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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여호수아

여호수아 2장 강해, 믿음을 붙잡으라Catch the faith! Keep the faith!

by Message.K 2023.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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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여호수아 2장 본문(1-24절)을 토대로 '믿음을 붙잡으라Catch the faith! 믿음을 지켜라Keep the faith!'라는 주제로 강해설교한 내용을  포스팅해 보고자 합니다.

 

여호수아 2장 강해, 믿음을 붙잡으라Catch the faith! Keep the faith!
여호수아 2장 강해, 믿음을 붙잡으라Catch the faith! Keep the faith!

 

2장 개요

  • 1.여호수아의 명령(2:1a)
  • 2.도착과 우려: 정탐꾼들 보호(2:1b-7)
  • 3.라합의 신앙고백과 합의(2:8-14)
  • 4.탈출과 우려: 라합과 가족들 보호(2:15-21)
  • 5.여호수아에게 보고(2:22-24)

 

 

 

용서에 굶주린 세상

 헤밍웨이의 한 소설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스페인 아버지가 집을 나가 마드리드로 간 아들과 화해하기로 결심합니다. 아버지는 뒤늦게 양심에 가책을 느끼며 ‘엘리베랄’ 신문에 이런 광고를 냅니다.

 

“파코, 화요일 정오에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했다. 아빠”

 

파코는 스페인에서 흔한 이름입니다. 아버지가 그곳을 나가자 파코라는 이름의 젊은 남자가 무려 800명이나 나와서 저마다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라합의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 용서와 은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용서를, 그 은혜와 믿음을 찾아 떠나볼까요?

 특별히 여호수아 1장과 3장 사이에 있는 이야기는 하나의 삽입구라도 해도 좋습니다. 어떤 이들은 전설이다, 민담이다 라고 하지만 그것은 아니고, 이 스파이이의 정탐이야기는 정말 필요적절한 대목입니다. 2장은 라합이라는 가나안 여인을 통해 이 일에 대한 가나안 사람들의 관점을 제시합니다. 1장에서 사자의 심장을 가진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널 준비를 하라고 하며, 3일을 기다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선 정탐꾼들이 최소한 4일 정도를 라합의 집과 여리고 성 주변에 머문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준비일은 사흘 후에 라고 해놓고 이렇게 늦어졌는가?

 

 

 이런 시간적 문제를 극복하는 일은 별로 어렵지 않다. 먼저 2장은 1장의 일이 이전에 있었던 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

2:1 눈의 아들 여호수아-이례적인 표현, 여호수아 총 138차례 사용, 이 문구는 10차례만 사용하셨습니다.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정탐꾼을 보낸 여호수아

여호수아는 왜 정탐꾼을 보냈을까요? 몰래 다녀오라고 보낸 스파이들은 어떻게 된 것인지, 가나안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정탐꾼들은 자신들의 정체가 탄로날까봐 오히려 라합의 집, 창녀, 매춘부의 집에 손님인 것처럼 투숙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스파이가 여리고성에 입성했다는 소식은 벌써 왕에게 보고되어졌고(2절), 단순히 ‘수상한 스파이’가 아니라 그 사람들이 ‘이스라엘 스파이’였다는 사실이 벌써 군대 내에서 다 퍼진 것입니다. 소리 소문도 없이 간 스파이들의 정체가 왜 이렇게 탄로난 것일까요? 이스라엘에 여리고의 스파이가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근데 오히려 그게 더 괜찮은 효과를 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심리전

하나님께서 미리 심리전을 하신지도 모릅니다. 지금 가나안 땅 사람들의 분위기는 어떠합니까? 9-11절에 잘 나타납니다.

 9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간담이 녹다”로 번역해놓은 동사는 단단히 굳어 있던 흙이 비에 녹아 내리는 상황을 묘사하는 단어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과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이미 장대비에 흙이 녹아 내리듯 녹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10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지금 여리고 사람들의 분위기는 완전 침울모드입니다. 절망모드입니다. 이스라엘군의 위용에 놀랐습니다. 이스라엘 군대? 그들은 군대도 아닙니다. 60만 대군이긴 했지만, 인해전술의 중공군보다 더 못한,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의 위용에 여리고는 완전히 멘붕 직전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 분위기를 고발하는 라합! 간담이 서늘했다, 정신을 잃었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3절에서도 ‘그들은 온 땅을 정탐하러 왔느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새 번역에서 ‘이 모든 땅’을 정탐하러 왔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라합의 생각은 이스라엘 정탐꾼들이 가나안 전체를 정탐하기 위해 잠시 여리고에 들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군대--->온 땅을 정탐하러 옴, 거대한 대군이 곧 쳐들어올 것 같은 위험한 기운을 감지한 여리고!

 

  많은 주석가들은 이 이야기에서 일종의 유머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왕의 사신들은 라합의 잘못된 정보에 의해 성문을 출발하여 열심히 정탐꾼들을 쫓는데, 정작 그들이 쫓는 사람들은 그들이 출발한 성문 뒤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의 첫 주자, 라합

정탐꾼들에게 도움을 준 라합! 하나님께서 여리고 함락 작전에 첫 번째에 참여시킨 행동대장은 바로 이 거리의 여인, 라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선 이 여인을 준비시키셨습니다. 남자들의 잘못된 성적 욕망을 채워주는, 정말 가까이해서는 아니 될 여인, 라합, 하지만 그녀의 집이 성벽 위에 있었던 것인지, 성벽의 일부가 그녀의 집이었는지, 벽 옆에 자기 집이 있었는지(15절)에 대해서 추측해 보더라도, 그녀의 직업이 그녀의 집을 그쪽에 위치하게 만들지 않았는가? 생각해봅니다. 군인들이 드나들면서 흘려들은 모든 여론과 민심은 11절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고 할 정도였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적으로 별 볼일 없는 여자, 매춘부-창녀(히브리어 ‘조나’는 간음하다, 매춘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사자의 심장을 가져서 용감하고 담대하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하셨습니다. 그리고서 정탐꾼이 갔을 때 이 작전에 한 여인을 사용하셔서 미리 전세가 이미 이스라엘에게 기울어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게끔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선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사용하셔서 가나안 정복의 출발점을 찍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사랑하는 청년.대학부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용하실 줄 믿습니까? 때때로 과연 나같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쓰실까 의심하면서 불신한 적은 없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이 여인, ‘라합’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는 ‘편견’이 없습니다. ‘선입견’이 없습니다. 성경에선 분명히 ‘사람은 외모를 본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라합의 중심을 보시고, 그녀를 가나안 정복의 마스터플랜에 넣어두신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 정말 사람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희망 없이 사는 여인을 하나님께선 사용하셨습니다. 당시 사회의 남자들은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창녀들을 용납했습니다. 그러나 사회는 창녀들을 무시했습니다. 라합은 가나안 사회에서 소외되고 배제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왜 사용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녀의 중심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소문을 소문으로만 듣지 않고, 믿음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가족들의 안전을 보장해 줄 것을, 구원해줄 것이란 약속을 받아냅니다(12-14절, 17-20절).

 

 

 

우리의 마지노선을 뛰어넘는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세계관을 뛰어넘습니다. 우리가 정해놓은 상한선, 마지노선조차 뛰어넘습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생각 속에 넣으려고 하지 마십시다. 하나님을 우리의 사고방식의 틀 속에 제한하지 맙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틀을 깨고, 그 모든 틀을 초월하여 일하십니다.

 

요즘 너무 행복합니다. 기도회에 거의 20명을 육박할 것 같은 숫자가 모여 힘있게 기도합니다. 너무 행복하고 뜨겁고 감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제가 이렇게 기도회 숫자가 많아지는 것에 만족하는 것을 싫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사람이, 두 사람이 왔을 때에 기도가 잘 안 되고, 사람이 많이 모이면 기도가 잘 되고 그것도 문제이지 않습니까? 어쨌든 감사합니다만, 하나님의 일하심은 때때로 우리와 확연하게 다름을 늘 기억합시다!

 

 

 

라합은 기생이었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1:4절에 보면,

 

...나손은 살몬을 낳고, 5절입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절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여기에 보면 라합(기생)이었으며, 룻은 이방여인이었습니다. 라합이 이방여인이니깐 보아스의 아내, 며느리를 룻으로 들이는 것에 대해 라합은 별로 개의치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그랬거든요. 룻은 과부였습니다. 하지만 라합은 기생이었던 자신의 처지를 알았기에 보아스의 배필로 반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룻기에서 보면 라합의 존재는 등장하지 않기에 알 순 없습니다만, 보통 아무리 자기가 기생이고, 이방인이었다고 해도 자기 자식이 이방여자에다, 과부와 결혼하는 것을 좋아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자신이 그러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사람을 더 잘 이해하는 경우도 간혹 있긴 하나 그런 경우는 드뭅니다. 오히려 더 배타적이고 더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의 역사는 라합-보아스를 허용하고 있고, 이들은 다윗의 선조였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다윗의 선조는 왜 그렇고 그런 선조들인가? 예수그리스도의 계보는 왜 그렇고 그런 선조들로 구성되어 있는가? 평범한 사람도, 보통 사람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그런 이들인가? 콩가루집안인가? 불륜드라마를 쓰는 것은 집안 내력인가? 마태복음 1:3에 보면 유다가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는다. 베레스와 세라는 쌍둥이이다. 쌍둥이의 아빠, 유다는 누굴까? 바로 다말의 씨아버지입니다. 씨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에 태어난 불륜아, 쌍둥이! 그 유다가문에서 다윗이, 그리고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입니다. 받아들일만한 일입니까?

 

 

 우리는 오늘 라합의 이야기를 통해, 더 나아가 이 마태복음의 계보에 나타난 여인들의 이름을 통해 무엇을 깨달을 수 있는가? 마태복음에서 마태는 유독 이 여자들의 이름만을 적고 있다. 다른 평범한 여인들의 이름은 적지 않고 수많은 남자들의 이름 중에 이 특이하고 불건전한 그룹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여인들의 이름을 강조하듯 적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은 죄인들의 이야기입니다. 거룩한 성자들의 이야기만 있다면 아무도 성경을 보고 위로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을 보고 오히려 좌절하고 절망하고, 너무 절망한 나머지 자살하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했음을’,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청년.대학부 여러분, 하나님이 구원하기에 불가능한 죄인은 없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시오! 라합은 당당하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9절부터 13절까지 라합의 신앙고백의 대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향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소식을 듣고서, 그는 11절에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선포한다. 그리고 자신과 가족이 구원이 필요함을 호소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이방인이기에 구원에서 있어서 열외라는 것도 생각지 않습니다. 그녀는 거추장스럽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렇게하기엔 이제껏 그녀는 너무나 거추장스럽게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핏줄과 혈통이 아닌 믿음의 공동체가 바로 이스라엘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습니까? ‘이스라엘 혈통과 핏줄에 의해 구원받습니까?’ 뭐 그런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 정의나 질문을 뒤로하고 무조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붙잡고 있습니다.

 

    ‘너희가 믿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다! 나도 믿고 싶다! 구원해달라!’

 

실제로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핏줄보다는 믿음에 의해 정의되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허다한 잡족들’이 함께 나왔습니다(출 12:38;cf, 민 11:4).

 

출 12:37-38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민 11:4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성경에 보면 모세가 각 지파에서 대표를 선발하여 가나안에 보냈던 정탐꾼들 중 유다를 대표했던 갈렙은 그나스 사람/후손이었다고 하는데(민 32:12), 창세기 15:19에 의하면 그나스는 이방 족속이었습니다. 이방인의 후손인 갈렙이 유다 족속을 대표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혈통적으로 상당히 섞여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 여호수와 갈렙! 갈렙은 이방민족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무엇을 붙잡았느냐는 사실입니다. 라합이 믿음을 붙잡았던 것처럼, 갈렙 또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붙잡았고, 그 믿음을 끝까지 유지시켰던 것입니다.

 

catch the faith! keep the faith!

 

사랑하는 청년.대학부 여러분, 무엇을 붙잡고 있습니까?

아직도 잊지 못한 옛사랑의 희미한 그림자를 잡고 있습니까?

씻어내지 못한 상처와 아픔, 트라우마와 콤플렉스에 질퍽대며 헤매고 있습니까?

 

 

 

어네스트 헤밍웨이가 붙잡고 있었던 것

 앞서 소개한 작품의 저자인 헤밍웨이는 문학의 대작을 창조했던 대작가이다.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대단한 문학가입니다. 그는 작가로서는 성공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인생에 있어서는, 신앙에 있어서는 철저히 실패한 인물입니다. 신앙이 독실했던 그의 부모는 헤밍웨이가 방종한 삶을 사는 것이 싫었습니다. 헤밍웨이의 조부모님의 휘튼 대학출신이었습니다. 나중에 어머니는 아들이 자기 눈에 띄는 것조차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아들의 생일에, 케익과 함께 아버지가 자살할 때 쓴 권총을 보낸 일도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자살한 걸 보니 헤밍웨이의 어머니는 대단한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그 신앙수준에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아버지의 압박감이 자살을 부르지 않았나 섣부르게 유추해봅니다. 아버지가 자살했다는 것은 아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입니까? 그녀는 어머니의 인생은 은행과도 같다는 내용을 편지에 적어 보냈습니다.

 

“자식은 누구나 세상에 태어날 때 크고 아무리 써도 바닥나지 않을 것 같은 통장을 받고 나온다.”

 

자라는 동안 아이는 예금을 전혀 하지 않고 인출만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다 자라면 지금껏 찾아 썼던 구좌를 다시 채워 놓는 것이 자식의 도리입니다. 헤밍웨이의 어머니는 이어 아들에게

 

“구좌의 잔고 유지를 위해 예금할 수 있는 길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써 놓았다. 꽃, 과일이나 사탕, 어머니 이름으로 나온 청구서를 몰래 지불해 주는 것,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의무 불이행>을 청산하겠다는 결단."

 

그러나 헤밍웨이는 어머니나 어머니의 구주에 대한 미움을 끝내 떨쳐버리지 못했습니다.

 

신앙심이 너무 억센 엄마 밑에서 헤밍웨이는 결국 자살하고 맙니다. 아버지의 자살 DNA는 그대로 가계의 저주로 이어졌습니다. 어머니가 주는 상처가 그를 계속 붙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상처, 해결되지 않는 상처 가운데 그는 문학으로서 노벨문학상의 영예를 안았습니다만 행복은 그 안에 없었습니다. 그의 영혼을 채울 행복은 그가 그토록 써내려갔던 수많은 작품 속에도, 그런 활동에도, 명예에도 없었습니다. 세상적으로 그는 성공한 문학가로 남을지 모르나, 그의 인생은 너무나 불쌍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는 믿음을 붙잡아야 했습니다. 어머니의 지독스런 종교적 생활과 가계의 저주를 떼어내고 그리스도께 대한 순수한 믿음을 붙잡아야 했습니다.

 

 

 

catch the faith! keep the faith!

여러분 무엇을 붙잡으시겠습니까? 가계에 흐르는 운명의 저주를 미신처럼 부여잡고 계시겠습니까? 믿음으로 모든 것을 정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붙잡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모든 것이 가능하십니다! Nothing is Impossible!

 

믿음을 붙잡으십시오! 믿음을 붙잡으셨습니까?

은혜를 붙잡으십시오! 은혜를 붙잡으셨습니까?

그렇다면 그 믿음을 유지하십시오! 끝까지 그 믿음을, 그 은혜를 유지하십시오!

거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진정한 위로와 힐링이 있을 것입니다.

 

 

 

 

*참고사항

  • 가나안 사람들의 간담이 녹았다는 정탐꾼들의 증언은 오래전에 적들의 마음이 녹아 내리게 하시겠다던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어 가고 있음을 암시하기도 합니다(cf, 출 15:15).
  • 홍색 ‘줄’은 곧 라합과 가족들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 히브리어로 ‘줄’과 ‘소망’은 같은 단어라는 것은 이 둘 사이에 일종의 언어유희가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라합은 ‘줄’이 달려 있는 동안에는 ‘소망’할 수 있지만, ‘줄’이 끊기면 소망도 끊깁니다.

 

여호수아 2장 강해설교로 "믿음을 붙잡으라Catch the faith! Keep the faith!"라는 주제를 같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도저히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기생 라합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다는 것,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을 붙잡길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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