다. 자부심, 자긍심, 자존감, 자존심은 웬만하면 좋은 것이고, 긍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자만심, 교만은 위험한 것이다. 어찌 이런 교만이 있었을까? 실로가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에 서쪽 지파들이 기고만장했을까? 전쟁의 주역들은 오히려 두 지파 반 지파인데 말이다.

EX) 1고든 맥도날드의 자기 위의 40명의 사람이 존재

2엘리야의 고백 –나만 남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알에게 절하지 아니한 사람, 7000명을 준비하심!

 

 

 

교만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죄악, 사탄인 루시퍼가 ‘교만’이란 죄에 빠져서 자신이 No.2로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 위에 오르고자 하다가 타락한 경우가 아닌가? 아무리 탁월하고 재능이 많고 출중해도 교만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쓰임받기가 힘들다는 것을 기억하라! 세상에는 재능이 많은 사람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그 가운데 겸손하게 자신의 일에 성실한 자, 겸손한 자가 쓰임 받는다! 지금 세상에 쓰임 받는 수많은 인물들은 원래 다 약 80%는 겸손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라! 지금의 모습은 어떻든!

다윗을 죽이고자 했던 질투의 화신 사울은 처음에 얼마나 겸손했는가? 자신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것이 부끄러워서 180이 넘는 친구가 뒤주 같은 곳에 숨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순수하다는 말인가? 겸손하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사람의 자리가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

자신들에게 보낸 사절단 앞에서 두 지파 반 지파는 지금 자신의 진심어린 고백을 하고 있다. 정직하게 자신을 변명하고 있다. 거룩한 변명을 하고 있다.

 

 

거룩한 변명을 하라! - 결백함을 강조하는 두 지파 반 지파

22절: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시나니 이스라엘도 장차 알리라 이 일이 만일 여호와를 거역함이거나 범죄함이거든 주께서는 오늘 우리를 구원하지 마시옵소서

 

하나님의 세 가지 이름을 두 차례씩 반복하면서 자신의 결백을 강조. 이것은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표현이다. 일부 번역본들과 주석가들은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

---->‘여호와, 신들 중의 신’(The Lord, God of gods)

라고 번역. 구약에서 이처럼 하나님의 세 가지 이름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곳은 이곳뿐이다. 동쪽 사람들은 자신들이 너무 억울하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왜 이 제단을 쌓았는가?

그들은 진심은 이러했다. 오해를 불러 왔던 그 기념비(감사패)는 훗날 자기 자손들을 위한 기념비이기도 하며, 혹시 강 서쪽에 정착한 자손들이 동쪽 자손들로 하여금 여호와를 섬기지 못하게 하여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제외할까 봐 증거로 세운 것이라고 한다(26-28). 동쪽 지파들은 자손들이 여호와께 등을 지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서쪽 지파들이 자신들의 후손들을 종교적으로 푸대접하거나 따돌릴 것을 우려해서 이 제단을 증거로 세웠다. 여호수아서에서 ‘증인/증거’란 단어를 사용한 곳은 여기가 처음이다. 이 단어는 법률적인 용어이다. 동쪽지파들은 이 제단이 법적인 효력을 지닌 증거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동쪽 지파들도 서쪽 지파들과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무엇?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동쪽 지파들은 혹시라도 자기 자손들이 언약공동체 속에서 제외될까봐, 예배에서 제외될까 해서 이 제단을 세운 것이다. 이들의 영적 스토리! 강 이쪽 저쪽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표식하기 위함!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지만, 아마 요단강을 가운데 두고 약간의 갈등이 내재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우리 교회 청년.대학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해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다. 청년/대학부의 구분으로 인한 갈등은 out!

전라도/경상도 지역에 의한 구분 out! 가진 자/못가진자의 구분 OUT!

공동체를 가르는 모든 구분과 분리선은 추방되어져야 한다. 예수님의 보혈만이 우리 공동체를 새롭게 하고 하나되게 하고 견실하게 한다.

 

또한, 요단 강 서쪽 둑의 이 제단을 굉장히 크게 세웠다고 한다. 왜? 누가 봐도 커야 하는 이유는 강 동쪽 자손들이 강 건너지 않고도 먼발치에서나마 이 제단을 보고 이 일을 기념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여호와께 드리는 예배를 상징하는 제단은 이스라엘의 통일성을 상징하는 종교적 유물인데, 불행하게도 이 제단은 이스라엘을 나누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제단은 참 제단의 모형일 뿐(28절). 그들은 제단을 사용할 용도가 아니었다. 만약에 사용하려고 했다면 동쪽에 세우지, 서쪽에 세웠겠는가? 예배드릴 때마다 강 건너야 할 불편함뿐만 아니라 번거로움, 그리고 제단이 지극히 컸기에 예배드리기도, 제물을 드리기도 번거로웠다.

 

동쪽 지파들은 분명하게 29절에서 고백한다. 그들이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제단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성막 앞에 있는 제단”이라고 못박는다.

 

 

 

 

거룩한 변명이 오해를 풀다!(30-34절)

요단 강 서쪽에 쌓은 제단 이름을 “주께서 하나님이심을 우리 모두에게 증명함”이라고 지음.

 

이 제단 이야기는 세 가지 목적

  • 1 하나님께 제물 드리는 곳은 오직 한 곳이라는 점을 강조.
  • 2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는 지역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충성에 의해서 결정된다.
  • 3 이 이야기는 믿음의 공동체가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지에 대한 본을 보여준다. 서쪽 지파들은 자초지종을 모른 상태에서 극단적인 결론을 내리고 전쟁을 할 준비를 한다. 다행히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사절단을 보냄으로써 오해를 풀 수 있었다. 전쟁이 아닌 대화로 문제를 해결!

 

사랑하는 청년.대학부 여러분!

새친구 축제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한가?

여러분이 적어낸, 작정한 그 명단을 가슴판에 새기고 함께 기도하며 준비합시다. 우리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전도의 기회로 삼아 한번 해봅시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마음의 결정’입니다. 거룩한 변명이 필요합니다.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는 자신들의 입장과 기념비에 대한 오해와 도전이 있었을 때 변명이 필요했다면, 우리에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친구들, 지인들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교회에 대해, 믿음에 대해 물을 때, 우리는 거룩한 apology가 필요합니다.

거룩한 변호, 변증, 변명이 필요합니다.

 

베드로전서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여러분의 믿음에 대해서 누군가 묻거나 도전할 때, 담대하게 말하라! 여러분의 복음의 컨텐츠를 보여주라! 변호하라!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시나니 22절에서 그렇게 진심어리게 고백한 그들처럼 여러분도 여러분의 믿음에 대해 보여주길 바란다. 이번 전도축제에 한번 거룩한 변명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는 친구, 지인들에 대해 잠시 후 볼 영화의 한 대목을 통해서 거의 가능성이 없는 상황과 환경과 여건 가운데서도 믿음을 가지고 시도하는 스토리가 우리에게 도전으로 다가왔음 좋겠다.

 

 

 

영화 “분노의 질주6” 한 장면(영상)이다.

레티가 둠에게 묻습니다.


“물어볼게 있어!”
“우리가 떨어질 곳에 차가 있던 걸 어떻게 알고 몸을 던진거야?”
“몰랐어”
“단지 믿음만 가지고 해야할 때도 있어”

하나님, 우리에게 믿음을 주옵소서! 이번에 한번 나를 들어 사용하여주옵소서!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복음의 소식이 전파되게 하옵소서! 아버지, 기름부어주옵소서!

 

“단지 믿음만 가지고 해야할 때도 있어”

 

주님을 위한 거룩한 변명이 필요합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기로 하고 시도합시다!

그일을 위해 우릴 사용하소서! 우릴 도구로 사용하소서!

 

 

여호수아 22장21-29절의 본문의 개요와 해석을 하면서 요단 동편쪽의 2지파 반 지파, 르우벤, 므낫세 반, 갓 지파들가 했던 변명에 대해 '거룩한 변명이 필요합니다'라는 주제로 강해설교한 내용이었는데요. 결백하다면 거룩한 변명을 필요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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